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미술 100
김성진, 차홍규 지음 | 미래타임즈
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미술 100
차홍규, 김성진 엮음
미래타임즈 / 2018년 6월 / 560쪽 / 24,000원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 디에고 벨라스케스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으로 경건한 종교적 주제를 그렸으나 민중의 빈곤한 일상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이며, <시녀들>은 많은 토론거리를 남겼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7세기 스페인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왕과 왕실 가족, 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뛰어난 관찰력으로 자연과 인물, 현실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특히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뛰어났다. 그는 당대에도 이름이 높은 화가로 화려한 생활을 하였고, 19세기 들어 회화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식되면서 더욱 명성을 떨쳤다. 인상주의자들은 그의 작품을 기점으로 회화가 순수 시각 미술로 전환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파블로 피카소는 그가 진정한 리얼리티를 구현한 화가라고 평했다.
벨라스케스는 1599년 6월 6일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포르투갈계 유태인 출신의 변호사였던 아버지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바와 스페인의 하급귀족 출신인 어머니 헤로니마 벨라스케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어머니의 혈통이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장남이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쓰도록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을 따라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벨라스케스가 되었다. 벨라스케스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당시 이탈리아의 화풍을 거부했던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에게서 미술을 배웠다. 12살이 되자, 벨라스케스는 에레라의 곁을 떠나 세비야의 예술가인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프란시스코 파체코는 알론소 카노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벨라스케스는 파체코의 지도 아래 5년 동안 미술을 공부하면서 세비야의 화풍을 배웠다. 파체코는 “성실성과 훌륭한 재능을 갖추고 있는 벨라스케스는 실물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모델의 자세를 스케치하기 때문에 인물 묘사에 뛰어나다.”라고 벨라스케스를 평했다. 스승인 파체코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1617년에 화가 길드에 가입하고, 일 년 뒤 스승의 딸인 후안나 파체코와 결혼했다.
벨라스케스는 초기부터 화가로서 실력이 완성되어 있었지만, 만족하지 않고 카라바조풍에서 전기 인상주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법을 배우고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보데곤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정물을 모티브로 하여 일상의 주제를 다룬 양식으로 17세기 스페인의 회화에서 크게 유행된 양식이다. 그가 보데곤 양식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으로는 <달걀부침을 만드는 노파>와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등이 대표적이다. 1622년 4월 초 그는 왕의 사제였던 돈 후안 데 폰세카의 추천서를 받아 마드리드로 가게 된다.
1622년 12월에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인 로드리고 데 비얀드라도가 죽자 벨라스케스가 궁정으로 들어와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1623년 8월 16일 드디어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는 단 하루 만에 왕의 초상화를 완성하였다. 단지 왕의 두상 부분을 그린 초상화였지만 왕과 다른 사람들 모두 그 그림에 만족했다. 이에 벨라스케스와 가족 모두 마드리드로 이사하라는 왕의 명을 받게 된다. 이사를 하는 조건은 벨라스케스 이외에 다른 어떤 화가도 왕의 초상을 그릴 수 없다는 것과 그가 그린 모든 그림은 궁정에 보관된다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624년 벨라스케스는 왕으로부터 비용을 받고 마드리드로 이사를 와 죽기 전까지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는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며, 왕의 전속 초상화가가 되어 왕과 왕의 가족들을 그린다.
벨라스케스는 이 시기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시녀들>이란 작품을 그린다. 이 그림은 총 3가지의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첫째는 화가가 바라보는 시선, 둘째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의 시선, 셋째는 관람자의 시선이다. 벨라스케스가 이 그림을 그린 장소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오빠 방이었지만 그가 일찍 죽자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의 화실로 꾸며준 방이다. 어린 공주는 왕과 왕비를 위문하려고 왔지만 왕과 왕비는 뒤에 멀리 있는 거울에 반사되어 나타나고 있다. 공주의 양옆에는 귀족 출신의 시녀가 있다. 한 명은 공주에게 물을 주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왕과 왕비에게 예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공주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난쟁이 광대가 있다. 맨 뒤에 그려진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은 궁정의 기사 겸 집사이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걸작이자 역작으로 고전 시대 전체를 압도하는 백미라고 극찬을 받는 작품이다.
