B급 세계사
김상훈 지음 | 행복한작업실
B급 세계사
김상훈 지음
행복한작업실 / 2018년 6월 / 352쪽 / 15,800원
CHAPTER 1 우연이 만들어낸 필연
피라미드의 오해와 진실_ 고대의 국가사업과 세계의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적지 않다. 그런 영화에 등장하는 단골 장면. 병사들이 노예들을 잔인하게 채찍질한다, 노예들은 신음하며 거대한 돌덩이를 운반하다가 쓰러진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장면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484~기원전 424)는 “노예들을 강제 동원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영화의 장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때로는 상식에 치명적인 왜곡이 개입한다. 이 헤로도토스의 주장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바로 그렇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정말로 노예들의 강제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최근 학계에서 이 주장이 틀렸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피라미드는 노예가 아니라, 합당한 급료를 받는 건설 노동자들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1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기자란 도시가 있다. 바로 이 기자의 사막 지대에 여러 개의 피라미드가 있다. 그중 이집트 제4왕조의 2대 파라오인 쿠푸(기원전 2589~기원전 2566 재위)의 피라미드가 단연 돋보인다. 147미터(현재는 137미터 내외) 높이로 만들어졌고, 밑변의 가로와 세로가 각각 230미터다. 2.5톤의 돌덩이 230만 개가 소요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피라미드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이다.
이 쿠푸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 20여 년이 걸렸다. 최소한 10만 명의 노예가 동원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반론이 커지고 있다. 쿠푸 피라미드와 가까운 곳에서 인부들의 마을이 발굴되었다. 그 마을에서 1,000개가 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어쩌면 피라미드 건축에 동원된 노예들의 집단 수용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유골에서 치료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노예라면 정성껏 치료할 리가 없잖은가. 영화 장면을 떠올려보라. 노예가 쓰러지면 죽을 때까지 채찍질했다! 아이들의 유골이 발굴된 점이나 성인 남자와 여자의 유골 비율이 거의 비슷한 점도 흥미롭다.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석판도 발견되었다. 그 석판에는 어느 날에 잔치를 열었고 장례식을 열었으며, 인부가 무슨 이유로 노역장에 나오지 못했는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쉽게 말해 출결 상황판이다. 심지어 숙취가 심해 출근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평범한 건설 노동자의 삶과 다를 바 없다. 노예라면 이런 상황판이 필요할 리가 없고 이런 내용이 담겨 있을 이유도 없다.
최근에는 “모든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당시 나일강은 7~10월에 범람했다. 이 기간에 농민들은 생업인 농사에 주력할 수 없었다, 그러니 생계를 꾸리기조차 힘들었다. 당장 굶어 죽을 판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다 묘안을 짜냈다. “피라미드를 더 만들자!” 쉽게 말하면 국가가 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피라미드 축조 사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황당한가? 이 또한 근거가 있다.
미국의 한 연구소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후원을 받아 이집트를 인공위성에서 적외선으로 촬영했다. 그 결과 땅 속에 묻혀 있는 17개의 피라미드를 찾아냈다. 당시 연구진은 “더 많은 피라미드가 아직도 세상의 빛을 못 보고 있을 확률이 크다.”라고 했다. 현재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80여 개가 조금 넘는다. 사실 피라미드에 대한 오해가 더 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피라미드가 발견되고 있다. 피라미드가 모두 지배자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멕시코의 피라미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전이었다. 최대 혹은 최초의 기록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인류의 역사는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선다.
