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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후퇴

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 살림



거대한 후퇴

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살림 / 2017년 6월 / 383쪽 / 18,000원



민주주의의 약화 - 아르준 아파두라이

우리 시대의 핵심 질문은, 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는 현상과 자유민주주의가 일종의 포퓰리스트 권위주의로 대체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의 뚜렷한 징조가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 푸틴이 이끄는 러시아, 모디가 이끄는 인도, 에르도안이 이끄는 터키에서 발견되고 있다. 게다가 이미 기존 권위주의 정부(헝가리의 오르반 정부, 폴란드의 두다 정부)와 프랑스ㆍ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연합(EU) 국가의 권위주의 우익 통치를 지지하는 주요 정치인 사례도 허다하다. 나는 이 글에서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대안을 찾기 위한 유럽식 접근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도자와 지지자] 대두하고 있는 새로운 포퓰리즘에서 지도자와 지지자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전통 분석 방식으로 보면, 자칫 정치 영역에서 주된 사회적 경향은 통솔력, 선전, 이데올로기 같은 요소와 관계가 있으며, 이 모든 요소가 지도자와 지지자 사이에 강한 연결고리를 이룬다고 여기기 쉽다. 물론 오늘날에도 지도자와 지지자는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연결은 지도자의 야망ㆍ전망ㆍ전략과 지지자의 두려움ㆍ상처ㆍ분노 사이의 우발적ㆍ부분적 겹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새로운 포퓰리즘 운동의 물살을 타고 급부상한 지도자들은 대개 외국인 혐오ㆍ가부장주의ㆍ권위주의 경향이 있는데,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향 중 일부를 공유하기도 하겠지만, 또한 동시에 사회가 자신들에게 해온 또는 자신들을 위한다고 해온 일들에 대해 두려움, 억울함, 분노를 품고 있다. 이런 정서는 당연히, 특히 선거에서 (부정하게 조작되거나 세심히 관리되어) 결집된다.

[위로부터 메시지] 새로운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국권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국가 대표직을 노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국권 위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증상은 현대의 어떤 국민국가도 자국의 이른바 국가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 경제는 실질적으로 중국 손에 달려 있고, 중국은 아시아 여러 국가는 물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원자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모든 국가가 중동의 석유에 어느 정도 의지하고, 현대의 모든 국민국가가 사실상 소수 부유한 국가의 군비에 의존한다.

오늘날 국가가 보호하고 발전시키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국가 경제가 없는 상황이라, 효율 위주 국가와 야심에 찬 많은 포퓰리즘 운동에서 문화적 다수결주의, 민족국가주의, 내부의 지적ㆍ문화적 반대 의견에 대한 억압을 지향함으로써 국권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세계적인 경제 주권 상실 때문에 문화 주권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새로운 권위주의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모두 소프트 파워(정신과 문화 같은 무형의 힘)를 하드 파워(군사력과 경제력 같은 물리적 힘)로 바꿀 방법을 찾으려 하고, 모두가 아무 거리낌 없이 소수자와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고, 언론 자유를 억압하고, 반대자를 제거하기 위해 법을 이용한다.

유럽에서 이런 추세의 발화점은 최근 거세진 이주 물결에 대한 두려움, 주요 도시에서 일어난 각종 테러 공격에 따른 분노와 충격,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브렉시트 투표 결과의 충격이다. 이렇듯 포퓰리스트 권위주의 지도자들과 선동 정치가들이 구대륙 곳곳에서 발견되며, 또 그들 모두는 이 글에서 논한 주요 사례들처럼 신자유주의, 맹목적 문화 우월주의, 이주 반대자들의 분노, 다수결주의자들의 격노라는 동일한 조합의 운용을 선보인다. 따라서 이는 새로운 권위주의 포퓰리즘 지도자들과 그들의 매력을 살펴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렇다면 지지자들은 어떨까?

