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불평등의 역사

발터 샤이델 지음 | 에코리브르



불평등의 역사

발터 샤이델 지음

에코리브르 / 2017년 9월 / 768쪽 / 40,000원





불평등의 역사



불평등의 탄생

대불평등화: 불평등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 조건이 이례적 안정기에 들어선 다음에야 급격히 퍼졌다. 10만 년 이상 지속된 최초 간빙기의 고온 기간인 충적세는 경제적ㆍ사회적 발달에 더욱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는데, 이런 발전이 인간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에너지를 추출하고 수적 증가를 가능케 하면서 점차 권력과 물질 자원의 불균등한 분배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내가 ‘대불평등화(Great Disequalization)’라고 부르는 것, 즉 수렵ㆍ채집인의 평등주의를 무너뜨리고 소득과 부의 지속적 위계와 불균형으로 이를 대체한 새로운 양식의 최저 생활 및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 이행으로 이어졌다. 이런 발전이 일어나려면 그 침해로부터 방어 가능하고 소유자들이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잉여를 끌어낼 생산적 자산을 갖춰야 했는데, 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 생산은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하면서 경제적ㆍ사회적ㆍ정치적 변화의 주요 동인이 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상이한 발달 수준 - 수렵ㆍ채집인, 원예인, 목축인, 농경인 - 을 가진, 21개 소규모 사회에 대한 공동 연구는 불평등의 두 가지 중요한 결정 요인을 밝혀냈다. 바로 토지와 가축의 소유권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부를 전달하는 능력이다.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부를 살펴봤다. 요컨대 체화된 부(주로 체력과 번식 성공), 관계적 부(동업자들에 의해 예시됨) 그리고 물질적 부(가정용품, 토지 및 가축)가 그것이다. 그들의 표본에서 수렵ㆍ채집인과 원예인에게는 체화된 자질이 가장 주요한 부의 범주였고, 물질적 부는 가장 덜 중요했다. 반면 목축인과 농경인은 정반대였다. 다른 종류의 부에 대한 상대적 가중치는 전체 불평등 정도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체화된 부에 대한 물리적 제약은 비교적 엄격하다. 특히, 신체 크기에 대해 그렇고, 체력과 사냥 수익 및 번식 성공에는 약간 덜 엄격하다. 관계적 부는 더 유동적이긴 하지만 농경인과 목축인한테서보다 불균등하게 분배됐고, 이들 두 집단에서 나타난 토지와 가축의 불평등 정도는 수렵ㆍ채집인과 원예인의 도구나 배(boat) 점유율보다는 더 높은 수준에 달했다. 각기 다른 종류의 부에 적용되는 다양한 불평등 제약과 특정 유형의 부에 매겨지는 상대적 중요성의 조합이 생계 양식마다 관찰되는 차이점을 설명해준다. 부의 종합 평균 지니계수는 수렴ㆍ채집인과 원예인은 0.25~0.27로 낮았지만, 목축인(0.42)과 농경인(0.48)은 훨씬 높았다. 물질적 부만 놓고 보면 주요 분계선은 수렵ㆍ채집인(0.36)과 나머지 전체(0.51~0.57) 사이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부의 전달 가능성은 또 다른 중요한 변수다. 세대 간 부의 전달 정도는 농경인과 목축인이 나머지 집단의 약 2배만큼 높았고,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물질적 소유물은 수렵ㆍ채집인과 원예인의 자산보다 전달에 훨씬 더 적합했다. 이러한 체계상의 차이는 종합적인 부의 상위 10분위수에 있는 부모의 자녀가 가장 가난한 10분위수 부모의 자녀와 비교해 결국 동일한 10분위수에 속할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측정했을 때 삶의 기회 불평등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방식으로 규정한 세대 간 이동성은 일반적으로 미미했다. 심지어 수렵ㆍ채집인과 원예인 사이에서도 상위 10분위수 자손이 이 지위를 재생산할 가능성은 최하위 10분위수 자손이 거기에 올라설 확률의 최소 3배였다. 그러나 농경인의 경우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고(약 11배), 특히 목축인보다는 훨씬 더 높았다(약 20배). 이런 격차는 두 가지 요인 때문일 수 있다. 즉, 이러한 효과의 절반 정도는 기술이 차지하는데, 이런 기술이 각기 다른 유형의 부가 갖는 상대적 중요도와 특징을 결정한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부의 전달 양식을 지배하는 제도가 차지한다. 농경과 목축의 규범이 친족으로의 수직적 전달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분석에 따르면, 불평등과 그것의 지속은 세 가지 요인이 조합된 결과다. 바로 상이한 부류의 자산에 대한 상대적 중요도, 자산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데 얼마나 적합한가, 그리고 자산의 실제 전달 비율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적 부가 별로 큰 역할을 하지 않고 손쉽게 전달하기 적합하지 않으며, 상속의 의욕을 꺾는 집단은 물질적 부가 가장 중요한 유형의 자산이고 전달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며 다음 세대에 남겨주는 것이 허용된 집단보다 당연이 더 낮은 수준의 전반적 불평등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결국에는 전달 가능성이 결정적이라는 얘기다. 만약 부가 세대 간에 대물림된다면 건강과 관련한 임의의 충격, 동등함 그리고 불균형을 창출하는 자본과 노동의 수익은 보존될 것이다. 아울러 분배의 성과는 평균으로 회귀하도록 방치되는 대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쌓일 것이다.

