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인들
조민기 지음 | 미래지식
세계사를 움직인 위대한 여인들
조민기 지음
미래지식 / 2018년 1월 / 324쪽 / 16,000원
군주의 길을 걷다
빅토리아 여왕,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건설하다
켄싱턴 궁에서 지낸 외로운 어린 시절: 켄트 공작 에드워드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1살밖에 되지 않았던 딸 빅토리아와 그녀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에게 남은 것은 거액의 빚과 영국 왕실 일원이라는 허울 좋은 명예뿐이었다. 그 후 빅토리아가 윌리엄 4세의 추정상속인이 될 때까지 약 10년간 두 모녀는 레오폴트에게 의지하여 생활을 해야 했다. 빅토리아의 외숙부이자 켄트 공작부인의 친정오빠이며 조지 4세의 외동딸 샬럿 공주의 남편이기도 했던 레오폴트는 어린 조카에게서 장차 영국의 군주가 될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매년 3천 파운드의 자금을 지원해주며 경제적으로 매우 빠듯했던 두 모녀의 생활을 보살펴주었다.
1820년, 조지 4세가 승하하고 윌리엄 4세가 왕위에 오르자 빅토리아의 왕위계승이 잠재적으로 확실해졌고 마침내 왕실의 대우도 달라졌다. 영국 왕실은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켄트 공작부인의 연금을 두 배로 높여주었고 빅토리아의 양육비로 연 3만 파운드를 지급해주었다. 드디어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켄트 공작부인은 기뻐하면서도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녀가 자신보다 19살이 많았던 에드워드 켄트 공작과 재혼한 목적은 단 하나, 켄트 공작의 후계자를 낳아 영국 왕실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빅토리아는 그녀의 꿈을 이뤄줄 유일한 자식이었다.
켄트 공작부인은 딸의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독일로부터 가정교사가 도착했고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같은 언어를 가르쳤다. 그녀의 하루는 수업 일정으로 빠듯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왕의 예법이었다. 딸이 영국의 여왕이 되면 섭정을 하고자 했던 켄트 공작부인은 일상생활을 할 때도 빅토리아를 차기 여왕처럼 대했다. 공작부인은 어렸을 때부터 빅토리아가 혼자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하게 했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왕족들과 그녀가 접촉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덕분에 빅토리아는 아주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당시 켄트 공작부인은 비서였던 아일랜드 출신의 존 콘로이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다. 순종적이고 착한 딸이었던 빅토리아는 폐쇄된 켄싱턴 궁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과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콘로이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때의 기억은 빅토리아가 성장한 후에도 큰 상처로 남았다. 훗날 여왕으로 즉위한 빅토리아는 콘로이를 해고하고 어머니를 지방으로 보내 결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즉위, 미숙하고 편협한 정치 초보: 1837년 5월 24일, 빅토리아는 18살이 되었다. 성인이 된 것이다. 윌리엄 4세는 성인이 된 빅토리아가 매년 1만 파운드의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지급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빅토리아가 그 돈을 쓰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다음 달인 6월, 재위 7년 만에 7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윌리엄 4세가 승하하면서 18살의 빅토리아는 여왕으로 즉위했다. 장수가 특징인 하노버 왕조의 군주들은 대부분 노인이 되어서야 왕위에 오르곤 했다. 반면 18살의 빅토리아는 하노버 왕조 출신의 최연소 영국 군주였고, 마지막 군주이기도 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빅토리아는 곧바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빅토리아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군주로서의 예법도 잘 갖추고 있었지만 곧바로 국정을 수행하기에는 여러모로 미숙했고 경험 또한 전무했다. 그녀는 휘그당의 수장 멜번 경을 자신의 파트너로 삼았다. 사실 빅토리아는 반대파인 토리당의 인물과는 만나본 적도 없었다. 멜번을 먼저 만난 그녀는 소탈하고 편안한 언변과 우아한 매너를 지닌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믿을 만한 성인 남성이 부재한 가운데서 성장한 빅토리아는 멜번을 의지하며 정치를 시작했다.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휘그당은 이내 여왕이 옹호를 받는 집권당이 되었다. 당연히 상대당인 토리당에서는 반발하였고, 빅토리아의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결혼, 남편의 사랑과 국민의 존경을 얻다: 1939년 10월 10일, 레오폴트의 조카 앨버트는 버킹엄 궁을 방문하여 빅토리아를 만났다. 당시 빅토리아는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극도로 강해져 있을 때였다. 그런데 앨버트를 만난 지 나흘 만에 그녀는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린다. 빅토리가 먼저 앨버트에게 청혼을 하였고 그가 다정한 키스와 포옹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사실 앨버트 역시 진심으로 결혼에 회의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앨버트가 4살 무렵에 간통죄를 저질러 스위스로 추방되었다. 어머니의 부재는 앨버트에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던 그는 매사에 신중하고 차분하며 조용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성장하면서는 학문과 예술에 집중하여 스스로를 다스렸다. 앨버트는 실로 권력과 줄이 닿아 있는 명문가 출신의 남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반듯하게 자란 훌륭한 청년이었다.
