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 교수의 조선 산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출판사
신병주 교수의 조선 산책
신병주 지음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4월 / 312쪽 / 17,000원
왕, 부흥과 몰락 사이 외줄을 타다
조선판 탄핵과 반정, 쫓겨난 왕들의 최후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대통령의 모든 업무가 정지됐다. 조선시대에도 왕을 몰아내는 조선판 탄핵이 있었으니, 1506년의 중종반정과 1623년의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는 반정은 원래 중국의 역사서 『춘추공양전』의 ‘발란반정(撥亂反正, 어지러움을 제거하여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에서 나온 말로, 폭군을 몰아낸 후 왕통을 이을 가장 적합한 인물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의미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재위 1608~1623)이 폐위됐다. 조선 역사상 두 번의 반정이 일어났고, 반정으로 쫓겨난 두 명의 왕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연산군이야 검증된 폭군이니만큼 억울한 것이 없지만, 광해군의 폐위에 대해서는 현재에도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광해군은 초반의 개혁정치와 실리외교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지나치게 독선적으로 정국을 운영해 반대파 결집의 빌미를 제공했다.
광해군 후반 정국에 등장해 광해군을 혼군(昏君)으로 이끈 여인이 있었다. 바로 상궁 김개시로, 김개똥으로 불리기도 했고 『계축일기』에는 ‘가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장녹수나 장희빈처럼 후궁의 지위에서 왕의 판단을 흐리게 한 여인들과 달리 김개시는 상궁으로서 국정을 좌지우지한 인물이었다.
광해군과 김개시의 인연은 선조 때부터 시작된다. 실록은 “김 상궁은 이름이 개시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가 많았다. 춘궁(광해군)의 옛 시녀로서 왕비를 통해 나아가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인하여 비방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고 해 김 상궁이 용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비밀스러운 방책으로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김개시는 광해군의 최고 심복 이이첨과 교분을 맺게 되면서 권세가를 자유롭게 출입했다. 광해군은 1613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처형한 이후 반대세력에 대해 철저한 정치적 탄압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이이첨 중심의 대북 세력만이 광해군을 비호하는 상황이 되었다. 『계축일기』에는 가희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어 그녀가 늘 광해군의 의중에 맞추려 했음을 볼 수 있다. 김개시와 이이첨에 대해서는 비난 여론이 많았지만, 광해군은 ‘역적 토벌’의 전위부대인 이들을 깊이 신임했다.
광해군의 후원을 입은 김개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위로 감사(監司)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로부터 아래로 권관(權管)ㆍ찰방(察訪)에 이르기까지 천 냥, 백 냥 하는 식으로 모두 정해진 액수가 있어 값에 따라 선발하고 낙점도 또한 이런 액수로 정했다. 김 상궁이 붓을 잡고 마음대로 하니 왕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는 『속잡록』의 기록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김개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1623년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능양군(훗날의 인조)과 서인이 주도해 광해군을 축출한 것이었다. 반정의 명분은 크게 세 가지로,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전통의 우방국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친교를 맺은 외교정책, 무리한 궁궐 조성 사업을 통해 국가재정을 어렵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민생을 위한 개혁과 외교에서 역량을 발휘한 점을 고려하면 인조반정은 북인 정권에서 소외됐던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정변이라는 성격도 있다.
훈련대장까지 포섭한 반정군은 창덕궁으로 쉽게 입성을 했고, 반정군의 공격에 놀란 광해군은 내시에게 업혀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했지만 곧 체포됐다. 광해군은 폐주(廢主)를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운다는 인목대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15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광해군 정권 내내 국정을 농단한 김개시는 정작 마지막에는 광해군의 편이 되지 못했다. 반정군 측에 포섭돼 김자점 등에게서 뇌물을 받은 김개시는 여러 차례 반정을 알리는 상소를 받은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반정의 성공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1623년 3월 인조반정 직후 김개시는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처형됐다. 광해군 대 국정을 농단하고 최후에는 광해군을 배신한 김개시. 그는 새로운 정권에서도 제거대상 1호로 떠올랐던 것이다.