[민중의 소리] 이 세계가 어떠한지 파악하기 위해 정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앨버트 O. 허시먼이 훌륭한 책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에서 제안한 유명한 개념을 소개하겠다. 허시먼이 내놓은 개념은 브렉시트의 핵심이 ‘이탈’이며, 이탈은 늘 충성심 및 의견 표현과 관계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허시먼이 사용한 이런 용어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줄까? 내 생각에 트럼프, 모디를 비롯하여 권위주의 포퓰리즘에서 이미 유명하거나 새로 떠오르는 인물을 추종하는 대중 지지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이탈은 대안이 아니라 의견 표현의 한 형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거가 시민이 의견을 표명하고 지도자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 또는 만족했는지 보여주는 주요한 방법이라는 허시먼의 생각은 옳았다. 아주 좋은 예인 최근의 미국 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선거는 정치를 바로잡고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서 이탈하는 수단이 되었다. 트럼프를 뽑은 거의 6,2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은 트럼프에게 찬성표를 던짐과 동시에 민주주의에 반대표를 던졌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이탈’에 찬성했다. 모디의 선거, 에르도안의 선거, 푸틴을 지지한 사이비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경우와 유럽의 많은 포퓰리스트 지역에서 민주주의 자체의 약화가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 약화는 각 국가별 민주주의 형태에서 자유와 심사숙고와 폭넓음이라는 요소를 폐기하겠다고 공약한 지도자가 당선되는 토대다. 모든 포퓰리스트 지도자가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불만을 자양분 삼아 성공하고 출세했다. 그렇다면 오늘나라 민주주의 약화에서 새로운 점은 무엇일까?

오늘날 민주주의 자체에 진저리를 치는 정서가 독특한 논리와 맥락을 갖는 방식은 3가지가 있다. 첫째, 증가하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이용 인구와 웹 기반 동원, 선전, 정체성 형성, 친구 찾기의 유용성이 누구나 원하는 대로 또래, 동료, 동지, 친구, 협력자, 전향자를 찾을 수 있다는 위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모든 개별 국민국가가 어떤 형태로든 경제 주권을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셋째, 이방인과 외국인과 이주자가 어디로 이동하든 냉정한 반응과 상황에 부딪히겠지만, 인권이 세계로 확산된 덕에 사실상 모든 국가에서 그들에게 최소한이나마 발을 디딜 토대가 제공된다.

이 3가지가 결합해 민주주의 체제에 늘 필요한 정당한 법 절차, 신중하고 합리적인 행동, 정치적 인내심에 대한 알레르기 증상이 전 세계에서 심해졌다. 여기에 세계경제 불균형의 악화, 전 세계 사회 복지의 붕괴, 우리 모두가 재정 재앙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의 확산 덕분에 번창하는 금융산업의 세계적인 침투까지 더해지면, 민주주의의 더딘 행보에 대한 조급증은 끊임없는 경제공황 분위기로 인해 더욱 악화되는데, 번창을 약속한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고의로 이런 공포를 조성한다.

따라서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세계적인 이야기에 새로운 장이 작성되고 있으며, 이는 지도자들의 야망, 약속과 지지자들의 사고방식 사이의 부분적인 교집합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이런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편집광적인 권력 추구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싫어한다.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약화의 피해자로, 그들은 선거 정치가 민주주의 자체가 존재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여긴다. 이들의 혐오와 탈진은 자연스럽게 문화 주권 공간에서 공통 기반을 찾으며, 소프트 파워의 가능성을 통한 분노한 다수의 인종적 승리, 국가의 민족적 순수성, 세계적인 재기라는 대본을 짠다. 필연적으로 이런 문화적 공통 기반은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족벌 자본주의와 대규모 지지자들의 경제적 고통과 불안 사이의 심각한 모순을 감춘다. 또한 이는 새로운 배척 정치의 지대로, 배척 대상은 이주자나 국내 소수민족 또는 둘 다 포함된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이 문제는 단기 프로젝트가 아닌 중기 프로젝트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유럽이 선두에 서 있기 때문에 구대륙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의 결론을 내리려 한다.

