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이즈미야 간지 지음 | 북라이프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이즈미야 간지 지음
북라이프 / 2017년 12월 / 216쪽 / 13,000원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
중년과 청년의 온도 차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칼 융은 정신적 위기가 찾아오기 쉬운 세 번의 시기로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꼽았다. 청년기의 위기는 사회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출발점에서의 다양한 고뇌, 즉 직업 선택이나 가정을 이루는 일 등 ‘사회적 자기실현’을 둘러싼 고민을 가리킨다. 중년기의 위기는 어느 정도 사회적 존재로서 역할을 다하고 인생의 후반으로 옮겨가는 지점에서 분출되는 고요하고 깊은 물음이다.
다시 말해 ‘나는 과연 나답게 살아온 걸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미래를 살아가는 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사회적 존재를 초월해 인간 존재로서의 실존적 물음을 향한 고뇌다. 청년기에 중요하게 여겼던 ‘사회적’이라든가 ‘자기’라는 개념이 반드시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일종의 집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중년기의 위기는 대개 중년기인 40대 후반에서 60대 전반 무렵에 찾아오는데, 최근에는 이러한 고뇌가 20대 젊은 층에서도 일어나는 저연령화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중년기 위기의 저연령화 현상은 왜 일어날까? 한 가지 원인은 ‘사회적 자기실현’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데 있다.
현대의 젊은 세대는 정보화의 발달로 인해 어른들이 겉으로 연기하는 ‘사회적 자신’, 즉 ‘역할적 자신’이 그 무대 뒤에서 얼마나 공허한지를 상당히 이른 나이부터 알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장래에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하는 사회적 자기실현에 대한 고민보다 한층 더 깊은 곳에 자리한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실존적인 굶주림이 오히려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물론 오늘날 젊은이들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진로나 취직 문제로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옛날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때 고민하는 내용은 예전과 다르게 그 질이 상당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을까?’, ‘원하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내용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가능하면 귀찮은 일은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한다면 뭘 해야 좋을까’, ‘왜 일을 해야만 하나’ 같은 고민으로 바뀌고 있다.
헝그리 모티베이션의 가치관으로 살아온 어른이 고작 입 밖에 내는 말이란 대부분 ‘밥을 먹어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까’, ‘사치스러운 고민이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어’, ‘사람이니까 일하는 게 당연하지’ 등 궁색한 답변뿐이다. 하지만 이는 ‘왜 일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닐 뿐만 아니라 헝그리 모티베이션으로 살아온 인간의 정지된 사고를 여실히 드러낼 뿐 전혀 설득력이 없다. 현대에는 이렇게 어긋난 가치관이 부모자식 간을 비롯해 학교나 직장 등 모든 곳에서 부딪혀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노동의 배신,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할까?
나쓰메 소세키가 말하는 ‘일’
소세키의 소설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이른바 ‘고등유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과 인류를 위해서 무언가 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이 언뜻 보면 이타적인 삶을 장려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이기적인 헝그리 모티베이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굳이 아버지와 부딪히지 않고 적당히 받아넘기면서 가능한 한 말을 하지 않는다. 가치관이 결정적으로 어긋나는데도 직접 부딪히기보다 체념하고 대응한다는 점에서도 고등유민다운 특징이 잘 드러난다.