CHAPTER 2 세계를 움직이는 힘, 욕망
제국주의 야심으로 시작된 돈가스_ 욕망이 만들어낸 음식들
포크커틀릿(pork cutlet). 돈가스의 영어식 표현이다. 미국에 여행 가서 식당을 들렀다 치자. 그 식당에서 “Don-gas, please.”라고 하면 종업원은 알아듣지 못한다. 혹시 다른 식당에선 돈가스를 팔까? 이런 생각을 하며 돌아다니지 말라. 발만 아플 뿐이다. 애초에 서양에는 돈가스가 없다. 돈가스는 일본에서 비롯된 음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먹는 카레라이스도 비슷하다. 인도의 ‘먹자골목’을 이 잡듯이 뒤져도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카레라이스를 찾을 수 없다. 혹시나 일본식 요리를 파는 곳에 가면 우리에게 익숙한 카레라이스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가스, 카레라이스, 고로케를 일본의 3대 양식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로케 대신 스키야키를 3대 양식으로 넣기도 한다. 이 요리들은 서양 음식을 바탕으로 하되 일본만의 독특한 조리법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니 고로케가 크로켓이란 서양 음식과 다르고, 돈가스 역시 포크커틀릿이 아닌 것이다.
1185년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출범했다.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이다. 가마쿠라 막부에 이어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섰다. 약 700년 동안 일본의 왕(천황)은 왕 구실을 하지 못했다. 권력은 막부의 일인자인 쇼군이 장악했다. 19세기 들어 에도 막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문호를 개방했다. 일단 문이 열리자 다른 열강들이 너도나도 일본으로 진출했다. 서양의 문물이 쏟아졌다. 일본 민중의 삶은 고달파졌다. 에도 막부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결국 막부가 무너졌다. 권력은 다시 왕에게 넘어갔다. 이 왕이 메이지다. 그래서 메이지 정부라 부른다.
1868년 메이지 정부가 출범했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 열강을 따라잡기 위한 개혁에 돌입했다. 이를 메이지 유신이라 한다. 학교와 공장을 세웠다. 서양식 군대를 양성했다. 리트머스 용지처럼 서양 문화를 쭉쭉 빨아들였다. 일본은 열강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제도만 개혁한다고 해서 서양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서양인과 비교하면 일본인의 체격은 왜소했다. 정치인들은 일본이 진정한 열강이 되려면 서양인과 비슷한 수준까지 덩치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서양 사람들은 뭘 먹기에 저렇게 덩치가 좋은 것일까……? 메이지 정부는 서양 음식을 면밀히 검토했다. 곧 나름의 답을 찾았다. “오호라! 서양 사람들은 소고기와 돼지고기 같은 육류를 많이 먹는구나.”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 메이지 왕은 즉각 “앞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먹도록 하라!”라는 조서를 내렸다. 없어서 못 먹지, 주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게 고기다. 그러니 ‘왕의 조서를 모두 환영했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본 국민은 이 조서를 반기지 않았다. 의외로 많은 국민이 이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일본 국민은 그 전까지 소고기를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육류 자체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7세기의 일본 40대 천황 덴무는 독실한 불교 신도였다. 그는 살생을 금했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육류를 잘 먹지 않았다. 어느덧 1,0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긴 기간 동안 육류를 즐기지 않는 정서가 일본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고기를 먹으라니! 반발이 생기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극단주의자들은 “고기는 불결하고 영혼을 더럽힌다.”며 저항했다.
메이지 정부는 소고기를 먹일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의외로 쉽게 풀렸다. 군대의 병사들부터 소고기를 먹였다. 군대는 상명하복의 질서가 명확한 곳이다. 그러니 병사들은 거절하지 못하고 고기를 먹었다. 뜻밖의 상황이 나타났다. 막상 먹어보니 맛이 기가 막혔다. 병사들은 제대한 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소고기 예찬론을 폈다. 서양 문물을 많이 수입하다 보니 이미 많은 서양 요리가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배층의 일부만 이 서양 요리를 즐겼다. 이 요리를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개선할 방법이 없을까? 요리사들은 고민을 시작했다. 물론 정부의 지침이나 명령이 있었을 터다.
