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식 프라임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사회 지식 프라임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년 3월 / 368쪽 / 16,000원
왜 우리는 때로 자유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가? -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1941)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독일인들이 혁명으로 세운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을 붕괴시킨 나치의 파시즘을 지지하며 사실상 자유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프롬은 이 책을 출간하고 25년 후 “근대인은 아직도 모든 종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도록 갈망되고 있거나 유혹당하고 있다. 아니면 기계 속의 하나의 작은 톱니바퀴로 그 자신을 변화시켜 자유를 상실하고 있으며, 잘 먹고 잘 입고 있긴 하나 자유인이 아닌 자동인형이 되고 말았다.”라고 주장했다.
프롬은 문제의 원인이 대중의 ‘권위주의적 성격(authoritarian character)’에 있다고 보았다. 우리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보호와 권위에 의존하는 삶을 살다가 자립할 때에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하면 오히려 자유가 부담스러워진다. 이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새로운 보호와 권위를 찾게 되는데, 이렇듯 자유를 피해 새로운 권위에 기대려는 심리 상태가 바로 ‘권위주의적 성격’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개인적으로 권위주의를 내재화한 것으로, 그 핵심은 삶이 자신 중심이 아니라 그밖에 있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확신이다. 프롬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힘에 굴종하는 데에 있다”며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나오는 용기란 본질적으로 운명 또는 그의 상관이나 지도자가 그에게 요구한 것을 견뎌내는 용기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왜 쉽게 권위에 복종하는 걸까? 프롬은 스스로 국가나 교회 혹은 일반적인 여론에 복종하고 있는 동안에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며, 복종을 통해 자신이 경배하는 힘의 일부가 되고, 그리하여 스스로 강해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그 힘이 자신을 대신해서 결정해주며 자신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 힘이 자신을 지켜주기 때문에 결코 외로울 수 없으며, 이 권위가 자신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며, 설사 죄를 짓는다 해도 이에 대한 벌은 단지 자신이 전지전능한 그 힘에게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건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자주 안전과 평안을 위해 권위에 굴복하고 사회에 동조하면서 사실상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거나 유예하는 유혹을 받는 경향이 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유란 책임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조지 버나드쇼의 말을 음미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왜 2030세대는 남북 단일팀 구성에 반대했는가? - 공정으로서의 정의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과 관련하여 2018년 1월 11일 국회의장실ㆍSBS가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72.2퍼센트가 ‘단일팀을 무리해서 구성할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 핵심 지지층인 20~30대가 가장 크게 반발했다. 19~29세 응답자 중 82.2퍼센트, 30~39세 응답자 중 82.6퍼센트가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3~4명이 나마 한국 선수의 출전을 가로막는 단일팀 구성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한 시민은 “남북 단일팀은 소수의 인권을 희생해 대의를 이루겠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기도 했다.
이는 뜻밖의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공정과 정의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핵심 지지층에서 공정과 정의의 이름으로 비판을 받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1990년대 초반 탁구와 축구 단일팀이 구성될 때에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것과 비교해볼 때 큰 변화였다. 정부여당 쪽에서 나온 “여자 아이스하키팀은 메달권 밖에 있다.”거나 “선수 개인 욕망 넘어 역사 만든다는 자부심 가져달라.”와 같은 발언 들이 결코 해선 안 될 말로 여겨진 것도 과거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그간 누적된 북한에 대한 불신도 주요 이유였겠지만, 공정과 정의에 대한 감각이 그만큼 예민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2030세대는 10대 시절 교육 지옥을 거쳐 이제 ‘취업 지옥’과 ‘주거 지옥’에 직면해 ‘헬조선’을 외칠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이 과연 ‘지옥과 비견될 정도로 살기 나쁜 나라’인 헬조선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겠지만, 2030세대가 과거 그 어떤 세대보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갈증이 심해진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과연 남북 단일팀은 ‘전체주의적 발상’인가? 그렇게까지 말하긴 어렵겠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발상’인 건 분명해 보인다.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스(1921~2002)는 1971년에 출간한 『정의론』에서 공리주의가 다수의 행복이라는 명목 아래 소수의 행복을 희생시킨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를 제시했다. 그는 책 첫머리에서 “사상 체계의 제1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제도의 제1덕목이다.”라고 단언했다.