불평등의 기복

2개의 정점: 이제 소득 및 부의 불평등과 관련한 진화가 전체적으로 특별한 불평등화 및 평준화 동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패턴을 따라온 것인지 살펴보기 위해 지구상의 특정 지역을 자세히 들여다볼 차례다. 내 목표는 이 책의 핵심 논거, 즉 불평등 증가는 기술적ㆍ경제적 발전과 국가 형성의 상호 작용으로 추동되었다는 논거를 입증하는 것이다. 아울러 효과적 평준화에는 불평등을 초래한 자본 투자, 상업화 및 약탈적 엘리트와 그 동료들에 의한 정치적ㆍ군사적ㆍ이데올로기적 권력 행사의 성과를 일시적으로나마 약화 및 역전시킨 격렬한 충격이 필요했다.

우리를 장장 20세기 초까지 데려갈 이 연구에서 나는 유럽에 초점을 맞췄다. 농경은 기원전 7000년부터 유럽에 등장해 다음 3000년 안에 널리 퍼졌다. 아주 뭉뚱그려 말하면, 이런 근본적인 경제적 변모에는 그 과정을 자세히 밝혀낼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긴 해도 점진적 불평등 증대가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우리의 연구를 수백 년부터 수천 년까지 확장한다면 인구 밀도가 높아지고, 통치를 강화하고, 잉여가 많아지면서 나타나는 지배적 상승세를 안심하고 상정할 수 있다. 이런 훌륭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기원후 초반 몇 세기에 걸쳐 있는 성숙한 로마 제국 시기에 물질적 불평등이 장기간 치솟은 최초의 정점을 찾아낼 수 있다. 과거 대부분의 유럽에서는 인구, 도시화, 사유 재산 및 강제력이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한 적이 없었다. 이러한 격차는 다음 몇 세기 동안 국가 붕괴로 대폭 축소됐다.

유럽에서 로마의 지배를 받은 다른 모든 지역은 5세기 후반 로마 세력의 해체와 함께 시작된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서 극심한 압착을 겪었다. 이런 경제적 평준화는 대부분 국가 실패의 직접적 결과였다. 대규모 격렬한 충격은 6~8세기에 유라시아 서쪽을 강타한 선(腺)페스트라는 최초의 대유행병으로 한층 더 강력해졌다. 선페스트는 토지 대비 노동의 가치를 상승시켰다.

이후 유럽의 국가와 정치 조직은 각기 다른 시기에 회복하기 시작했다. 8세기 카롤링거 왕조의 팽창은 무슬림의 에스파냐 정복이 그렇듯 불평등의 소생기로 볼 수 있다. 영국에서는 로마 시대 이후의 최저점이 에식스(Essex) 주도하의 국가 조직과 강력하고 부유한 귀족 계급의 형성으로 무너졌다. 로마의 몰락 이후 일반적으로 약화된 귀족들이 또다시 힘을 모았다. 상당한 지리적 분산을 감안하더라도, 9세기 이후 봉건 제도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엘리트는 농업 노동력과 그 잉여에 대해 더 큰 통제권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는 속세와 교회 지도자 사이에 진행 중이던 토지 집중과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과정이었다. 이후 대략 1000~1300년까지 유럽은 시종일관 경제적ㆍ인구학적 성장 국면을 경험했다. 늘어난 국민, 더 많고 더 커진 도시, 좀 더 활성화한 상거래 그리고 훨씬 강력해진 엘리트가 일제히 경제적 불평등을 끌어올렸다. 잉글랜드의 불평등은 이 시기 내내 치솟았다.

불평등의 상승은 여러 요인의 상호 작용으로 이뤄졌다. 요컨대 인구 증가, 토지 거래의 용이성, 분할 상속의 효과 등이 그것이다. 또 불평등이 증가한 데는 소득과 부가 상위층에 집중된 것도 작용했다. 하지만 1347년 페스트가 유럽과 중동을 강타하면서 수백 년간 지속된 불평등은 인류가 그때까지 경험해본 가장 가혹한 충격으로 인해 원상태로 되돌아갔다.

