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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이종호 지음 | 사과나무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이종호 지음

사과나무 / 2018년 2월 / 366쪽 / 15,000원





아는 것은 절대 회피하지 않는다 - 최부(崔溥, 1454~1504)



조선의 천재 3명을 말하라면 『칠정산』을 편찬한 이순지,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정약용, 『표해록』을 저술한 최부를 꼽는다. 정약용과 이순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최부라는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갸웃한다. 이에 대해 부연 설명이 필요한데, 최부가 저술한 『표해록』은 3대 중국 여행기(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최부의 『표해록』) 중 하나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표해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중국 사회과학원의 심의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표해록』을 읽게 된 것을 몹시 기쁘게 생각한다. 과거 중국인들은 마르코 폴로라는 이탈리아 사람의 여행기만 알았지, 이웃나라 조선에도 ‘동방의 마르코 폴로’라 할 만한 최부의 기막힌 여행기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최부의 『표해록』은 중국에 대한 이웃나라의 가장 친절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표류 중에도 예를 갖추다

최부는 진사 최택과 여양 진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했고, 1477년(성종 8) 24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당대의 문장가이자 사림파의 영수인 김종직의 문하가 되어 영남사림의 맥을 이어받은 호남사림의 선도자가 된다. 1486년에는 문과중시에 아원(장원 다음)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수찬으로 승진하고, 1487년 부교리가 되었다. 같은 해 도망친 노비들을 잡아들이는 추쇄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도로 파견된다. 그런데 2달 후인 이듬해 정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488년 1월 3일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곧 폭풍이 몰려올 것 같은 날씨여서 모두 만류했지만, 최부는 상주의 예를 올려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했고, 제주를 떠난 배가 나주로 향하던 중 기상 악화로 방향을 잃고 말았다. 14일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중국의 절강성 산문현 주산열도에 속한 대산섬에 닿았다. 최부는 표류하면서 겪었던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했는데, 그의 일정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해현과 영파부를 지나 소흥부에 도착하여 좀 더 엄격한 심문을 거친 후 조선 관리로 대접을 받는다. 항주에 도착하여 일주일 동안 머물고 가흥을 지나 소주부에 도착한다. 다시 무석과 상주부를 거쳐 진강을 지나 양자강을 건넌다. 항주에서는 의천 대각국사와 인연이 있는 고려사가 있다는 것과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집』을 편찬한 장녕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소주에서는 고려정이 있고 호남과 복건 등지의 상인이 모여드는 등 도시의 번성에 놀란다. 강북의 양주부를 지나면서 5년 전 이 섬이 조선에서 표류해 온 사실을 들으며, 계속 북상하여 회안부, 회하(황하)를 건너고 서주를 지난다. 다시 북상하여 한 고조 유방의 고향 패현을 지나고 노나라와 공자의 고향이 있는 연주와 제령주를 거쳐 덕주 등지를 경유하여 산동지역을 떠난다. 계속하여 옛 발해군 지역을 거쳐 천진위에 도착한다. 과거 해운에 의존하던 남북간의 물류 문제를 영락제가 천진에서 운하를 건설하면서 해결했다는 사실을 안다. 북경 회동관(옥하관)에 도착하여 약 25일 동안 체류하면서 황제를 알현하고 북경을 떠나 산해관과 요동을 거쳐 1488년 6월 4일, 제주를 떠난 지 6개월 만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한다.’

명나라에 대한 생생한 기록 / 중국인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한 중국 풍경

중국 학자들이 『표해록』을 격찬하는 이유는 기행문학으로서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6개월 동안 4000킬로미터의 대장정을 거치면서 기행문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생생한 리얼리티가 돋보인다. 최부는 명승지로 유명한 소흥, 항주, 소주 등 중국의 강남지역을 종주하면서, 그곳 지리와 함께 각 지역의 옛 역사를 해박한 지식으로 적었다. 더욱이 중국 명나라 효종 통치 초년과 중국의 사회상황,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통, 시정 풍경 등 다방면에 관해 기록한 것이 돋보인다. 또 당시 정치 중 중요한 것으로 판단되는 명대의 해금과 해안 방어 등을 기록해 최부가 국제정치에도 감각이 있음을 보여준다.

최부가 기록한 대운하에 대한 생생한 기록도 중요한 자료로 인정된다. 최부는 넉 달 넘게 대운하를 종주하면서 수백 개의 역참을 지나는데, 『표해록』은 이들 지명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한편 『표해록』이 중국 3대 여행기로 꼽히는 것은 중국의 양자강 남쪽과 북쪽의 퐁속에 대한 놀라운 비교로 당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쓰여졌기 때문이다.