앨버트는 결혼을 목적으로 빅토리아를 방문했음에도 그녀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고 주변 상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늘 어머니와 주변을 의식하고, 외삼촌 레오폴트의 의견을 신경 쓰고, 멜번에게 의지하고,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의회와 국민을 생각해야 했던 빅토리아에게 앨버트의 그런 의연한 모습은 너무나 듬직하고 편안해 보였다.
1840년 2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는 마침내 결혼했다. 이날 빅토리아는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여왕의 웨딩드레스로는 너무 수수하다는 평이 있었지만 오히려 청순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 후 빅토리아의 자손들이 그녀를 따라 결혼식에서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입으면서, 하얀 웨딩드레스는 오늘날까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앨버트는 누구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국정 전반을 파악해나갔고, 빅토리아가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사안들을 잘 정리하고 종합하여 설명해주었다. 앨버트의 정치참여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빅토리아의 유치하고 미성숙한 사고방식과 발언을 ‘군주답게’ 바꿔놓았다. 의회는 앨버트의 정치적 식견에 감탄하며 여왕의 정치적 성장을 환영했다. 앨버트의 정치 참여에 대한 빅토리아의 경계 또한 눈 녹듯 사라졌다. 빅토리아는 앨버트와 부부가 되면서 온전한 군주가 될 수 있었고 의회와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영국의 위상을 드높인 만국 박람회: 정치적으로 앨버트의 영향력이 커지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는 결코 단 한 번도 도를 넘지 않았다. 앨버트는 이상적인 ‘여왕의 남편’이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의 금슬만큼이나 내정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절정의 부흥기를 맞이한 영국은 각국으로부터 가져온 미술품들을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때 수상 로버트는 이 중요한 임무의 책임자로 앨버트를 추천했다. ‘여왕의 충실한 비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기회를 얻은 앨버트는 적극적으로 국제무역박람회를 준비했다. 앨버트는 개최 전, 박람회장 설계도를 공개 입찰하여 세계 각국의 시선과 관심을 영국으로 모으는 데 성공했다.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는 기술ㆍ문화ㆍ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영국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임을 전 세계에 우아하게 광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빅토리아 또한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이날의 벅찬 심정을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박람회는 굉장히 웅장하고 영광스럽고 감동적인 마술이었다. 박람회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경외감에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종교 행사나 예배보다 훌륭한 박람회였다. 사람들은 이로써 앨버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이런 사람과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과 몰락: 1819년에 태어난 빅토리아는 1901년 82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장장 65년 동안 왕위를 지켰던 빅토리아의 시대는 영국이 가장 번영을 누린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기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식민지를 확보하였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며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빅토리아는 영국 군주로서 최초의 인도제국의 황제를 겸임하기도 했다. 의회정치는 완전히 정착되었고, 산업자본주의의 발달로 엄청난 부를 누렸다. 물론 그 이면에는 어둠이 함께했지만 영국의 국민들에게 빅토리아는 영광의 시대를 이끌었던 최고의 여왕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과 함께 영국의 화려한 시기도 서서히 막을 내렸다. 식민 통치로 착취한 부와 명예가 영원할 수는 없었다. 왕위는 빅토리아와 앨버트의 장남인 에드워드 7세에게 이어졌다. 빅토리아의 죽음으로 영국 하노버 왕조는 끝났다. 에드워드 7세는 아버지 앨버트의 성인 ‘작센-코부르크-고타’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 성을 쓴 인물은 에드워드 7세 한 명뿐이다. 에드워드 7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조지 5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대한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할아버지 앨버트의 독일 성을 아예 버리고 ‘윈저’라는 궁전의 이름으로 성을 바꿨다.
예술의 길을 걷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은 작가
“나는 사랑을 사랑했고 사랑하기에 사랑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1943년 첫 소설을 발표한 뒤라스는 죽는 날까지 글을 썼다. 글쓰기와 작품은 그녀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래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뒤라스는 첫 소설을 출간한 후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썼고, 장장 수십 년 동안 평단의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은 문제적 작가였다. 오늘날 뒤라스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나이 일흔이 넘어서였다.
뒤라스의 삶은 상식적인 기준에서 바라보았을 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중 가장 많은 이들을 당혹시킨 것은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 뒤라스가 이십 대의 젊은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뒤라스의 작품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소설들은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불행한 가족사: 뒤라스의 아버지가 죽고 세 아이와 함께 덩그러니 세상에 남겨졌을 때, 뒤라스의 어머니는 38살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고 여자로서의 삶은 아예 포기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인도차이나에서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려면 강해져야 했다. 하지만 6년 후, 결국 그녀는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프놈펜 생활을 정리하고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삶의 목표를 잃었고, 장남 피에르에게 그녀의 모든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피에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보다 약한 동생들을 괴롭히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피에르는 폭군이 되어갔다. 어머니의 편애를 받는 포악한 큰오빠의 횡포를 견뎌야 했던 뒤라스는 작은오빠에게 의지하며 그 시절을 견뎌냈다.
