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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선비들

함규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최후의 선비들

함규진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0월 / 318쪽 / 16,000원





개화를 용서할 수 없던 선비, ‘최후의 최초’가 되다_ 최익현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비장한 얼굴로 굳게 잠긴 광화문 앞에 꿇어 엎드려 등에는 큼지막한 도끼를 짊어진 채 몇 번이고 ‘통촉’을 외치는 한 사람의 선비. 그는 이제 막 유배지에서 돌아와 피로도 채 풀리지 않은 몸이었으나, 스스로 보기에 하늘이 무너져도 용납할 수 없는 조정의 조치, ‘개항’이라는 조치를 청천벽력처럼 듣고 달려와 엎드리고는 몇날 며칠 동안 철회를 촉구하고 있었다. 여염 백성들은 그 서릿발 같은 기개에 찬탄하며 몰래 다가가 ‘힘내시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개항이 뭐고 수호조규가 뭔지는 잘 몰라도, 의로운 선비가 목숨 걸고 반대하는 일이니만큼 틀림없이 고약한 일, 나라 망치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가 바로 면암勉庵 최익현이었다. 광란과 격변의 시대의 가장 앞줄에 섰던 선비, 영원할 것만 같던 꿈이 무너지는 순간을 가장 먼저 체험한 선비였으며,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겨 오랫동안 본보기가 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희망을 가슴에 품다

최익현은 1833년(순조 33), 경기도 포천에서 최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최익현의 집은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어 연명했다. 그러나 최대는 어떻게 해서든 자식을 출세시켜 집안을 일으켜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맏아들 최승현을 친척 집 양자로 준 다음에는 둘째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최대였다. 영특했던 최익현은 14세가 되던 1846년에는 큰 선비인 화서 이항로의 집에 기거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20세가 되기까지 이항로의 가르침을 받았다. 최익현 일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는 이 시절을 영영 잊지 못해 나중에 상소를 올릴 때도 “제 스승 이항로의 가르침”을 자주 언급하곤 했다. 그의 사상 역시 이항로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위정척사의 진면목

그러면 이항로의 사상은 무엇이었는가? 성리학자들은 모든 일을 이(理)와 기(氣)를 중심으로 생각했다. ‘이’는 자연 질서와 인간 사회의 질서를 두루 꿰뚫는 불변의 이치이며, ‘기’는 천지 만물에 독특한 형태를 부여하는 실체다. 모든 것은 이와 기로 이루어지므로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나(불상리, 不相離), 이와 기가 서로 혼동되거나 혼합될 수 없다(불상잡, 不相雜). 여기까지는 모든 성리학자가 같은 입장인데, 불상리와 불상잡 중 어느 측면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이른바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나뉜다. 주리론자들은 모든 사물이 각양각색인 듯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로 일관된다고 하며,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동일성을 강조한다. 반면 주기론자들은 하나의 이가 모든 것을 꿰뚫는다 해도 사물에 개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기의 차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에 주목한다. 주리론자들은 그 어떤 현상에도 똑같은 이치만을 갖고 이야기하므로 독단론적 관념론에 빠질 위험이 있고, 주기론자들은 차별성을 강조하다 보니 통섭적 시각이 부족해질 수 있다.