“서른이나 되어서 한량처럼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볼썽사납구나.” 다이스케는 결코 자신이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일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고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고귀한 부류라고 여길 뿐이다.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실은 딱하기만 하다. 아버지의 미숙한 두뇌로는 이토록 의미 있게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삶이 자신의 고차원적 사상과 감정에서 결정을 이루어 나온 결과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니 말이다. _『그 후』, 나쓰메 소세키
점점 더 심해지는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다이스케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는 불손하다고 할 만큼 아버지를 멸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감정에도 다소 일리는 있다. 아버지가 설교의 마지막에 일을 해야 하는 이유로 꺼내든 말은 결국 남 보기에 ‘볼썽사납다’는 체면의 문제이다. 다이스케가 일을 하면 자신의 무언가가 더러워진다고 생각해 주저하는 것과 비교하면 아버지의 가치관은 피상적이고 세속적일 뿐이다. 두 사람의 가치관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다이스케가 아버지를 ‘미숙한 두뇌’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이스케는 그 후 오랜 친구인 히라오카와 재회하는데 이때도 일하는 것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는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일할 바에는 생계 이상의 가치를 얻어야 명예로운 걸세. 모든 신성한 노동은 먹고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네. (……) 다시 말해서,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은 성실하게 임하기 어렵다는 의미지.”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군. 먹고살기 위해서니까 열심히 일할 의욕이 생기는 거네.” “열심히 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실하게 일하기는 어렵다니까.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거라면 결국 먹고사는 것과 일하는 것 중 어떤 게 목적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먹고사는 거지.” “그것 보게나. 먹고사는 게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수단이라면 먹고살기 쉽게 일하는 방법을 찾는 게 당연하잖은가.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을 하든, 어떻게 일하든 상관없이 그저 식량을 얻을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겠나? 노동의 내용도 방향도 그리고 순서도 전부 다른 사람에게 제약을 받는다면 그것은 타락한 노동이라네.” _『그 후』, 나쓰메 소세키
다이스케는 헝그리 모티베이션을 강하게 내세우는 히라오카에게 일하는 것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당당하게 펼친다. ‘먹고사는 것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수단’이라면 그것은 결코 성실한 노동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다이스케에게 일한다는 것은 식량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은 빵만 먹고 살 수 없다고 말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다이스케는 헝그리 모티베이션으로 일하는 것은 정신의 타락이며 불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은 경멸의 대상인가 기쁨의 원천인가
다이스케가 일하는 것을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데 거부감을 드러낸 문제를 더 깊이 고찰하기 위해 나치스의 박해를 경험한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고를 참고해보자. 아렌트는 1958년에 발표한 저서 『인간의 조건』의 활동 전반을 ‘활동적 생활’이라고 지칭하고 이를 ‘노동’과 ‘일’, ‘활동’이라는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다.
‘노동’은 인간이 동물의 일종으로서 생명과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에 쫓겨 행하는 직업을 가리킨다. 이때 생겨난 산물은 소비되는 성질이 있으며 영속성을 갖지 않는다. 한편 ‘일’은 인간만이 갖는 영속성이 있는 무언가, 이를테면 도구나 작품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가리키고 ‘활동’은 사회와 역사를 형성하는 정치적 작용이나 예술 등의 표현행위를 일컫는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리스 시대에 이들 중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자세로서 본래는 ‘관조생활’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기술한다. 관조는 현대의 언어로 성찰 또는 명상과 의미가 가까운 단어로 자연이나 우주의 진리를 감지하여 차분하게 마주하는 자세를 뜻한다. 그리스인들은 활동적 생활이나 활발하게 사고하는 것 모두 정적인 관조생활을 지향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보았다. 또한 아렌트는 이어서 그리스 시대에 도시 사람들은 노동을 경멸했다고 언급했다.
노동에 대한 경멸은 원래 필연성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열정적인 노력에서 비롯되었으며 흔적도 기념비도 기억에 남을 위대한 작품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막대한 고생은 결코 참을 수 없다는, 노동에 대한 혐오감에서 생겨난 것이다. (……) 노동은 필연성에 의해 노예가 되는 일이며 이러한 노예화는 인간생활의 조건에 고유하게 존재했다. 인간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에 지배된다. 그렇기에 오직 필연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노예를 지배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은 운명이 가하는 일격에 의해 노예로 전락하는데, 그 운명은 죽음보다도 가혹했다.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 인간은 가축과 같은 존재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_『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그리스인들은 살아갈 필요에 쫓겨 노동에 속박되는 것은 가축과 같은 동물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노동이 인간다운 일이나 활동, 나아가서는 관조생활을 방해한다고 여겨 노동을 맡길 노예가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인간이 생명체로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의 원천이 노동이라고도 말한다.
