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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세계정치 저우언라이를 보다

덩자이쥔, 저우얼쥔 지음 | 경지출판사



위기의 세계정치 저우언라이를 보다

덩자이쥔, 저우얼쥔 지음

경지출판사 / 2017년 6월 / 728쪽 / 23,800원



저우언라이는 위대한 정치가이자 걸출한 인물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저우 총리는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며, 인류를 매우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이 만약 어떤 사람ㆍ어떤 국가와 어떤 협의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상호간에 이해하고 성실해야 하고 진실되게 서로를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와 교류하는 과정 중에 자신의 태도를 숨긴 적이 없었다. 그는 나의 관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항상 진지하게 나의 의견과 생각을 경청했다. 미ㆍ중 수교에서도 그는 우리의 존중을 얻어냈으며, 그는 회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극단적으로 곤란한 시대의 위대한 민족의 총리였다. 그들은 혁명을 진행했고, 또 다른 일종의 혁명인 생산을 진행한 후에 문호를 봉쇄하고 타국과 내왕하지 않았는데, 이를 타개코자 저우언라이는 이 국가를 새롭게 세계로 데리고 나갔다. 중국 인민은 저우언라이를 중국의 수많은 우수하고 훌륭한 것의 대표로 삼았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저우언라이는 오늘날 중국 인민을 위해 매우 훌륭한 기초를 세웠다. 나는 만약 저우언라이가 오늘의 중국을 볼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매우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에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세계의 수많은 지도자를 만나보았지만 저우언라이와 같이 나에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준 사람은 없었다.

저우 총리는 내 마음속의 위인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수상)

1973년 1월, 나는 일본 통산대신으로 일ㆍ중 국교정상화 후에 첫 번째 대표단을 인솔하여 중국을 방문하였다. 기억하기론 세 차례에 걸쳐 합쳐서 10시간 동안 저우 총리와 회담을 나눴으며 그때 받은 인상이 매우 깊었다. 그는 위대한 전략가로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국공합작 기간 동안 이미 충칭에서 마오쩌둥의 조수 및 중국공산당 대표로 국민당 장제스 대표와 담판을 했는데, 당시 담판을 하면서 활약한 저우 총리를 보면 나는 그가 뛰어난 외교가이자 전략가라고 생각했다. 중국이 독립한 후 그는 외교부장을 겸임하여 거대한 외교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독립한 중국이 아직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주도적으로 나서서 중국을 선전하고 독립한 중국의 존엄을 처음으로 표현하였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나는 통산대신이었지만, 소련과 미국, 일본과 중국 및 아시아에서 어떻게 외교와 전략을 전개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고, 일본의 방위정책을 이야기하고, 안전보장 정책의 실현은 어디에 둬야 하는가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표시했고 질문도 많이 했다. 나는 마오쩌둥의 유격 전략과 유격전에 관하여 논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당시 중국공산당의 전략사상에 대하여 탄복했었다. 내가 젊었을 때의 경험을 저우 총리도 매우 흥미 있어 하고, 이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점심때부터 계속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해서 저녁에 우리는 또 4시간을 더 이야기했다. 그래도 그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인민대회당에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의 위대한 총리는 일본의 일개 통산대신과 연거푸 세 차례나 회담을 진행하였는데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회담이 끝난 후, 그는 나와 같이 이층에서 일층으로 내려와 친히 나에게 외투를 걸쳐주었고, 나를 대문앞 차까지 배웅했다. 당시 바깥은 매우 추웠는데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매우 감동했다. 저우 총리가 후에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을 때, 다가와 의원과 후루이 의원이 병원으로 문병을 갔다. 당시 저우 총리는 이미 매우 수척해 있었지만, 그는 일본 의원에게 말하기를 일본과 중국의 관계에 대하여 우려를 표하였고, 우리들이 영원히 화목하고 우호적으로 지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후 내가 수상이 되어서 중국을 방문하고 저우 총리에게 분향하고 싶다고 하여 저우 총리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의 미망인인 덩잉차오가 환영해 주었다. 나는 저우 총리의 안식을 기원하고 생전에 나에게 보인 관심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마오쩌둥도 위대한 정치가이지만, 만약 저우 총리의 보좌가 없었다면 아마도 중국혁명의 성공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우 총리의 인격, 그의 애국심으로 중국공산당이 단결하여 혁명을 완성했고, 지금의 중국을 건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저우 총리를 존경하기 때문에 나의 응접실에 내가 저우 총리를 만났을 때의 기념사진을 걸어놓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레이건, 시라크 등 세계 각국의 위인들의 사진을 두고 있다. 이렇듯이 저우 총리는 내 마음속에 있는 위인 중의 위인이다.