일본인은 우리처럼 쌀로 만든 밥을 늘 먹는다. 고기 위주의 식사는 부담스러워한다. 그렇다면 서양과 일본의 식습관을 절묘하게 섞어 쌀밥과 고기를 같이 먹게 하자. 이런 생각에 따라 서양 요리를 바탕으로 한 일본만의 독특한 음식이 여럿 탄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돈가스, 쇠고기 전골, 카레라이스, 고로케였다. 소고기 섭취 운동의 결과는 어땠을까? 다들 짐작한 대로 별 효과가 없었다. 물론 영양 상태가 좋아지면 체격과 체력이 좋아진다. 요즘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체격이 10~20년 전보다 월등히 좋아진 걸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기간에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언감생심이다.
CHAPTER 3 도전과 응전의 하모니
골드러시(Gold Rush)의 명암_ 서부 개척 시대와 청바지의 역사
1848년 1월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목수 제임스 마셜(1810~1885)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재소의 수차를 점검했다. 수차 밑바닥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질들이 발견되었다. 혹시 금? 마셸은 여러 방법을 동원해 물질의 정체를 탐색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금이 확실하다! 그것도 순도가 아주 높은 최고급 품질의 금이었다. 이 소식은 제재소의 주인이자 농장주인 존 서터의 귀에 들어갔다. 서터는 기뻐했을까? 사실 난감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부나비처럼 몰려올 테니까 말이다.
서터는 스위스 출신의 이주민이었다. 그가 미국에 정착한 1834년에는 캘리포니아가 멕시코 영토였다. 서터는 멕시코 정부로부터 새크라멘토의 일부 지역을 불하받았다. 서터는 요새처럼 공고한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 안에서 황제처럼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 부귀영화를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쉬쉬한다고 해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감출 수는 없다. 곧 세상 모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금이 발견될 무렵 미국과 멕시코는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가장 먼저 동부의 미국인이 서부로 달려왔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도 있었다. 골드러시다. 1849년, 인구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이해에만 8만 명 이상이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이동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허다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대이동에 참여했는지 알 수 없다. 미국에서는 이 사람들을 ‘포티나이너스(49ers)’라고 불렀다. ‘49년도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1860년까지 약 10년 동안 무려 5억 달러 가치가 넘는 금이 채굴되었다, 캘리포니아 인구가 순식간에 급증했다. 1850년대에는 약 1만 4,000여 명이었다. 1860년대에는 38만 명이 되었다. 인구가 늘어나니 도로가 깔렸고, 각종 시설이 들어섰다. 상인이 늘어났고, 곳곳에 대도시가 생겨났다. 서부 개척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한 것이다. 하지만 서터와 마셜의 운명은 얄궂게 되었다. 서터의 정착촌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금을 찾아온 사람들은 강가 주변에 진을 치고 망나니처럼 행동했다. 닥치는 대로 땅을 파헤쳤다. 서터는 죽을 맛이었다.
만약 금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마셜은 제재소에서 평범하게 목수와 농부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금이 발견되는 바람에 일터를 잃었다. 마셜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골드러시 열기가 주춤해진 1850년대 후반에 돌아왔다. 다시 농사를 지었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뒤늦게 마셜도 금맥을 찾기 시작했다. 허사였다. 완전히 파산했다. 서터 또한 비슷한 길을 밟았다. 금이 발견되기 전 번창하던 사업은 망해버렸다. 땅은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미국 연방 대법원은 서터가 멕시코 정부로부터 받은 토지 문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졸지에 농장을 잃었다. 서터는 죽을 때까지 농장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금맥은 그의 삶을 불운하게 만들었다.