갑자사화 때 참변을 당하다

중국에서 돌아온 최부는 성종의 명에 따라 단 8일 동안 무려 5만 자 분량을 일기체로 썼는데, 그것이 바로 『표해록』이다. 놀라운 기억력과 예리한 관찰력, 역사와 지리에 대한 풍부한 식견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표해록』을 본 성종은 감탄하며 포 50필과 마필을 하사했다. 그리고 최부는 곧바로 고향인 나주로 내려가 부친상을 당한 지 반 년 만에 상을 치른다. 그런데 상중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또 치른다. 만 4년 동안 부모의 상을 마치자 성종은 최부를 불러 정5품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최부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임용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사간원에서 동의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중국에서 돌아와 상주된 몸으로 견문기, 즉, 『표해록』을 쓴 사실이 유교의 명분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성종은 최부가 『표해록』을 쓴 것은 자신이 명령한 일이므로 그에게 잘못이 없다고 두둔했다. 그리고 최부는 1년 후에 홍문관 교리로 교체 임명되었다가 3개월 후에는 홍문관부응교, 예문관응교로 전례 없는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그런데 1494년 연산군이 등극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연산군 초기에는 최부의 관직생활이 순탄했다. 충청도 지방에 큰 가뭄이 들자 연산군의 명을 받들어 그가 기행문에서 소개한 중국 수차의 제작 및 이용법을 제시하여 재난에 대처토록 건의하기도 했고, 1497년(연산군 3)에는 성절사(중국 황제,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사신)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강직한 성품 탓에 연산군에게 간언하고 3정승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의 눈밖에 난다. 더욱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하인, 김굉필, 박한주 등과 함께 붕당을 조직해 국정을 비난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함경도 단천으로의 귀양에 처해졌다. 그리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처음에는 장 100대에 노예 신분으로 거제로 귀양 가는 처벌이 내려졌으나, 결국 참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표해록』은 소재나 서술 방법에서 다른 기행문을 압도한다. 중국 3대 기행문으로 꼽히는 다른 책을 보면, 일본의 엔닌은 불승으로서 주로 당나라의 불교 관련 내용만 언급했고,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17년간이나 머물면서도 만리장성이나 차 문화, 젓가락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을 정도로 부실해서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을 여행했는지 아직 결론이 나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에 반해 최부의 기록 내용은 차원이 다르다. 중국어를 모르는 조선의 하급관리인 최부가 이와 같이 날카롭게 적었다는 놀라운 일이다. 그가 경험하고 목격한 것을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다양한 소재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기억력과 관찰력, 문장력과 함께 철저한 기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편 표류기를 과학으로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남극이나 북극을 탐험한 후 논문을 제출한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과학자들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하다. 그런데 만일 최부가 갑자사화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 천재성으로 또 다른 과학자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든다.



과학기술로 부국강병을 꿈꾸다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현 남양주)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과 해남 윤씨 사이의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는데, 정약전이 둘째 형이다. 흔히 정약용의 생애는 네 단계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에 합격한 22세까지이다. 정약용은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웠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서 큰 물줄기를 만난 것은 16세가 되던 1776년 이익의 학문을 접하고부터이다. 그는 이가환, 매부 이승훈 등 많은 지식인들이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고 자신도 이익의 책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실학 이론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 발생한 신유사옥으로 투옥되던 때까지이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고, 1789년에는 식년문과 갑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희릉직장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예문관 검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경기 암행어사, 사간원 사간, 동부승지, 좌부승지, 곡산부가, 병조참지, 부호군,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했다. 당시 그는 과학적으로도 큰 성과를 이루었는데, 1789년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했고, 1793년에는 수원 화성을 설계하여 완공시킨다(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정조 사망 이듬해인 1801년부터 1818년까지의 유배기간이다. 막강한 후견인인 정조가 사망하고 신유사옥(1801)이 일어나면서 형 정약종은 처형되고,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 백서사건의 여파로 정약전ㆍ약용 형제는 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정약용은 죄가 없음에도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된다.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은 관료로서는 암흑기이겠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제자들이 찾아왔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조선의 성리학 사상을 쇄신시키는 개혁안을 정리하는 데 주력했는데, 그의 개혁안이 잘 드러나는 것이 3대 역작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이다.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때 유배에서 돌아온 후 생을 마감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상서』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 작업을 계속했다. 『매씨서평』의 개정ㆍ증보 작업, 『아언각비』, 『사대고례산보』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그 밖에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했으며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를 편찬했다.

