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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평전

이창호 지음 | 벗나래



보재 이상설 평전

이창호 지음

벗나래 / 2018년 1월 / 287쪽 / 15,000원





출생과 학문 연구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다 / 학문에 힘쓰다 / 한학과 전통 유학사상

이상설은 1870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에서 선비인 아버지 이행우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7세 때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로 올라와 유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1877년 8세에 처음으로 한학자 이제촌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상설이 13세 때인 1882년 양부 이용우와 생부 이행우의 친상을 차례로 당하게 되었다. 그다음 해에는 생모인 벽진 이씨의 상도 당했다. 어린 이상설은 16세가 되어서야 탈상을 하고, 참판 서공순의 장녀 서씨와 혼인을 했다. 이상설은 이 무렵부터 의암 유인석에게서 배움을 얻는 한편, 의당 박세화를 스승으로 맞아 그에게서 한학과 유학을 배운다. 한편 이상설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이상설의 학문은 신구 학문을 겸수한 것이었으며 또 학문 분야도 광범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고로 이상설은 전통 학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유학을 공부했는데, 이미 20세를 넘으면서부터는 유학계에서 큰 학자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과거 급제와 출사

이상설이 처음으로 관계에 진출한 것은 그가 25세 때이던 1894년의 일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와 함께 응시한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인 갑오문과 병과에 응시하여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이상설은 한림학사에 제수되고 이어 세자의 시독관이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는 시대를 잘못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왕조의 질서를 뒤흔들려는 갑오 동학농민전쟁과 이를 구실로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이때에 조선에서 일본이 갑오개혁을 강제 시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1895년 4월 7일 이상설은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승정원을 개편한 비서감의 좌비서원랑에 제수되었고, 1개월을 근무하고 5월 8일 이후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아 6월 17일에는 그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아마 사직 상소를 올리고 자퇴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 중, 1896년 1월 22일 이상설이 27세를 맞이하던 때에 성균관 교수 겸 관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이상설의 문명과 학식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발탁하고 제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오래 봉직하지 못하고 한 달 만인 2월 22일에는 한성사범학교 교관에 전임되었다. 그러나 이상설은 한성사범학교 교관도 근 한 달 만인, 그해 3월 25일에는 사임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인 4월 19일에는 탁지부 재무관 주임관에 제수되었으나 6월 20일에 의원 사임하였다.

이상설이 관직에 나갔다는 기록은, 탁지부 재무관 벼슬에 나가지 않은 후 한동안 문헌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35세 때인 1904년 1월 14일에 궁내부 특진관에서 해임된 기록이 관보에 보인다. 그리고 그 후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위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져 가던 무렵에 관제이정소의 의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상설은 그 후 36세 때인 1905년 9월 6일에 학부협판에 제수되고 이어 9월 21일에는 법부협판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이상설이 최후의 관직인 정2품 의정부 참찬에 발탁된 것은 그해 11월 1일이었다.

을사늑약을 막고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ㆍ대한시설강령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ㆍ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이상설은 이런 사태 속에 의정부 참찬에 취임하여 일차적으로 조약 체결 저지에 힘썼다.

이상설이 펼친 늑약 저지 활동

이상설과 이시영 등 강직한 소장 지사들의 조직적인 저지로 을사늑약 체결이 쉽지 않자 이토 히로부미는 폭력수단을 동원하는 방법을 썼다.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회의를 열고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ㆍ미국ㆍ청국ㆍ독일ㆍ벨기에 등의 주한공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통감으로 취임하였다.



구국운동에 앞장서다



벼슬을 던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이상설은 더 이상 조정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는 곧 병을 얻었다는 것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다. 하지만 고종도 쉽게 이상설을 놓아 주지 않았다. 고종 황제는 이상설의 제5차 상소를 받은 후에야 퇴임을 재가했다. 이상설은 이때부터 관인의 신분을 벗어나 민간의 신분으로 항일 구국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된다.

을사늑약 파기운동 주도

정식으로 관직을 벗어 던진 이상설은 을사늑약 폐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시기 양반 유생들의 상소운동, 민영환 등의 분사, 을사오적 척살 시도, 의병운동 등이 다양하게 일어났다. 한편 이상설은 11월 30일 민영환의 자결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 네 거리로 달려가 수많은 민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나도 국가에 충성치 못하여 나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 지금 이 조약은 지난날의 병혁과는 다른 것이다.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백성이 깨닫지 못하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조약이 한 번 이루어짐에 나라는 망하고 인종(민족)이 이를 따라 멸종하게 된 것이다. 이제 민영환이 자결한 오늘이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하는 날이다. 우리 전 국민이 멸망함을 탄하여 우노라.’ 연설을 마친 이상설은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히며 자진을 시도했다. 유혈이 낭자하고 인사불성이 되자 사람들이 간신히 집으로 데려갔다.

