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전기. 1
마르크스 레닌주의연구소 지음 | 노마드
마르크스 전기 1
마르크스ㆍ레닌주의연구소 지음
노마드 / 2018년 5월 / 496쪽 / 25,000원
유물론과 과학적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카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트리어(Trier)시의 한 변호사 집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트리어시는 한적한 도시였지만, 그곳이라고 해서 독일 전체를 휩쓸고 있는 사회운동으로부터 고립돼 있을 수는 없었다. 사회주의 이론이 트리어시에서도 일정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카를은 가족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명석한 두뇌, 놀이할 때의 창의력, 공상적 이야기들을 꾸며내서 몸짓까지 섞어가며 이야기해주는 능력 등은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게 했다.
본과 베를린에서 보낸 학창시절
1835년 10월 카를은 본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 전공과목은 물론 그리스ㆍ로마 신화와 현대예술사 등의 강의까지도 경청했고, 본 대학에서 두 학기만 수료한 뒤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베를린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한편 카를은 베를린으로 가기 전 1836년 여름방학을 집에서 보냈는데, 그때 그는 어릴 적 친구였던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장래를 약속했다.
박사학위 논문
1839년 초부터 마르크스는 고대 세계의 철학적 사고, 특히 에피쿠로스학파ㆍ스토아학파ㆍ회의론 등을 광범위하게 조망하는 데서 시작해서 철학사 연구에 몰두했고, 이러한 연구의 결과 오늘날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 회의론 철학에 관한 노트」로 알려진 예비 자료를 포함하는 일곱 권의 노트를 썼는데, 이 노트를 통해 마르크스는 철학이 종교와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841년 초에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그는 이 논문에서 인류의 정신적 발전과정상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견해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고, 에피쿠로스의 철학체계 속에 존재하는 변증법적 요소들, 특히 원자의 자발적인 쇠퇴에 관한 이론까지 밝혀놓았다. 한편 당시 베를린 대학에서는 누구든 학위논문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일이 매우 성가시면서도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논문을 예나 대학에 제출했고, 이윽고 1841년 4월 15일에 그곳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정치활동의 개시 - 프로이센 검열제도에 대한 평론
박사학위 논문이 완성하고 마르크스는 트리어에서 두 달 남짓 머문 뒤 1841년 7월에 생활 터전을 본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브루노 바우어와 친교를 맺게 되었는데, 헤겔 우파를 겨냥한 무신론적 사상이 담긴 소책자 『헤겔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소리』의 저술 작업을 돕기도 했다. 한편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자 했던 그의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권좌에 오른 즉시 헌법을 개정할 용의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왕정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탄압이 자행되어, 요한 야코비는 프로이센에 의회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창한 팸플릿을 발행하여 대역죄로 고발당했고, 브루노 바우어는 본 대학에서 해고당했다. 가장 급진적 성향을 지닌 청년헤겔주의자들(그 선두에 마르크스와 브루노 바우어, 아르놀트 루게를 내세운)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정부의 보복조치와, 자발적으로 헌법과 자유주의적 질서를 도입하리라 믿었던 ‘계몽군주’에 대한 환상이 붕괴되면서 점차 정치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미 진행 중이던 이론적 작업들을 일단 제쳐두고 1842년 1월 중순과 2월 초에 <최근의 프로이센 검열훈령에 대한 논평>이라는 글을 썼다. 이것은 그가 쓴 최초의 정치평론적인 성격의 글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검열법을 신랄하고도 비판적으로 공격했다.
《라인신문》의 기고가이자 편집장 / 마르크스의 정치평론에 나타난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
마르크스의 혁명적ㆍ민주주의적 시각은 그로 하여금 폭넓은 행동 분야와 자신의 사상을 피력할 연단을 찾아 헤매도록 부추겼고, 그는 1842년 쾰른에서 창간된《라인신문》이라는 반정부지에 참여했다. 한편 《라인신문》 편집장에 취임한 다음 날, 이 신문은 그의 논설 <공산주의와 아우크스부르크의 종합신문>을 게재했는데, 이 논설의 요지는 그의 신문이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있다는《종합신문》의 비난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청년 마르크스는 현실에 대한 교조적인 처방을 선언하거나 제시하는 것을 삼가고, 끊임없이 현실의 모순들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그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려고 했다.
