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글 공부
권귀헌 지음 | 제8요일
엄마의 글 공부
권귀헌 지음
제8요일 / 2017년 11월 / 272쪽 / 14,000원
엄마의 삶은 그 어떤 소설보다 위대하다
온몸으로 생명을 만드는 사람
걔는 결혼하더니 완전히 달라졌어. 모임에도 안 나오고. 결혼하면서 180도 바뀌어버린 친구들을 보며 혀를 찼습니다. 사실은 ‘달라졌어’를 ‘이상해졌어’로 바꿔 말하고 싶었죠. 결혼이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는 걸까요. 함께 기울인 수많은 소주잔과 거기에 담긴 의리의 맹세는 본심이 아니었단 말인가요. 하루아침에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 유부남들은 총각들의 안주거리로 전락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결혼과 동시에 이상한 남자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판단이란 게 얼마나 얕은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가정을 꾸렸는데도, 남편과 가장이라는 역할이 생겼는데도, 심지어 아이가 생겼는데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니까요.
사랑에 빠지면 밤하늘 같은 아득한 심정에 몸살이 납니다. 그래서 사랑은 열병이라고 하죠. 사랑을 모르는 이에게 사랑이란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모래와 같습니다. 정체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아는 이에게 사랑이란 소금과 같습니다. 달콤 쌉싸름하면서도 짠맛이 번지는 중독성 물질이며 건강을 지켜주는 영양소입니다. 경험한 사람만이 사랑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이별처럼 결혼, 임신, 출산, 육아도 그런 부류입니다.
결혼부터 볼까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개의 삶이 한날한시에 하나로 통합되는 게 결혼입니다. 부부라는 이름의 삶이죠. 서로 닮아간다고 할 정도로 결혼생활에는 사랑을 비롯해 배려, 양보, 이해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다른 점을 끝없이 확인해나가는 것도 부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 때가 있습니다. 육아는 사람이 사람을 키우는 겁니다.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가 스스로 성장하도록 돌보는 일이죠. 말은 쉽지만 직접 아이를 키워본 사람만이 육아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아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부모가 더 크는 성장 과정입니다.
출산은 제2의 출생입니다. 아이와 함께 엄마도 다시 태어나는 거죠. 실제로 한국에서는 꽁꽁 싸맨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산후조리에 신경을 씁니다. 찬바람이 스칠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르고 덮고, 한겨울을 연상케 합니다. 아기를 위해 모든 걸 용인하며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업적을 쌓은 겁니다. 생명을 만드는 일에 온몸을 다 바치는 사람은 오직 엄마뿐입니다.
악마를 구원한 글쓰기
아이를 셋이나 돌봤지만 글을 쓰는 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막내의 기저귀를 갈고 젖병을 물리면서도, 심지어 아기띠를 한 채 서서도 글을 썼습니다. 청소와 빨래를 하면서도 문장을 만들어나갔고 상황이 허락할 때마다 종이에 옮겨 적었습니다. 또 아침 9시만 되면 큰 녀석 둘은 제 갈 곳으로 가버리니 꼬맹이 하나만 챙기면 낮 시간은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워만 있던 이 녀석이 어느새 일어나 앉고, 기고, 서고, 걷고, 뛰면서 저의 하루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막내를 챙기면 큰 녀석들이 방치되기 일쑤였죠. 아이들 재우다 치우지도 못하고 잠드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시끄럽게 떠들면 제가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상냥하던 아빠는 폭군으로 변했고 자상하던 남편은 게으르고 신경질적인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바뀌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흐렸고 창문을 열어도 공기는 탁했습니다. 지난날이 그립고 화려했던 경력이 아쉬웠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어디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는데 불과 1년 만에 깡통처럼 쪼그라든 자신이 못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억울할 일은 없었습니다. 불쌍한 건 아이들이고 고생하는 건 아내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이들 셋 키우는 남자 흔치 않다’며 육아일기 써보라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자존심 상해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재미라곤 사라져버린 저에게 그나마 위안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진을 들춰보고 여기저기 끼적여놨던 에피소드도 꺼내 읽었습니다. 큰 녀석과 함께 만든, 머리가 기형적으로 큰 종이로봇도 보였습니다. 저는 악마로 변했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중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일기처럼 쓰진 않았습니다. 미소 짓게 만드는, 나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 순간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감정을 간직한 채 글로 풀었습니다. 나름의 의미도 넣었습니다.
