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 현대사
박찬수 지음 | 인물과사상사
NL 현대사
박찬수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1월 / 326쪽 / 15,000원
NL의 등장
NL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강철서신, 금기를 뛰어넘다: 제5공화국의 폭압통치가 극에 달했던 1986년 3월, 휴학하고 공장 취업을 준비하던 김지연(서울대 약대 83학번)은 서클 ‘고전연구회’ 선배인 김영환(서울대 법대 82학번)에게서 팸플릿(문건) 하나를 타이핑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건네진 문건의 제목은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김지연은 문건을 타이핑한 뒤 김영환에게 건넸다. 김영환은 이 팸플릿을 딱 한 부 복사한 뒤 다시 7부로 복사하고, 원본과 1차 복사본은 폐기했다. 국가안전기획부나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보안 조치였다.
7부는 서울대 각 단과대학의 학과 사무실에 몰래 뿌렸다. 팸플릿 맨 끝에는 작성자의 이름이 ‘강철’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지금 청년학생들에게 부과된 가장 크고도 중요한 임무는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이해하여 이를 지도적 지침으로 삼으며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굳게 뭉치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어야만이 비로소 청년학생운동이 종파주의를 비롯한 제반 편향에 쉽게 빠지지 않을 강한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며, 적의 어떠한 분열 와해 파괴 공작도 진정한 단결을 유지하며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
팸플릿에 언급된 ‘주체사상’이 북한 주체사상을 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처음에는 거의 없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을 흔들고 이후 30년간 숱한 논쟁과 갈등을 불러온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 노선’, 좀 더 좁혀서 이야기하면 남한의 자생적인 ‘주사파(주체사상파)’는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 강철 명의의 팸플릿이 잇따라 서울대에 배포되었다. 파장은 즉각적이고 광범위했다. 문건은 수천, 수만 부로 복사에 재복사를 거듭하며 순식간에 전국의 대학ㆍ노동현장ㆍ재야운동권으로 퍼져나갔다. 나중에 이 문건들은 몰래 책으로 만들어져 출간되었고, ‘강철서신’이란 제목이 붙었다.
NL은 무엇인가?: NL 주사파를 상징하는 말처럼 되어버린 ‘종북’이란 단어를 처음 쓴 이들은 2001년 사회당이었다. 사회당은 민주노동당의 통합 제의에 “민중의 요구보다 조선노동당의 외교정책을 우위에 놓는 종북세력과는 당을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민주노동당 내 NL과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 노선 또는 평등파)의 노선투쟁 과정에서, PD 계열인 조승수는 “종북주의와 이에 바탕한 패권주의가 당내 다수파가 됐다. 종북주의에 기반한 다수파(NL)는 당비 대납과 집단 주소 이전, 심지어 부모ㆍ친척ㆍ미성년까지 입당시켜 지역위원회를 장악하고 지금은 중앙위원회와 대의원까지 주요 의결기구를 장악했다.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의 정체성(북한과의 관계와 태도)에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고 NL 주사파를 공개 비난했다. 이때부터 ‘종북’은 대중적 용어로 확산되었다. 조승수의 주장은 예언과도 같았다. 5년 뒤인 2012년 4월 비례대표 후보를 뽑는 경선에 대리투표와 공개투표 등 대규모 부정이 있었다는 ‘부정경선 사건’으로 통진당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NL 사조의 영향: 1986년 돌연 등장한 NL 사조는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중노선을 분명히 하여 학생운동권이 엘리트적ㆍ전위적 운동방식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19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 학생운동이 일반 시민의 민주화 열기와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데에는 NL의 대중노선 역할이 컸다는 평가가 있다. 1988년 결성된 ‘반미청년회’ 의장을 지냈던 조혁(고려대 인문대 82학번)은 이렇게 말했다. “NL이나 주사파가 세력이 커서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정치력이 있고 유연했기에 1987년 민주화 시기를 주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NL의 확산에 기여했다. 지금이야 (운동권 출신이) 정치권에 많이 진출해 있으니까 쉬워 보이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해도 (개량주의적인) 야당과 함께 투쟁하자고 하면 내부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곤 했다. ‘직선개헌 쟁취’란 전 국민적 구호를 내거는 것도 대중추수주의(大衆追隨主義, populism)란 비판을 받을 때였다.”