그러나 사상이란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사회적으로 다른 의미를 띨 수가 있다.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관용과 화합’이라는 주제를 두고도, 주리론은 ‘우리와 풍속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지만, 저들도 우리와 같은 이치에 따르는 존재이니 우리와 근본적으로 같다’는 접근을, 주기론은 ‘다른 풍토에 따라 다른 풍속이 이루어지니, 우리에게 생소한 문화라고 해서 배척할 필요는 없다’는 접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항로는 주리론과 주기론을 통합한 사상을 제시했다. 이항로는 기의 작용에 따라 서로 이질적인 존재들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존재들 사이에서 이가 기를 제어하는 것과 같은 제어와 선후의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중화’와 그 이질적인 대상으로서 ‘오랑캐’가 있는데, 중화와 오랑캐는 결코 동등하거나 화합할 수 없고 중화가 오랑캐를 통제하는 상태만이 올바르며, 그 반대가 되거나 양자가 뒤섞이는 일이 일어나면 세상은 끝장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몽골족이나 만주족이 황제의 자리에 앉았던 원이나 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양 문물에 대해 극단적인 배척을 주장하면서, 병인양요가 벌어지던 1866년에는 75세의 노구에 병든 몸을 이끌고 궁궐 앞으로 나와 ‘척화’를 외쳤던 것이다. 이런 이항로의 사상을 그대로 흡수한 최익현 역시 ‘위정척사’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으며, 개화에 대해서는 손톱만한 양보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최익현에게 천하에서 가장 큰 근심은 서양 문물이 조선의 강토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여태까지 소중히 여겨온 가치가 모조리 구렁텅이에 빠질지도 모를 수상한 시대에, 최익현의 이런 태도야말로 선비의 귀감이라고 두루 여겨졌다.

‘민중의 별’이 된 최익현

최익현은 23세가 되던 1855년(철종 6)에 명경과에 급제했으며, 승문원 관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최익현은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신창 현감 등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던 그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868년(고종 5) 10월의 상소 때문이었다. 당시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여러 정책(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모시던 만동묘 철거, 서원 철폐, 남인 천거 등)은 최익현이 속한 화서학파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이를 반드시 바로 잡아야 했다. 마침내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상소문을 올렸다.

최익현의 이 상소는 흥선대원군을 노골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모두 경복궁 중건 사업을 밀어붙여온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걸고넘어지는 것이었다. 조정은 이 상소문을 둘러싸고 한창 시끄러웠고 최익현에게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독단적 행보가 못내 못마땅했던 고종은 한사코 최익현의 편을 들어주었다. 고종은 최익현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서 사헌부 장령에서 물러나자, 곧바로 그를 더 높은 품계인 돈령부 도정에 임명했다. 재야의 선비들과 백성들도 최익현의 상소에 통쾌해했다. 이 일로 최익현의 이름은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최익현은 5년 뒤인 1873년, 이번에는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더 날선 공격을 가했다. 먼저 10월에 “조정에서는 정론이 사라지고 속론이 마구 떠돌며, 아첨하는 무리는 뜻을 펴고 정직한 선비들은 숨어버렸다.”며 흥선대원군이 쥐고 흔들던 인사 체계를 에둘러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고종이 달갑게 받아들이며 그를 호조참판에 제수했다. 이어서 11월에도 또다시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의 정책이 “떳떳한 하늘의 이치와 윤리를 씻은 듯이 없애버렸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과격한 상소문을 놓고 고종은 이중적인 결정을 내렸다. 한편으로는 최익현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면서, 한편으로는 “상소문 가운데 나를 핍박하는 말이 있다.”며 최익현에게 유배형을 부과한 것이다.

아들로서의 아버지의 정치가 인륜을 파괴했다고까지 극언하는 사람을 마냥 두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상소를 도화선으로 흥선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났고, 그 뒤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을 추종하던 관리들과 종친들이 최익현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수도 없이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최익현을 제주도에 유배하는 것으로 처벌을 마감했다. 민초들은 그가 유배지로 가는 길목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어 이 의로운 선비를 환호와 눈물로 전송했다. 그는 명실공히 민중의 영웅이 된 것이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이유

