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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와 지명의 세계사 도감 1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 이다미디어
지리와 지명의 세계사 도감 1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이다미디어 / 2018년 5월 / 316쪽 / 14,500원





1장 서아시아와 지중해, 고대 문명의 출발



‘강 사이에 있는 땅’에서 인류의 문명이 탄생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라크’의 의미는 ‘강 사이에 있는 땅’: 우리는 이라크 전쟁을 통해, 이라크 사막에서 불어대는 엄청난 모래 폭풍과 가혹한 더위에 대한 소식을 많이 접했다. 그런데 사막에 모래뿐일 것 같은 이곳에서 인류 최고의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보통 ‘메소포타미아’라 불리며, 그리스어로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아랍어로는 이런 강가의 땅이나 저지대를 ‘이라크’라고 부르니, 메소포타미아와 이라크는 같은 의미인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영역과 현재의 이라크 영토는 거의 일치한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은 시리아 사막과 아나톨리아 고원, 이란 고원 등에 둘러싸여 있으며 밀과 대추야자 등을 수확하는 비옥한 농경 지대이다. 이 두 강은 모두 터키에서 발원하며, 수원 근처에서도 서로 약 4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그리고 페르시아 만에 도달하기 200킬로미터 전에 합류해 샤트 알 아랍 강이 된다.

지금부터 약 5000년 전에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수메르 지방에서 수메르인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건설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도시가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하천을 이용한 교역으로 번성했던 우르이다. 우르라는 도시명은 ‘해가 떠오르는 땅’ 또는 ‘동쪽’이라는 뜻을 가진 헤브라이어에서 유래했으며, 이 지역은 달의 신인 ‘난나 신앙’의 중심지였다. 특히, 이곳에서 난나에게 제사를 지내는 약 20미터 높이의 지구라트가 있는데,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대지의 어머니 신이며 풍요와 전쟁을 주관하는 여신인 이 난나를 모시며, 9.5킬로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원형 모양의 도시 ‘우루크’도 수메르를 대표하는 도시였다. 『구약성서』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요 무대가 바로 우루크이다.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바빌론은 ‘신의 문’이라는 의미: 하지만 수메르 지역에서도 혹심한 더위 때문에 농지의 수분이 증발해 염분 농도가 올라가면서 농지의 생산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이라크 북부로 이동했고, ‘메소포타미아’의 중심도 자연히 그쪽으로 옮겨 갔다. 기원전 1830년 무렵, 아무르인이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도시 ‘바빌론’을 중심으로 패권을 장악했다(고바빌로니아). 이라크 중부의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를 대표하는 도시로, 아카드어로 ‘신의 문’을 의미하는 ‘바빌림’이라고 불렸으며, ‘바빌론’은 그리스어이다.

바빌론에서는 함무라비 법전이 제정됐고, 설형문자인 쐐기문자가 새겨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점토판이 발견됐다. 또 이곳은 기원전 6세기에 주변 13킬로미터를 성벽으로 감싸는 도시로 성장했으며, ‘바벨탑’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탑을 비롯해 크고 작은 1,000개 이상의 신전과 ‘공중정원’으로 유명해졌다. 바빌론은 유프라테스 강 도하 지점으로 현재 이라크 도시 카르발라 근처에 있었다.

기원전 1500년 무렵, 말에게 전차를 끌게 했던 인도 유럽계 유목민의 침임으로 말미암아 메소포타미아는 대격동기에 접어들었다. 이런 가운데 아나톨리아 고원의 하투샤를 수도로 한 히타이트인이 인류 최초로 철제 무기를 사용해, 기원전 1530년경에 고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이로 인해 문명의 중심이 좀 더 북쪽인 아나톨리아로 옮겨 갔다. 하투샤는 ‘하티인 왕의 성’이라는 뜻으로, 현재 터키에서는 ‘보가즈쾨이’라고 불린다. 길이가 약 1,200미터인 하투샤 유적에 둘러싸인 신전과 대궁전이 오늘날까지 히타이트제국의 영화를 전하고 있다. 또한 왕실 문서실에서는 설형문자로 쓰인 약 1만 점의 점토판 외교 문서가 발견되어 히타이트가 얼마나 강대한 국가였는지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100년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제국