법의학 참고서 『흠흠신서』

정약용이 다방면에 걸쳐 많은 저술을 했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대표작으로 꼽지만, 일부 학자들은 과학 수사록인 『흠흠신서』를 그의 대표작으로 꼽기도 한다. 과학 수사록이라는 자체가 과학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강력 사건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사기법 등을 적은 『흠흠신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으로 지금 읽어봐도 놀랍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정약용의 설계안

수원 화성의 건축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조는 당시 홍문관에 근무하고 있던 젊은 실학자 다산에게 ‘삼남의 요충지요, 서울의 보장지지(군사적 요충지)로서 만세에 길이 의지할 만한 터인 수원 화성을 건설토록 명한다. 왕명을 받을 당시 서른 살의 다산은 왕실 서고인 규장각에 비치된 첨단 서적들을 섭렵하고 기존의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새로운 도시 화성에 걸맞은 새로운 성곽을 설계했다.

다산은 수원 화성 축성 안으로 ‘성설’, ‘옹성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 ‘포루도설’, ‘기중도설’, ‘총설’ 등 총 7가지 계획안을 지어 바쳤다. ‘성설’은 성의 전체 규모나 재료, 공사 방식 등 전반에 관한 내용이고, ‘옹성도설’은 옹성, ‘현안도설’은 현안(성벽 위에서 아래로 낸 홈), ‘누조도설’은 적이 성문에 불을 붙였을 때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성문 위에 벽돌로 오성지라는 다섯 구멍을 내고 그 뒤에 물을 저장한 큰 통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포루도설’은 치성(성벽 바깥으로 덧붙여 쌓은 벽)을 만든 후 설치하는 갖가지 시설에 대해 설명했다. 정조는 다산의 계획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정약용에 대한 깊은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참고로 ‘성설’은 후일 ‘어제성화주략(왕이 내려준 화성 축성의 기준이 될 만한 몇 가지를 방안)’이란 제목으로 변경 없이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었다.

수원 화성의 건설 계획이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당초 10년 정도 예상한 공사 기간을 단 2년 반에 끝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중간에 6개월의 공사 중단을 감안하면 28개월 걸린 셈이다. 이와 같이 빨리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4년에 걸친 설계 계획의 치밀함도 있지만 첨단 건설 도구가 도입되었기 때문인데, 축성에 동원된 장비는 모두 열 종류였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각 장비의 종류와 공사장에 투입된 숫자가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거중기 11량, 유형거 11량, 대거 8량, 별평거 7량, 평거 64량, 동거 192량, 발거 2량, 녹로 2좌, 설마(썰매) 9좌, 구판 8좌이다. 대거ㆍ평거ㆍ발거는 소가 끄는 수레로 대거는 소 40마리, 평거는 소 10마리, 발거는 소 1마리가 끌었다. 별평거는 평거에 바퀴를 단 것으로 보인다. 동거는 바퀴가 작은 소형 수레로 사람 넷이 끌어 사용했으며 설마(雪馬)는 바닥이 활처럼 곡면을 이루어 잡아끄는 기구이고, 구판은 바닥에 둥근 막대를 여럿 늘어놓고 끌어당기는 작은 기구이다.

과학의 원리를 파악

정약용은 서양 기술을 배워오기 위해 제도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기술 도입을 위한 전문 국가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설치하자는 것으로, 아예 이용감(利用監)이라고 작명까지 했다. 그리고 정약용은 광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여 렌즈나 안경의 이치에 대한 글을 남기고 있다. 또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았던 정약용은 천연두 예방법인 우두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마과화통』이란 책도 썼다.

한편 정약용 개인으로 볼 때 18년의 유배는 상당한 고통의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지만,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조선을 구하기 위한 구상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는 것은 후손들로서는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조정에서 정약용 등 당대의 신지식인들의 의견을 제대로 청취하여 현실에 접목했더라면 우리나라가 좀 더 근대화를 빨리 이루고, 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의 지식을 융합하다 - 최한기(崔漢綺, 1803~1877)



무과(武科) 집안 양자로 가다

조선시대에 정약용보다 더 많은 책을 쓴 사람이 있는데 최한기이다. 그는 무려 천여 권의 책을 썼다고 알려진다. 아쉽게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20권 정도인데 그것들 모두 조선 말기 실학을 대표하는 역작들이다. 그의 문집에는 ‘명남루(明南樓)’란 제목이 적혀 있는데, 명남루는 그의 당호이다. 최한기는 1803년 아버지 최치현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개성이고 본관은 삭령이다. 본가와 외가는 여러 대에 걸쳐 개성에서 거주했지만 최한기는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 부친 최치현은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에 뛰어나 일찍이 영락한 삭녕 최씨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촉망받았다. 그러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가 좌절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최치현은 1812년 27세로 요절했다. 부친의 사망 당시 10살이던 최한기는 큰집 종숙부인 최광현의 양자로 입양된 상태였다. 내세울 것 없는 본가에 비해 양아버지 최광현은 1800년에 무과에 급제해 지방 군수를 지냈고 많은 책을 소장하고 거문고를 켜는 등 문(文)과 예(藝)를 아는 교양인이었다. 최한기의 학문적 바탕은 친부와 양부 모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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