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의 거장들
안문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외교의 거장들
안문석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2월 / 354쪽 / 16,000원
유럽 평화의 조율사 ?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외교의 개척자
메테르니히만큼 많은 별칭이 붙어 있는 외교관도 드물다. ‘외교의 개척자’, ‘외교의 달인’, ‘외교의 대가’, ‘외교의 거장’ 등으로 묘사된다. 그만큼 현란한 외교를 펼쳤다는 이야기다. 메테르니히는 1773년 5월 15일 코블렌츠에서 태어났다. 메테르니히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프란츠 게오르게 메테르니히는 라인강 유역의 세 대주교령(트리어 대주교령, 쾰른 대주교령, 마인츠 대주교령)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였다. 메테르니히는 준수한 외모에 성격도 활달한 편이었다. 이런 점들은 추후 그가 유럽 각국을 다니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1792년부터는 아버지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때 오스트리아 통치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 주재 대사였다. 1794년에는 네덜란드 주재 공사가 되었다. 그리고 1797년에는 베스트팔렌 백작령들을 대표하는 자리를 맡게 되었고, 1801년에는 드레스덴 주재 공사가 되었다. 또 1803년에는 프로이센 주재 대사를 맡았고, 1806년 프랑스 주재 대사가 되었는데, 프랑스 대사 시절 활력 있는 외교관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와 면담의 기회를 종종 가졌다.
한편 프랑스의 외교장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에게서 외교의 다양한 기교를 배우기도 했다. 이렇게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외교 활동을 하면서 인맥을 확장한 메테르니히는 1809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장관이 되었고, 오랜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1821년에는 총리에 올랐다. 그리고 27년이나 오스트리아 총리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가 1848년 혁명의 물결을 맞았다. 유럽 전체의 자유주의적인 격랑이 오스트리아에도 밀려들어와 빈에서도 시민혁명이 발생했고, 보수주의자 메테르니히에 대한 퇴진 요구가 거세졌다. 결국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망명을 해야 했다. 거기서 3년을 살다가 1851년 오스트리아로 귀국해 1859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세력균형을 금과옥조로 여기다
메테르니히는 프랑스혁명 세력과 나폴레옹을 세력균형의 파괴자로 보았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영국 등 유럽의 왕국들이 비슷한 힘으로 균형관계를 유지하면서 질서를 유지해왔는데,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고 나폴레옹이 등장해 주변국을 침략하면서 질서가 깨졌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유럽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연합을 형성해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네 차례에 걸쳐 대 프랑스 연합이 이루어졌다. 1793년 제1차 연합은 영국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가담했다. 그리고 1797년 제2차 연합은 영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되고 오스트리아와 포르투갈이 가담했다. 한편 1805년 제3차 연합은 영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참여했다. 그리고 1813년 제4차 연합은 프로에센과 러시아가 중심이 되었고,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가담했다.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전쟁과 연합의 과정을 모두 경험했고, 제3차 연합 이후에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세력을 결집하는 데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태생적 한계
메테르니히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린다. 어떤 이는 유럽의 평화를 이룬 탁월한 외교관으로 높이 평가한다. 나폴레옹전쟁 후 유럽 대륙은 러시아가 강자였다. 전체적으로는 영국의 국력이 앞섰지만, 영국은 해양 세력이어서 대륙의 일에 일일이 간섭하기 어려웠다. 러시아의 패권이 유럽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알렉산드르 1세는 그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폴란드를 통째로 삼키려 했다. 이를 막는 데 메테르니히가 크게 기여했다. 또 프로이센의 급성장도 일정 부분 저지했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무력화도 실행했다. 세력균형, 즉 평화를 위해서였다.
물론 메테르니히의 세력균형 지향이 평화주의적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스트리아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으로 세력균형이 가장 유리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이루려고 했다. 자국의 국가이익을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외교관으로서는 너무 당연한 행위 양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부분 그의 노력으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사이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고, 그 체제는 3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를 이루는 방법으로 공개적인 대화, 즉 공개외교를 지향했다. 빈 회의는 역사상 유례없이 큰 규모로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더디지만 회의를 통해 국제적인 합의서를 만들어내려 했다. 이후에도 국가 간 회의를 통해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회의외교’를 지향했다. 또 그의 의식 저변에는 협력이 가능하고 이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그래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회의외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또한 합법성을 중시했다. 회의의 내용은 조약으로 문서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럽 정치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겐츠와 같은 1급 참모를 오랫동안 썼다.
그런가 하면 메테르니히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로 역사의 자유주의적인 진보를 막은 장본인이라고 혹평받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언론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고, 비밀경찰을 통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어떤 형태이든 혁명은 거부하고 탄압했으며, 자유주의ㆍ민족주의와는 평생을 두고 싸웠다. 1832년 영국에서 중류층 이상에게 투표권을 주는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을 때에도 이를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고 비판했다. 귀족 출신이라는 생래적 속성, 오랜 기간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공생관계 등이 그에게 그런 의식을 심었을 것이다. 그의 태생적 한계였다.