그는 나의 일생을 변화시켰다 (한수인[韓素音] 영국화교 작가)

저우 총리를 언급하면 울고 싶어진다. 그는 1976년 세상을 떠났고,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를 생각하면 여전히 슬프다. 나는 『저우언라이와 그의 세기』를 쓰면서 적지 않은 눈물을 흘렸다. 덩 큰언니도 나에게 매우 잘해주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을 생각하기만 하면 나는 울고 싶어진다.

나는 중국인들이 그 두 사람에게서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야 하며, 전 세계도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병은 무엇일까? 그것은 도덕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도덕이 없다. 현재의 젊은이들은 모두가 매우 총명하며 돈 모으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중국인에게는 정신문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저우 총리가 이런 측면에서 정신문명이 풍부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은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혁명정신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덕은 결코 과거의 구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도덕을 말하는 것으로, 곧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국가를 위해 애국하며, 인민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해야 하는 도덕을 말한다. 나는 저우 총리가 이런 점에서 중국에만 한하지 않는 위대한 세계적인 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 베이징에서 성장했다. 후에 유학을 갔다가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입하자 1938년에 스촨성으로 돌아와서 항전에 참가했다. 그때 나는 중국인과 결혼했는데, 그 중국인은 장제스 시종실에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1941년 1월 저우 총리가 충칭에서 연설을 하였는데, 나는 감히 남편에게 말하지 못하고 몰래 가서 들었다. 연설을 듣고 나는 마음속으로 장래 반드시 그가 말한 것처럼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당시 저우 총리와는 만나지 못했다. 후에 1956년 귀국 후에야 비로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그의 비서가 공평이었는데, 그녀는 나의 옌징 대학 동창이었다.

나는 공평에게 편지를 써주며 저우 총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좋다고 말했다. 이는 처음으로 저우 총리와 담화를 나누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에 또 여러 차례 그를 만났다. 내가 매번 귀국할 때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 만나면 반드시 한 번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는 내가 밖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연설을 요청받는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과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쓴 책이 비교적 유명하게 됐기 때문인데, 당시는 미ㆍ중 양국의 국교가 아직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나만이 중국을 갈 수 있었기에 수많은 미국인들은 중국이 도대체 어떠한 나라인지를 나에게서 듣고 싶어 했다.

나는 저우 총리가 나의 일생을 변화시켰고 나의 견해를 변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저우 총리는 친근감이 넘치는 분이었기에 우리 모두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게 하고 우리 모두는 그가 우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그를 보면서 나는 내가 어떻게 중국에 공헌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오나시스 부인은 “우리는 그를 매우 존경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저우 총리가 없었으면 중국의 미래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설, 경제, 교육에 있어서 저우 총리가 없었으면 그렇게 빠르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덩샤오핑이 있게 된 것도 수많은 부분에서 저우 총리와 노선이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그는 자신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를 몰랐다. 왜 모두가 그를 좋아했겠는가? 그는 사람을 잊지 않았고 모든 일에서 그들을 돌봐주었기 때문이었다.