고된 일상의 연속이지만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감정, 생각, 경험 같은 자잘한 것들을 문장으로 옮기는 과정에 많은 것들이 정화되기 때문이죠. 또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육중일기를 쓰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많은 행복을 우리가 놓치며 사는구나!’ 우리 주변에는 행복이라 할 만한 것들이 넘치는데도 우린 언제나 자극적이고 새로운 일만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런 흥분만 즐기는 게 가능할까요. 쾌락만 쫓는 게 옳은 걸까요.
하루 5분 글쓰기
프리라이팅 따라 하기: 프리라이팅이란 아무런 부담 없이 첫 문장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다음 문장을 쓰는 겁니다. 쓰다 보면, 계속 쓰다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슴에서 피어납니다. 그걸 하나의 주제로 다듬어 글을 완성하는 겁니다. 누구든 연필을 소재로 다양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일단 쓰세요. 쓴 다음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의도를 버리고 풀어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스토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낙엽 쌓인 벤치에 대해 쓰기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어머니로, 아버지로, 아이들의 교육으로, 헤어진 첫사랑으로, 어제 마신 소주 한 잔으로 번져갑니다. 잊고 있던 경험이 떠오르고 낯선 문장이 만들어집니다.
일상에서 스토리를 건지는 일은 평범한 자극을 인지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끝은 뭐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펜을 들고 끼적여보는 것이죠. 이 작은 수고로움이 한 편의 이야기가 되고, 이런 이야기가 쌓이면서 자신만의 생각, 태도, 관점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철학이고 가치관입니다. 눈앞의 작은 것에서 시작해보세요. 때로는 모래알처럼 낱낱이 흩어지더라도 쓰는 걸 멈추지는 마세요. 쓰다 보면 스토리가 되고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됩니다.
글공부로 엄마도 행복하자
쓰잘머리 없지만 간직하고 싶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좀 간직하고 싶더라고요.”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는 엄마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어느 날 품 안에 잠든 아이가 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간지럽힌 그 느낌을 기억하고 싶어 합니다. 알 수 없는 말을 옹알거리며 혼자 노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그 뿌듯함도 잊어서는 안 되겠죠. 또 의도가 담기지 않은 깨끗하고 맑은 아이들의 대화를 훗날 아이들이 컸을 때 들려주길 원합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겨도 뭔가 아쉽습니다. 순간의 장면을 담을 수는 있어도 정작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떠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때의 감흥을 기억에서 꺼내와 상상해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미지는 같지만 감정은 재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재롱잔치 같은 발표회에 가보면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부모들로 무대 앞은 북새통이 됩니다. 편하게 즐기다가도 정작 우리 아이가 나오는 순간에는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느라 정신이 없는 겁니다. 여느 부모처럼 저 역시 아내가 부여한 임무를 철저히 수행해왔습니다. 그런데 첫째의 7살 재롱잔치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두 달 뒤에 초등학생이 되는 큰 녀석과 지금까지 잘 키운 아내를 향한 고마움이었습니다. 또 제 자신에 대한 격려이기도 했습니다. 간단히 사진 몇 장만 찍고 그 순간을 즐겼습니다. 그날 밤 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변치 않는 게 있다면 눈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탱탱하던 피부에 주름이 지고, 손바닥이 두꺼워지고, 피부가 말라가더라도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언젠가 TV에서 허리가 잔뜩 휜 노인이 먼저 보낸 아들을 떠올리며 흘린 눈물을 기억한다. 이성은 흐려질지라도 감정은 틀어지지 않는다. 오늘 난 행복을 맛보았다. 짭짤한 맛이 일품이었다.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과 동작을 맞추는 현오가 이제 다 컸다며 손을 흔들었다. 막내가 태어나면 그간 받던 사랑을 조금 나눠줘야 할 텐데. 미리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마치 그걸 아는 듯 괜찮다고 손을 흔드는 게 아니었나 싶다. 나는 그래서 할 말을 읽은 게 아닐까. 고맙고 미안할 때, 할 말을 잃었을 때 나오는 대답. 그게 눈물이니까.