반론도 있다.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을 지낸 임성택(82학번)의 말이다. “NL의 대중노선이 새롭다고 보지 않는다. 1980년 무림-학림 논쟁 때부터 대중노선은 학생운동의 한 흐름으로 죽 이어져왔고 언제나 대중노선이 다수파였다. NL은 학생운동의 분열을 극복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그 이후 NL과 PD로 운동의 분열이 훨씬 심해지고 고착화했다. NL 전체에서 주사파의 영향력도 과장되어 있다. 중요한 역할은 했지만 NL의 압도적 다수는 주사가 아닌 ‘비주사’였다.”
NL 운동의 부침이 극적인 것은, 남한에 NL을 확산시킨 ‘강철’ 김영환과 민혁당 핵심 인사 상당수가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 정권 타도’와 ‘북한 민중 해방’을 외치는 노선으로 180도 변신했기 때문이다. 김영환은 1995년 월간 《말》 4월호에 실린 「반미, 북한 그리고 90년대에 대한 나의 생각」이란 인터뷰 기사에서 전향을 공식화했다. 지하 전위당인 민혁당 중앙위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민혁당은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와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 등 3개 지역조직을 두고 있었는데, 이 중 김영환이 관할한 전북위원회 다수가 그를 따라 전향했다.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던 홍진표(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 현 《시대정신》 편집인) 등도 김영환의 설득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NL 전성기와 전대협
극우 총장이 불 지핀 주사파 논쟁
주사파 색출 광풍: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18일. 청와대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14개 대학 총장의 오찬에서 박홍 서강대 총장이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주사파와 우리식 사회주의가 제한된 학생들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다. 북한은 학원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까지 만들어 놓았다. 선량한 학생들은 사상적 방황을 하다가 주사파에 말려든다. 베이징에서 김일성대학 학생회장을 만난 일이 있는데, 남한 학생들의 공산화는 시간문제라고 호언했다. 일부 학생은 남조선 해방을 위해 가을에 또 이슈를 만들어 나올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비준 반대와 미군기지 반납 서명운동을 벌일 것이다. 북에서 이미 지시를 했다. 내가 증거를 갖고 있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북한 사노청,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학생들은 팩시밀리를 통해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
김일성 주석 사망과 맞물리면서 남한 사회에는 ‘주사파 색출 광풍’이 몰아쳤다. 전국 대학 총장들은 박홍 총장 지지와 학원 내 친북세력 근절을 다짐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한바탕 소동이 일었지만 실질적인 성과물은 없었다. 하지만 여파는 컸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 쉬쉬하던 주사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역설적으로 박홍의 발언이 운동권 내부에서 ‘주체사상과 주사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더 중요한 건, 이 파문으로 ‘NL=주사파’라는 인식이 일반 국민에게 각인되었다는 점이다. 그전까지 ‘주사파(주체사상파)’는 운동권 내부에서만 주로 언급하던 단어였다. 이제는 1986년 이후 남한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NL을 특징짓는 키워드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NL=주사(주체사상)’는 아니다. 주체사상의 혁명이론이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을 표방하지만, 북한의 주체사상과 남에서 받아들인 NL 사조는 확연히 달랐다. 북한은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버금가거나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새로운 철학 체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한 운동권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철학과 사상으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운동가의 올바른 태도를 적시한 실천적 지침이었다. ‘품성론’이 바로 그랬다. 1980년대 중반 이후 NL에 빠져들었던 학생들 대부분은 “품성론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1986년 강철서신과 북한 방송 녹취록을 받아 처음 읽었다는 전남대 출신의 한 인사는 “북한 방송 문건은 내용 면에서 큰 감흥은 없었다. 매력적이었던 건 품성론이었다. 