민족교육 효시인 ‘서전서숙’ 설립 / 무상교육 실시

이상설은 을사늑약 반대 후 자택에 은거하면서 이회영, 이동녕, 장유순, 이시영 등과 은밀히 만나 더 이상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이 어렵다는 점을 간파하고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북간도 연길현 용정으로 갔다. 용정에 도착한 이상설은 국내에서 망명할 때 가산을 정리하여 가져온 자금으로 천주교당 회장 최병익의 집을 사들여 학교 건물로 개축하여 1906년 ‘서전서숙’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처음 학생 수는 22명이었고, 학과목은 역사ㆍ지리ㆍ정치학ㆍ수학ㆍ국제법ㆍ헌법 등이었으며, 철저한 항일ㆍ애국독립 사상 고취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1907년 3월 이상설이 이준 등과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외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일제의 신병인도 요구 때문에 용정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항일교육의 근절을 위해 간도 보통학교를 개교하고 각지의 서당을 매수하는 한편, 서전서숙 측에 매월 20원씩의 보조금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서전서숙 측은 이를 거절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혼춘 방면으로 떠나 탑두구 근처에서 수업을 계속했으나, 1908년 8월 20일 졸업식과 동시에 폐교되고 말았다.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선정되다



헤이그특사를 준비하다

이상설이 북간도에서 서전서숙을 개설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있을 무렵, 국내에서 이회영과 전덕기 등이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특사를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일제가 무력으로 대한제국 정부를 겁박하여 외교권을 강탈했다는 사실을 알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구상한 방안을 내시 안호영을 통해 황제에게 전하는 한편, 특사로 적합한 인물로 정사에 이상설, 부사에 이준과 이위종을 천거하였다. 당시 이준은 한성재판소 검사보로서 조신들의 비행을 파헤치다 면직되어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평의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이위종은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 이범진의 둘째 아들로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이었는데, 영어ㆍ불어ㆍ러시아어를 익힌 까닭에 헤이그에서 활동하기에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황제는 이와 같이 특사 3인의 천거를 받은 후, 4월 20일자로 국새와 황제의 수결이 찍힌 백지위임장을 보내왔다.

헤이그에 도착하다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특사와 함께 고종의 외교고문 역할을 한 헐버트에게도 별도의 신임장을 주어 헤이그로 파견하였다. 황제의 신임장을 지닌 이준은 1907년 4월 21일 한국을 출발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이 합류하였다. 그리고 6월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이위종이 합류했다. 그리고 6월 24, 25일경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의 특사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무사히 헤이그에 도착했다. 헐버트는 이 세 사람과는 별도로 시베리아 철도 편으로 프랑스 파리를 거쳐 비슷한 날짜에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가로막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못 함 / 동지 이준의 순국

세 사람의 대한제국 특사들은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요구사항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알리기 위해 준비한 〈공고사〉와 이상설이 직접 지켜보았던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박에 의해 맺어지게 된 과정을 소상히 적은 장문의 〈부속문서〉를 평화회의 사무국에 접수시켰다. 또한 6월 30일 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제시하면서 대한제국 특사단의 만국평화외의 참석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는 대한제국 특사단의 참석 여부는 네덜란드 정부의 소관이라고 에둘러 말하며 특사단의 참석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세 사람은 네덜란드 외상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그 역시 접견을 거부했고, 미국 대표에 대한 접견 요청도 거부당하였다. 이는 뒤에서 모든 방해공작을 조장하고 있던 일제의 만행임과 동시에 냉정한 국제권력정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은 회의참석이 거부되자 이번에는 다른 전략을 전개해 보기로 했다. 회의가 열리는 평화회의장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이위종이 유창한 불어로 일제의 야만적 한국침략과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공고사〉와 〈부속문서〉를 배포했다. 그런데 이 문건이 만국평화회의 기관지 《평화회의보》6월 30일자에 실리고, 기자회견 내용은 7월 5일자 현지 신문에 1면 톱기사로 보도되었다. 7월 9일 세 사람은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간곡한 발언을 이어 나갔다. 마침내 각국 언론에서는 관심과 함께 대한제국의 상황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는 즉석에서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세 사람의 열정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등 열강들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했다. 이미 일제는 영국과 러시아의 동진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1902년 영ㆍ일동맹에 이어 1905년 공수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또 일제는 미국과는 1905년 러일전쟁 종전 직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한국 지배를 양해하기로 한 뒤였다. 러시아는 평화회담 전까지 한국을 적극 지원하다가 태도를 돌변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내보였다.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7월 14일 돌연 이준이 사망한 것이다. 이준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이상설과 이위종은 만국평화화의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상설은 이위종과 함께 구미 열강을 순방하며 일제의 비겁함과 야만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구명하고자 구미 열강으로 떠났다.