글쓰기는 카메라로 포착하기 어려운 대상을 담아낼 때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감정과 생각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건 단순히 ‘어떤 사건이 있었다’가 아닙니다. 그 순간을 타임캡슐처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뿐입니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면 충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글로 풀어야 풍부하게 그 순간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바람처럼 눈썹을 스치는 생각, 확 끓어올랐다 가라앉은 그 감정. 참 좋았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그걸 남기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너무 아름다워 간직하고 싶었다는 한 엄마의 말처럼 우리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일은 일상에서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걸 얼마나 담아내느냐에 따라 삶의 농도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하루 5분 글쓰기
마음의 진동을 담은 편지: 집에 있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뭘까요? 지금 자신의 모습을 다른 누군가와 또는 예전의 자신과 비교하는 겁니다. 살림하는 사람이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웬만하지 않으면 감정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내가 이러려고’ 죽도록 공부했나, 결혼했나, 그 좋은 직장을 그만뒀나, 애를 낳았나 같은 혼잣말이 어둑한 연극무대의 독백처럼 온몸을 감쌉니다. 이런 감정의 붕괴를 달리 표현하면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많은 주부들이 결혼하면서, 임신하면서, 출산하면서, 육아와 양육을 책임지면서 집으로 들어갑니다. 장밋빛 미래는 아니더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시들었고 쪼그라들었습니다. 축복받을 일인데도 엄마, 아내, 며느리, 결국 여자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일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남의 편인 줄 알지만 그래도 남편에게 기대고 싶습니다. 그러나 냉랭한 반응에 혼자 감당하고 체념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은 여전히 어깨를 짓누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스스로 택한 전업이었지만 바깥과 고리가 끊어지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내가 밥벌이할 때는 집안일도 엄청 했는데, 미친 듯이 일하고 칼퇴했는데, 술자리는커녕 공식적인 회식도 최대한 짧게 끝냈는데, 직장에 치우친 아내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 때면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났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굳은 얼굴과 심통 가득한 행동거지는 숨길 수 없었습니다. 물밑의 감정이 수면 위로 톡 하고 터지는 날이면 밤새 갑론을박을 해도 결론은 점점 멀어졌죠. 속만 상하고 몸만 축난 채로 적당히 봉합하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다행히 글쓰기가 저를 살렸습니다. 저는 이런 감정들을 글로 풀었습니다. 일상적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캐내는 일이 오히려 저를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줬습니다. 그러다가 희망사항 몇 개에 애교를 섞은 뒤 빙빙 돌려 편지에 쓴 적이 있습니다. 닭살스런 행동에 아내는 별말이 없었지만 이런 탄원서가 몇 번 이어지면서 다툼이 줄었습니다. 물론 수면 위로 기포가 터질 때는 여전히 고드름처럼 날이 서고 차갑지만 서로의 본심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편지를 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상대적 박탈감으로 괴로운 날에는 매번 남의 편만 들어주는 사람에게 여러분의 손편지 한 장 건네보세요. ‘내가 이러려고’ 결혼한 게 아니라는 마음의 진동을 편지에 담아 남편의 손에서 울리게 해주세요. 직접적인 대화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콩트의 시나리오처럼, 윗집 아주머니의 넋두리처럼 써보세요. 진동은 반드시 전해집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향기를 뿜는다
그 남자는 왜 여학생 앞에 앉았을까
집 앞 도서관을 자주 찾습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이 깨끗하고 찾는 이가 적어 조용합니다. 공원 속에 자리하고 있어 신선한 공기 마시며 산책할 수 있지요. 어린이집에서 나들이 나오는 날에는 꼬맹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에 귀가 즐겁습니다. 느릿느릿 걷는 노부부의 잡담 소리도 살갑고 운동화 바닥에 흙이 갈리는 소리도 포근합니다. 가끔 무료해질 때는 주변 사람을 구경합니다. 어떤 책 보나, 무슨 공부하나, 메모는 하나, 손톱을 물어뜯나, 생수를 마시나, 정수기 물을 받아 마시나. 뭐 그런 잡스러운 행동을 보며 그 장면을 문장으로 옮겨봅니다. 일종의 글쓰기 산책입니다.
