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친구가 된 일본인들

이동식 지음 | 나눔사



친구가 된 일본인들

이동식 지음

나눔사 / 2017년 11월 / 347쪽 / 13,000원





외롭고 힘든 친구들이기에



이 아름다운 사람들을_ 야나기 무네요시

1919년 3월 “독립만세”의 함성이 전국 곳곳으로 확대될 때 일본의 언론들은 조선에서 일어난 이른바 소요사건에 대해서 걱정과 우려, 비난의 목소리만을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5월 20일 한 젊은 학자가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조선 사람들이여, 나는 그대들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경험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나라 조선의 예술을 사랑하고 인정을 사랑하고 조선의 역사가 경험한 쓸쓸한 그 과거에 끝없는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대들이 예술로 오랫동안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호소해 왔는가를 마음속으로 듣고 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외로움을 느끼고 솟아오르는 사랑을 그대들에게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 사람들이여, 설혹 내 나라 일본의 식자들이 그대들을 욕하고 또 그대들을 괴롭히는 일이 있더라도, 그러한 일본인 사이에 이런 글을 쓰는 자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이 글은 1920년 4월 12일부터 18일까지 동아일보에 우리말로 번역 연재되었다. 뒤이어 4월 19일부터 20일까지 그의 유명한 글인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이 염상섭 기자의 번역으로 동아일보에 또 연재되면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식민지 통치 아래서 고통 받던 한국인들은 진정한 친구를 만났다며 글을 쓴 사람이 이름을 가슴속으로 불러주었다. 그는 1889년 생으로 도쿄대 철학과를 나온 당시 서른 살의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야나기는 해군소장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정3위(正三位)를 부여받은 귀족 군인이었다. 그의 외가 쪽으로도 외조부가 해군대장과 해군장관을 역임하는 등 야나기는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야나기는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에 명가의 자제가 모이는 학습원 초등과에 입학하였다. 그 후 학습원 중등과와 고등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10년(22세)에 도쿄제국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재학 중 시가 나오야,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등과 함께 인도주의를 표방한 문예잡지 《시라카바》를 창간하였다. 한편 야나기는 1912년 가을에 홍콩출신으로 일본에 와 있던 도예가 버나드 리치, 그리고 도미모토 겐키치와 함께 친구가 되어 도쿄에서 열린 척식박람회에 갔는데 거기서 조선의 도자기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조선(한국)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그다음에 일어났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14년 9월 어느 날의 일이다. 전혀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아사카와 노리다카라는 사람이 멀리 경성(서울)에서부터 일본 치바현 아비코에 있는 야나기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가 온 목적은 야나기가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이 보내준 조각 작품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조각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였다. 그가 인사를 하면서 들고 온 보자기를 풀자 거기에서는 조그만 백자 항아리가 하나 나왔다. 바로 백자추초문각호(현 일본민예관 소장)라고 하는, 각진 하얀 도자기 몸통 표면에 추초(秋草) 꽃무늬가 그려진 도자기이다. 이것을 처음 본 야나기는 전혀 모르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푹 빠져버린다. 그리고는 먼 나라였던 조선에 대해서 신문을 통해 소식을 모으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한다.

야나기는 이때 자기 집을 찾아온 아사카와 노리다카와 곧 친구가 되고, 조선의 아름다운 백자 그릇들을 더 보기 위해서 2년 후인 1916년 조선을 찾는다. 사실 이때는 베이징에 있는 버나드 리치의 초청으로 중국에 가는 길이었다. 부산에서 노리다카의 안내로 도자기 한 점을 사고, 이어 가야산 해인사에 들러 13세기 몽골군의 퇴치를 기원하기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을 보았다.

노리다카와 야나기는 이어 경주의 석굴암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 6시 반 야나기는 불상의 자애로운 얼굴에 태양이 바다 위로 올라오면서 밝은 빛을 비추는 광경에서 한없는 감동을 느꼈다. 그것이 야나기가 감동으로 기록한 석굴암의 아침이었다(노리다카도 1921년에 석굴암을 본 감동을 묘사했다). 이후 야나기는 서울로 올라와서 아사카와 노리다카의 동생인 타쿠미와 인사하고 그의 집에서 묵게 된다. 여기에서도 그는 노리다카가 모아놓은 조선시대 백자라던가 타쿠미가 모은 소반, 목기 등의 공예품들을 보고는 더욱더, 아니 아예 조선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 몇 년 후인 1919년 조선에서의 만세 운동 이후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되는 비극을 본 야나기는 5월 20일부터 24일까지 5회에 걸쳐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다음과 같은 명문을 싣는다.