지중해 2대 교역권은 동쪽의 알렉산드리아와 서쪽의 카르타고: 지중해는 중앙부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 아프리카 북쪽 지역의 튀니지를 연결하는 선을 기준으로 해서 동서로 양분된다. 그리고 지중해 교역권이 성숙 단계에 이르러서는 동쪽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교역권과, 서쪽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교역권으로 나뉘었다. 이탈리아 반도 중앙부를 흐르는 테베레 강 하구에서 약 25킬로미터 거슬러 올라간 도하 지점에 위치한 로마는 두 개의 교역권을 잇따라 정복해, 기원전 3세기 전반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로마라는 도시 이름은 원주민인 에트루리아인의 ‘루몬(‘강의 도시’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이 도시를 건설했다는 로물루스에서 따왔다고 하기도 한다. 전설을 보면 군신 아레스와 알바롱가 왕가의 딸인 레아 실비아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어렸을 때 테베레 강에 버려졌다고 전한다. 이후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뒤 양치기가 이들을 데려다 키웠으며, 두 형제가 기원전 753년에 테베레 강가에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나중에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살해하고 초대 왕이 되는데, 자신의 이름을 따서 도시에 ‘루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카르타고를 철저하게 파괴: 로마는 반도 남부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 이주민과 손을 잡고,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쳐 포에니 전쟁(기원전264~기원전146)을 치렀다. ‘포에니’는 그리스어의 ‘포이니케’가 변한 것으로 페니키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카르타고는 운하로 연결된 두 개의 항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항구의 뒤쪽에는 요새가 건설되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9세기 말에 페니키아의 티루스에서 태어난 여왕 디도가 이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새로운 도시’라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튀니지의 또 다른 식민시인 우티카에 비해 새로 건설된 도시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치른 첫 번째 전쟁에서, 지중해 교역의 중심인, ‘시클(낫)을 가진 사람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시칠리아 섬을 빼앗았다. 시칠리아 섬은 카르타고에서 16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 뒤 카르타고는 스페인 남동부의 항구인 카르타고 노바(새로운 카르타고, 현재의 카르타헤나)를 중심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본격적으로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카르타헤나는 지금도 항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에 미군의 해군 기지가 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스페인의 카르타고 노바에서 약 5만 명의 군대와 수많은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다. 곧바로 이탈리아 반도로 치고 들어간 한니발은 8만여 명의 로마군을 포위해 섬멸했다. 하지만 기원전 202년에 카르타고 서남 지역의 자마 전투에서는 로마가 승리해 카르타고로부터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땅을 빼앗았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서지중해의 교역망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로마군은 모멸의 뜻을 담아 완전히 파괴된 카르타고에서 작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렸고, 그 뒤 25년 동안 어느 누구도 카르타고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다.

지중해를 ‘로마의 바다’라고 부르며 해양제국으로 발돋움: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동지중해에 살던 그리스인이 카르타고를 지원했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동지중해에도 손을 뻗쳐 기원전 146년에는 마케도니아를, 기원전 64년에는 시리아를 정복했다. 한편,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세련된 교양과 미모를 무기로 로마의 무장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잇달아 자기편으로 만들어 자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해 기원전 30년에 이집트는 로마에 병합되었다. 이리하여 로마는 지중해를 ‘로마의 바다’라고 부르며 대해양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해양 네트워크를 통해 로마로 대량의 물자들이 운반되었는데, 육로라면 약 100킬로미터밖에 운반되지 못할 비용으로 지중해 끝에서 끝까지 배를 이용해 운반하면서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다.