구미를 순방하며 활동을 펼침



루즈벨트와의 면담 실패 / 조선의 영세중립화 주장

1907년 7월 19일 이상설은 이위종, 윤병구, 송헌주 등과 함께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에서 3일간 머문 다음 8월 1일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이상설과 그 일행들은 8월 1일부터 9월 초와 1908년 2월부터 1909년 4월까지 두 차례 미국 뉴욕에 머물면서 일제의 만행과 대한제국의 독립,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끈질기게 호소하였다. 이상설과 함께 동행한 헐버트는 미국 언론인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미국 정부의 대한제국 특사단에 대한 반응은 냉랭했으나, 반면에 미국 언론들은 한국특사들의 활동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참고로 한 연구가는 이상설의 헤이그 외교활동 이후의 활동을 6가지 - ① 미국에서 애국동지대표자대회 참석 ② 국민회 조직과 한흥동 건설 ③ 13도의군 편성과 성명회 선언 ④ 권업회 조직 및 권업신문 발간 ⑤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 ⑥ 신한혁명당 창당 - 로 정리했는데, 여기서 ①, ②의 요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애국동지대표자대회 참석이다. 이상설은 이위종과 함께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 조야에 한국독립지원에 관한 호소를 계속하면서 각지의 한국 교포를 결속시키고, 조국독립운동의 계기를 만들고자 하였다. 참고로 그는 1908년 8월 11일에서 15일 사이 콜로라도 주 덴버 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의 막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때 그는 이승만과 함께 연해주의 한인대표로 참석하였다.

다음은 국민회 조직과 한흥동 건설이다. 1909년 2월 1일 미국에서는 국민회가 조직되었다. 총회장은 정재관이었다. 4월에 이상설은 정재관, 최정익, 송중호 등과 함께 연해주로 출발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그는 이승희, 김학만, 정순만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러시아령 국경지방 홍개호 남쪽 북만주 밀산부에 한흥동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학교(한민학교)도 세우고 민족교육도 실시했다. 참고로 이 시기에 이상설을 만난 안중근은 그를 가장 존숭한다고 했다.

광무황제의 퇴위 강요 / 사형선고를 받다

해외에서의 국권회복운동과는 별개로, 당시 조선 국내에서는 일제가 ‘헤이그밀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자 온갖 권모술수와 위협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일제의 겁박에 시달리던 고종황제는 퇴위하고 말았다. 고종의 퇴위와 함께 황태자를 즉위(순종)시킨 일제는 국내의 매국노들을 십분 활용하며 대한제국의 목숨 줄을 차근차근 조여 갔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1908년 8월 통감부에 헤이그특사에 대한 궐석재판을 열도록 하고, 이 재판에서 이상설에게는 교살,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일제로부터 교살형을 선고받은 이상설은 다시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만리타국을 떠돌며 국권회복 투쟁에 여생을 바쳐야 했다.



연해주에서 활동을 시작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둥지를 틀다 / 신흥촌 건설

미주에서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치열한 외교 활동을 펼치던 이상설은 국민회의 결의로서 연해주 지역의 회무를 총괄하는 사명을 띠고 1909년 7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연해주 한인 사회는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었다.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사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기지를 물색하고, 토지 매입을 위해 기금을 모으고 미주 한인 사회에 지원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이상설은 여러 지역을 답사한 후 봉밀산을 후보지로 골랐다. 그리고 이상설은 이승희를 찾아가 봉밀산 일대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방략을 말하고 그와 함께 추진키로 합의했다. 자금은 미국의 교포들이 ‘태동실업주식회사’를 조직하여 모금한 5,000달러가 큰 몫을 하였다.

이상설과 이승희는 100여 가구의 한인을 봉밀산에 이주시키면서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한흥동)’을 개척하였다. 북간도에 세웠던 ‘서전서숙’과 비슷한 학교를 세워서 민족교육을 시키고 이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한흥동 건설의 소식이 국내의 애국지사들에게 전해지면서 신민회의 주요 간부인 안창호, 신채호, 조성환, 이종호, 유동열, 이동휘 등은 각기 한국을 떠나 1910년 4월 청도회의를 통해 밀산부에 10만 평을 사들여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추진하고자 안창호, 신채호 등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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