현란한 동맹외교의 상징 ? 오토 폰 비스마르크
교육열이 넘친 어머니
비스마르크는 1815년 4월 1일에 태어났다.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을 끝내고 새롭게 유럽 질서를 정리하는 빈 회의를 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태어난 곳은 프로이센의 북동부 쇤하우젠이다. 아버지는 귀족 집안 사람이었으며, 조상이 주로 정부 관료나 장교를 지냈다. 자연히 집안은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반면 어머니는 평민 집안 출신이었으며, 자유주의적이면서 지적인 집안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는 1832년 프로이센 중부 지역의 명문 괴팅겐대학으로 진학해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공직 진출에 유리할 것으로 보아 법학을 공부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시 괴팅겐대학의 풍경은 자유주의 물결과 시위의 연속이었다. 학생들은 술렁였고, 강의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비스마르크는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다. 술을 즐겼고, 주변 사람들과 격투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1834년에는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좀 정리된 생활을 하게 되었고, 1835년에는 국가고시에 합격해 베를린 고등법원의 사법시보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정치의 세계에 입문한 것은 1847년 2월이다. 당시 프로이센의 정치 이슈는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 철도 건설 문제였는데,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강력히 추진했다. 비스마르크는 마그데부르크 지역에서 지방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당선자가 4월 통합의회 개원 당시 병을 얻게 되어 보결로 의원이 되었다. 철도 건설 문제는 동프로이센 지역의 지방귀족과 시민계급의 반대로 6월에 부결로 결론이 났다. 그런 와중에도 비스마르크는 국왕을 지지하는 쪽에 서서 정치의 출발선에서부터 보수주의 색채를 분명히 했다. 한편 그는 1851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독일연방 의회에 파견되는 프로이센의 대사가 되었고, 1862년에는 프로이센의 총리에 올랐다.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이겼다. 1871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독일통일을 이루었다. 독일 제1제국이라 불리는 신성로마제국에 이어 독일 제2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독일 제2제국의 총리가 된 비스마르크는 1890년까지 그 자리를 맡았고, 1898년 83세로 사망했다.
철혈 재상이 되다
프리드리히 벨헬름 4세가 1861년 사망하자, 섭정을 하던 빌헬름이 빌헬름 1세로 왕위에 올라 가톨릭교도인 카를 안톤을 총리로 하는 자유주의 내각을 임명했다. 당시 산업 발전에 따라 자유주의 세력이 크게 성장했고, 국왕은 이를 국정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헬름 1세는 보수주의자이면서 군국주의자였으며, 프로이센의 힘을 증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비군을 줄이고 상비군을 늘리는 군제 개혁을 추진했다. 군복무 기간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려 했고, 국방 예산도 증가시키려 했지만 의회가 반대했다. 그런데 국왕과 의회 사이의 충돌을 안톤 내각은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이 위기를 타개할 해결사로 비스마르크가 지목되어 1862년 9월 총리 겸 외교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를 추천한 사람은 국방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이었다.
1862년 9월 총리로서 첫 의회연설에 나선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국력 강화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빈 의정서에 따른 프로이센의 경계선은 건전한 정치 생활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1848년에서 1849년의 큰 실수와 같이 연설 또는 다수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鐵)과 혈(血)로서만 결정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 이후 확산된 유럽의 자유주의 물결을 경계하면서 군사적 무장을 역설한 것이다. 철은 무기, 혈은 병력을 말하는 것인데, 오늘까지도 전해지는 ‘철혈재상’이라는 그의 별명은 여기서 유래했다. 그의 첫 총리 연설은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함을 강조한 것으로, 철저한 프로이센주의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편 비스마르크를 총리 자리에 앉힌 군제 개혁 문제는 해결난망이었다. 의회는 계속 반대했다. 비스마르크가 들고 나온 방안은 ‘결점 이론(luckentheorie)’이었는데, 여기서 뢰케(lucke)는 틈, 균열, 결점 등을 이르는 말이다. 즉 왕과 왕실, 의회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그러한 결점이 발생했을 때에는 국왕이 문제 해결의 권한을 가진다는 주장이었다. 비스마르크는 그러면서 의회의 예산 승인 없이 정부를 운영했다. 아무튼 그런 비상수단까지 동원해 비스마르크는 군비를 확장했다.