남북 단일팀 구성과 관련해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올림픽 출전을 위해 모든 걸 바쳐왔음에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 꿈이 박탈당해야만 하는 선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 선수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갈등 상황에서 무엇이 공평한지를 평가할 때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게 어렵거나 번거롭다면 아예 그 어떤 입장도 갖지 않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가상의 세계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게 바로 롤스의 제안이다. 그런 원초적 입장을 갖는 데에 필요한 건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이다. 무지의 장막은 롤스가 자신의 입장이나 역할을 배제한 채 무엇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상상해보라는 의미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무지의 장막이 쳐진 상태에서 사람들은 누구도 상대의 능력, 재산, 신분, 성(gender) 등의 사회적 조건을 알 수 없다. 롤스는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떤 계층에 특별히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도록 조화로운 사회계약을 체결할 것이라며, 그렇게 합의되는 일련의 법칙이 정의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롤스의 정의관은 이른바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롤스는 “법과 기준이 공적으로 인정된 기준에서 크게 일탈할 때는 그 사회의 정의 관념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을 정당화했다. 그는 시민 불복종을 “일반적으로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화를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로 정의했는데, 이는 다수자의 정의감에 호소하면서 다수자들이 참여자들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만들어 부정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롤스가 『정치적 자유주의』(1993)에서 잘 지적했듯이, “갈등이 더욱 깊어질수록 이 갈등의 뿌리에 관한 분명하고 정리된 견해를 얻기 위하여 추상의 수준을 높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 최소한의 소통이라도 가능해지니까 말이다.
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 능력주의
“오늘의 혁명 이데올로기는 내일의 반동 이데올로기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걸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1915~2002)이 1958년에 출간한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Meritocracy)』이라는 책에서 귀족주의의 반대말로 만들어낸 것이지만,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것은 17~18세기의 시민혁명 이후 존재해온 착한 이데올로기였다.
영의 책은 특히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으면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인들은 능력주의를 대학 교육은 물론 아메리칸 드림의 이론적 기반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미국에선 능력주의자가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공정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차별의 피해자를 게으른 사람으로 비난할 수 있는 논거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의해 결정되는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학력과 학벌의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전의 귀족주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한국은 미국 못지않게 능력주의를 예찬해온 나라인데,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압축 성장의 동력은 바로 능력주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슬로건이 전 국민의 가훈으로 받아들여진 가운데 능력이 오직 학력ㆍ학벌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평가되면서 전 국민이 뜨거운 교육열을 보여 오지 않았던가. 한국의 발전이 과연 그런 교육열 덕분이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긴 하지만,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건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이 발전에 친화적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고성장의 시대가 끝나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고, 개천에서 난 용들의 기득권 집단화가 공고해지면서 학력ㆍ학벌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가족의 능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능력주의는 변형된 세습적 귀족주의로 되돌아가고 말았지만 반동으로 전락한 능력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혁명 이데올로기는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과도기의 상황에서 큰 사회적 위기와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과도한 임금 격차는 정의롭지 못하다. 정규직 노동자도 이 총론엔 공감하지만 각론으 로 들어가 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가 자신의 조직에서 이루어질 경우엔 반발한다. 그들의 반발은 공정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정규직이 되기 위한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피땀 어린 노력을 기울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능력을 보이지 못한 사람들이 정규직이 된다거나 자신의 임금을 희생으로 해서 임금을 더 받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논리다.
그런 반발을 집단 이기주의로 비난할 수 있을까? 문제의 핵심은 잘못된 게임의 법칙인데, 그 게임의 법칙에 충실했던 사람에게 갑자기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게임의 법칙을 제시하면서 수용하라고 하면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건 문제에 접근하는 자세와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고성장을 전제로 한 능력주의의 틀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데, 이 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하며 이거야말로 범국민적 공론화 작업이 필요한 사안이다.