그러나 시대의 바람은 갈수록 빠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불어댔다. 1876년, 유배에서 풀려나 있던 최익현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일본 군함이 강화도와 제물포를 공격해 분탕질을 했고, 이에 놀란 고종과 조정 대신들이 일본과 수교하는 조약을 맺기로 했다는 것이다. 최익현은 바로 궐문 앞으로 달려가 상소를 올린 다음, 도끼를 짊어지고 궐문 앞에서 노숙하며 하회를 기다렸다. ‘제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도끼로 저를 죽이소서’라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저들이 비록 왜인의 이름을 칭탁했으나 실은 양적입니다. 강화하는 일을 이루면, 사학의 서책과 천주의 초상이 교역물에 뒤섞여 들어오고, 얼마 후면 전도사와 신자가 온 나라에 가득해질 것입니다. ……조만간 집집마다 사람마다 사학을 할 것이고, 그러면 아들이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게 되어서, 예법은 시궁창에 빠지고 인류는 금수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저들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입니다. ……사람과 짐승이 한자리에 있으면서 걱정이 없기를 보장한다니! 신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 즉 ‘도끼를 지고 궐문 앞에 엎드려 척화의 뜻을 밝힌 상소문’은 이처럼 이항로에게서 물려받은 위정척사론을 절절하게 담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니 곧 서양이며, 서양인은 삼강오륜도 모르니 곧 사람 탈을 쓴 짐승이나 같다. 사람은 사람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놀아야 하는데 이제 강화하고 개국한다면 사람이 짐승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고 개혁한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종이 그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아 최익현은 흑산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3년 뒤에 풀려나 보니 이미 강화도조약은 맺어졌으며, 일인과 서양인이 궁궐에 버젓이 출입하고 있었다. 최익현은 절망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등의 큰 변란이 연달아 일어날 때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1895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더는 앉아만 있을 수가 없던 최익현은 한양으로 갔다. 그는 고종에게 간간이 상소를 올려 ‘서양 문물에 빠지지 말고, 오랜 제도를 고치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고종도 벼슬을 내려 최익현을 조정으로 불렀다. 하지만 서로가 마이동풍이었다. 그렇게 또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최후의 길, 풀리지 않는 문제

1906년, 그는 마침내 움직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국권이 상실되자, 그는 이제까지의 삶에서 가장 두려운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금수 같은 왜인과 양인이 설치는 것도 아니었고, 황후가 대궐에서 피살되고 임금이 외국 공사관으로 피난을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나라가 망하고 있는데, 선비를 자처했던 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대부분 심상해하는 모습이었다. 30년 동안 숨 가쁘게 이어진 격변과 반전, 또 반전을 겪으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 충성이란 무엇이며 의리란 무엇인가 하는 의식이 아예 마모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최익현은 이것만은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왕조는 언젠가 망하기 마련이며 오랑캐가 날뛰어도 결국에는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 떳떳한 도리를 아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무덤에 반쯤 집어넣고 있던 발을 서둘러 뺐다. 그리고 마침 고종의 밀지가 내려오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국가에서 선비를 기른 지 500년, 힘을 내어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의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성공할 가망이 별로 없다는 말에, 이 수염 허연 74세의 의병장이 대답한 말이었다.

4월 13일,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궐기한 최익현의 의병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두루 사람과 물자를 모았으며, 800여 명의 병력으로 정읍과 흥덕을 거쳐 순창에 입성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했다. ‘병력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칙명 앞에서 고민하던 최익현은 앞서의 밀지가 진정한 고종의 뜻이라 여기고 남원으로 진군했는데, 그들을 막아서는 병력은 일본군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진위대임을 알고는 “동포끼리 학살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해산하자.”며 깃발을 거두었다.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나는 여기서 죽겠다’며 자리를 지키던 최익현의 곁에는 그를 흠모하던 임병찬을 비롯한 10여 명만이 남았다.

민중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지만 명분의 굴레를 벗고 전사로 거듭날 수는 없었던 의병장 최익현의 한계였다. 그 한계는 일본군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쓰시마섬에 구금되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공자께서 천하가 어지러우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나가려 하신 일과 노중련이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하면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다고 한 일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하는 꿈을 꾸었다. 최후의 최후에, 선비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 옳은가, 목숨을 버리는 것이 옳은가? 1906년 11월 17일, 그는 아마도 이 난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의 운구 행렬에는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최익현은 자신의 죽음으로 평생에 걸쳐 지키려 했던 선비의 대의를 대중에게 실감시켰다. 새로운 세상에서 그것은 ‘독립운동’과 ‘민족주의’로 전화되었고, 일제와 맞서 최후까지 항전한 독립투사로 그는 신화화되었다. 그런 비타협적이고 장렬한 투쟁 정신은 장차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벽두, 그 첫 희생자가 된 그에 의해 선비 정신이 오직 지조와 절개뿐이라는 인식이 심어진 것은 과연 긍정적인 일일까? 선비는 천하를 위해 더 실용적인 근심을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한 떨기 벚꽃처럼 지사의 길을 가다_ 김옥균