혁명이론보다 의리와 헌신,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는 품성론은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남한 독재정권에 대한 회의: 「80년대의 사회 변혁 운동과 주체사상」이란 논문을 쓴 김재기(경성대 교수)는 ‘품성론’이 주체사상의 핵심이 아닌데도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남한 운동권에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그는 “NL 사조를 따랐던 사람들이 주체사상의 철학적 체계를 제대로 이해했을까 하는 점엔 회의적”이라면서 “1986년 자민투 기관지 《해방선언》을 보면, ‘사상이란 조국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 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운동 승리에 대한 강철 같은 신념, 그리고 백전 불굴의 투지로 표현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상’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그 뒤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NL은 1930년대 혹독한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맹아를 틔운 주체사상의 초기 성격과 맞닿는 측면이 있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을 전공한 한홍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체사상은 1930년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실제 경험과 고난에서 나온 건데, 1960년대 이후에 북한 정권이 멋있게 포장해버렸다. 1930년대 코민테른은 ‘일국일당’ 원칙을 내세워 만주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중국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혁명을 하면 조선 혁명은 저절로 이루어진다’며 조선 혁명의 독자성을 부정했다.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이끌던 김일성은 조선 혁명의 독자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게 ‘주체’를 탄생시킨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자력갱생’이나 ‘사람 중심’이란 주사의 원리도 그 당시의 열악한 상황, 곧 돈도 물질도 없으니 믿을 건 사람밖에 없고 모든 걸 우리가 의지로 극복해야 한다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난관을 극복하는 삶의 태도로 보면 훌륭한 것인데, 이걸 사상이나 철학 체계로까지 격상시키려다 보니까 문제가 생겼다.”
김일성의 항일운동 전력은 ‘북한’이란 금단의 문을 여는 열쇠구실을 했다. 1980년대 들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이 은밀하게 대학가에 퍼졌다고 해도, 여전히 뿌리 깊은 반북 이데올로기가 굳건하던 시절이었다. 초기에 NL을 받아들인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북한이 어떤 사회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최소한 남한 독재정권보다는 정통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은 이렇게 말했다. “강철서신을 쓸 때까지만 해도 주체사상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만, 북한 정권의 정통성이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남한 정권에 비해선 더 있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리고 북한과 손을 잡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6년 이후 남한 학생들이 접한 것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집대성한 ‘주체사상’이었다.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1982년)는 주체사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건으로 널리 읽혔다. 물론 이 문건을 김정일이 직접 썼는지는 의심스럽다. 1997년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노동당 비서 출신 황장엽은 “문건은 내가 기초를 해서 노동당 선전국에 넘겼다.”고 진술했다. 아무튼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시절의 경험과 1960년대 이후 김정일에 의해 유일사상으로 격상된 주체사상이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1980년대 남한 사회에 유입된 건 기묘한 현상이었다. 이는 수많은 논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NL이 남한 사회운동의 주류를 점할 수 있었던 이유였고, 또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며 교조화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한편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 “혁명운동, 공산주의 운동에서 지도 문제는 다름 아닌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 문제”라고 주장했다. “당의 영도가 수령의 영도로 되는 것은 수령이 근로인민대중의 지도적, 향도적 역량인 당의 최고 영도자로서 혁명과 건설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수령과 후계자의 유일적 영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주체사상의 핵심이었다.