《라인신문》의 폐간
정부는 점점 《라인신문》을 프로이센 국가에 위협적인 존재로 보았고, 1843년 1월 19일에 이 신문을 1843년 4월 1일자로 폐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가 이 신문에서 계속 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843년 3월 18일자 《라인신문》은 마르크스가 편집장에서 사퇴했다는 공고문을 실었고, 3월 31일에 최종호를 발행하고 폐간되었다. 프로이센에서 혁명적 사상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자, 그는 프로이센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라인신문》에서의 활약은 그의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그리고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또 그는 각기 상이한 사회적 집단에 속한 인간들의 행동은 모종의 객관적인 요인에 근거하며, 그들의 사적인 이해관계도 그들의 객관적인 사회적 지위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편집장으로서 그는 갖가지 경제문제에 부딪히게 됐고, 그로부터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경제문제가 인간생활에서 우선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크로이츠나흐에서,『헤겔 법철학 비판』초고 - 역사에 관한 노트
1843년 5월 마르크스는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그녀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라인 지방의 소읍 크로이츠나흐로 이사했고, 마르크스와 예니는 이곳에서 1843년 6월 19일에 결혼했다. 마르크스로서는 크로이츠나흐에 머물던 시절이 가장 창조적인 작업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때였다. 그의 앞에 놓인 주요한 문제는 국가와 법에 대한 헤겔의 이론을 비판하는 일이었다. 이 연구 작업의 결과가 바로 1927년에 소련에서 『헤겔 법철학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된 미완성 초고였다. 5권으로 된 『크로이츠나흐 노트』에는 국가의 이론과 역사, 그리고 개별 국가의 역사에 관한 저서에서 발췌한 수많은 인용문이 수록되어 있다.
《독불연보》의 발행 준비, 파리로 가다
크로이츠나흐에서도 마르크스는 《라인신문》 폐간 이전부터 시작한 독일과 프랑스 민주주의자들을 단결시킬 정기간행물의 발행계획과 관련한 서신 연락을 계속했다. 마르크스는 1843년 9월에 아르놀트 루게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리에서 발행할 잡지의 대략적인 계획표를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현존 세계질서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을 이 잡지의 주요 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쟁쟁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기고를 받는다는 계획도 세웠다.
궁극적으로 채택한 유물론과 과학적 사회주의 / 위대한 우정의 서막
《독불연보》 최초의 합본호(제1호와 제1호)가 1844년 2월 말에 발행되었다. 이 잡지에는 마르크스의 평론 이외에도 엥겔스의 평론 2편(<정치경제학 비판 대강>, <영국의 상태>)과 하인리히 하이네와 헤르베크의 시, 모제스 헤스와 베르나이스의 평론 및 그 밖의 많은 기사들이 실렸다. 한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라는 두 이름이 《독불연보》의 내용 속에서 나란히 발견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매우 상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후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동지이자 진정한 전우가 되었으며, 마르크스는 나머지 생애를 실질적으로 엥겔스와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처음 만난 것은 1842년 11월 영국에 가는 도중에 《라인신문》 편집실을 방문했을 때였다. 마르크스는 《독불연보》에 게재된 엥겔스의 평론을 통해서 두 사람의 사상이 동일한 노선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그들의 절친한 친교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적 전망의 원리에 대한 최초의 정식화
1844년 파리에서의 마르크스 / 과학적 탐구
마르크스는 파리에 체류하면서 7월 왕정의 사회적ㆍ정치적 기류와 더불어, 당시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정치적ㆍ사회주의적 동향들을 더욱 깊이 통찰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 혁명적 노동자들 그리고 망명해온 독일의 혁명가들 등 다양한 서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파리에 정착한 이후 정치경제학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 그리고 프랑스의 역사를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이 연구과정에서 마르크스는 특히 현대사회의 계급투쟁이 갖는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골몰했다.
『1844년 경제학ㆍ철학 초고』
마르크스는 그간의 연구 결과를 3개의 다소 단편적인 미완성 초고 형태로 정리했다. 그것이 1844년 4월부터 8월 사이에 집필한 『1844년 경제학ㆍ철학 초고』이다. 이 『초고』는 이 시기의 마르크스의 경제적ㆍ철학적 관점이 어떤 것이었는지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의 중심은 소외와 소외된 노동의 범주에 있었다. 이 같은 소외는 노동하는 인간이 생산해내는 부가 증가할수록 궁핍화가 더욱 증대되는 사실로부터, 또 정치경제학 그 자체가 인정하고 있는바 ‘현존하는 정치ㆍ경제적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노동소외 개념은 타인의 임노동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를 밝히고 있는 그의 이론과, 그가 훗날 『자본론』에서 발전시켰고 과학적으로 뒷받침한 중요한 사상의 맹아가 되었다.
