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기업 인문학
박민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反기업 인문학
박민영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년 5월 / 355쪽 / 17,000원
정통 인문학 죽이기
학제 개편으로 인문학 파괴하기
‘인문학자들의 밥그릇 챙기기’라는 프레임: 나는 앞으로 기업 이익과 자기계발에 복무하는 인문학을 ‘기업 인문학’이라 부르고, 그것을 정통 인문학과 구별해 쓰고자 한다. 기업 인문서와 정통 인문서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업 인문학은 하나의 수단으로서 목적(생존, 출세, 성공, 경제적 이익)에 복무하지만, 정통 인문학은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한국에서 인문학 위기론이 처음으로 공식 제기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1996년 11월, 국공립대학 인문대 학장들이 제주도에 모여 “인문학이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인문학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배려와 지원을 촉구한 ‘인문학 제주 선언’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인문학 위기’를 주장하는 인문학자들의 일련의 선언들에 대한 주된 여론은 무관심과 냉소였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없어도 먹고사는 데 별로 지장이 없어서 그랬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류 언론들이 주도한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의 위기’라는 주장이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먹혀든 것이 무관심과 냉소를 더욱 촉발한 측면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인문학 관련 학과가 폐쇄되고 학생들이 줄어들고 취직도 안 되고 그래서 인문학 교수들이 궁지에 몰리니 ‘인문학 위기’ 운운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 밥그릇 챙기기’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의 위기’라는 프레임은 이중의 공격이었다. 하나는 문제를 먹고살기 힘들어진 인문학자들의 투덜거림으로 격하시키는 것, 또 하나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들이 자초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밥그릇 논쟁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의를 가장 저급한 차원으로 끌어내림과 동시에 그에 대한 진지한 담론 형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낳았다. 인문학 위기론이 인문학자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불과하다면 대중은 인문학 위기론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 프레임을 공유하는 공병호의 글을 보자. “다수의 소비자들이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은 궁극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그는 철저한 시장론자답게 인문학이 위기라면 그것은 시장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문제는 인문학자들에게 있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들도 경쟁하며 살고 있으니, 인문학이라고 해서 특별히 시장 밖에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는 친절하게도 인문학자들이 나아가야 할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해주었다. “국내의 인문학 관련 분야에서 계신 분들이 대중들이 필요로 하는 인문학 지식을 제공하는 데 너무 소홀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 심리학계의 걸출한 인물인 하버드대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나 전 시카고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얼마든지 자신의 전문 지식을 이용해서 사회에 가치를 제공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하워드 가드너는 『열정과 기질』, 『체인징 마인드』 등을 쓴 전형적인 기업 인문학자였다. 『몰입의 경영』, 『몰입의 즐거움』등을 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도 마찬가지다. 공병호의 말은 대중이 원하는 것이 기업 인문학이니, 살아남고 싶으면 그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했다. “누구든 타인에게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자들 역시 일련의 ‘지적 기업가’라고 생각하고 위기를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노골적인 투항 요구와 다름없었다. “누구든 타인에게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정통 인문학이 타인(사회)에게 가치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지만, ‘지적 기업가’ 운운하는 것은 평생 인문학을 연구해온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것은 인문학자들이 특별히 고고하게 대접받아야 하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인문학’이라는 것이 본디 이익을 논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대 학장들이 학부제 폐지를 요구한 이유: 2001년 국공립대학 인문대학협의회는 ‘2001 인문학 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학부제 및 모집 단위 광역화에 대한 폐지” 요구였다. 이 단체에서 그렇게 요구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학부제와 모집 단위 광역화가 인문학 기반 붕괴의 주범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학부제는 다학문적 연구 필요성과 학생들의 전공 선택권 확대를 명분으로 1995년(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제도였고, 모집 단위 광역화 역시 같은 취지로 1998년(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제도였다. 정부는 재정적 차등 지원을 통해 학부제와 모집 단위 광역화를 대학에 강요했다.
대학 입학 후 1년 동안 이것저것 다양하게 배워보고 나서 2학년 때 자기 적성에 맞는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무슨 문제가 있나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학과제에서 학부제 혹은 모집 단위 광역화로 개편한 것은 학문의 시장화,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 그 거대한 쓰나미의 시작이었다. ‘전공 선택권’이라는 말은 학생들의 학습권을 대폭 보장해주는 듯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그러나 학부제와 모집 단위 광역화는 결코 학생들을 위한 것도,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은 취직이 잘 되는, 소위 ‘인기학과’로 몰릴 수밖에 없는데, 그 인기학과 전공자가 되느냐 마느냐는 학점이 결정한다. 그런데 이 학점 경쟁이 장난이 아니다.
