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의학 콘서트
이문필·강선주 외 지음 | 빅북
한 권으로 읽는 의학 콘서트
이문필ㆍ강선주 외 편저
빅북 / 2018년 1월 / 528쪽 / 25,000원
히포크라테스 학파
‘히포크라테스’는 수많은 관념과 행위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플라톤은 그를 ‘위인’이라 칭했으며 중세에 이르러 ‘의학의 아버지’로 추앙되면서 의학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굳어졌다. 히포크라테스가 세상을 떠난 후 1백여 년에 걸쳐 그의 필기와 저술을 모아 편찬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프톨레마이오(Ptolemy) 국왕은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기원전 3세기 말엽에 70여 편에 달하는 문헌을 집대성하기도 했다. 이곳의 학자들은 히포크라테스의 저술로 판단되는 것이면 모조리 수집할 만큼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 전집 Corpus Hippocraticum』에 나오는 그의 저술 가운데는 히포크라테스의 제자들의 저술이 혼재해 있어 진위를 분별하기 어렵다. 후에 히포크라테스의 저술은 20여 권이 채 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는 해부생리학을 비롯해 섭생법, 병리, 치료법, 내과, 외과, 안과, 부인과, 소아과, 진단, 예후(豫後: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고 병세 및 병이 나은 후의 경과를 전망하는 것), 약 조제 등의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다. <선서>, <잠언(箴言)>, <의사론>, <고대의학론>, <의술규칙>, <인체부위론>, <물, 공기, 환경에 대하여>, <해부학론>, <심장론>, <예후론>, 〈신성병(神聖病)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질병에 대한 관점을 파악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인체의 생리과정을 일부가 아닌 전체로 파악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은 몸 전체에서 시작된다. … 인체의 특정 부위가 이에 반응하면서 또 다른 부위의 질병을 발생시킨다. 일례로 허리 부위의 통증은 두통을 유발하며 두통은 근육통과 복통을 일으키게 된다. … 인체 각 부위는 서로 연관성을 띠고 있다. … 인체에 발생하는 모든 변화는 각 부위로 신속하게 전달된다.”라고 설명했다. 눈에 입은 상처 하나가 두통을 일으키거나 몸 전체에 해를 줄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을 관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병의 증상을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 환자의 소변을 맛보기도 하고 허파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기도 했으며 호흡, 안색 등 표면적인 증상을 체크했다. 그는 중풍의 발생 연령대가 40~60세이며 황달은 간경화로 발병하기 때문에 향후 치료가 어렵다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사람은 임종 전에 손톱이 검게 변하고 손발이 차가워지며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귀가 차가워지고 오므라들며 눈앞이 몽롱해진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해놓은 사망 직전 인간의 얼굴을 후대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의 얼굴(Hippocratic face)’이라고 칭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소변, 허파, 복부 등의 진단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또한 늑막염의 증상에 대해 “늑막염은 허파와 늑골이 서로 달라붙어 기침을 유발하며 흉부에 심한 통증이 생기는데 귀를 대고 들어보면 가죽을 서로 비비는 소리가 들린다.”고 설명했다. 특히 요도결석은 불결한 물을 마셔서 생기는 병으로 요도에 이물질이 점점 쌓이면서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며 결국 요도를 막아 소변이 잘 나오지 않게 된다. 히포크라테스가 제시한 요도결석 치료방법은 근ㆍ현대과학 수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히포크라테스는 ‘신성병’ 같은 것은 없다고 못 박았으며 모든 질병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질병이 진행되는 과정을 관찰해 병은 고통, 투쟁, 해소 등의 3단계로 진행된다고 밝혔다. 병에 걸리면 먼저 고통이 수반되고 그다음은 몸과 병마와의 투쟁이 벌어지는데, 만약 몸이 이기면 병마는 사라지고 병마가 이기면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몸의 자연치유 능력을 굳게 믿었다. 그의 저서에도 “대자연이 바로 의사이다”, “대자연은 스스로의 치유법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 등 자연치유에 대한 믿음을 토로했다. 의사의 역할은 인체의 자연치유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의사는 자연의 조수일 뿐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주로 식이요법, 공기욕, 안마, 해수욕, 사혈요법, 부항 등의 치료방법을 사용했다. 약은 주로 설사, 진정제 등에 사용했으며 약품의 종류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문집에는 조속(藻粟), 천선자(天仙子: 미치광이풀의 씨로 치통 및 외과의 마취제로 쓰이며, 독성이 강함), 꽃무릇 (Cluster Amaryllis: 백합목 수선화과의 구근식물), 갈매나무(갈매나뭇과의 낙엽 활엽 관목으로 열매는 약용하고 나무껍질은 염료로 쓰임) 등 수백 종의 약용식물이 기록되어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유행병론>에서 의료행위를 질병, 환자 그리고 의사 사이에서 일어나는 행위로 규정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히포크라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질병은 마귀의 조화이며 의사는 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환자는 믿음이 있어야 질병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치료의식 또한 기이하기 짝이 없었으며 질병은 수도원 수도사들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히포크라테스는 환자들의 병력을 꼼꼼히 기록해 놓아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일례로 후두 부위에 병이 생긴 한 여성 환자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했다. “환자의 통증은 혀끝에서 시작되었으며 발음이 모호하고 혓바닥이 붉고 말라 있다. 