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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김준혁 지음 | 더봄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김준혁 지음

더봄 / 2018년 1월 / 368쪽 / 18,000원





『무예신보』를 편찬한 사도세자의 꿈



사도세자는 담대한 무인 기질이었다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관심이 많았다. 영조가 시험 삼아 사도세자의 소질을 떠보려고 병법에 대해 물어보면 조목조목 대답을 해내곤 하였는데 매우 상세하였다. 또한 병서를 좋아하여 속임수와 정당한 수법을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묘리에 정통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본래 영웅의 기상을 타고났는데, 어린 시절 무예놀이를 과도하게 한 것이 성장하면서 영향을 주었고, 그것으로 인해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아쉬워하였다.

사도세자, 효종의 북벌론을 계승하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15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고, 대리청정을 통해 효종의 북벌론을 계승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효종은 즉위 후 경기관찰사로 하여금 역사들을 선발하여 한성으로 모아 훈련시켜 북벌을 강행할 준비를 하였고, 북벌을 위한 상징적 의미로 청룡도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를 만들어 창덕궁 후원에서 무예 시연을 자주 하였다. 그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효종 사후에 조정에서는 저승전에 보관해두었는데, 사도세자는 대리청정 과정에서 효종의 청룡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한편 이 청룡도는 무쇠로 주조하여 당시 무관들도 무거워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였는데, 사도세자는 15, 16세부터 이 청룡도를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그만큼 사도세자의 신체 조건과 무예가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세자 책봉 시 조현명이 한 “세자가 효종을 닮았다.”는 말은 선견지명이 있었고, 사도세자 역시 늘 효종을 닮고자 하였다.

조선 최초의 무예서, 『무예제보』의 발견

조선 시대 무예서의 시초인 『무예제보』는 1598년 훈련도감의 장교인 한교에 의해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선조는 훈련도감을 만들고 도제조에 유성룡, 대장에 조경, 실무를 책임지는 유사당상에 병조판서 이덕형을 임명하여 군사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무사 선발은 큰 돌을 들게 하거나, 한 길 정도의 담장을 넘는 자를 선발하여 소정의 관직을 주고,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신법에 따른 삼수병(활쏘기를 잘하는 병사인 사수, 총과 대포를 쏘는 포수, 검을 잘 쓰는 병사인 살수)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활쏘기는 거의 필수 과목이었기 때문에 우선은 포수와 살수의 양성에 치중하였다. 이후 훈련도감은 선조 27년에 임시적이나마 독립 군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한교는 그동안 익혀온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의 무예 중 특히 살수에 관한 것을 번역하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유성룡은 한교에게 『살수제보』의 번역과 함께 『기효신서』의 내용 중 미비점을 명나라 장수의 의견을 듣고 명확히 해석하게 하였다. 『무예제보』는 전쟁 중 시급하게 간행된 무예서로, 신속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곤,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장도의 6기의 무예로 구성되어 있다.

『무예신보』를 편찬한 사도세자의 꿈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는 새로운 무반층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노론과 소론 대립관계에서 소론을 지지하던 사도세자는 겉으로는 탕평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노론을 후원하는 부왕 영조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정치적 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린 시절부터 출중한 재능을 보여 왔던 무예서를 편찬하는 일이었다. 당시 무예서의 편찬은 새로운 무반층 육성을 간접적으로나마 반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정치적 부담이 없는 명분 있는 일이었기에 노론의 제지를 받지 않고도 할 수 있었다. 결국 『무예신보』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편찬되었다. 사도세자는 『무예제보』에 대해 연습하는 규정에 그 방법이 대부분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철저하게 고증하여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래서 1759년(영조 35년)에 『무예제보』6기를 고증하고 이에 더하여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 곤 등 12가지 기예를 더 넣었다. 거기에 그림과 설명을 넣어 『무예신보』를 새롭게 편찬하고 훈련도감에서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사도세자의 『무예신보』 편찬은 조선후기 무예 체계의 한 단계 발전을 가져왔고, 뒤이어 정조의 『무예도보통지』의 간행으로 이어졌다.