2장 유라시아를 지배한 이슬람제국과 몽골제국



세계의 중심 무대로 등장한 이슬람의 아라비아 반도



로마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을 아라비아 반도 중심으로 연결: 역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환된다. 7세기 아라비아 반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슬람교로 결속된 아랍인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지중해 세계(로마제국)와 서아시아 세계(페르시아제국)를 새로운 무대, 즉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연결하면서 세계사가 일대 전환기를 맞기 시작한 것이다. 아라비아 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로, 유럽 대륙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이이다. 이곳의 평균 고도는 약 1,000미터이며 3분의 1 이상은 사막이다. 이 아라비아라는 지명은 아랍인이 이곳을 ‘비라트 알 아랍’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는데, 여기서 비라트는 ‘나라’이고 아랍은 ‘황야’라는 뜻이다.

6세기에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비잔티움제국의 치열한 싸움이 만성화되면서, 동서 교역 루트가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통하지 않고 아라비아 반도의 홍해 연안에 위치한 헤자즈(‘산에 둘러싸였다’라는 뜻) 지방에서 아라비아 해로 가는 우회로가 개척되었다. 낙타를 이용한 교역 루트의 중심 도시는 큰 흑운석 ‘즈하루’를 모시는 신전인 ‘카바’가 세워져 있는 메카였다. ‘메카’라는 이름은 고아라비아어의 마코라바(성지)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다시 영어의 ‘본고장’, ‘중심지’를 의미하는 ‘mecca’의 어원이 된다. 이슬람력으로 12월(순례의 달)이 되면 지금도 전 세계에서 약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슬람교도가 대거 메카로 몰려든다.

사막의 대상 상인이었던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 570년경, 메카의 상인 귀족층이었던 하심 가문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다. 그는 유복자로 태어나 6세 때 어머니를 잃었고, 이후에는 조부의 손에서 자라다가 조부가 죽자 다시 숙부 집안에서 자랐다. 25세 때는 15세 연상의 부유한 미망인 하디자와 결혼했고, 그 후 상인으로 성공해 아들 두 명(어렸을 때 모두 사망)과 딸 네 명을 낳았다. 610년 어느 날 밤, 무함마드는 히라 산(메카 교외에 위치한 산으로 ‘빛의 산’이라고도 불린다)에서 600개의 날개를 단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너는 신의 사도이며 예언자다’라는 계시를 받고, 유일한 알라를 절대신으로 하는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한 부족이 200명 정도인 유목민들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각 부족마다 다른 우상을 믿었던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 중심지 메카에서 무함마드는 10년 동안 열심히 포교했다. 하지만 그동안 얻은 신자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

619년에 아내와 숙부가 세상을 떠나자, 무함마드는 포교가 힘든 메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622년 7월 16일, 양부 아부 바크르(나중에 초대 칼리프가 됨)와 길 안내자, 해방 노예 세 명을 데리고 북방에 위치한 ‘대추야자의 대생산지’ 야스리브로 포교 거점을 옮겼다. 야스리브에는 나중에 무함마드의 무덤이 조성되었으며, 훗날 사람들은 이곳을 ‘메디나(‘예언자의 마을’이라는 뜻의 ‘마디나트 안 나비’를 줄인 말, 도시라는 뜻)’라고 불렀다. 한편, 제자들은 석 달 전부터 몇 명씩 나뉘어 야스리브를 찾아갔으며, 그곳에서 무함마드와 만났다. 이런 교단의 이동을 ‘헤지라(아랍어로 ‘도망, 이주’라는 뜻)’라고 하며, 622년이 이슬람력의 ‘기원 원년’이 되었다.

유목민 베두인족을 이슬람교로 결집시키고 메카를 무혈점령: 무함마드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서로 경쟁하는 야스리브에서 권력 기반을 구축하고, 계약 관계에 기반을 둔 교단(움마)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무함마드가 거주하는 곳은 예배당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곳은 최초의 모스크가 되었다. 그는 사막 주변에서 낙타와 양, 염소를 기르면서 생활하는 용감한 유목민인 베두인족(베두인은 ‘황야’를 의미하는 바디야에서 유래)을 복속했고, 메카 상인단에 대해 지하드(알라의 적에 대한 성전, 죽은 자는 ‘신의 순교자’라는 칭호를 얻었다)를 실시해 전리품 가운데 5분의 1을 교단의 소유로 귀속시켰다.