한양대학교 뉴스포털「한양뉴스」에는 학부제와 관련해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본교의 경우 안산캠퍼스 언론정보대학에서 1학년을 대상으로 전공희망학과를 조사한 결과 1지망으로 광고홍보학과를 선택한 학생은 91명이었으며 인원수 제한으로 인해 75명이 배정되어 언론학 23명, 정보사회학 32명과는 대조적으로 학과 선택의 편중이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본래 40명 정원이었던 학과가 광고홍보학과처럼 거의 2배가 늘어나면 전공교육이 내실화될 수 있을까? 전공자가 늘어나는 만큼 예산을 늘린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대학들은 전공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예산을 늘리지 않는다. 학부제를 실시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예산 절감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의는 대형화되고, 교수들은 학생들을 지도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러면 전공자가 줄어든 비인기학과는? 대학이 학생들 수가 적다는 이유로 예산을 삭감한다. 비정규직 교수 채용을 대폭 늘리고, 소형 강의는 전공에 해당되는 것이라도 폐강시킨다. 이것은 학습권 보장이 아니라 학습권 침탈이다. 또한 비인기학과는 구조 조정의 주된 타깃이 된다. 또 다른 문제는 학문간 서열화다. 아무튼 학부제와 모집 단위 광역화로 직격탄을 맞은 것은 기초과학과 인문학일 수밖에 없었다.
대학 공동체 붕괴와 인문학 붕괴: 학부제에는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이 있었다. 그것은 학생운동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학부제가 학생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인 학과 학생회를 조용히 무력화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들어 학생운동이 퇴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정원식 총리서리 계란 투척 사건을 기점으로 한 대대적인 언론 공세, 연세대학교 사태,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인한 민주-반민주 구도의 소멸, 외환위기로 인한 취업 대란 등을 꼽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일반인들이 잘 인식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어떤 것들보다 학생운동 몰락에 결정적으로 복무했음이 확인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학부제다. 학부제가 시행된 199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이 급속히 소멸해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학자의 위기: 세상의 모든 문제는 인간의 고통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인문학의 위기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자의 위기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문학이 인문학자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문학자 없는 인문학의 존립도 상상할 수 없다. 주된 주체인 인문학자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어떻게 인문학이 활성화될 수 있단 말인가. 인문학도 사람이 한다.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학자의 위기를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업 인문학의 탄생
좌파 지식인의 타협과 투항
문순태의 기업 인문학 옹호: 소설가 문순태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21세기 들어 인문학의 바람이 분 것은 삶의 가치관에 대한 자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물질주의 만능과 고도화된 과학기술로 인간성이 마비되자, 잠시 경쟁적 삶에 쉼표를 찍고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이 길이 과연 행복한 길인가’ 하는 반성의 순간부터 인문학적 삶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말이 맞다면,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인문학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 적지 않을 테니, 물질주의와 과학기술, 경쟁체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흐름이 조금이라도 생겼어야 옳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그런 흐름은 전혀 조성되지 않았다. 현실은 반대다.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물질주의, 과학기술 중심주의, 경쟁체제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인문학 열풍의 진원지가 기업이기 때문이다. 지금 유행하는 인문학은 ‘본격 인문학’이 아니라, 자본권력이 추동한 ‘기업 인문학’이다. 돈벌이에 복무하는 ‘기업 인문학’은 물질주의, 과학기술주의, 경쟁체제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적극 포용하고 추동한다.
문순태는 이런 말도 했다. “그동안 『해리포터』의 총 수익이 600조 원으로, 같은 기간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벌어들인 수익의 2배가 된다. 그래서 감성은 창조력인 동시에 돈이 된다.” 문순태가 아니라도, ‘인문학 열풍’에 대한 이런 식의 설명은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문순태 같은 사람에게서 이런 발언이 나온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순태는 진보적 문인 단체인 ‘한국작가회의’ 소속으로, 젊은 작가들의 존경을 받는 원로다. 그런 그가 이렇게 기업 인문학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그만큼 기업 인문학의 논리가 사회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신영복은 왜 CEO 인문학을 했을까?: 신영복은 많은 사람에게 ‘우리 시대의 스승이자 사표’로 존경받는다. 그러나 그런 그도 기업 인문학에서 자유롭지 않다. 성공회대학교 인문학습원 원장으로서 ‘CEO를 위한 인문학 과정’을 개설하고 강의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운 사람들로는 삼성전자 고문 이학수, 한화그룹 부회장 김연배, 넥솔 회장(전 대우자동차 회장) 김태구, LG인화원 원장 이병남, 하나금융지부 부사장 조봉한 등이 있다. 이 프로그램 강사들 중에는 진보적 인사로 알려져 있는 진중권도 있었고, 강헌, 임헌영, 유홍준도 있었다. 상상해보라. 진중권 같은 사람에게 인문학을 배우겠다고 ‘삼성 2인자’ 이학수 같은 사람이 앉아 있는 풍경을. 그 뜨악한 풍경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기업 인문학’이다. 기업 인문학은 자본가와 좌파 지식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 그뿐이 아니다. ‘CEO를 위한 인문학 과정’을 들은 이들 중에는 이재정(경기도 교육감)이나 이인영(국회의원) 같은 인사도 있었다. 이들이 재벌 임원들과 동석해 강의를 듣는다. 당연히 인적 교류도 생긴다.
