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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의 발견

아거 지음 | 인물과사상사



꼰대의 발견

아거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1월 / 221쪽 / 13,000원





동굴 : 꼰대의 서식지 증명



뭐가 이리 많아?

오늘도 나는 꼰대를 만난다. 거의 매일 만나서 익숙한 모습이지만, 그를 만날 때마다 도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커피 전문점에서,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 안에서, 사무실에서, TV에서, SNS에서, 인터넷 댓글에서, 뉴스에서 그를 마주친다. 그들은 참 쉽게 반말을 내뱉고, 항상 자신에 찬 모습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한다. 때로 그와 말을 섞기도 하고, 때론 방관자가 되어 물끄러미 지켜본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뭐가 이리 많아?” 꼰대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남보다 서열이나 신분이 높다고 여기고, 자기가 옳다는 생각으로 남에게 충고하는 걸, 또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등한시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자”다. 이런 사람, 꽤 있다.

동굴 속 꼰대

꼰대의 모습은 정치학자 전인권이 주장한 ‘동굴 속 황제’와 닮아 있다. 그는 『남자의 탄생』에서 자신의 성장 경험을 토대로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을 설명한다. 그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한국 남자는 동굴 속 황제였다. 어머니에게 왕자님 같은 대우를 받으며 자라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고, 남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모성의 동굴에서 길러진 허영심”을 지니고 있는 존재란 이야기다. “자기가 타인보다 더 올바른 생각을 하며, 더 선한 마음을 가졌으며, 더 아름다운 존재”라고 여기는 동굴 속 황제는, 남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꼰대의 일면을 보여준다.

전인권이 말하는 ‘동굴 속 황제’는 사회학자 엄기호가 말하는 ‘나르시시스트’와도 닮았다. 엄기호는 나르시시스트를 “제 자신의 괴물로서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타자-거울은 상실/파괴하고, 오로지 제 자신 안에서 자기의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하고 도취되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괴물이면서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존재라는 이야기다. 나 역시 남들보다 우월하다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물론 이를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남들 앞에서는 겸손과 겸양의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속내는 남과 나를 사사건건 비교해가면서 내가 더 나은 인간임을 매번 확인하려 든다. 하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은 건 사실이다. 꼰대는 동굴 속에 갇힌 인간이다. 동굴 속 횃불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실제 자신보다 자기를 더 크게 본다. 또 동굴 밖을 보지 못한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동굴 속이 온 세상인 것처럼 행동한다. 동굴 밖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즉 타자를 볼 줄도 이해할 줄도 모르고, 오로지 동굴 속 자신의 그림자에만 몰두하는 이가 동굴 속 꼰대라고 할 수 있다.

동굴 안에서 끼리끼리

동굴 속 꼰대들이지만, 이들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러다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또 다른 동굴을 만들고 그 안에 머문다.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이들과 특권 의식으로 뭉쳐진 일종의 이너서클을 만드는 것인데, 이때 낯선 존재는 배제된다. 배제만 되면 다행이다. 꼰대는 동굴 밖 존재에 대해 동굴 안 규범을 적용해 그들을 단죄한다. 집단화된 꼰대의 모습이다.

동굴 탈출, 꼰대 탈출의 시작

꼰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동굴 속 그림자를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동굴 속 꼰대들이 갇혀 있는 더 큰 동굴 속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 살고 있다 해도 각자가 살아온 삶은, 앞으로 살아갈 삶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꼰대 탈출의 시작이 될 것이다. 또 나만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타자와 내가 평등한 관계라는 것을, 위아래와 우열로 나누지 않고 서로가 같은 인간으로서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게 동굴 속 꼰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동굴 밖을 둘러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이자 꼰대 탈출의 첫걸음이다.



인정 욕구 : 꼰대의 유치찬란함 증명



내가 누군지 알아?

가끔 반말을 듣는다. 가끔 누군가 밀친다. 가끔 누군가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 가끔 직장 내에서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한마디 듣는다, 그러면 생각한다. “내가 우스워 보이나? 네가 우습게 볼 사람 아니거든.” 딱 여기까지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 말 뒤에 한마디 단어가 무의식에 깃들어 있다는 걸, 문득, 눈치챘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이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씨!” 이렇듯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나는 정말 이렇게 묻고 싶다. “누구냐, 넌?”

네 정체를 알려주마!

‘내가 누군지 알아?’는 기본적으로 권력자의, 힘을 가진 자의 언어다. 힘으로 상대방을 내리누르려는, 심지어는 힘 있는 사람의 코스프레를 하면서까지 남을 짓누르려는 언어다. 또한 ‘내가 누군지 알아?’는 폭력의 언어다. 그 외에도 그런 언어를 쓰는 사람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포함해서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속으로 생각하거나 입으로 뱉어내는 꼰대들에게 그 정체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그 존재는 이렇다.