군주에 불충하고 경전에 불순하고

김옥균을 ‘최후의 선비’라고 불러야 할까? 그는 개화파 중에서도 최고의 급진파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볼모로 삼고 국정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실행한 사람이다. 또한 그렇게 권력을 잡고(고작 3일에 그쳤지만) 추진한 개혁이란 최익현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성현의 가르침을 쓸어 없애고 스스로 금수의 지경으로 떨어지려는 것’이었다. 군주에도 불충하고 경전에도 불순했던 사람을 과연 선비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김옥균은 유교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배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유교의 가르침 중에서 다른 무엇보다는 ‘경장更張’을 중시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부강한 나라, 아니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나라였다. 그러기 위해 그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기회가 왔을 때 그 위에 대뜸 올라탔다. 그 줄이 너무나 여리디여린 줄이며, 줄이 끊어지는 날이면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한다는 사실이 뻔히 보였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젊은 그가 이상을 실현할 기회가 오자 그만 신중한 판단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공자가 그랬듯,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일까?

‘조용한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나다

고균古筠 김옥균은 1851년(철종 2) 충청남도 공주에서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병태는 당대의 최대 세도 가문이던 안동 김씨의 일맥이었으나, 시골에서 서당 훈장을 하며 농민 반, 선비 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준 맏아들을 애지중지하며 ‘옥균玉均’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구슬 같은 아기가 장차 자신과 가문을 파멸로 몰아넣으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로.

다가오는 파멸을 모르기는 그의 조국,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김옥균이 신동이라는 감탄과 희망을 부모에게 안겨주던 1845년, 일본에서는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포 외교’로 도쿠가와 막부를 위협하고 250년 이상 계속된 쇄국이 무너지고 ‘개화’의 시대가 열렸다. 또 중국에서는 이미 12년 전에 아편전쟁의 결과 난징조약이 맺어져 있었다. 이웃나라들이 서세동점의 급류에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던 시기에, 조선은 여전히 세도정치의 그늘 아래 부패와 정체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백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김옥균은 9세 때 세력이 있었던 종숙 김병기의 후사를 잇기 위해 양아들이 되었는데 그의 앞집에는 김홍집이 살았고, 옆집에는 서재필이 살았다. 조금 걸어 내려가보면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집이 모여 있었다. 김옥균ㆍ박영효ㆍ홍영식ㆍ서재필ㆍ서광범은 한데 몰려다니며 글공부와 놀이를 즐겼다. 이 ‘다섯 꼬맹이들’은 훗날 ‘갑신오적’으로 불리는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며, 그중 나이가 많았던 김옥균이 자연스레 리더가 된다. 그들은 북학北學, 즉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자는 사상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접한다. 북학이 주자학의 틀을 고집하던 당대의 주류 사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마련했다면, 청나라를 거칠 것이 아니라 서양의 문물을 바로 보고 배우자. 그리해 급진적인 개혁에 나서자는 개화사상은 김옥균이 10세 넘어 싹트기 시작했다. 11세 때 김옥균은 강릉 부사에 임명된 양부 김병기를 따라 강릉으로 간다. 강릉 부사로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돌보느라 골머리를 앓는 양아버지를 보고 김옥균은 ‘경장이야말로 급선무’라는 시각을 굳혀갔다. 1872년 김옥균은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이제 젊은이가 된 다섯 꼬맹이들은 서양 학문을 익히고 개화를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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