벨라스케스는 궁정에 머무는 동안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가 그린 <바쿠스의 승리>와 <술주정꾼들> 같은 작품에는 미묘하게 변화하는 빛의 뉘앙스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보다 장식적이고 화려한 채색 기법을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화풍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 특유의 사실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접근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뿐만 아니라 왕실의 수석 집사 역할까지 맡아 축제와 관련된 일들을 집행하면서 왕실의 생활 전반에 관여했다. 그런 한편 그는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거울을 보는 비너스> 등 많은 그림도 그렸다. 이때 그린 그림들은 티치아노를 연상시키는 섬세한 붓놀림과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들이 벨라스케스 특유의 사실적인 묘사 방식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벨라스케스는 1660년 마리아 테레사 공주와 루이 14세의 결혼식 장식 담당자로 스페인과 프랑스의 접경에 있는 푸엔테라비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고 마드리드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벨라스케스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알카사르에 안치되었다가 많은 왕실 가족과 귀족들의 추도 아래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으며, 산 후안바우티스타 성당에 매장되었다.
로코코의 위대한 여류화가 -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
로코코 시대의 여성화가인 르브룅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매력적인 초상화로 유명하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은 궁정화가로서 왕실과 귀족의 초상을 다수 제작해 명성을 얻었다.
로코코 양식의 예술이 왕성하던 17세기에는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다. 그만큼 여성의 지위는 한없이 낮았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풍조 속에서 여자라는 성별의 한계를 극복하고 왕실화가로 활동함은 물론 전 유럽에 엄청난 예술적 영향력을 발휘한 여성이 있다. 로코코 양식과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여성화가인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룅이 그 주인공이다.
비제는 1755년 4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12살 때 세상을 떠났으며, 1768년에 어머니는 부유한 보석상과 재혼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가족은 파리의 중심부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어려서부터 그림을 배운 그녀는 가브리엘 프랑수아 도이엔, 밥티스트 그루즈, 조세프 버넷 같은 당대의 유명 화가들로부터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
1775년 8월 7일에 비제는 화가이자 미술상이었던 장 밥티스트 피에르 르브룅과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녀는 이미 여러 귀족들과 부유층의 초상화를 그려 유명해진 화가였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화가의 입지를 넓히는 데에는 미술품 수집가로 이름이 높았던 남편의 영향력이 컸다. 이때부터 그녀는 전문화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수입을 거뒀으나, 그 수입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남편에게 귀속되었다. 남편의 도움으로 전문화가로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독립적일 수 없었던 것은 여성이라는 핸디캡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비제의 능력과 가치를 발견하여 지원해 주는 최고의 조력자가 생겼다. 그 조력자는 그녀와 동갑내기인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1780년 2월 12일, 비제는 딸 잔 마리 루이즈를 낳았다. 1781년에 그녀는 남편과 함께 네덜란드를 여행했다. 이때 그녀는 그곳의 유명 화가들의 기법에 많은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 냈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몇몇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중에는 빌럼 1세의 초상화도 있었다. 1783년 3월 31일, 엘리자베스 비제는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은 비제도 역시 혁명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처형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 엘리자베스 비제를 지키기 위해 남편은 그녀를 이탈리아로 망명시켜 처형의 위기를 모면시켰다. 망명자라는 신분으로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은 미술적 역량을 키울 기회가 되었다. 비제는 이탈리아, 헝가리, 러시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활동을 계속했다. 로마에서 그녀의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러시아에서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가족과 러시아의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곳에서 그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비제는 660여 개의 초상화를 남겼으며 200여 개의 풍경화도 남겼다. 그녀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유명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코코 양식 특유의 섬세함, 그리고 아름답고 고상한 느낌의 그림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우아한 감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비제는 나폴레옹의 집권 시기에 프랑스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녀는 루브시엔의 한 집을 사서 1814년 프로이센의 군대에 의해 집을 빼앗기게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녀는 1842년 3월 30일 죽기 전까지 파리에서 머물렀다. 그녀의 시신은 루브시엔에 다시 돌려보내져, 그녀가 살았던 집 근처에 묻혔다.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자 - 외젠 들라크루아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인 들라크루아의 작품 경향은 초기 고전주의에서부터 바로크적 특징과 낭만주의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두루 포함하고 있다. 말년에 들라크루아는 역사화와 정부 건물에 그린 뛰어난 벽화로 인기를 얻었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최고 예술가로 손꼽히는 화가이다. 그는 작품의 영감을 주로 과거와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에서 얻었다. 특히 1832년 프랑스 정부 사절단에 끼어 모로코를 방문했는데, 그 방문 후 그의 그림에서는 색채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법과 붉은 색과 녹색, 푸른색과 오렌지색을 적절히 배합하는 방법을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평가를 얻었다.