국가의 모든 일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을 부여잡았다 (위안바오화[袁?華],국가계화위원회 전 부주임) 1952년 내가 제1차 5개년 계획의 편성에 참여했을 때 처음 저우 총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해 8월, 나는 저우 총리가 영도한 중국정부대표단을 따라 소련을 방문했다. 9월 22일 저우 총리는 귀국하였고, 나는 다음해 5월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1953년 3월 8일 저우 총리는 다시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9일에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저우 총리가 돌아간 후 우리는 소련의 각 지역을 참관하며 경제 회복 상황을 파악하였다. 저우 총리는 매번 올 때마다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하였으며, 그가 가고 나면 우리 역시 인원을 파견하여 그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는 매우 자세히 들으며 우리와 소련의 담판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매우 세밀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계획한 숫자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발견할 경우, 그것을 담당한 동지에게 전화를 걸어 비판하였으며, 다음날 식사를 할 때 주도적으로 그 동지와 건배하였다. 담판을 거쳐 결국 소련이 156개의 항목을 지원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 항목들은 우리나라 공업건설의 골간을 이루는 것들로 현재까지도 역할을 하고 있다. 저우 총리는 이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1962년 중국공산당 중앙에서는 확대 중앙 공작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7,000인 대회를 마친 후 다시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천윈 동지가 경제 상황을 분석하고, 저우 총리가 발언을 통해 동의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대약진운동의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업무를 멈추었던 중앙경제팀을 회복시키기로 결정하고, 천윈에게 팀장을 맡도록 하였다. 중앙경제팀은 화이런당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천윈의 보고를 들었는데, 천윈은 “중공업과 기초 건설의 지표가 근본적으로 손상된 것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저우 총리는 천윈의 의견에 완벽히 동의하였다.

1964년 국민 경제가 기본적으로 회복되자 마오 주석은 소계위의 건립을 제창하였고, 저우 총리가 이 의견을 지지하였다. 그는 시화청에서 회의를 열어 소계위의 업무에 대해 백방으로 트집을 잡는 일부 동지들을 비판하였다. 나는 저우 총리가 화를 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 저우 총리는 노트와 연필을 모두 던져버렸다. 저우 총리는 재차 논의하여 소계위를 지지하였으며, 비록 어려움이 있었지만 소계위의 임무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1966년 싱타이 지진이 발생하자, 저우 총리는 직접 재난 지역으로 가서 구조현장을 조직하였으며, 돌아온 이후에도 여러 차례 리스광을 불러 지진 예보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는 진상을 물어 규칙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저우 총리는 지진 예보의 성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로 1967년 나는 직무 수행이 금지된 상태였는데, 저우 총리는 나를 보호하고자 노동절에 천안문에 오르도록 안배해 주었다. 그러나 조반파(造反派)가 허락하지 않았다. 저우 총리는 리푸춘에게 나를 불러 대화하도록 하고 다시 나를 보호하고자 시도하였다. 5월 상품판매박람회를 개최할 때 내가 나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인데, 조반파가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후에 저우 총리는 국무원 회의석상에서 우리에게 군사관제위원회 주임을 소개해주며, “위안은 내가 옌안에 있을 때 알게 된 사람이네. 이 사람의 역사는 비교적 간단한데, 학생 출신으로 혁명에 참가했지. 저 사람 좀 빨리 조사한 후 해방시켜 주게나. 난 일손이 필요하네.”라고 말하였다. 이 군사관제위원회의 주임은 꽤 괜찮은 자로, 3개월 만에 나를 정직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렇게 하여 1968년에 나는 ‘해방’되었고, 1969년의 계획 제정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국무의 생산 소조로 전되어 부조장을 맡았다.