첫째, 이들은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천박한 인격의 소유자다. 둘째, 이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권위나 재산에 기대서만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빈약한 지성의 소유자다. 셋째, 이들은 서열 사회와 신분 사회를 공고히 유지하는 톱니바퀴다. 넷째, 이들은 남들보다 높은 서열을 유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게 살아가는 허름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다섯째, 이들은 “내가 누군지 알아?”란 말에 담긴 힘을 자각하고 있는 실리주의자들이다. 이게 이들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다.

네 유치함을 알라

어렸을 적 말다툼이 벌어지면 으레 하던 이야기가 있다. 아빠 자랑이다. 아빠로 모자라면 삼촌이나 다른 친척을 끌어들이고, 거짓말도 불사한다. 유치찬란함, 작렬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내보이거나 어떻게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종의 방어막이다. 어렸을 때 했던 힘의 우열 가리기와 다름없다. 그 유치함을 자각해야 한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 ‘우리 아빠 힘세거든’과 동일한 맥락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유치한 꼰대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다.



서열과 신분 : 꼰대의 뒷배 증명



될성부른 꼰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은회를 한 적이 있다. 그날 몇 순배 술이 돌자 평소보다 일찌감치 취했고,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겼다. 토막토막 잘린 기억 속에서 한 장면이 떠오른다. 4학년 졸업반 학생들만 있던 자리에 2학년 후배가 합류했고, 후배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까진 기억이 난다. 내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몇 년 후에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때 그 후배한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는 취지의 말을 욕과 함께 했다고 한다. 그 후배도 지지 않고 나한테 저항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갈등은 전체 술자리로 퍼져갔고, 끝내 사은회 자리는 분위기 좋지 않게 끝맺어야 했다. 모든 게 나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 나는 꽤 일찍부터 될성부른 꼰대였구나.”

어디서 감히? 조폭이세요?

지금은 다를까? 아니다. 다르지 않다. 나는 인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보다 직위가 높은 이든, 낮은 이든, 스스럼없이 인사를 먼저 하는 편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나보다 직위가 낮은 이가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내 인사를 받거나, 나보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내 인사를 받지 않으면 기분이 상한다. 거기까지도 괜찮다. 문제는 기분이 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사’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다. 나보다 직위가 낮은 이는 ‘싸가지 없고 버릇없는 애’로, 내 인사를 받지 않는 높은 직위의 사람은 ‘거만하고 오만한 권력자’로 평가하고 깔아뭉갠다.

그런데 그 깔아뭉갬의 정도가 다르다. 인사를 받지 않는 윗사람에게는 그 이후에도 인사를 계속하지만, 인사를 하지 않는 아랫사람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친다. 이런 사소한 ‘인사’ 하나에도 서열을 작용시키는 나는 꼰대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꼰대는 자기보다 서열이 낮은 이가 자신의 권위를 침범하는 걸 참지 못한다. 그럴 때면 이렇게 말한다. “어디서 감히!” ‘어디서 감히’가 풍기는 뉘앙스는 조폭이나 양아치들이 쓰는 “눈 깔아”란 말과 비슷하다.

조폭 언어는 조폭에게 돌려주자

“어디서 감히”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서열주의다. 서열과 신분, 바로 이것이 꼰대의 든든한 뒷배가 된다. 참고로 문화평론가 이재현은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장기 지속’으로 존재하는 권위주의적 헤게모니 때문”에 꼰대라는 말이 유행한다며, “권위주의, 순응주의, 기회주의”가 꼰대질에 내장된 이데올로기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이런 꼰대가 한국 사회에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개인의 성정, 인격의 모자람만으로는 이 많은 수의 꼰대를 설명하긴 힘들다. 꼰대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때로 꼰대질은 갑질의 모습을 띠기도 하는데, 나는 갑질도 꼰대질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감히’는 조직폭력배의 언어와 닮아 있다. 그러니 조폭으로 오해받고 싶지 않다면 ‘어디서 감히’란 말, 감히 하지 말자. 누군가에게 ‘어디서 감히’란 말, 함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아무리 권력자라 하더라도 말이다. 조폭 언어는 조폭에게 돌려주자.



모욕 : 꼰대의 존재 증명



나한테 왜 그랬어요?

첫 직장에서 실수를 했다. 실수를 인정하고 보고를 했다. 부장에게는 좀 깨졌다. ‘좀 더 꼼꼼하게 살피지 그랬냐.’ 국장은 경위를 듣고 난 뒤 ‘알았다’고만 했다. 그게 다였다. 안도감이 들었다기보다는 부끄러웠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자리에 돌아오자 1년 선배가 불렀다. 옥상으로 오란다. 그렇게 옥상에서 만난 선배는 내 실수에 대해 물었다. 설명했다. 그 설명 듣고, 그 선배 한마디 하더라. “똑바로 하자.” 그 말 뒤에 요즘 내가 일을 불성실하게 한다. 초심을 잃었다, 뭐 그런 말을 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었고, 그 선배한테 불이익이 돌아갈 게 없었다. 단독 업무였다. 그 이해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나는 내 실수가 부끄러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불현듯 깨달았다. 아, 내가 모욕을 받았구나. 그때 그 옥상에서 한마디 해야 했다.