첫날은 오한이 들었다가 열이 났으며 둘째 날과 셋째 날은 심한 오한과 급성 발열 증상에 시달렸으며 경흉(頸胸) 양쪽이 붓고 팔다리가 창백하게 변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먹은 음식을 삼키지 못해 콧구멍으로 다시 흘러나왔으며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넷째 날은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다섯째 날에 사망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히포크라테스가 병의 실체를 얼마나 생생하게 파악하고 분석했는지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폐결핵, 발진티푸스 유행성 이하선염(볼거리), 말라리아 등 많은 질병에 대해서도 수준 높은 처방을 선보였다. <유행병론>에 소개된 유행성 이하선염의 임상 경험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열이 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양성이었지만 일부는 코피를 흘렸다. 사망자는 없었다. 이하선(귀밑샘)이 부어오르면서 발병하기 시작했는데 한쪽만 부어오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양쪽이 함께 부어올랐다. 체온은 대개 정상이었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부는 경미한 발열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하선의 붓기가 가라앉고 나면 특별한 후유증이 없었으며 고름이 생기는 경우도 없었다. 이에 반해 입병은 붓기 시작하면 바로 고름이 맺혔다. 부어오른 부위는 물렀지만 넓게 분포했으며 점점 더 확산되며 붓지 않은 부위에 통증과 염증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질병은 다 나은 후에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주로 아동, 청년에게 많이 발병했으며 성인 가운데 처음 발병한 사례도 있었는데 특히 체조 훈련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났다. 여성은 이 병에 걸린 사례가 많지 않았다. 병에 걸리면 마른기침을 하고 목이 쉬곤 했다. 발병 후에 고환 양쪽, 또는 한쪽이 부어 통증을 일으키는 사례도 있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의 ‘예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훌륭한 의사라면 병의 경과와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병의 증상에 따라 합당한 처방을 하는 것은 물론 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진행 정도를 예견해 향후 발생할지 모르는 복잡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야 했다. ‘예후’의 개념 역시 히포크라테스가 처음 제기한 것으로 현대 의학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예후’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일이라도 꼼꼼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히포크라테스의 해부생리학 이론은 미흡한 부분이 많고 정확도도 떨어졌다. 당시는 종교의 영향으로 인체 해부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는 남몰래 인체 해부를 시도해 인체구조에 관한 지식을 익혔다. 그의 외과 저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머리에 난 상처>에는 머리 부위에 난 상처를 꿰매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수술을 택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는 손톱이 길어서는 안 되며 평소에 손가락을 기민하게 움직이는 훈련을 하도록 강조했다. 기술이 정교해야 함은 물론 민첩하고 우아하게 이뤄져야 하고 환자의 고통을 최대한 경감시키도록 했다. 또한 수술에 함께 참여하는 간호사에게 환자의 수술 부위를 완전히 드러내도록 당부했으며 차분한 환경에서 환자가 편안한 자세로 수술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히포크라테스가 기록한 외과의사의 수술 도구로는 랜싯(lancet: 세모날, 양날의 끝이 뾰족한 의료용 칼)을 비롯한 각종 수술용 칼, 아연 또는 동으로 제조한 소식자(체내에 삽입하는 대롱 모양의 기구), 날이 직선 또는 곡선으로 된 칼, 두개골 수술용 관상톱, 치질을 불로 태우는 도구, 파이프형 내시경, 발치(拔齒)용 주사기와 핀셋 등이 있다.
그는 젊은 의사들에게 미지의 도시에 도착하면 우선 그 도시의 기후와 토양, 수질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방식을 유심히 살펴보도록 당부했다. 의사의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도시의 생활환경을 파악하고 있어야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기, 물, 환경에 대하여>라는 그의 저서에는, 외부환경이 인체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와 인종별로 서로 다른 체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책의 내용을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사는 현지의 계절적 특징, 바람, 냉기, 기온의 변화, 지역별 물의 맛과 체내에 끼치는 영향, 주민들의 생활방식, 기호, 음식, 운동 여부, 기질 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지역적 특징을 지닌 질병에 대처해 올바른 치료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사를 양성하면서 그는 특히 의사들의 윤리의식을 매우 중시했다.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동등한 기준으로 환자를 대하도록 했으며 이 고귀한 정신은 어둠의 시대에 갇혀 있던 의학에 품위를 불어넣었다.