‘주사’와 ‘비주사’의 갈림길: 여기서 남한 운동권의 반향이 뚜렷하게 갈렸다. 품성론만으로는 주체사상의 정수를 받아들인다고 할 수 없었다. 수령론을 받아들일 것인지, 북한 노동당을 남한 변혁운동의 지도부로 인정할 것인지가 NL 내부에서 ‘주사’와 ‘비주사’를 가르는 선이 되었다. 김재기는 이렇게 말했다. “NL 가운데 ‘주사(주사파)’를 어느 범위까지 보느냐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주체사상에 포함된 넓은 의미의 민족 문제에 대한 각성, 그걸 풀어가기 위한 전략전술과 통일 염원, 이런 정서와 논리까지 폭넓게 주사에 포함시킨다면, 주사파가 (NL 운동권의) 다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노동당과 김정일을 추종하고, 그걸 명료하게 자각하고, 의식적으로 추구한 사람으로 한정한다면, 소수였다.” 소수임에도 주사파는 1990년대를 관통해 2000년대까지 NL 운동권 전체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민족주의, 거대한 블랙홀
북한의 권력 세습, NL 분화 촉발: NL을 하나의 사조로 묶은 것이 세 기둥(민족주의, 대중노선, 품성론)이라면, 마치 양파 껍질처럼 NL 내부를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만든 것은 북한과 주체사상과 수령론과 후계자론이었다. 북한과 김일성 주석, 김정일 후계자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단순히 NL과 PD를 가르는 기준이 아니었다. NL 내부의 다양한 인식 차이를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했다. 익명을 요청한 진보정당 출신 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계급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게 NL이라 한다면, NL 내부에선 북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수령론과 후계자론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논란거리였다. 그런데 이게 단순하지 않다. 수령론과 후계자론으로 가면, 반응은 미묘하지만 다양하게 갈린다. 후계자론까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주체사상은 인정하면서도 수령론과 후계자론엔 소극적인 그룹도 있다. 세습은 중국ㆍ쿠바와 같은 현존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전례 없는 일이니까, 이걸 받아들이는 농도는 사람에 따라 또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주체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비주사 NL’ 그룹도 있다.”
혁명 사조로서 NL은 대중적으로 세력을 확산하는 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식반론이 그랬고 주체사상 핵심인 수령론과 후계자론이 그랬다. 그럼에도 비교적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86년 처음 등장할 때 강렬한 인상을 준 세 가지 특징(민족주의, 대중노선, 품성론)이 NL 주변을 두텁게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해방전사여, 음주와 흡연을 절제하라
구국학생연맹 / NL 사조 확산의 공신: 1986년 3월 29일 오전 9시 30분, 서울대 자연대 건물 22동 404호. 학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빈 강의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누군가 앞에 나와 ‘결성취지문’을 낭독했다. “한반도는 19세기 말부터 분단을 거쳐 지금까지 미ㆍ일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 지배를 당해왔다. 이들의 억압과 독점에 항거하여 분연히 투쟁하다 산화한 선배 순국영령들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고…… 열혈 애국청년학생들의 민주적 역량을 총집결하여 투쟁할 목적으로 ‘구학련’을 결성한다.” 첫 NL계 학생운동조직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은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1960년 4ㆍ19혁명기 이후 처음으로 남한에서 ‘반미’와 ‘통일’을 전면에 내건 대중적인 학생운동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반독재 투쟁에 주력했던 기존 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사조가 학생운동권의 주류로 떠올랐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구학련 결성을 주도한 이들은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인 정대화와 김영환이었다. 정대화가 총책인 중앙위원장을 맡고, 김영환이 뒤에서 돕기로 했다. 구학련은 1986년 8월 경찰 수사로 조직이 와해될 때까지 반년도 활동하지 못했다. 그 기간 동안 최고지도부인 중앙위원회는 핵심 활동가들의 잇따른 구속과 수배로 무려 일곱 차례나 개편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구학련은 기존 학생조직과 지향점을 달리하며 NL 운동의 확산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그 뒤를 이어 고려대의 애국학생회, 연세대의 반미구국학생동맹, 전남대의 반미구국투쟁위원회 등 NL 노선을 따르는 학생운동조직이 잇따라 결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