한번은 문득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어떻게 묘사할까. 대낮에 도서관을 찾은 중년의 남자. CCTV처럼 구석탱이에 앉아 이따금씩 열람실을 훑어보는 남자. 뭔가 끄적이는 듯싶더니 팔자 좋게 산책을 떠나는 남자. 하릴없이 공원 벤치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는 남자. 어느 순간 보면 다시 뭔가를 쓰는 남자. 그런 생각이 든 어느 늦은 여름에 남겼던 세 편의 글입니다.
조카뻘의 여학생이 맞은편에 앉더니 공부를 한다. 중급회계. 대학생인가. 난 아들도 셋이고 마누라도 있고 해야 할 일은 많고 읽어야 할 책들은 옆에 잔뜩 쌓여 있다. 그런데도 그 학생이 자꾸 신경이 쓰인다. 힐끔힐끔 나를 보는 것 같다. 예쁘장하게 생겼다. 앞자리가 이렇게 가까웠었나. 갑자기 책상 길이를 한번 재보고 싶어진다. - 도서관에서
눈치 볼 필요는 없지만 남들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상상하는 것은 즐겁습니다. 세 사람의 눈을 통해 하나의 대상을 보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짧은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해보기 전에는 몰랐던 관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글을 쓰는 세 아이의 아빠는 젊은 처자의 앞자리를 차지한, 어딘가 의심스러운 취업준비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솥에서 뜬 국이라고 해도 누구는 짜다. 누구는 싱겁다고 합니다. 같은 곳을 다녀와도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다릅니다. 한 사람을 놓고도 저마다 내리는 평가가 다릅니다. 우리 삶도 그렇죠. 비슷한 듯 다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와 같은 삶은 없습니다. 내 향기는 내가 만드는 겁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어요. 내 생각과 감정을 알아가고 그것을 삶의 한 장면으로 남기는게 중요합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어도 향기는 퍼집니다.
하루 5분 글쓰기
타인의 문장에서 시작하기: 어리석음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결함이 아닐까. 인간은 어리석기에 조건 없이 마음을 주고, 어리석기에 눈물 흘리고 아파한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이 우리를 따뜻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자기 구역임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후회할지언정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게 낫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단 말인가. 어리석어 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의 절반을 보지 못한 셈이다. - 어리석음 예찬
저는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는데도 지금은 글로 먹고살게 되었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스승이라 여기는 사람은 미국의 시인인 나탈리 골드버그입니다. 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쓰다 보면’인데 나탈리 골드버그의 ‘무조건 쓰라’는 지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무조건 쓰다 보면 평소에는 가보지 못한 내면의 보물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죠.
글을 쓰거나 강의를 준비하다 보면 저부터 생각이 복잡해질 때가 있습니다. 눈길에서 미끄러지는 자동차처럼 가야 할 곳이 분명한데도 방향을 잡지 못하는 거죠. 그때마다 독서노트를 꺼내 그녀의 책에서 옮긴 문장을 읽으며 필사 당시의 느낌을 떠올려봅니다. 부족하다 싶으면 아예 책을 폅니다. 저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자국이 남는 문장을 만나면 우측 모서리를 접어놓습니다. ‘어리석음 예찬’은 그녀의 책 한쪽에 날아가는 글씨로 메모를 해둔 겁니다. ‘어리석다’를 긍정적인 낱말로 재해석하는 그녀의 관점에 수긍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