베두인족을 교단으로 결집하는 데 성공한 이슬람교단은 630년에 메카를 무혈점령해 아라비아 반도 전체에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슬람교를 기반으로 여러 아랍민족연합체가 통일된 아랍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632년에 무함마드가 젊은 아내 아이샤의 무릎을 베고 누운 상태에서 급사하자, 이슬람교는 분열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교단은 대화를 통해 칼리프(무함마드의 대리인, 후계자)를 선출해 교단이 분열될 위기를 극복했다.

몽골 고원의 부족을 통합한 칭기즈 칸의 기마 군단



서쪽의 이슬람 세계와 동쪽의 중화 세계를 정복한 기마 민족: 알타이 산맥 서쪽에서 투르크멘인이 등장한 시대보다 조금 뒤늦게 동쪽 몽골 고원에서는 칭기즈 칸이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출현했다. 그는 이슬람 상인과 손을 잡고 유라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한반도부터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유라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몽골제국은 인구가 얼마 안 되는 몽골 고원을 기점으로 동서로 띠모양으로 펼쳐진 대초원을 지배했는데, 서쪽의 이슬람 세계와 동쪽의 중화 세계를 통합했다. 하지만 대제국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몽골 고원이었다.

유라시아 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몽골 고원은 서쪽으로는 알타이 산맥, 동쪽으로는 대흥안령 산맥, 남쪽으로는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고원이다. 평균 고도가 약 1,580미터인 몽골 고원은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해발 1,000~1,200미터 되는 자갈 상태의 고비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초원 지대의 연간 강수량이 250밀리미터인 데 반해 고비 사막은 100밀리미터 이하이다. 바로 이런 가혹한 환경이 강인한 유목 기마 군단을 길러낸 것이다. ‘용맹한 사람’이라는 ‘몽골’의 의미처럼 몽골 고원에서 활약하는 흉노 등은 예부터 남쪽에 위치한 중화제국을 계속 위협해왔다. 중화제국이 건설한 ‘만리장성’도 흉노의 군사적인 위협 때문이었다. 몽골 고원의 완만한 경사가 황토 지대까지 이어졌기에 중화제국은 산과 강과는 달리 ‘인공 경계’인 만리장성을 건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의 군사 제도를 도입해 ‘천호제’로 재편: 12세기 몽골 고원은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였다. 당시 몽골 고원을 지배했던 금나라가 대항 세력이 출현할 것을 두려워해 부족 간의 대립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지도자가 ‘초원의 푸른 늑대’의 피를 이어받은 명문 출신이면서, 젊어서 부친이 살해당해 고난의 청년 시대를 보냈고, 45세가 넘어 ‘칸(왕)’의 자리에 오른 테무친이었다. 참고로 그는 1206년 쿠릴타이(집회)에서 부족장들에게 칸의 지위를 인정받고, ‘칭기즈(빛의 신)’라는 칭호를 얻었다.

칭기즈 칸은 고원의 전통적인 유목 사회를 일신했다. 그는 적대적 관계에 있던 금나라의 군사 제도를 도입해 십진법으로 유목민을 재편(천호제)했다. 그리고 심복 부하를 각각의 장으로 파견해 엄한 군율을 확립했다. 이로써 강력한 기마 군단이 단숨에 성립된 것이다.

칭기즈 칸은 동으로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군락을 지배하던 서하를 공격했고, 서로는 투르크계 신흥국인 호라즘과 협력하며 실크로드 무역을 관리 하에 두려고 했다. 하지만 호라즘에 파견한 사절단이 지방 장관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칭기즈 칸은 다시 한 번 사절단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수염을 깎아버리는 굴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칭기즈 칸은 이에 분노하여 기마 군단 10만 명을 이끌고 호라즘을 공격했다. 결국 1220년, 몽골군은 호라즘 왕을 카스피 해의 작은 섬으로 몰아넣은 뒤 살해함으로써 호라즘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1227년에는 동남쪽의 서하를 멸망시킴으로써 칭기즈 칸은 내륙 아시아의 건조 지대를 모두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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