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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고독

안용태 지음 | 문학테라피



유쾌한 고독

안용태 지음

문학테라피 / 2018년 2월 / 184쪽 / 13,800원





유쾌한 고독



고독을 피하면 불행을 만난다

드라마 같은 멋진 인생을 원하지만 현실을 그냥 별 볼 일 없는 사람에 불과할 때, 볼품없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큼 외로운 일이 또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곤 한다. 간절히 원하는 일에 실패하거나 남들처럼 살지 못한다는 생각에 빠질 때 우리는 존재 전체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고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내가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이제껏 소중하다고 생각된 모든 것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그것을 위해 애써온 나 자신이 허망하다. 이러한 허무함은 어느 날 갑자기 슬그머니 찾아와 삶 전체를 낯설게 만든다. 거대한 세상을 실감할 때면 그 앞의 나 자신이 하찮게 느껴진다.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갈 것이다. 가장 소중해야 할 내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은 인간을 매우 쓸쓸하게 만든다.

자신의 삶이 불만족스러운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신시아이다. 이제 서른두 살이 된 신시아는 찰리와 세 번째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저녁, 신시아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왜 다시 결혼하고 싶은지. 일단 타자수라는 자신의 직업이 보잘것없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나이도 서른두 살이다. 빨리 결혼하지 않으면 너무 늦을지도 몰랐다. 마음이 급한데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신시아는 결혼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았다. 찰리와 결혼하면 꽃이 만발한 단독 주택에서 살 테고, 아이가 생긴다면 지긋지긋한 직장도 그만둘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이런 식의 결혼은 더 큰 불행만 가져올 뿐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그녀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번이나 결혼했지만, 누구를 만나도 형태만 다를 뿐 불행은 반복됐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을 ‘비본래적 삶’이라고 말했다. 비본래적 삶이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고, 남들이 결혼하니까 나도 하는 식이다. 신시아에게 타인의 삶은 참고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멋져 보이는 이상적인 답안을 꿈꾸고 그대로 실현하고자 한다. 자기 삶의 주인도 못 되고 남들처럼 살지도 못한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볼품없고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본래의 자신을 가린 채, 남들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비본래적 삶, 혹은 가짜 인생이다.

종종 사람들은 자기의 현실을 직면하기보다는 남에게 기대서라도 도망치길 원한다. 지금 당장 닥친 상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선택한다. 그녀는 미래를 두려워하지만, 그 실체를 대면하느니 생각하지 않기를 택한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물었을 때 나올 결과를 겁내는지도 모른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 결과에 따른 불안 또한 감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불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적당히 묻어가며 산다면 우리는 생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서도 나의 선택을 내릴 수 없다.

악몽을 꿔서 불안한 게 아니라 불안하니까 악몽을 꾼다

불안은 인간에게 본질과도 같은 감정 중 하나이다. 왜 항상 불안에 빠지게 되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하이데거는 이를 두고 ‘피투성(被投性)’이라 불렀다. 피투성이란 우리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냥 세계 속으로 던져졌다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세계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아무리 노력해도 취직이 안 돼서 불안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자신의 삶을 원망한다. 왜 하필 이런 시대에, 이런 환경에서 태어났을까? 하지만 이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런 세상에 던져졌을 뿐이다.

인간은 어떤 답도 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이기에 주어진 삶을 억지로 살아야 하는 듯한 막막함에 처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행위나 가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것도, 풀어나갈 수 있는 것도 그 자신뿐이다. 그러나 구한다고 답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때 불안이라는 감정은 한 가지 실마리를 던져준다.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불안만이, 신앙의 도움을 입음으로써, 절대적으로 교육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유한한 목적을 소멸시키며 또 유한한 목적들의 모든 속임수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불안에 의해 교육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가능성에 의해 교육을 받는 것이며, 오로지 가능성에 의해 교육을 받는 사람만이 자신의 무한성에 따라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성은 모든 범주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불안은 새로운 시작의 씨앗이자 인간에게 주어진 위대한 선물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할 것만 같은 불안감은 궁극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불안은 자기 존재에 대한 떨림이다. 그 떨림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내 인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언제까지 가짜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언제까지 세상의 가치에 따라야 하는지, 진정한 자기 자신이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피투성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인간은 불안을 느낄 때마다 동시에 이 현실에서 절대로 도망치지 못함을 깨닫는다. 탄생도 죽음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다시금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이를 두고 ‘기투(企投)’라고 부른다. 나 자신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라면, 나 스스로 목적을 가지고 다시금 나를 내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새롭게 내던질 수 있는 기투성의 자유이다.