노동의 수고와 노력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생명에게서 가장 자연스러운 쾌락을 빼앗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삶에서 활력과 생명력 자체를 앗아가는 일이다. 고통과 노력은 생명을 별달리 해하지 않고도 없앨 수 있는 단순한 증후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다시 말해, 고통과 노력은 오히려 생명 그 자체가 생명을 속박할 필요성과 함께 스스로는 감지하는 양식이다. 생명이 유한한 인간에게 ‘신들의 안락한 삶’은 오히려 생명 없는 삶일 것이다. _『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인간에게는 노동을 경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기피하는 경향과 반대로 노동에 의해 생명의 기쁨을 얻는 경향이 있어 복잡하고 까다로운 면이 있다. 노동이 안고 있는 딜레마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동물이면서도 다른 동물과는 결정적으로 다르게 문화를 창출해내고 문화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양면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왜 노동이 찬양받게 되었나
아렌트는 왜 옛날에는 경멸받던 노동이 오히려 찬양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동이 가장 경멸받는 최하의 지위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 중에서도 가장 높이 평가를 받는 최고의 지위로 급격하고도 눈부시게 상승한 것은 존 로크가 ‘노동은 모든 재산의 원천’이라고 내세운 것이 발단이었다. 그 후 애덤 스미스가 ‘노동이 모든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면서 노동에 대한 평가 상승은 지속되었고 카를 마르크스의 ‘노동체계’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노동은 모든 생산성의 원천으로 인식되고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인간성 자체의 표현이 된 것이다. _『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여기서는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가 갈고닦은 ‘노동가치설’, 즉 노동이 가치를 생성해내고 상품가치를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이 비난의 대상으로 거론된다. 아렌트는 그들이 일과 노동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일만이 갖고 있던 몇 가지 능력이 노동에 주어졌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소비되어 소모되고 마는 노동의 생산물과 어느 정도 영속성을 지니고 세상을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일의 질적인 차이를 노동가치설 주장자들이 간과한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거짓말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왜 일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꼈을까? 본래는 인간적인 보람을 얻어야 할 일이 어느 사이엔가 노동이라는 행위에 흡수합병되어 완전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리고 노동이야말로 가치를 창출한다는 노동가치설이 사회경제의 근본적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더욱이 예로부터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던 차분한 관조생활의 의미가 완전히 잊혀 사라지고 단지 나태하고 비생산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었다.
또한 전력으로 천직을 수행하는 일이, 세속 내 금욕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라는 프로테스탄트 가치관의 출발점이 되고 노동해서 돈을 버는 일이야말로 선행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거기서 자본주의라는 사고가 생겨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가 힘을 갖게 된다.
즉, 라파르그의 자본교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노동교’라는 종교에 근현대인이 완전히 홀려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배경으로 인해 일하는 것이 노예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등유민이 안고 있는 위화감은 그러한 비정상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정직한 위화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에 내걸린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표어가 새빨간 거짓말이며 이곳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 포로들은 벌레와 다를 바 없이 착취당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는 상당히 특수한 상황 아래서 벌어진 대학살이지만, 노동교가 지배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표어는 결코 연관 없는 역사상의 유물이 아니라 통렬한 풍자로 다가온다.
노동을 해야 할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다이스케가 직면한 막다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아렌트가 말한 ‘일’의 복권이나 활동에 대한 자각, 그리고 오래도록 망각된 관조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부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양의 차원으로 변질된 ‘노동’을 질 높은 ‘일’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앞으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인간다운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벌이가 된다거나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가치만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에서 각자의 눈을 뜨고, 생명체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삶을 모색해야 한다. 이 좁은 길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이며 희망이다.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일은 자아 찾기 과정이 아니다
고학력을 달성하고 일류 기업에 취직해 높은 사회적 지위와 수입을 얻는 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 다양한 것을 배우게 하는 일 등 많은 사람이 기를 쓰고 좇는 가치는 원래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그들 수단 자체가 목적으로 변질된 것이다.
우리의 본능적 부분인 ‘마음=몸’은 질을 직접 감지하고 맛볼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마음=몸’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중심이며, 마음과 신체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는 것은 결코 가치 있는 일을 이뤄서가 아니라 ‘마음=몸’이 다양한 일을 맛보고 행복을 느끼며 실현된다.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혹은 빠져나오는 일이다. 진정한 자신은 어딘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마음=몸’을 중심으로 한 생명체로서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달성된다.
최근 철학자들의 논조에는 ‘본연의 나’ 찾기, 즉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일에 대해 회의적인 뉘앙스가 들어 있다. 현대의 진정한 자신 찾기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 찾기로 바뀌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말해, “이미 주어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자아의 형성만을 목표로 한다. 진정한 자아는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 노동은 스스로 자아를 창출하는 과정에서의 도구다.”라는 말처럼 진정한 자아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 의해 창출되는 ‘새로운 자신’으로 완전히 개념이 바뀌었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일 찾기를 통해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진정한 자아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바깥쪽에 갖춰져 있고, 그래서 이미 사회에 마련된 ‘직업’과 연결하여 자아가 실현된다는 사고방식은 확실히 사람들을 끝없는 ‘자아 찾기’, 즉 ‘일 찾기’의 미로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진정한 자신을 밖에서 찾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직업이라는 좁은 범주에 맞춰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