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은 ‘잔혹 동시’를 썼을까? - 구조적 폭력
“고양이는 쥐를 잡아 발톱으로 움켜쥐었다가 결국 죽일 때는 폭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때는 다른 요소가 나타난다. 고양이는 쥐를 얼마쯤은 도망치게 내버려두기도 하고 쥐에게서 등을 돌리기까지 한다. 이때는 쥐가 폭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쥐가 고양이의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으며 쥐는 다시 고양이에게 잡힐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쥐가 그 테두리를 뛰쳐나오면 고양이의 권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잡힐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그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불가리아 출신의 노벨문학상(1981) 작가인 엘리아스 카네티가 1960년에 출간한 『군중과 권력』에서 “폭력과 권력의 구분은 고양이와 쥐의 관계를 가지고 매우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권력은 언제든지 폭력으로 변할 수 있는 잠재적 폭력이라는 점을 잘 말해준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정치학자 셸던 월린(1922-2015)은 “권력의 본질적인 핵심은 폭력이며 권력의 행사는 종종 누군가의 신체나 재산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는 원초적인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권력은 사회구조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사회구조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다면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게 바로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다. 우리는 폭력이라고 하면 개인들 간의 주먹다짐이나 범죄, 테러, 사회 폭동 등에서 나타나는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가해 행위만을 연상하지만, 그게 폭력의 전부는 아니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오 늘도 수많은 직장인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이유로 갑질을 견뎌내고 또 그 원리에 따라 갑질을 하고 있다. 친구들을 이기기 위해 전쟁하듯이 공부에 임해야만 하는 학생들의 고통은 어떤가. 이런 게 바로 구조적 폭력이다.
학벌 서열 경쟁이 치열한 우리나라에서 학생은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장원순은 2015년에 발표한 「구조적 폭력 에 대응하는 인권교육 접근법」이라는 논문에서 그해에 사회적 논란 의 대상이 된 이른바 ‘잔혹 동시’ 사건을 인권 교육의 사례로 분석한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쓴 동시 <학원가기 싫은 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원가기 싫은 날 /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 이렇게 / 엄마를 씹어 먹어 / 삶아먹고 구워먹어 / 눈깔을 파먹어 / 이빨을 다 뽑아버려 / 머리채를 쥐어뜯어 /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 눈물을 흘리면 핥아먹어 /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 가장 고통스럽게.”
이 동시가 출판되자 언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표현이 너무 잔혹하다며 출판사, 아이와 부모를 비판했고, 결국 출판사는 그 시가 포함된 시집을 전량 회수하여 폐기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 장원순은 “한국 사회의 구조와 제도라는 맥락에서 이 사건을 다시 바라보면 동시 속에 표현된 잔혹함 외에 또 다른 잔혹함, 즉 구조적 폭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아이들을 끝없이 학원으로 내모는 교육 구조이다.”고 말한다. 즉, 아이들은 동시 속에 나타난 직접적 폭력에 상응하는, 아니 이보다 더한 폭력을 교육 구조에서 당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어 장원순은 “아이가 잔혹하게 죽이고 싶은 것은 정말 어머니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시를 문자적으로만 읽는다면 아이가 죽이고 싶은 것은 어머니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이가 죽이고 싶도록 미운 것은 어머니가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를 통해 움직이는 우리 사회의 교육 구조이다. 단지 아이는 그것을 볼 수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는 그 대리자인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에게 교육 구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게 하고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어쩔 수 없어 보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한 길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 이를 개인주의적으로 접근하면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이를 사회구조적으로 바라보면 너무 많은 이들이 피해자가 되고 실패자가 된다.
구조적 폭력은 간접성ㆍ비가시성ㆍ극적 효과 부재ㆍ비의도성으로 말미암아 대다수 사람에게서 분노를 자아내기 어려운데, 이 ‘잔혹 동시’ 사건이야말로 그걸 잘 입증해준 사례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어린 아이가 어떻게 그런 잔혹한 동시를 쓸 수 있느냐?”며 펄펄 뛰었지만, ‘학원가기 싫은 날’에 그 아이가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구조적 폭력엔 눈길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이런 구조적 폭력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한 사회의 인권 수준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이젠 우리 사회의 서열 문화를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를 외치며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각자도생적 투쟁이 무조건 나쁘기만 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고도성장이 끝난 오늘날엔 한국인 대다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를 옥죄는 구조적 폭력을 단기간에 끝장낼 수는 없을망정 그걸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굳은 의지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