신시아는 몇 번이고 다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꾸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나에 대한 불안은 타인을 통해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나를 책임질 수 없다는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그녀는 텅 빈 주방에 앉아 지독한 고독과 함께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신시아가 어떤 삶을 선택할지, 그 상상은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또다시 신시아가 지금의 상황을 회피하고 타협하려 든다면, 잠시 불안을 잊을 수는 있어도 그것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유쾌한 고독

영국 최고의 정신분석의 중 한 사람인 앤서니 스토에 따르면 사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충동을 느낀다. 하나는 누군가와 만나고 사랑하며 함께 하고 싶다는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홀로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은 충동이다. 그간의 세상이 첫 번째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다면 이제는 많은 사람이 두 번째 충동에 이끌린다. 이것은 사회가 망가진 것도 아니고 공동체가 무너지는 전조 현상도 아니다. 통합된 인간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인맥 부자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졌느냐면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혼자인 것을 못 견디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든다. 스마트폰으로 이제 사람들은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감상하고, 놀고, 읽고, 쓰고, 소통한다. 왜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로 일상의 작은 공백까지 채우려는 것일까?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불안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얕고 한시적인 관계들이 진정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 또한 자기 소외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모든 관계의 본질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맺기에서 찾아야 한다.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도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관계에는 자존감의 문제가 선행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아 자기혐오에 빠지기 쉽다. 인간의 최대 불행은 바로 자신을 싫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기혐오감을 메우기 위해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망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기에 타인과의 관계도 뒤틀린다.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자신을 속이는 삶은 자기와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다.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보듬을 수 있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시간, 잠시 멈추는 시간,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 나를 기다려주는 시간까지. 이것은 자신과 관계를 맺는 고독의 시간이다. 쓸쓸한 시간이 아니라 나를 만날 수 있는 유쾌한 시간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고독을 원한다. 억지로 누군가와 함께하여 불행해지기보다는 먼저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갈망하는 것이다.

고독을 견뎌야 얻어지는 단독성

고독은 무엇일까? 고독은 혼자일 때 찾아드는 감정이 아니라 혼자이고자 하는 자발적 태도이자 의지이다. 세상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혼자됨을 선택해 자신의 지친 마음과 영혼을 돌보는 시간에 대한 구체적인 욕망이다. 성과를 내기 위해 무작정 달려와 피로가 산처럼 쌓일 때, 인간은 잠시 멈추고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

타인의 시선을 걷어내고,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실존의 시간이다. 살고자 밀쳐두었던 내 내면의 욕망을 살피고, 온갖 잡동사니로 채워진 복잡한 생각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걷어낸다.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한 걸음을 다시 내디딜 수 있도록 내면을 단단하게 다잡는다.

그런 자발적 고독의 시간을 통해 불투명하던 삶의 안개가 걷힌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누구이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또 누구인지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보다 명료한 관점을 갖게 되어 나를 방해하는 타인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자발적 고독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되돌려준다. 그때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진 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와 내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의 무게를 내 역량의 크기에 맞게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욕망과 언어, 삶의 태도, 방식을 일치시켜 나간다. 타인이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길을 막으려 할 때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고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며 나를 완성해가는 일상의 정의다.



의미, 당신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며 세 가지 질문을 가진다. 태어난 이유와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한 의문이다. 이를 존재 의문이라 부른다. 질문은 명확하지만, 그 답을 알기란 쉽지 않다. 삶은 그냥 주어져 있을 뿐이며, 주어져 있기에 이유를 묻는다. 이것은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연보다 더 우연적인 사건이다.