[유럽은 어디로 향하는가?] 유럽에서는 유럽연합 ‘이탈’을 지지하는 다양한 운동이 미국, 인도, 러시아, 터키의 경우처럼 민주주의에서 이탈하기 위해 선거 과정을 이용하는 예다. 민주주의 약화가 유럽에서 이미 발생했고, 스웨덴에서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여러 국가에서 그 약화가 드러나고 있다. 유럽에서도 선거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런 시나리오에서 독일은 중대하고 위험한 갈림길에 서 있다. 독일은 자국의 놀라운 부, 경제 안정, 역사적 자각을 이용해 유럽연합의 이상을 수호하고 아프리카와 중동의 난민을 환영하고, 세계 정치의 위기에 맞서 평화로운 해결책을 강구하고, 독일과 유럽 내에서 등가 범위를 확대해 유로화의 위력을 활용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아니면 독일도 유럽연합에서 이탈하고 국경을 닫고 자국의 부를 비축하고 나머지 유럽 국가(와 세계)가 각자 문제를 해결하도록 방치하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후자는 독일 우익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선택이 될 것이다. 세계적 상호 의존은 우리 생활의 일부며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부는 세계경제에 의존한다. ‘이탈’ 해결책은 독일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독일은 유럽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유럽의 민주주의는 전 세계에서 권위주의 포퓰리즘과 벌이고 있는 고투에서 필수 자원이다. 그러나 이런 독일 시나리오가 성공하려면 특히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긴축재정과 금융 규제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대두하지 않도록 독일이 유럽연합의 회원국을 설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민자와 문화적 관용에 대한 관대한 정책은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국가의 유럽 내 부채와 재정 주권의 급격한 감소에 대한 냉혹한 접근법과 상반되는데, 이는 까다로운 문제다. 독일의 부 역시 유로 강세에 의지하고 있고 독일의 부가 없으면 독일의 자유주의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우파로 이동하라고 위협하는 유럽 국가들 내에 존재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독일이 지지할 수 있느냐, 그리고 이 일이 유럽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패권국 역할을 (또다시) 독일에게 맡기지 않고도 실현 가능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할 쉬운 답은 없지만 피해야 할 딜레마 또한 아니다. 독일의 자유민주주의는 유럽의 권위주의 포퓰리즘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결국 나아갈 길은 하나뿐이며, 유럽의 진보 대중(노동자, 지식인, 활동가, 정책 입안자)이 경제적ㆍ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유럽 내 공통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진보 대중이 필요하다. 그들만이 최근 유럽을 비롯한 각지에서 부상하고 있는 퇴행 대중에 대한 답이다.

진보 신자유주의 대 반동 포퓰리즘: 홉슨의 선택 - 낸시 프레이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신자유주의 패권의 붕괴를 암시하는 일련의 극적인 정치 반란 중 하나를 대변한다. 이런 반란으로는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이탈리아의 렌치 총리 개혁에 대한 거부, 버니 샌더스의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참가, 프랑스의 국민전선 지지자 증가를 들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목적은 서로 다르지만 이 선거 반란들은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기업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또 그것들을 조장한 기존 정치권에 대한 거부를 표명한다. 모든 경우에 유권자들은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특징인 긴축재정, 자유무역, 약탈적 부채,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 같은 요소들의 치명적인 결합에 대해 ‘반대’를 외치고 있다. 참고로 진보 신자유주의는 미국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발달했고 1992년 빌 클린턴의 당선으로 승인되었다. 클린턴은 노동조합에 가입된 생산직 노동자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도시 중산층의 뉴딜 연합 대신에, 사업가와 교외 거주자와 새로운 사회운동과 젊은 층, 다양성과 다문화주의와 여성 권리를 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진실성을 보여주는 이들로 새로운 연합을 구축했다. 그런데 그런 진보적인 생각을 지지하는 순간에도, 클린턴 정부는 월 가의 환심을 사려 했다. 클린턴 정부는 미국 경제를 골드만삭스에 넘겨준 채 은행 규제를 철폐했고 제조업의 쇠퇴를 가속화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포기한 것은 러스트 벨트(Rust belt)였다. 한때 뉴딜 사회민주주의의 중심지였으나 이제는 도널드 트럼프를 뽑는 지역이 되었다.