‘그들에게 자유로운 독립의 호흡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단지 북쪽의 잔인한 대국만이 아니었다. 실로 연약한 그들을 또 한편에서 괴롭힌 것은 우리들의 조상이었다. 역사가들은 흔히 <조선정벌>을 한 나라의 용감한 기록처럼 말하나 그것은 오직 고대의 무사가 그들의 정복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아무런 뜻도 없이 저지른 죄 많은 행동이었다. 나는 이러한 원정을 한 나라의 명예를 높이는 이야기라고는 보지 않는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의 고(古)예술, 즉 건축이나 미술품이 거의 파손된 것은 대부분이 실로 놀랍게도 무서운 왜구가 범한 죄였다. 중국은 조선에 종교나 예술을 보냈으나 그것을 거의 파괴한 것은 우리 일본의 무사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 사람에게는 뼈에 사무칠 원한일 것이다.’

그는 서울 남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다가, 직선의 지붕을 가진 일본주택들이 들어선 도쿄와는 달리, 둥글둥글한 초가집이 즐비한 것으로 보고, 그동안 일본에서 보아왔던 백제의 불상 등 한국의 예술품과 비교한 뒤에, 한국인의 예술의 특질을 선(線)의 예술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굽은 선은 직선에 비해서 약해 보인다. 그의 생각은 이런 한국의 선을 일본이라는 큰 나라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는 역사적인 현실과 결부시켜 그들의 마음이 본래 약하고 슬프기 때문이라는 데까지 미치게 된다.

그는 이 선의 예술을 중국, 일본과 비교하면서 중국의 예술은 의지의 예술로, 일본의 미술은 정취의 예술로 이해하면서 한국 예술을 비애의 예술로 표현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예술과 인생을 보는 각도나 마음가짐, 혹은 취향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지만, 이후 그는 조선의 예술을 통해 조선인과 조선민족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갖게 되어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는 글을 언론에 잇달아 발표했다. 1920년에 발표한 다음과 같은 <조선 친구에게 보내는 글>에서 야나기는 이미 조선인들의 친구가 되었다.

‘조선은 지금 외롭고 괴롭다. 그들의 깃발은 하늘 높이 나부끼지 않고, 봄은 찾아와도 꽃은 봉오리를 싸고 있다. 고유한 문화는 나날이 사라지고 태어난 고향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수많은 훌륭한 문명의 사적은 단지 과거의 책에서만 읽혀지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는 수그러지고 괴로움과 원한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주고받는 말조차 소리에 힘이 없고 백성은 태양을 피해 어두운 그늘에 모여드는 것 같다. 어떠한 힘이 그대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조선 친구에게 보내는 글>

야나기가 《요미우리》 신문에 발표한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글의 반향은 컸다. 1919년 5월에 일본으로 돌아온 노리타카와 일본에 유학 중인 남궁벽 씨 등이 도쿄 동쪽 치바현 아비코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가 교류가 시작되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야나기의 글을 자주 실어주는 한편 조선을 사랑하는 이 일본인의 아내 가네코가 성악가인 것을 알고는 이들 부부를 초청해 서울에서 음악회를 여는 문제를 추진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문학동인지 《폐허》가 김억, 황성우, 염상섭, 남궁벽, 변영로, 오상순 등이 주축이 되어 막 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 동인들도 가네코의 음악회를 준비하겠다고 나섰다.

음악회는 기대 이상의 대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가네코는 십여 일을 경성에 머물면서 숙명여학교를 비롯하여 일곱 차례나 더 음악회를 가졌다. 가네코의 음악회는 말 그대로 조선 사람들에게 마음의 정으로 바치는 노래였으며, 여행 경비는 전부 자비로 부담하고, 음악회 수익금도 전액 남편이 추진하는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사업을 위해 기부하였다. 야나기는 종교와 예술을 주제로 한 강연회에 나섰다. 야나기 부부가 진정으로 한국인들에게 친구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야나기가 더욱 한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 계기는 일제가 1922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새로 지어야한다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철거해버리려 할 때 이 문을 없애면 안 된다는 목소리를 유일하게 크게 낸 것이었다. ‘이 한 편을 공개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야흐로 단행하려 하고 있는 동양의 옛 건축물에 대한 무익한 파괴에 대해서 나는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이런 머리글과 함께 야나기는 부서질 운명에 처해있는 광화문에 대해 처절한 눈물을 흘린다. 이 글이 일본에서 발표된 이후 일본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철거반대 여론이 일어나자, 일본은 광화문을 철거하는 것을 취소하고 서쪽으로 옮겨 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해서 광화문은 살아났다. 그 글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야나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뢰는 더욱 높아졌다.

음악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일본에 돌아온 가네코와 남편 무네요시는 마침 집으로 찾아온 아사카와 다쿠미를 만나 조선의 예술과 민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선의 미술품이 자꾸 사라져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데 의기투합한다. 그리하여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기로 계획한다. 야나기는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우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아내 가네코도 남편의 뜻에 동조해서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모금을 위한 연주여행을 하며 내조했다. 물론 야나기의 이러한 노력은 당시 서울에 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와 다쿠미 형제와 함께 이뤄졌다.