한편 가저우바를 건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는 계속 의견이 갈린 상태였다. 창장유역에서 근무하는 동지들은 건설하지 말자고 주장하였고, 후베이, 우한의 동지들은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우 총리는 수없이 많은 회의를 소집하여 양쪽의 의견을 경청하였고, 이 사안을 저우 총리가 마지막으로 마오 주석에게 보고하였을 때 마오 주석은 “가저우바의 건설을 찬성한다.”고 지시하였다. 저우 총리는 가저우바 기술위원회의 건립을 건의하여 반대의견을 지니고 있던 린이산 동지를 주임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결국 가저우바 항목은 훌륭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1973년 덩샤오핑 동지의 활동 재개는 마오 주석이 결심한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저우 총리가 진행한 작업이었다.

저우 총리는 업무를 할 때 매우 세밀했으며, 책임감 있고 주도면밀하여 사소한 부분까지도 최선을 다했다. 한번은 우리가 보고를 하러 갔을 때에 그는 수첩을 꺼내 숫자 하나하나를 기록하였다. 우리는 서면 자료로 보충하면 되니 총리께서는 기록하실 필요 없다고 했으나, 저우 총리는 “장츠종이 나에게 서신을 보내 이미 이룩한 업적을 잘 지키고 삼가며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나와 마오 주석은 다르다고 대답하였네. 나는 마오 주석을 보좌하여 업무를 처리할 뿐이니, 이런 상황들을 잘 기록해 두었다가 마오 주석이 물어볼 경우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네.”라고 말했다.

그가 간부들에게 관심을 갖고 보호했던 일들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리스광이 지질부에서 논쟁을 벌였을 때, 총리는 전국지질업무회의를 개최하여 리스광이 참여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총리는 본인의 연설 전에 리스광에게 먼저 이야기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에게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대립하는 측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 20세기 진정한 지기 (덩푸팡[鄧朴方], 전국정협 전 부주석, 덩샤오핑의 장남) 저우 총리에 대해 부친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일찍부터 서로를 알았는데, 프랑스에서 일과 학업을 병행할 때 함께 살았다. 나에게 있어 그는 시종 형님과 같았다. 인민이 모두 그를 존중한다.”

부친과 저우 총리의 접촉이 많아진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52년 부친은 베이징에 가서 부총리를 맡았고, 저우 총리의 지도하에 업무를 수행하여 1952년부터 “문화대혁명”까지 부친은 줄곧 부총리로서 저우 총리의 업무에 협조하였다. 어느 때 저우 총리가 출국하자 부친이 총리 대행으로 그의 업무를 보았던 적도 있었다. 이 시기는 대략 10여 년이었는데, 부친은 줄곧 저우 총리를 존중하였고 그는 부친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후 부친이 총서기가 되어 중앙의 일상 업무를 주관하였을 때 저우언라이는 국무원의 일상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때 중앙의 업무와 국무원의 업무에 대해 두 사람은 서로 믿고 서로 이해하여 문제의 처리에 상호간 묵계가 이뤄져 있었다. 참고로 부친의 일 처리 방식은 비교적 과감하여 작은 일은 신경 쓰지 않고 큰일만 담당하였다. 반면 저우언라이는 외교를 담당하였는데, 외교에는 작은 일이라는 게 없어 처리 방식이 매우 치밀하였으니, 양자의 협력은 매우 좋았다. 부친이 저우 총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는 매우 존경하는 마음가짐을 늘 보였다.

한편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부친은 타도되었고 옛 간부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저우 총리는 마오 주석을 보필하면서 그들을 보호해주었다. 당시 상황은 험난하였다. 1969년 린뱌오가 “1호 대통령”을 작성하여 옛 간부들을 외지로 보냈는데, 그때 부친은 장시로 하방되었다. 그 후 장시에서는 부친을 간저우로 보냈는데, 저우 총리가 알고 난 후 장시성 “혁의회”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여 덩샤오핑이 65세이고 건강이 좋지 않으니 난창 부근에 배치하고, 2층 단독주택을 마련하여 위층에는 부친과 모친이 거주하고 아래층에는 업무 인원이 거주하게 하며 산책 정원을 줄 것을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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