진보 신자유주의는 해방의 불완전한 이상과 금융화의 치명적인 형태를 뒤섞는다. 트럼프를 뽑은 사람들이 거부했던 게 바로 이 혼합이다. 멋진 세계시민주의에서 뒤처진 사람들 중 으뜸은 산업 노동자이지만, 거기에는 실업과 약물로 파괴된 농촌 사람들뿐 아니라, 관리자, 소규모 사업가, 러스트 벨트와 남부의 산업지대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런 사람들이 볼 때, 산업 공동화로 인한 상처는 진보 도덕주의가 가하는 모욕으로 더욱 악화되는데, 툭하면 그들을 문화적으로 낙후됐다고 치부한다. 또한 트럼프를 뽑은 사람들은 자유 세계시민주의를 거부한다. 그들 중 일부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악화된 상황을 정치적 올바름(차별ㆍ편견 철폐 운동), 유색 인종, 이주자, 이슬람교도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간편한 수단이다. 그들이 보기에 페미니즘과 월가는 힐러리 클린턴을 중심으로 담합한 유유상종 무리였다.

이런 결합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진짜 좌익의 부재였다. 월가 점령 시위 같은 주기적인 폭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수십 년 동안 계속 살아남은 좌익은 없었다. 또한 좌익은, 한편으로는 금융화에 대한 입에 발린 비판,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ㆍ성ㆍ계급 차별 반대와 더불어, 트럼프 지지자들의 정당한 불평을 분명히 대변해주는 어떤 그럴듯한 서사도 내놓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노동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 사이의 유대 가능성은 시들어가도록 방치했다. 서로 쪼개진 좌익의 양 진영은 멀찍이 떨어진 채 서로 반대쪽이 되어 대치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렸다.

샌더스의 반란은 민주당 처지에서는 트럼프의 반란과 유사했다. 샌더스와 트럼프는 미국 유권자 중 대다수를 자극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포퓰리즘만 살아남았다. 트럼프가 거액 기부자들과 정당 당수들이 선호하는 인물들을 포함한 공화당 경쟁자들을 쉽게 궤멸시킨 반면, 샌더스의 반란 사태는 덜 민주적인 민주당에 의해 확실하게 저지되었다. 총선 무렵 좌익 대안 세력은 이미 진압된 상태였다.

남은 것은 반동 포퓰리즘과 진보 신자유주의 사이 ‘홉슨의 선택(아무 대안 없이 주어진 것 중에서만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뿐이었다. 하찮은 설교하기로 재빨리 방향을 바꾼 힐러리 클린턴은 트럼프의 ‘비도덕성’을 알리는 선거운동에 집중했다. 클린턴은 자신과 같은 자격을 갖춘 후보가 도널드 트럼프처럼 거칠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질 수 없다고 확신한 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우세를 유지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뿐이라고 예상했다. 공포 분위기 조성 전술을 내놓은 클린턴의 대리인들은 샌더스의 지지자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파시스트’의 위협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클린턴 후보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고 차악을 지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힐러리 클린턴이 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트럼프의 급부상을 가능하게 한 상황에 대처하는 데 실패했기에, 클린턴의 선거전은 트럼프의 지지자들과 그들의 우려를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 결과는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을 국제금융의 협력자로 굳혀버린 것이었다. 이런 시각은 골드만삭스에서 한 클린턴의 연설문 공개로 힘이 실렸다. 일부 꺼림칙해하던 지지자들의 바람대로 ‘클린턴을 왼쪽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두 가지인 반동 포퓰리즘과 진보 신자유주의 중에서 가혹한 선택을 하도록 했을 뿐이었다.

이제부터 좌익은 진보 신자유주의와 반동 포퓰리즘 사이의 선택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권이 제시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증가하는 현 질서에 대한 혐오감을 바탕으로 다시 정의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사회보호에 맞서 금융화 겸 해방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금융화에 맞서 해방과 사회복지를 새로 결합하는 활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샌더스의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하는 이 프로젝트에서 해방이란 기업의 위계 제도를 다각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폐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번영이란 주가나 기업 이익의 상승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필요조건이 갖춰진다는 뜻이다. 이런 결합이야말로 현 국면에서 가장 원칙적이고 성공적인 대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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