“의사는 건강한 신체와 단정한 외모를 지녀야 한다.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돌볼 자격이 없다. 때와 장소를 가려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생명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그는 비로소 의사로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의사는 반드시 신중하고 성실하게 행동해야 하며 성실한 사람과 교제해야 한다. 또한 충동적이고 다급해 보여서는 안 되며 진중하고 온화하게 보여야 한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도 금물이다.” - 히포크라테스의 <의사론>에서
<잠언>이란 제목의 논문에서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기회는 얻기 어렵고 실험은 위험이 따르며 결단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등의 격언이 소개되어 있다. 이 말은 실천이 없는 학설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폭식은 몸을 상하게 한다”, “자연에 희망을 걸어라” 등의 말은 지금까지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잠언>은 6세기 무렵 라틴어로 번역되어 13세기 중엽에는 서유럽 중상류층 이상 가정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히포크라테스의 교의는 의학의 길과 방향을 전면적으로 바꿔 놓았다. 의술이 개개인의 생활 속에 깊게 파고든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종교’가 아닌 ‘인간’의 기반 위에서 새로 정립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혁명적인 개념은 수백 년 동안이나 경시를 받아왔다. 오히려 현대 의학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의 깊이 있는 내용과 시대적 색채, 역동성 등은 지금까지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체 해부의 서막
우리는 인체를 구성하는 뼈, 근육, 심장, 간, 비장, 허파 등에 대해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신체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메스와 나누는 대화, 그것이 바로 ‘인체 해부학’이다. 해부학은 의학의 기본으로 건축설계사의 설계도면과 같은 존재이다.
기원전 2800년 전, 이집트의 상형문자에는 당시 미라를 제작할 때 내장은 해부해서 처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단편적인 형태이긴 했지만 그때부터 인류는 이미 초보적인 해부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대에는 종교의 영향으로 시체 해부가 금지되었다. 해부는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힌두교는 시체를 접촉하는 것조차 교리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 교리를 어기면 바로 종단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 때문에 동물의 내장과 부패한 동물의 시체만 가지고 해부학을 연구했으므로 그 성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갈레노스는 동물 해부에서 발견한 사실을 그대로 인체에 적용했다. 따라서 그의 학설 가운데는 실제 인체의 구조와 다른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중세 의학사에서 ‘원숭이 해부학자’로 불린 갈레노스는 오랜 시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의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진보적인 의사들(이 가운데는 신부, 일반 신도들도 있었다)은 교회의 속박에 울분을 터뜨렸다. 《성경》 어디에도 시체 해부가 종교적 신앙에 위배된다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에 대학이 발전하면서 볼로냐, 파도바, 살레노르 등이 의학교육의 메타로 떠올랐다. 교회가 대학의 인체 해부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지만 최초의 대학 내 인체 해부실은 종교의 교리가 가장 엄격했던 이탈리아에 처음 등장했다. 그 뒤를 이어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의 의학교에서도 이탈리아를 모방한 해부학이 속속 개설되었다.
후에 베살리우스가 현대 인체 해부학을 확립한 뒤부터 대학마다 ‘해부실’을 설치한다고 법석을 떨게 되었다. 일부 급진적인 의학자들은 실제 인체 해부 시범을 보이며 해부학 지식을 전수하기도 했다. 16세기 해부학 강의를 받은 한 의학도가 당시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해부실은 수많은 의학도와 일반 시민, 젊은 여성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또한 수도사들도 자리에 앉아 교수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며 인체 해부의 전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해부 첫날, 복부의 내장 해부를 시작으로 둘째 날은 흉부의 장기, 셋째 날은 두개골 내부, 넷째 날은 사지의 근육, 혈관 신경, 뼈, 척추 등이 차례로 해부되었다. 일반인들은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해부과정을 볼 수 있었고 인체 생식기 등의 해부를 참관할 경우 추가비용을 내야 했다.”
그러나 해부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시체 확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정부는 해부학이 사망자의 사인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14세기 중엽부터 사인이 불분명한 사망자가 발생하면 법관은 대학의 외과의사에게 검시를 요청했다.
법관이 의사들의 검시결과를 점차 신뢰하게 되면서 1526년 뷔르츠부르크 법원은 법정에 참여해 검시를 담당하는 의사들에게 시체 한 구당 20페니의 보수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카를 5세는 독일 최초의 형사ㆍ형사소송법인 ‘형사법’을 제정해 의사들이 상해나 사인을 검사하는 데 협조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폭력으로 상해를 입었거나 사인이 불분명한 사건에서 해부는 필수적인 조사과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당시는 해부용 시체가 늘 부족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빙자한 살인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828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게리 부부가 그들이 묵고 있던 여관에서 혈흔과 낯선 사람의 시체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이 의사와 함께 도착했을 때는 시체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들은 곧 인근 해부학교의 교수 로버트 녹스(Robert Knox)를 떠올렸다. 그는 부족한 해부학용 시체를 금품으로 사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해부실로 들어가서 시체를 보관하는 지하실의 문을 열었을 때 게리 부부는 자신들이 보았던 시체를 찾아냈다. 범인은 바로 여관주인이었다. 그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여관에 투숙한 손님을 죽인 후 팔아넘겼던 것이다. 또한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져 더욱 충격을 안겨줬다. 이 사건으로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동안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여관주인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 각국은 해부학 관련법을 제정하기 위한 토론회를 연거푸 개최했다. 그리고 1889년 최초의 해부학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 조항에는 “자살한 자, 교수형에 처한 죄수, 사망 후 시체를 수습할 가족이 없는 죄수, 고아, 신원불명의 사망자 등의 범위 내에서 해부학 연구를 추진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