마침내 1924년 4월, 경복궁 내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가네코와 그녀의 남편 무네요시, 아사카와 노리타카와 다쿠미 형제가 중심이 되어 도자기 등의 미술품을 수집하고 혼신을 다해 마련한 전시장이었다. 야나기의 조선인 친구들인 남궁벽과 염상섭, 변영로, 오상순 등의 관심과 도움도 컸다. 이 순간이야말로 조선의 아름다운 예술이 그 주인인 조선 사람들에게 바쳐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도자기만 해도 1,000점 이상이며, 그 밖에 목공예, 금속공예, 종이공예품이나 자수류, 민화 등 수천 점 이상이 집경당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수집되었다.

이 미술관은 해방 전까지 아사카와 형제가 관리 운영해 오다가, 1946년 국립민족박물관(남산관)으로 옮겨진 후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합류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조선민족미술관에서 넘겨준 3,000여 점의 작품 중 10점도 안 되는 극히 일부만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튼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야나기는 한국의 예술을 알리는 많은 저작물과 강연 활동을 꾸준히 했다. 그리고 1961년(73세) 5월 3일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의 많은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죽기 전인 1960년 1월에 ‘아사히신문사’에서 제정한 “조일상(朝日賞)”을 수상하였으며, 그가 죽고 나서 20여년이 흐른 후에야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84년 9월에 한국정부가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한국인은 핍박받는 민중이기에_ 후세 다쓰지

일본 도쿄 토시마구의 상재사라는 절에 세워진 한 비석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누구일까?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묘비명이다. 그에게 있어서 민중은 누구였던가? 일본이란 거대한 국가기관의 압제에서 신음하는 일본 내의 피압박인들, 그 중에서도 조선(한국)인들이 그에게는 민중이었다. 참고로 그에게서 조선 문제는 조선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세계평화와 그것을 가로막는 혼란에 관한 전 세계의 문제이자 인류의 문제였다. 일본에서 그는 민중의 권리 투쟁 옹호에 힘쓴 인권 변호사이자 사회 운동가였고, 일제시대 조선인(한국인)들에게는 모든 일본의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항해 그들을 대변하고 옹호해준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후세 다쓰지는 1880년 11월에 미야기현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와세다대학, 나중에는 메이지대학으로 옮겨 졸업을 하고, 22살에 판검사등용시험에 합격해 사법관시보가 되었다가 우쓰노미야지검 검사 대리로 부임해 활동했다. 그러던 중 생활고로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아들만 죽고 어머니는 살아난 사건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의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해야 하는 법률의 문제점에 회의를 느끼고 1년 만에 검사직 사표를 내고 변호사의 길을 택하게 된다.

변호사로서 초기에는 자리를 잡지 못해 이런 저런 법률사무소를 전전하다가 1917년에 스즈가 모리오케루 살인사건을 이겨 피고인을 무죄로 만든 것으로 해서 일약 이름이 나기 시작해, 1920년 무렵에는 일 년에 250건의 사건을 맡게 되어 하루에 4회나 법정에 출두하는 등 바쁜 변호사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민사사건도 맡으며 창녀폐지운동, 보통선거운동 등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진 것은 항일 독립운동에 관한 사건을 변호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19년에는 2ㆍ8 독립 선언의 주체였던 최팔용, 송계백 등을 변호하여 내란죄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1923년에 의열단원인 김시현의 변호, ‘대역죄’로 기소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도쿄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1924년) 등이 그의 변호를 거친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한편 1923년 9월 1일 일본의 수도 도쿄 등 관동지방에는 사상 유례가 없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관동 대지진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죽고 집과 건물이 무너져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일본 경찰과 일본군은 조선인들이 이틈을 타서 내란을 일으키려한다는 헛소문을 퍼트리면서, 길거리에서 일본의 자경단들이 조선인들을 보이는 대로 죽창이나 칼로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이때 6천여 명의 조선인이 항변도 못하고 학살되었는데, 당시 후세는 죽창을 든 자경단에 쫓겨 우왕좌왕하는 조선인유학생들을 집으로 안내하여 따끈한 차를 대접하면서 피신시켰고, 이 사건이 일본 정부와 일본 경찰,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1926년 3월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그는 도착 직후 관동대지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죄문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우송했다. ‘모든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 무산계급해방 운동자는, 설령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 활동의 근거를 두고 있어도, 일본민족이라는 민족적 틀에 빠지지 않으며 또 실제 운동에 있어서도 민족적 틀에 빠져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진재(震災) 직후의 조선인 학살문제에 대한 나의 소신과 소감을 조선동포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동포들에게 조선인 학살문제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하고 자책을 통감합니다.’

한편 그보다 먼저 1923년 8월 3일 조선 첫 방문 때에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내가 조선에 온 것은 가장 굶주린 사람이 가장 절실하게 먹을 것을 구하듯,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하는 조선 사람들을 만나보면 인간생활이 개조되지 않으면 안 될 이상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곤경에 빠진 조선에 와서 조선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은 가장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의 경치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기분에 접촉하고자 한 것이 내 방문의 주요한 목적입니다.’ 당시 서울의 천도교 교당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그는 “조선 해방은 결코 조선에만 국한된 조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고 외치며 조선 문제를 적극적인 세계평화운동으로 파악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