반면 골드러시 인파에 끼어 서부로 달려온 리바이 스트라우스(1829~1902)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금을 캐서 부자가 되지 않았다. 인부들의 작업 바지를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 청바지를 최초로 만든 인물이 바로 스트라우스다. 스트라우스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기 한 해 전인 1847년, 18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모두가 금에 열광할 때 스트라우스는 금에 냉정했다. 그 대신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았다. 1850년대 캘리포니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확천금을 노리고 이곳에 온 사람들이 묵을 곳이 있었을까? 아니, 설령 있다 한들 그 가난뱅이들이 숙박비를 댈 여유까지는 없었다. 그들은 천막을 세우고, 그곳에서 먹고 자면서 금을 채굴했다. 스트라우스는 그 인부들이 묵을 천막을 팔았다. 사업이 좀 안정되자 1853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리바이 스트라우스 & 컴퍼니’를 세웠다. 의류와 관련된 제품을 팔았다. 이를테면 옷에 다는 단추나 버튼, 캔버스 천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스트라우스는 선술집에서 인부들의 작업 바지가 많이 닳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더 튼튼하고 질긴 바지가 있다면……. 퍼뜩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떠올랐다. 만약 천막 재료인 캔버스 천으로 바지를 만든다면? 마침 캔버스 천이 많이 남아돌던 타이밍이었다. 그의 사업 감각은 탁월했다. 이 캔버스 바지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바지는 재봉사 제이코브 데이비스(1834~1908)가 제작했다. 인부들은 데이비스에게 “뒷주머니가 헐거워 물건이 자꾸 빠져나간다.”라고 푸념했다. 1872년 데이비스는 뒷주머니 모서리에 리벳을 박아 넣었다. 청바지 상징처럼 여겨지던 리벳의 첫 등장이다.
스트라우스는 나중에 인디고페라라는 나뭇잎에서 추출한 염료로 옷을 파랗게 염색했다. 또 옷감 소재를 캔버스에서 더 두껍고 질긴 데님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청바지가 탄생했다. 1928년 이 회사는 청바지 상표 하나를 등록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청바지의 대명사로 꼽히는 ‘리바이스’다. 하나의 사건이 이렇게 서로 다른 운명을 만들었다. 현재가 풍족하다고 해도 미래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끝없는 자기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대공황과 전쟁이 만든 섬유 혁명_ 합성 섬유의 탄생
1929년 10월 24일,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모든 주식이 폭락했다. 이날은 목요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날을 ‘암흑의 목요일’이라 불렀다. 경제가 폭삭 주저앉았다. 정부도 더 이상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은행과 기업이 도산했고 실업자가 속출했다. 농촌 경제도 무너졌다. 그렇게 미국 공황이 시작되었다. 미국 공황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전 세계가 몸살을 앓다가 드러눕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도 공황이 나타났고 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대공황이 시작된 것이다.
대공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국은 뉴딜 정책을 시행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한데 묶어 블록 경제를 추진했다. 두 나라는 식민지를 착취해 대공황의 위기를 넘으려 했다. 식민지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전체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특히, 일본은 1930년대를 전후해 아시아-태평양 일대에서 노골적으로 침략 정책을 드러냈다. 미국은 그런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미국에서 실크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그 전까지 주로 일본에서 실크를 수입했기 때문이다. 실크 수입량이 크게 줄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없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여성들의 블라우스와 스타킹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려면 실크가 꼭 필요했다. 낙하산, 텐트와 같은 군용 장비를 만들 때도 실크가 필요했다.
게다가 당시 미국 기업들에게는 대공황의 터널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큰 숙제가 있었다. 기업들은 대공황의 혼란 속에서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침 실크를 대체할 섬유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런 섬유를 개발한다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돈방석에 앉으면서 완전히 대공황의 터널을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에 대한 연구가 자연 활발해졌다. 화학 제조업체인 듀폰이 뛰어들었다. 이미 듀폰은 내로라하는 화학자들을 영입해 여러 실험을 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인 하버드 대학교의 화학과 교수였던 월리스 흄 캐러더스(1896~1937)였다. 캐러더스 연구팀은 곧 놀라운 실적을 만들어냈다. 1935년 캐러더스 연구팀이 마침내 공기, 석탄, 물의 화학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합성 섬유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합성 실은 양털보다 가볍고 거미줄보다 가늘었다. 하지만 천연 섬유보다 강했고 탄력성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