정조, 장용영에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다



『무예도보통지』의 시연자, 조선 최고의 협객 백동수

조선 최고의 무사, 혹은 조선 최고의 협객이라 불리는 이가 바로 백동수(1743~1816)이다. 백동수는 ‘전설의 조선검’ 김체건과 ‘검의 신선’ 김광택의 무예를 전수받은 인물이다. 백동수는 소년 시절부터 무예에 심취하여 검술을 비롯한 여러 무예를 익혔는데, 김광택이 영조를 만나 금위영의 교련관으로 활동하다가 은퇴한 후 남산 일대에 은거할 때 김광택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동수가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하더라도 영조 후반에 그는 쓰임을 받지 못했다. 서얼이라는 장벽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동수는 1773년, 서른한 살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기린이라는 깊은 산골로 들어가 목축과 농사를 하며 지냈다.

그러던 차에 개혁의 군주 정조가 즉위했다. 정조는 1777년에 자신의 개혁을 천명한 ‘경장대고’를 선포하였고, 그중 하나가 국방개혁을 선언한 ‘융정’이었다. 당시 서울에 있던 중앙오군영은 각기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못했는데,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785년에 정조가 창설한 군대가 장용영이었다. 1785년 정조는 백동수를 선전관에 임명하고, 1788년에는 장용영 초관에 임명하여 군사들이 익히는 24가지 무예를 표준화하고 정리하는 책임을 맡겼다. 한편 조선의 국방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표준무예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1789년 가을, “백동수는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정조는 장용영에 임시 출판국을 설치하고 이덕무와 박제가를 이곳에 파견하여 백동수와 합숙하며 편찬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790년 4월 29일, 마침내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정조, 호위부대를 만들다



정조 시해 음모와 숙위소 설치

정조는 자신의 호위기구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즉위 이전부터 자신의 호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즉위 이후에도 꾸준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호위기구 개편을 통해 단순히 생명에 대한 안전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왕권을 공고히 하는 것으로 연결시키고자 하였고, 장기적으로는 호위기구를 확대하여 군제 개혁의 중심축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에 정조는 즉위 후 홍국영을 승지로 발탁한 뒤, 즉위년 11월에 수어사, 1년 5월에 총융사 그리고 곧이어 금위대장 등을 순차로 거치게 하여 자신의 왕위를 호위할 수 있는 군권을 주었다. 정조의 홍국영과 소론 중심의 군영정책을 가속화시켜준 것은 바로 홍상범의 정조시해 기도사건이었다. 정조는 즉위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세손 시절 자신의 대리청정을 방해하며 국왕 등극을 저지하였단 정후겸과 홍인한 일당을 숙청하였다. 그러나 그 잔존세력이 원한을 풀고자 갖가지 모의를 하고 이듬해인 정조 1년 7월 말에 정조의 침전인 경희궁 존현각을 침범하여 소란을 피웠고, 8월 초에는 창덕궁 경추문 담장을 넘으려던 사건이 발생하여 궁중을 긴장시켰다. 정조는 이와 같은 참담한 사건을 역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호위를 강화하고 더불어 왕권도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정조는 자신을 호위하지 못한 호위군관들 중 죄 없는 이들을 풀어주는 포용력을 발휘하는 한편 궁궐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또 자신의 측근인 채제공을 창경궁의 수궁대장으로 임명하고, 금위대장 홍국영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동시에 경기 관찰사로 재직하던 김종수를 발탁하여 병조판서에 임명했다. 그리고 정조는 재위 1년 11월 15일에 창덕궁 건양문 동쪽에 자신의 친위 호위부대인 숙위소를 설치하고 도승지와 금위대장을 겸임하고 있는 홍국영을 숙위대장으로 삼았다.

홍국영의 역모와 숙위소 혁파

이처럼 정조는 일찍이 세손 시절에 홍국영의 충직한 보필을 받았으므로 즉위 후 그에게 조정의 모든 권한을 위임하여 왕권 승계에 장애가 되었던 척신과 신료들을 숙청하였다. 그러나 이후 홍국영의 세도가 한계를 넘어서자 정조는 홍국영을 사직시키고 세도를 회수하여 왕권을 확립하였다. 이는 정조가 집권 초기 정국운영에 고도의 정치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호위기구 장용위 설치