그냥 웃자고 한 소리?

나에게 “똑바로 하자”란 말을 한 선배는 서열이 나보다 위였다. 그는 나에게 반말을, 나는 그에게 존댓말을 했다. 그 사람의 개인 성정도 한몫했겠지만 그 서열이, 서열이 낮은 이에게는 그런 말을 해도 된다는 의식이, 나에게 모욕감을 안겨준 원인이었을 게다. 즉, 선배는 후배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된다는 걸 당연하게 여긴 결과다. 서열과 신분에 따른 차별 의식은 인간에 대한 모욕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한 개인의 자존감을 짓밟는 건 꼰대질의 특징이다.

곱창님 존안을 뵙습니다?

우리 사회의 꼰대질은 남에 대한 모욕의 형태로 자주 나타난다. 문제는 이게 한 개인의 일탈도, 아주 극소수의 사례도 아니라는 점이다. 꼰대 근성이 시대정신이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백화점 직원, KTX 승무원, 항공사 승무원, 콜센터 직원 등 사람들을 주로 상대하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감정노동자들은 모욕을 동반한 꼰대질에 고통을 받는다. 감정노동자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서비스 과잉 사회의 면모를 보여준다. 회사에서는 이들이 고객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나 모욕감을 해결하기 위한 별도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들의 서비스를 측정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관찰하고 ‘미스터리 쇼퍼’를 통해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회사에서 누가 부당한 처사를 받았다고 ‘고객님’에게 저항하고, 개선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고객님’은 어떤가. 우리는 돈을 내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서 최고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돈을 냈다고 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인격까지 무시하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최대한 양보해도 폭언이나 반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무감각은 악이다

그렇다면 직업이나 직장, 사회적 지위에 따른 귀천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노동의 위계화를 허물어뜨려야 한다. 우리는 정신노동을 상위에, 육체노동을 하위에 두는 걸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소득 격차가 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노동자 사이에 온갖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육체노동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야 가장 인간적인 문명이 된다고 보았다. 이를 인용하며 강신주는 인간을 작은 수단으로 보는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 더 나아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논의를 확장했다. 전체주의는 인간을 하나의 수단으로 보았다. 그러했기에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그토록 많은 학살이 자행될 수 있었다. 인간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사람의 물리적인 목숨을 거두지는 못하지만, 이 사회의 무수히 많은 꼰대는 모욕과 무례로,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죽이고 있다. 항복을 강요하고, 항복을 받아내고 있다. 그냥 그래도 된다는 그 생각이, 오랫동안 체감해온 것이 경험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이를 모욕하고 무례를 저지르는 게 이 사회다. 내가 당하는 꼰대질, 내가 행하는 꼰대질에 이런 무서움이 숨어 있다. 남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아주 커다란 상처가 된다. ‘죽고 싶다’는 감정을 들게 할 수도 있고,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 인간을 수단이자 부속품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그러니 남, 모욕하지 말자. 누구에게나 남을 모욕할 권한 따위는 없다.



반말 : 꼰대의 인격 증명



서열의 확인, 반말

몇 마디 말이 오간다. 나이를 묻는다. 서열이 정해진다. 순간 ‘훅’ 하고 반말이 들어온다. 존댓말과 반말이 중간중간 섞이는 것도 잠시, 반말 일색으로 치닫는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를 만날 때면 이런 일, 가끔 겪는다. 그러다 보니 연장자가 나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하면 그 사람이 멋있게 보이기도 한다. 꼰대는 반말을 즐겨 한다. 반말이 특권인 것처럼 행동한다. 하긴 반말을 할 수 있다는 건 남보다 나이가 많거나 권력이 많거나 서열이 높다는 걸 의미하니 특권이라고 인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반말은 무례하다. 특히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반말을 들으면 기분이 한없이 나빠지고, 무시 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런 반말이 횡행한다. 사적인 자리가 아니라 공적인 자리에서도 반말은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

인격을 반 토막 내는 반말

나이주의, 즉 연령에 따라 차별하는 행위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게 반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단 두 분 잊히지 않는 어른이 계셨습니다.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는데, 살아계실 때 그분들이 아랫사람을 대하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먼저 길가에서 만나 인사를 드리면 꼭 걸음을 멈추고 서서 마주 고개를 숙여 깍듯이 인사를 받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나보다 나이가 30살 이상씩 더 높았습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말이다. 이 어른들은 자기에게 인사를 하는 나이 어린 이를 동등하게 여겼다. 멈춰 서서 깍듯이 인사를 받는 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고개만 까딱하면 다행이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많다.

이렇듯 인사 받는 태도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때로는 나를, 또 당신을 존경의 대상으로, 때로는 혐오의 대상으로 만든다. 반말은 ‘꼰대어’다. 반말은 존중의 언어가 아니다. 무시의 언어다. 그러니 반말하지 말자. 나이와 지위 막론하고, 말을 반 토막 내는 건 인격을 반 토막 내는 것과 같다. 나이가 많다고, 직위가 높다고, 선배라고 반말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말자. 반말은 듣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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