언론에 보도된 것에 따르면 경위는 이렇다. 2006년 신영복의 성공회대학교에서 정년퇴임식 자리에 삼성그룹 부회장 이학수 등 몇몇 기업인이 참석했다. 참고로 이학수는 신영복과 고향(경남 밀양), 고교(부산상고) 동문 선후배 사이였다. 퇴임식이 끝난 후, 이학수가 후원금으로 2억 원을 쾌척했고, 그 외 다른 기업 인사들도 후원했다. 그렇게 ‘신영복 기금’이 조성되었고 이는 대학 발전기금으로 보태졌다. 신영복이 이 후원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CEO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영복이 CEO 인문학을 하게 된 계기를 설명할 뿐, 그 의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신영복이 자신의 의중을 드러낸 것은 《중앙SUNDAY》와 한 인터뷰가 유일하다. 내용은 이랬다. “1960~70년대가 블루칼라 시대, 80~90년대가 화이트칼라 시대, 2000년대가 CEO의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골드칼라 시대였다면, 이제 2010년을 필두로 한 새로운 10년은 휴먼칼라의 시대이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시점이다. 사회 주요 포스트에 있는 리더들이 문사철을 공부하면서 소통의 능력이 생기면 그게 바로 사회적 자산이 되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축이 블루칼라→화이트칼라→골드칼라로 변해 왔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의 흐름이다. 그 흐름이 어떻게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휴먼칼라 시대’로 갑자기 귀결되는지 알 수 없다. 혹 이것은 단지 ‘이제는 휴먼칼라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혹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당신의 당위적 바람을 담은 것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는 2006년 한국자원봉사대상 시상식 축사에서도 “인간적인 가치를 소중히 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이며 “앞으로 휴먼칼라의 시대가 반드시 와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CEO 인문학이 휴먼칼라의 시대의 도래에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진보의 외연 확장’이 아니라 ‘자본권력의 영토 확장’이다: 신영복은 삼성 사장단 회의에서 강의를 한 적도 있다. 물론 김상조, 김호기, 정승일 등도 강연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좌파의 외연 확장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렇게 보려면 강의 이후 삼성의 조직문화에 일말의 변화(노조를 허용했다거나 하청업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했다는 식의)라도 생겼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그런 지식인들도 불러서 이야기를 듣다니, 역시 일등 기업 삼성은 다르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다. 삼성이 저명한 좌파 지식인들을 불러 강의를 듣는 것은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에 대한 관리 차원에서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후한 강연료도 미끼가 된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삼성 사장단을 대상으로 강연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후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이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진보 지식인의 기업 인문학 참여는 ‘진보의 외연 확장’이 아니라, ‘자본권력의 영토 확장’으로 보는 것이 옳다.
체제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인문학: 인문학은 본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제도문물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 질문하고 비판하는 학문이다. 기업도 그 탐구의 대상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기업 인문학은 인문학이 기업 이익의 논리에 복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것은 두 겹의 오류다. 우선 특정한 목적에 인문학을 가두려는 것 자체가 오류다. 인문학은 자유로운 연구 대상 설정과 탐구를 본성으로 갖고 있다. 인문학을 특정한 목적에 가두는 것은 그 본성을 파괴한다. 또 하나 기업 인문학은 하고많은 목적 중에서도 ‘기업 이익’에 복무할 것을 강요한다.
인문학은 어떤 이익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은 본래 무용성을 본령으로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은 끊임없이 인문학의 유용성을 묻는다. 그것은 사실상 자본의 증식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고, 그에 복무하라는 요구다. 인문학이 특정 프레임, ‘인문학도 이윤 창출에 복무해야 한다’ 같은 자본의 명령에 포박되면, 그 폐해는 인문학자나 인문학도에 그치지 않는다. 특정 프레임에 갇힌 인문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 범인류적 차원에서 나쁜 영향을 미친다.
기업 인문학의 경제 담론
사회적 시장경제, 자본의 방패이자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