사실 뒤라스가 간절하게 바란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오직 큰아들에게 집착할 뿐이었다.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불의와 외로움을 혹독하게 겪어야 했던 뒤라스는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냉소적인 소녀로 성장했다. 자존감은 한없이 강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거나 사랑하는 방법은 모르는 아이가 된 것이다.
가슴 아픈 첫사랑: 1928년, 14살의 뒤라스는 가족들과 떨어져 이제까지 그녀가 지내왔던 빈 롱보다 훨씬 큰 도시 사이공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프고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게 될 첫사랑을 만났다. 그는 베트남 부동산을 장악하고 있는 소수의 부유한 중국인 중 한 명으로 파리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자는 15살의 백인소녀 뒤라스에게 한눈에 반했고, 뒤라스는 담담하게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인종과 나이, 집안과 배경을 뛰어넘는 사랑이었다.
부유한 중국남자와 연애를 하고 잠을 자는 뒤라스는 동급생들과 프랑스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 뒤라스는 육체적인 사랑에 탐닉했다. 나중에서야 딸이 중국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라스 어머니는 당황하였고 뒤라스를 만날 때마다 욕을 하고 때렸지만 이 관계를 말릴 수 없었다. 뒤라스와 그녀의 첫사랑이 된 중국인 남자와의 관계는 그가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을 하면서 끝이 났다.
1932년, 18살의 뒤라스는 가족과 함께 파리로 떠났다. 뒤라스는 첫사랑 중국인 남자와 헤어지면서 그녀가 파리에 도착하면 쓸,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았다. 식민지에서 프랑스인들로부터, 상류사회로부터 배척당하는 삶은 뒤라스에게 조금도 상처를 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아니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류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것은 그녀의 삶 자체였다.
파리에서의 새로운 출발: 뒤라스는 12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뒤라스가 수학교사나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녀가 아는 최고의 직업이었고, 최상의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뒤라스는 대학에서 법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공부보다 그녀를 더 매료시킨 것은 문학이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독서 경험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으나 파리는 달랐다. 뒤라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대신 커다란 대학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었고, 아예 극장에 고정관람권을 끊어놓고 공연되는 모든 연극을 보았다. 인도차이나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역시나 뒤라스는 고독했다. 이는 스스로 선택한 고독이기도 했다. 인도차이나에서의 삶과 파리에서의 모든 경험은 훗날 그녀가 작가가 되는 데 토양이 되었다.
전쟁의 상처 그리고 작가 데뷔: 그녀의 두 번째 소설 『평온한 삶』은 1944년 갈리마르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시기 뒤라스는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한 남자를 만난다. 바로 갈리마르사의 원고 선정인인 디오니스 마르콜로가 그 주인공이다. 같은 해, 뒤라스와 그녀의 남편 로베르 앙텔므 그리고 디오니스 마르콜로 세 사람은 프랑수아 미테랑이 창설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6월 1일, 로베르 앙텔므는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프랑스 국민들과 파리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을 때, 뒤라스는 남편의 실종으로 인해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1945년 4월, 연합군의 승리로 전 유럽이 기쁨에 휩싸였을 때도 뒤라스는 여전히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해 넋이 나가 있었다. 독일군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자행한 끔찍한 학살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었다. 다행히 프랑수아 미테랑의 도움으로 뒤라스는 남편이 독일의 다하우 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체더미 사이에서 시체와 다름없는 몰골을 하고 겨우 숨만 붙어 있는 로베트 앙텔므를 발견한 미테랑은 미군들의 눈을 피해 그를 극적으로 구출해냈다.
이혼 그리고 왕성한 활동: 뒤라스는 정성을 다해 사경을 헤매는 남편을 간병했고 그의 회복을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앙텔므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자 이혼을 요청했다. 앙텔므는 뒤라스와 이혼한 후에도 평생 우정을 유지했다. 뒤라스가 남자로서 원하는 사람은 앙텔므가 아니라 디오니스 마르콜로였다. 1946년, 뒤라스는 앙텔므와 정식으로 이혼하였고 이듬해 디오니스 마르콜로와의 사이에서 아들 장 마르콜로를 낳았다.
1950년, 뒤라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한 소설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를 발표했다. 소설은 발간 즉시 화제가 되었고 발간 첫 주에 5천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자행한 온갖 만행들을 고발했다. 그런데 공고롭게도 같은 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시작했다. 뒤라스는 강력하게 정부를 비난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지브롤터의 뱃사람』, 『타르키니아의 망아지들』, 『나무 위에서의 나날들』, 『왕뱀』, 『도댕부인』, 『공사장』, 『길가의 작은 공원』 등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문단에서의 입지도 점점 단단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