1782년에 정조는, 1685년(숙종 11년)에 무예별감 출신 30인을 훈련도감국 출신 3개 번과 교차시킨 선례를 따라, 무예출신 및 무예별감의 장교를 지낸 경력이 있는 자 30인을 골라 명정전 남쪽에 근무하게 했고, 추가로 20명을 더 선발하여 장용위를 창설하였다. 장용위는 척계광의 남군 제도를 본받아 5개 사(司)에 25개 초(哨)를 두었는데, 중사(中司) 5개 초는 서울에 있게 하고, 전사(前司) 5개 초는 수원에, 좌사(左司) 5개 초는 양성ㆍ용인ㆍ광주에, 우사(右司) 5개 초는 고양ㆍ파주ㆍ안산ㆍ과천ㆍ시흥에, 후사(後司) 5개 초는 지평ㆍ양근ㆍ가평ㆍ양주ㆍ장단에 있게 했다. 장용위는 1788년 장용영(壯勇營)으로 확대 개편되고, 1793년(정조 17년) 내ㆍ외영제가 성립되기 전까지 정조의 호위를 담당하며, 오위체제로 전환하고자 하는 정조의 군제개혁의 중심역할을 담당하였다.



정조, 마침내 장용영을 설치하다



구선복의 역모와 장용영 설치

영조, 정조 시대 무반들의 우두머리였던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갈 때 사도세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그 광경을 11살의 어린 정조는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정조는 군사력을 장악하지 못한 국왕이었기에 구선복을 제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정조는 이 비극적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의 호위부대인 장용위를 확대하여 구선복을 비롯한 노론이 장악한 오군영을 제어할 수 있는 친위 군영을 만들고자 하였다. 마침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인의 아들인 상계군 담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정조는 이를 구선복을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다.

상계군 담이 죽고 며칠 후 담의 외조부인 송낙휴가 상계군 담의 죽음에 정조 즉위 초 영의정을 역임한 김상철과 구선복의 아들인 구이겸이 연관되어 있다는 고변을 하였다. 당시 정조는 후사인 문효세자가 죽고 다른 후사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고, 이미 나이도 30대 중반을 넘은 상태였다. 따라서 상계군은 장차 세자로 책봉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임과 동시에 정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할 수 있는 신분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참여하였던 김상철이 정조의 등극 이후 배척받는 위치에 처해져 구선복 가문과 연계하여 상계군을 추대하기로 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정조는 즉시 추국청을 설치하고 김상철의 아들 김우진과 구선복의 아들 구이겸을 강력하게 심문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우진은 문양해 역모사건의 주범이었던 이율과 친분을 맺고 있었던 사실이 새로 발각되었지만, 역모사건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 상계군 담의 죽음이 역모사건으로 확대된 직후에도 구선복은 훈련대장의 지위를 내놓지 않을 정도로 오만한 자세를 보이다가 추국청에 의해 체포되었다. 구선복은 추국청에서 이 사건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라고 하며 결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사건의 관련자였던 장언회와의 대질 심문 끝에 1년 전에 있었던 홍복영과 문양해의 역모사건에 자신이 관여하여 상계군 담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반정을 추진하다 그만두었다고 실토하였다. 이에 정조는 구선복에게 최고의 형벌인 능지처사를 내리고, 그의 또 다른 아들인 구명겸을 효수하도록 하였다.

결국 정조는 홍복영 사건을 통해 장용위를 설치하였듯이, 이 사건을 통해 단순히 궁중수비만을 전담하는 부대가 아닌 역모사건을 방지할 수 있는 군영으로 확대하는 것을 추진하게 되었다. 아울러 정조는 구선복의 제거를 통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이 사건을 통해 오군영의 대표인 훈련도감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친위군영인 장용영 창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장용영 창설 목적 1 - 친위군 강화

정조의 장용영 설치는 일차적으로 자신과 궁성을 호위하기 위한 친위부대로서의 기능에 주안점을 두었다. 정조는 장용영 내외영제를 수립하였는데, 조선 초기 도성과 태조의 고향인 관북(함경도)의 땅을 지켰던 오위체제를 그대로 따름과 동시에, 장용위의 명칭과 화성에 설치된 친군위의 명칭도 과거 오위체제의 관북 군영의 명칭을 따랐다. 이는 태조로부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였다. 또 정조는 장용영의 창설을 통해 소외세력 - 서북지역 백성에 대한 배려와 서얼들에 대한 인재 발굴 - 의 사회적 진출을 추진하였다.