철저한 보수주의자ㆍ독일주의자ㆍ현실주의자
비스마르크가 많은 비밀조약을 체결하는 데 진력한 것은 하나의 국가만을 믿고 단순한 외교를 벌여서는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침략을 막고 독일의 평화로운 상태를 위해서는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그에 맞는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일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독일의 발전과 번영에 기여한 측면은 대체로 인정받는 부분이다. 1890년대 독일의 청소년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그의 동상을 건립하는 등 숭배 운동이 일어난 것도 그의 독일통일과 발전에 대한 기여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여전히 보수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자유주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회주의를 탄압한 독재자이기도 했다. 그가 개척한 사회보장의 다양한 방안도 실은 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컸다. 독일의 번영을 원했지만 군주제를 벗어난 독일은 생각하지 못했다. 유럽의 안정을 추구했지만 자유주의가 확산되어 귀족과 시민의 구분 없이 누구나 평등한 대우를 받고 비슷한 권리를 갖는 유럽을 상정하지는 못했다. 한편 독일의 통일을 위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도 불사한 것은 그가 독일 중심의 철저한 국가주의자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열강 사이의 전쟁 위기를 중재해 유럽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지만, 비스마르크 사고의 중심은 늘 독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외교는 군사력과 경제력, 동맹을 통한 힘의 확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힘을 바탕으로 자국이 원하는 것을 얻고 상대국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하려는 것이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여전히 철저한 보수주의자, 철저한 독일주의자, 골수 현실주의자라는 별칭이 그의 곁에 붙어 다닌다.
동양의 비스마르크 - 이홍장
재주가 크고 마음이 세심하다
이홍장은 1823년 태어났다. 어릴 적 이홍장은 부모 슬하에서 평범하게 생활하면서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다. 1844년 21세가 되어 지방에서 응시하는 1차 과거시험인 향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상경해 아버지와 향시 동기생인 증국번의 문하생이 되었다. 주자학에 정통하면서 문장에 능했던 증국번은 1840년대 청나라 정부의 능력 있는 소장파 관료로 이름이 높았다. 이홍장은 증국번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관료의 기본적인 소양도 배웠다. 그리고 1847년에는 베이징에서 보는 2차 과거시험인 회시에 합격해 한림원에 들어가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이홍장이 베이징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한 지 4년쯤 지난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태평군이 세력을 확대하자 청나라는 반란 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이홍장도 여기에 동원되었다. 고향인 안후이성에서 순무를 맡고 있던 복제를 도와 태평군 토벌에 나섰는데, 이홍장은 초반부터 군사를 지휘하는 데 능력을 발휘했다. 이때부터 그의 군사지휘 능력은 인정받기 시작했다. 1861년에는 증국번의 추천에 의해 장쑤성 쑤저우 지역의 군사책임자가 되었고, 1862년 태평군이 상하이를 포위했을 때 이홍장은 회군을 보내 상하이를 구했다. 그 덕분에 이홍장은 장쑤성의 순무서리가 되었다.
농민 반란을 잠재우다
태평군이 토벌된 뒤 이홍장은 염군 토벌에 나섰다. 1865년의 일이다. 직책은 높아져 량장 총독이 되었다. 1866년 12월에는 증국번이 병 때문에 사직하고 이홍장이 흠차대신을 맡았다. 염군 토벌의 책임이 온통 그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홍장은 지형이 복잡한 곳에 염군을 몰아넣고 공격하는 전략으로 속속 승리했다. 그리고 1868년 6월 말에는 염군의 주요 세력을 물리쳐 서쪽 염군도 평정했다. 이후 이홍장은 후광 총독이 되었다.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이이제이의 외교
1870년 톈진에서 청나라인들이 선교사를 죽이고 프랑스 영사관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기독교에 대한 반대의 차원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는데, 이를 톈진 교안이라고 일컫는다. 프랑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를 강하게 압박했다. 프랑스가 직접 조사를 진행해 청나라인 8명을 사형하고, 20여 명을 처벌했다. 또 거액의 배상금과 톈진의 지방관료 처벌도 요구했다.
당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즈리 총독은 증국번이었는데, 서양에 대해 양보하는 입장을 보여 온 증국번에 대해 여론은 비판적이었다. 그 때문에 그가 해임되고 프랑스를 상대하는 일은 이홍장에게 맡겨졌다. 1870년 9월 증국번 대신 즈리 총독에 임명된 것이다. 이홍장이 프랑스와의 교섭을 맡자마자 우연하게도 상황이 그에게 아주 유리하게 돌아갔다. 보불전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보불전쟁은 결국 1871년 초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그 바람에 청나라에 요구하던 거액의 배상금과 책임자 처벌 등은 요구할 입장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이 이홍장을 살린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인들은 이를 이홍장의 교섭 능력 덕분으로 오해했고, 이 덕분에 이홍장은 뜻하지 않게 외교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이홍장은 주변국과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청나라의 이익을 실현하려 했다. 예로 1882년 조선이 미국ㆍ영국과 통상조약을 맺도록 중재해 성사시켰는데, 이홍장은 먼저 미국과 통상조약을 거중 조정했고, 이를 본 영국의 요청으로 영국과의 통상조약도 조정해 체결되도록 했다. 이렇게 이홍장이 조선-서양 국가 사이의 통상조약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과 러시아가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홍장은 미국ㆍ영국이 조선과 통상하도록 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과 러시아의 우월한 지위를 낮추려 했다.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