반정으로 축출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시대 내내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들의 이름에는 왕자 시절의 호칭인 ‘군(君)’만이 남아 있다. 두 왕의 실록도 ‘일기’로, 무덤 역시 왕릉의 명칭 대신에 ‘묘’라는 말로 격하됐다.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 대신에 소수의 측근에만 의존하는 권력자의 말로에 대한 역사적 심판의 준엄함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세종의 눈부신 용인술
역사 속 지도자 중에서 인재의 적절한 등용으로 시대적 과제를 달성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30여 년이 지난 즈음 왕위에 오른 세종, 그의 시대는 왕권과 신권의 갈등과 같은 초기의 정치적 시행착오를 수습하고 왕과 신하가 함께 머리를 짜내며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시켜야 할 과제가 대두된 시대였다. 세종은 조선이 나아갈 국정의 방향을 자주ㆍ민본ㆍ실용으로 삼았고, 기용할 수 있는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나갔다.
우리의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를 비롯하여 백성들을 위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의 농서와 의서 간행, 장영실의 발탁과 해시계, 자격루, 측우기 등의 각종 과학기구들의 발명, 박연으로 대표되는 궁중 음악의 정리 등 조선 건국 50여 년 만에 이룩한 세종 대의 찬란한 성과들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또한 북방 개척에도 힘을 기울여 4군 6진을 쌓아 압록강, 두만강으로 경계가 이루어진 오늘날 한반도의 영토를 확정하였고, 공법이라는 세법을 확정함에 있어서는 17만여 명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세종의 리더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고, ‘함께하는 정치’를 표방하였다. 지역과 신분을 막론하고 전국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며 이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최고의 인재들로 하여금 국가 정책을 만들게 한 것, 천민 출신의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은 세종의 포용적인 리더십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 소주ㆍ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비해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처럼 장영실의 아버지는 중국계 귀화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관기로서 장영실의 신분은 천민이다. 그러나 세종은 장영실의 과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파격적으로 관직까지 부여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능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세종의 신념은 확고했다. 세종은 장영실로 하여금 국가의 과학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했다. 이것은 간의와 일월정시의, 천평일구, 자격루 등의 발명품으로 이어졌다. 자격루가 발명되자 세종은 “이제 자격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했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리 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라면서 장영실에 대한 무한 신뢰를 나타냈다. 세종과 장영실의 환상적인 호흡은 15세기 천문 과학 분야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계적 수준의 국가가 되게 했다.
세종 리더십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함께하는 정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관이 집현전이다. 세종은 즉위 후 바로 집현전을 학문과 정책의 중심기구로 발전시켰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로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세종이 집현전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집현전에는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세종 스스로도 학문이 뛰어난 군주였지만 홀로 정책을 결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집현전과 같은 기구에서 배출된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였다. 집현전에서는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집현전 학자들에게는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임무도 동시에 부여하여 국가의 기둥으로 키워 나갔다.
집현전에서는 각종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이 편찬되어 세종 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였다. 집현전의 설치는 무엇보다 세종이 혼자만의 힘으로 국가의 정책 결정을 하지 않고 다수 인재들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국가의 정책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사가 만사의 근원’이라는 말은 세종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언이다. 세종 시대를 찬란하게 만들었던 인재 등용의 힘이 우리의 시대에도 적극 실현되기를 기대해본다.
시대의 위인을 조명하다
1636년 병자호란, 남한산성의 두 사람 김상헌과 최명길
1636년(인조 14년)의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화 〈남한산성〉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비록 380년 전의 역사이지만 국방이나 외교에 대한 적절한 대책 없이 무모하게 전쟁을 수행하다가 당한 치욕은 현재에도 시사점을 주는 바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수도를 심양에 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중원 장악의 기틀을 마련했다. 누루하치의 뒤를 이은 청 태종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명나라에 대한 총력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전 단계로 조선에 대한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왔다.
전통적으로 오랑캐라 멸시했던 여진족의 군주에게 사대(事大)하라는 요구는 국왕 인조를 비롯한 정치세력 모두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처사였다. 최명길 등 일부 신료들이 주화론(主和論)이라는 타협 방안을 제시했지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 김상헌 등의 목소리가 우세했고, 조선 조정은 숙명처럼 전쟁을 받아들였다. 조선은 청에 대한 강경 노선을 고수했지만. 청나라는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한 군사강국이었다.