들라크루아는 1798년 4월 26일에 프랑스 샤랑통-생모리스에서 빅투아르 외벤과 샤를 들라크루아 사이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외벤은 왕실과 궁정에서 사용하는 가구를 만들었던 외벤 리즈너 가문의 후손이었고, 아버지는 정부 관리로서 보르도 지사로 재직하다 1805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따르면 들라크루아의 진짜 아버지는 정치가인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라고도 한다. 들라크루아는 17세가 될 때까지 고전을 공부하였고, 예술을 사랑하는 집안에서 음악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815년 그는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남작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제리코와 인연을 맺어 제리코의 작품 <메두사 호의 뗏목>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제리코를 대신해 작품을 그리면서 제리코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1822년 들라크루아는 살롱전에 <단테의 배>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그가 존경하는 옛 거장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채색법, 그리고 고전주의적인 조각의 인물 표현법이 적절히 결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명망 있던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는 그에 대해 천재적인 자질이 있다고 평했다. 그리고 그는 정치가이자 역사가로 프랑스 내무장관이 되었던 루이 티에르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들라크루아는 1824년 살롱전에 <키오스 섬의 학살>이라는 역사적 주제를 다룬 작품을 출품하면서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떠올랐다. 1820년에 발생한 그리스와 터키의 분쟁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화단을 지배하던 고전주의 작품들, 그중에서도 앵그르의 작품과 비교되면서 혹평을 받기도 했다. 1825년 들라크루아는 빅토르 위고와 함께 영국 여행을 떠났다. 그는 런던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괴테의 <파우스트> 등의 연극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았다. 이 영향으로 들라크루아는 바이런의 희곡 <마리노 팔리에로>에서 영감을 받아 <마리노 팔리에로 총독의 처형>을, 월터 스콧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아 <리에주 주교의 암살> 등의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파우스트』의 프랑스어 번역판에 삽입될 석판화도 제작했다. 이 시기 그는 영국에서의 폭넓은 작업 경험과 함께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와 존 컨스터블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표현법에만 갇혀 있지 않는 객관적인 작품활동을 했다.
1827년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화풍이 절정에 달한 작품인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이 작품은 앗시리아 왕 사루다나팔루스의 몰락을 주제로 한 바이런의 희곡 <사루다나팔루스>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으며, 격렬한 움직임과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가 넘쳐난다.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낭만주의 화가들로부터는 극찬을 받았다.
들라크루아는 1830년에 그의 대표작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작품을 완성하였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리프 왕정이 수립된 뒤 시민의 자유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열망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제적 법령포고에 반발해 파리 시민들이 항쟁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파리 시민들의 소요사태 중 가장 격렬했던 7월 28일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 정신의 상징으로 불렸으며, 1831년 살롱전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831년에 들라크루아는 그동안의 작품활동을 인정받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832년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로 갔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약 5개월을 지내면서 이국의 역사와 강렬하게 빛나는 투명한 아프리카의 태양에 크게 영감을 받았다. 귀국 후 그는 북아프리카를 주제로 수많은 크로키와 기록들을 남겼다. 들라크루아는 어린 시절부터 풍부한 인맥과 신사다운 품격, 냉철한 이성과 박식함을 지니고 있었다. 성장기의 훌륭한 인적 배경을 자산 삼아 그는 활발히 사교활동을 했다. 특히 여류소설가인 조르주 상드와 쇼팽과의 삼각관계는 좋은 우정과 애정으로 귀결되었다. 들라크루아는 1850년 이후부터 상로제에 있는 작업실이나 파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1863년 8월 13일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독신의 몸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실주의 풍자의 대가 - 오노레 도미에
도미에는 1830년부터 잡지에 정치 만화를 발표하여 한때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이후 40여 년간에 걸쳐 날카로운 풍자와 따뜻한 인간애가 담긴 걸작을 많이 남겼다. 만년에는 시력을 잃고 고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며 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는 19세기 프랑스 정치와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서민의 고단한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친 사회파 예술인이다. 그가 그린 4,000여 점에 이르는 석판화를 비롯한 방대한 작품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도미에는 180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가난한 유리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유리직공인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법률사무소 사원과 서점의 점원으로 돈벌이에 나서야 했던 그는 그만큼 일찍 현실의 냉혹함과 맞닥뜨려야 했다. 도미에는 알렉상드르 르누아르의 작업실에서 미술 공부를 했으며, 아카데미 쉬스에서 인체 데생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회화를 거의 독학으로 익혔다. 그러면서 친구로부터 석판화의 기법을 익혔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