장용영 창설 목적 2 - 균역법 혁파를 통한 민생안정

정조는 즉위 초부터 백성들의 생활이 왜 그렇게 어려워지는지 폐단의 근원을 깊이 궁구하였고, 이러한 고민 속에서 나온 정책은 바로 왕실에서 사용하는 재정을 줄여 이 비용으로 새로운 군영인 장용영을 창설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정조가 이처럼 민생 안정을 추구하는 군제개혁을 시도한 것은 조선후기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던 군역 때문이었다. 당시 균역법이 운영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으로 인해 민생은 파탄이 날 지경이었다. 영조는 백성들이 1년에 군역 세금으로 면포 2필을 납부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해서 양반을 포함한 조선의 모든 백성들이 1년에 면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양반들은 세금을 내기 싫어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군역 세금을 회피했고, 결국 그 몫까지 백성들이 충당하다 보니 오히려 균역법의 좋은 의도는 사라지고, 백성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균역법을 혁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장용영을 만든 것이다. 원래는 새로운 군영을 창설하게 되면 그에 따른 재정이 필요하고 이는 백성들의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장용영을 만들고 그 운영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건국 때부터 있었던 왕실의 사적 재산인 내탕전의 비용과 둔전으로 장용영을 운영하고. 이를 통해 오히려 백성들에게는 요역과 부세를 감해주고자 했다. 또 장용영의 둔전에서 발생한 농민들의 수확량에 대한 세금을 받을 때는 가장 헐한 전세(田稅), 대동미(大同米)의 예에 따라 받도록 하였다. 한편 정조는 장용영의 설치를 통해 오군영체제의 도성방어체제를 조선 초기의 병농일치를 통한 오위체제로 변경시키고자 하였다. 정조가 국방체제를 오위체제로 전환하고자 한 것은 오위체제가 병농일치를 통한 개병제이기에 군역을 담당하는 양인이 따로 세금을 내지 않고 자신의 군역 의무기간을 이행하면 경제가 안정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정조가 생각하는 병농일치를 통한 장용영의 체제는 장용영 소속의 둔전에서 군사의 반은 농사를 짓고, 반은 소속 부대에서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취재를 통해 군사를 선발하고, 이들에게는 둔전에서 나오는 비용으로 급료를 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정조의 장용영 창설은 신해통공(辛亥通共)과 같은 사회경제정책과도 연관되어 있다. 통공정책은 각 군문과 시전상인의 결합을 통해 사회경제적 안정을 흔드는 것을 방지하고, 이들의 재정적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실시된 측면이 있다. 즉, 장용영 창설을 통해 중앙 오군영과 시전상인의 결탁을 최소화하고 자유상인을 확대하여 경제를 활성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함께 내포되어 있었다.

장용영 창설 목적 3 - 북벌을 위한 군사력 증강

정조는 청에 대해 북벌론과 북학론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것은 북학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조선의 문화와 역량이 청나라보다 우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정조는 북벌에 대한 의지를 즉위 초부터 보여주었다. 심지어 정조의 북벌에 대한 표현은 오히려 효종대보다 적극적이었다. 정조는 남한산성 내에서 병자호란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모든 시설물을 돌아보면서 신료들에게 북벌에 대한 의지를 새삼 강조했다. 정조의 효종 북벌론에 대한 계승은 일상적인 행동에서도 이어졌다. 정조는 효종이 후원에서 북벌을 위해 말타기 연습을 한 것을 좇아 본인도 청양문 안에서 말을 타고 다녔다고 강조했다. 또한 효종의 북벌에 대한 의지를 계승하기 위해 병조판서에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활을 쏠 때 쓰는 각지를 끼고 다니도록 했다. 또 정조는 효종의 북벌을 계승하기 위해 능행 시 군사훈련과 열병을 실시하고, 수어청과 총융청을 재정비했다. 아울러 장용영을 북벌을 위한 군영으로 만들기 위해 청사를 이현(梨峴)에 건립한 것뿐만 아니라, 1792년(정조 16년) 겨울에 선인문 아래에서부터 이현의 동구까지 양편으로 거주민들을 이사시키고 장용영 장교와 군사들을 입주시켰다. 이는 군사를 보다 효율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한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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