1636년 11월 말 청 태종은 팔기의 군사가 집결한 심양에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총병력 12만 8,000여 명 가운데는 몽골인 3만 명과, 한족 2만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2월 2일 청군은 심양을 출발하여, 12월 8일 마부대가 이끄는 기병 6,000여 명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기마병을 중심으로 질풍같이 쳐들어 온 청군은 압록강을 넘은 지 5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별다른 방어 없이 우왕좌왕하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지만 청군의 선발대가 양화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피난길도 끊어져 버렸다. 인조 일행은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12월 15일 남한산성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남한산성을 둘러싼 청군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성안에는 1만 4,000여 명의 인원이 약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었다. 홍이포로 무장한 청군의 공세 속에 조선과 청군 사이에는 여러 차례의 협상이 오고 갔다. 특히,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청과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김상헌,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은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했지만, 결국 최명길의 옆에 있던 김상헌은 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찢어진 국서를 최명길이 다시 모아 붙이는 해프닝 속에서 항복 문서가 작성되었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찢은 국서를 다시 붙이면서 “대감의 나라를 위한 충성은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나 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이 국서를 또 찢으시면 나는 다시 붙이겠습니다.”라고 했다.
1637년 1월 30일 아침, 산성에서의 격론 끝에 인조는 항복을 주장하는 주화파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한삼성을 내려왔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는 조선 국왕 인조가 빨리 성밖으로 나올 것을 재촉했다. 참담하고도 비통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한 채로 인조는 삼전도(지금의 잠실 석촌호수 부근)로 향했다. 청 태종이 거만한 자세로 지켜보는 가운데서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 행해졌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군사의 호령에 따라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의 항복 의식을 마쳤다.
야사의 기록에는 당시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흥건히 맺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에 조선의 온 백성은 치를 떨고 분노했다. 이전까지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이었기에 국왕, 신하, 백성 모두가 참담한 패배의식에 빠졌다. 전쟁의 여파로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청나라 노예시장에 팔려가는 등 패전국의 아픔을 톡톡히 겪게 되었다.
인조의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됐지만, 남한산성에서 맞섰던 두 사람은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다시 만났다. 전쟁이 끝난 후 청에서는 척화파 대표 김상헌을 심양으로 보낼 것을 요구했고, 1640년 12월 심양으로 간 김상헌은 1645년 2월 석방될 때까지 억류됐다. 최명길은 명나라와 비밀리에 외교를 했다는 이유로 청에 압송돼 1642년 심양으로 끌려가 1643년 2월 남관의 감옥으로 이송됐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미 억류돼 있던 김상헌이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치열한 논리 대결을 펼쳤던 두 사람이 청의 심양 감옥에서 함께 갇히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당시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 시에는 서로 상대방을 인정했음이 나타난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변함없이 절개를 지킨 것에 존경의 뜻을 표시했고, 김상헌 역시 최명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을 위해 일관된 행동을 보인 것을 이해하게 됐다. 척화파와 주화파로 다른 정치노선을 걸었던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조선후기에는 극단으로 나타났다. 김상헌이 충절의 상징으로 존숭의 대상이 된 반면 최명길의 실리외교는 비난의 대상이 됐다. 최근에 이르러 명분보다 국가와 백성을 우선시한 최명길의 실리적 외교 수행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1636년의 병자호란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명분만 강조한 강경 외교가 얼마나 큰 우를 범하는지를 생생하게 기억시켜 줬다. 그리고 남한산성은 그 아픈 역사를 지켜본 공간이다. 남한산성은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됐다.
현재를 되새기게 하는 사건과 현장
태종과 신덕왕후 강씨 그 악연의 현장, 청계천 광통교
2005년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우리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청계천. 청계천은 이제 도시민들에게 휴식과 안정을 주는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다. 청계천의 연원은 한양의 도시 정비 과정에서 새롭게 준설한 인공하천에서 출발한다. 한양이라는 도시는 전통시대부터 홍수에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지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들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서울 도심은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는 경우가 많았다.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한 태종은 한양이 지닌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1406년 1월 처음 청계천 공사를 실시하여, 1412년 공사의 완성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청계천’이라는 용어 대신에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개천(開川)’이라고 불렀다. 태종 대 ‘천거(川渠)를 수리하여 열었다’는 뜻으로 ‘개천’이라 불렸고, 이후 개천이라는 말은 하천과 통용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