한편 마르크스는 『경제학ㆍ철학 초고』에서 공산주의를 휴머니즘과 동일한 완전한 자연주의, 또는 자연주의와 동등한 완전하고도 진정한 휴머니즘으로 규정했다. 그는 여러 문맥 속에서 ‘진정한’ 공산주의란 사적 소유의 폐지, 따라서 모든 소외의 폐지, 특히 경제적ㆍ정신적ㆍ종교적인 면에서 인간의 모든 자기소외의 폐지라는 최고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파리에서 추방당하다
1844년 당시 신문 《전진》은 민주주의적 독자층으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1844년 1월 파리 주재 프로이센 대사는 프랑스 정부에 대해 “국왕 시해를 설교하고 있는” 《전진》을 폐간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암살기도 사건에 대한 《전진》의 논평을 언급). 이러한 비난에 접하여,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법원에 송치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고 보고 일단 베르나이스 편집장을 법정 공탁금의 지불 불이행을 빙자하여 구속했다. 이에 대해 편집부는 《전진》을 공탁금이 필요 없는 월간지로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프랑스 당국은 《전진》의 기고자들 가운데 마르크스, 하이네, 뷔르거스 그리고 바쿠닌에게 추방명령을 내렸고, 1845년 2월 3일마르크스는 파리를 떠나 브뤼셀로 향했고, 그의 아내와 어린 딸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사적 유물론
브뤼셀에서
마르크스는 3년 동안 브뤼셀에서 살았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적 세계관의 과학적 원칙들을 더욱 구체화시키는 일에 몰두했고, 프롤레타리아의 선진적 인자들을 규합해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결성하기 위해 실천적 노력을 기울였다. 저술 활동 면에서도 이 기간은 대단히 생산적인 시기였다. 처음 18개월 동안 그는 엥겔스와 함께 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와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두 편의 탁월한 저서에서 논리 정연한 유물론적 역사관을 제시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마르크스가 1844년부터 47년까지 파리와 브뤼셀에서 사용한 메모록에 수록돼 있는 11개의 테제는 새로운 세계관의 원칙에 대한 최초의 기술이었다. 좀 더 다듬어야 할 필요성도 있고 다소 서두른 감마저 드는 이 메모는 5쪽이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사고의 집중력과 깊이, 그리고 표현의 명료성과 정확성에서는 아마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 메모는 사회생활에서 혁명적ㆍ물질적 실천이 지니는 결정적 역할을 그 중심사상으로 삼고 있다. 마르크스는 실천이야말로 모든 사물의 철학적 인식의 출발점이며 기초이고 판단기준이며 목표라고 주장한다.
종래의 유물주의는 관조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다. 반면 마르크스는 관조와 혁명적 실천, 낡은 유물론과 공산주의의 철학적 기초로서 새로운 변증법적 유물론을 대비시켰다. 그리하여 최종 테제는 새로운 세계관의 원칙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정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단지 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 이 새로운 세계관(그 기본적인 원칙들을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간단명료하게 정식화했다)은 훗날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그들의 공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더욱 구체화됐다.
『독일 이데올로기』 집필에 몰두하다
『독일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이론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1권의 서문형식을 띤 제1장(Ⅰ. 포이어바흐, 유물론적 시각과 관념론적 시각의 대립)이다. 이 장 대부분에 걸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해설하고 있으며, 나머지 장들에서는 주로 반대자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들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서문에서는 유물사관과 과학적 공산주의에 관한 다소 체계적인 해설을 제시하고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 제2권은 ‘진정한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계급투쟁과 사회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대신 감상적인 사랑의 설교를 통한 인류의 해방을 옹호했는데, 이는 독일 소시민계급의 반동적인 이해관계를 표출한 것으로서,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를 촉구하는 사상이었다. 이 같은 경향은 공산주의적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었으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마땅히 비판을 가해야 했다.
자기 정화
『독일 이데올로기』에 구체화된 이론적 성과는 이후 마르크스의 학문적ㆍ실천적 노력에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마르크스는 이제 사회주의가 과학적 형태를 갖추고, 환상적이거나 공상적인 사회개혁의 처방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참다운 이론적 발판을 제공하기 위해 창안된 엄격한 내용의 이론으로서 대중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정당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한 결론을 공표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 작업을 『철학의 빈곤』과 <공산당 선언>을 통해 보다 세련되고 완벽한 형태로 완수해냈다.
프롤레타리아 당을 위한 투쟁의 출발 - 국제노동계급 운동을 위한 강령
유럽의 여러 사건들은 혁명적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1847년 프랑스ㆍ독일ㆍ벨기에ㆍ미국과 그 밖의 여러 나라들이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었으며, 그것은 특히 영국에서 극심했다. 재난은 곡물의 흉작으로 더욱 악화되었고, 아일랜드의 기근은 특히 심했다. 기근 폭동은 동부 프로이센에서 노르망디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휩쓸었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잇달았다.
‘브뤼셀공산주의자통신위원회’
혁명이 성숙되기 이전 시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여러 진보적 요소들을 프롤레타리아 정당 건설을 위한 실천적 당면 운동 속에 결합시키는 데 몰두했다. 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의 지도적 노동자들과 혁명적 지식인들 사이에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그 결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활동을 위한 조직 중심부로서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 수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846년 초에 그들은 ‘브뤼셀공산주의자통신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또 다른 곳에 이와 비슷한 위원회들을 설립하려고 노력했다. ‘브뤼셀공산주의자통신위원회’는 아우구스트 에버베크를 통해, ‘의인동맹’ 파리지부와 지속적인 연대를 유지했다. 한편 파리에 통신위원회를 설립하자는 마르크스의 제안은 얼마 후 엥겔스가 현지에 도착한 이후인 1846년 8월에 실현되었다. 그리고 요제프 몰ㆍ카를 샤퍼ㆍ하인리히 바우어 등 런던의 ‘의인동맹’ 지도자들은 지방 통신위원회를 건설하려는 생각에 찬성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런던에 그들의 위원회를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