존재 의문 중 가장 절박한 것은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도 아닌 지금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치 않은 순간에 수많은 절망을 경험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고 이제껏 살아온 내 삶 전체를 부정해야 할 수도 있다. 힘든 삶 앞에서 나름대로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단 하나의 의미로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더불어 의미 하나에 나를 고정할 수도 없다.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삶의 의미는 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 하나의 의미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살게 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이토록 다양한 의미가 도출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니체는 흥미로운 답을 전해주었다.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화

인간 정신의 첫 번째 변화, 낙타의 정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에게는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 짐을 무던히도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정신은 세 가지 변화를 거쳐야 한다. 먼저 인간 정신은 낙타로 변한다. 낙타는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참을성 강한 동물이다. 여기서 무거운 짐은 사회ㆍ종교ㆍ도덕ㆍ관습이 전해주는 삶의 과제 같은 의미를 가진다. 다수의 인간은 때가 되면 학교에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한다. 가족을 책임지고 사회에서 무거운 의무를 부담한다. 니체는 이런 삶의 무게가 마땅히 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낙타는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감내하는 정신이자,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이다.

많은 이들은 낙타의 정신을 무척 부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한다. ‘아니오!’라고 말할 줄 모르는 노예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짐을 짊어져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삶의 무게를 짊어져본 자만이 자신을 현실감 있게 인식할 수 있고 자기 존재 가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낙타의 정신은 허황되지 않고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을 살아낼 수 있는 적응력과 인내, 책임감 같은 유용한 근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방구석에 누워 입으로 꿈만 꾸며 살아가는 사람은 낙타도 되지 못한 미성숙한 정신일 뿐이다. 오직 견뎌본 자만이 명령하는 법을 배운다. 세상의 수많은 낙타는 매일같이 공부하고 출근해서 돈을 번다. 어떻게 보면 지겨워 보이지만 그 짓눌림 안에서 삶의 의미가 도출된다. 견뎌본 자만이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신을 구체적으로 꿈꾼다.

인간 정신의 두 번째 변화, 사자의 정신 : 가장 쓸쓸한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획득하고 정신의 사막을 지배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정신은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정신은 마지막 주인, 최후의 신에게 적대하려고 하는 정신은 승리를 위해 이 거대한 용과 격투하려고 한다. 정신이 이미 주인으로 여기지 않고 신이라고 부르지 않으려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그대는 마땅히 해야 한다.” 이것이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바란다.”라고 말한다. (…) 새로운 가치의 창조, 이것은 사자도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획득, 이것은 사자의 힘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 정신에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낙타의 정신이 사자로 변한 것이다. 정신은 기존의 가치에 내포된 환상을 발견한다. 자신이 짊어진 짐의 의미를 묻는 과정에서 그들이 말하는 가치의 허상을 깨닫는 것이다. 이에 낙타는 자유를 쟁취하여 스스로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용과 싸워 이겨야 한다. 여기서 용은 신을 말하지만, 더 넓게는 세간의 가치를 의미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용에게 맞선 사자는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반면 용은 ‘너는 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앞에 있는 것이 권리라면 뒤에 있는 것은 의무이다. 정신이 사자가 되는 것은 무조건적인 의무에서 벗어나 주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살아봐서 안다며 기존의 가치를 강요한다. 모두가 낙타처럼 살아가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자의 정신은 여기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규범적 가치가 아닌 자신만의 자유의지를 포효하듯이 세상에 떨치는 것이다. 사자는 스스로 삶의 무게를 만들고 균형을 잡을 줄 아는 정신이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용기 있게 밀고 나간다. 견딜 수 있는 정신에 나를 잃지 않는 균형이 더해지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하는 목적이 없다. 도리어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를 두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나 핸드폰 따위의 물건은 존재의 목적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에겐 정해진 목적이 없다. 얼마든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단하여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포효하듯 외치는 사자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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