새로운 정점의 부상: 이후 15세기 말에 전염병이 누그러지자 유럽의 인구는 회복하기 시작했다. 경제 발전은 새로운 최고치에 도달했고, 불평등 역시 그랬다. 참고로 중세 말기와 특히 근대 유럽 초기는 물질적 불평등의 역사적 연구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처음으로 부의 분배에 관한 정량적 증거를 구할 수 있어 시간에 따른 변화를 추적하고 다양한 지역의 발달을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유럽 및 남유럽 여러 국가에서 나온 증거를 종합해보면, 자원은 소도시나 시골보다 대도시에서 더 불균등하게 분배되었고, 불평등은 일반적으로 흑사병이 끝난 후 치솟았다.

아울러 이러한 상승은 다양한 경제적 조건 아래서 발생했다. 노동 분업의 확대, 기술 및 소득의 차등, 엘리트 가구와 상업 자본의 공간적 집중 및 가난한 이민자의 유입은 항상 도시의 불평등을 촉진했다. 참고로 1427년 피렌체의 인구 조사 ‘카타스토(catasto)’에 따르면, 부의 불평등은 도시화의 규모와 비례 관계에 있었는데, 수도 피렌체는 0.79라는 부의 분배 지니계수를 자랑했다. 반면 소도시는0.71~0.75, 농촌의 평원에서는 0.63, 제일 가난한 지역인 산악 지대에서는 0.52~0.53 이었다. 최소 0.75인 높은 부의 불평등은 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에 서유럽 주요 도시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아무튼 흑사병이 초래한 평준화가 최저점을 기록한 15세기부터 사실상 우리가 자료를 갖고 있는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는 불평등이 증가했다. 네덜란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한편 피렌체의 영토(contado, 이탈리아의 농촌 지역)에서 재산 명부에 기록된 부의 불평등은 15세기 중반 0.55 이하에서 1700년경 0.74로 커졌다. 아레초에서는 1390년 0.48에서 1792년 0.83으로 올랐고, 프라토에서는 1546~1763년 0.58에서 0.83으로 커졌다. 이런 집중은 다분히 상위 부 점유율이 증가한 데 기인한 것이었다. 15세기 말이나 16세기 초와 18세기 초 사이에 가장 부유한 1퍼센트 가구가 소유했다고 신고한 자산의 비중은 피렌체의 콘타도에서는 6.8퍼센트에서 17.5퍼센트까지 올랐고, 아레초에서는 8.9퍼센트에서 26.4퍼센트, 프라토에서는 8.1퍼센트에서 23.3퍼센트까지 올랐다.

네덜란드에서와 달리 이 같은 변화의 대부분은 17세기의 경기 침체와 한층 더 장기화한 도시화의 순(純)증가 결핍이라는 맥락에서 일어났다. 여기엔 불평등을 일으킨 세 가지 주요 동력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바로 흑사병 시기의 감소로부터 회복한 인구, 농촌 생산자에 대한 점진적 착취와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화, 재정-군사 국가의 형성이 그것이다.

참고로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불평등은 글로벌 무역, 경제 성장 및 도시화 덕택에 상승했다. 반면 피에몬테에서는 재정적 압박이, 토스카나에서는 농촌의 프롤레타리아화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듯하며, 저지국(Low Country, 해발 평균 고도가 바다보다 낮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지칭하는 말) 남부에서는 이 두 메커니즘이 모두 작용했다. 이 시기에 북부 저지국 다음으로 가장 역동적인 사회였던 잉글랜드에서는 상업화와 도시 팽창이 물질적 격차를 증대시켰다. 그리고 16세기 초엽 프랑스의 시골에서는 인구 회복과 사유지 증가라는 쌍두마차의 압박이 중간층을 도려냈고, 지역 공동체는 대지주 및 먹고살기에는 농장이 너무 작아 소작과 임금 노동으로 내몰린 소자작농으로 양극화되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 로마의 불평등이 4~5세기 초 대규모 제국의 최후 단계에서 절정에 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이 한나라 왕조의 장기 통치 아래 증가해 아마도 2~3세기 초 동한 시대 후기에 정점을 찍었을 것이라고 믿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4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 장기간 지속된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는 틀림없이 어느 정도 압착이 일어났을 것이다. 스쳐간 수많은 외국인 정복 정권 사이에서 처음으로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고, 이후 대중 동원 전쟁과 야심찬 토지 분배 계획을 부활시킨 그 지역 북부에서는 특히 그랬을 것이다.

한편 당 왕조 치하에서 소득과 부는 최후의 분열 국면에서 엘리트가 대거 소멸하기 전인 7~9세기까지 증가함과 동시에 더욱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송 왕조 치하의 전례 없는 경제 성장, 상업화 및 도시화는 근대 초 유럽에서 관찰한 것과 흡사한 불평등화 성과를 이끌었을 것이며, 대지주의 세력은 이후 남송에서 막강해졌다. 그리고 몽골 제국 시대의 추세는 경기 침체, 전염병, 침략 및 약탈적 통치가 일제히 복잡한 상호 작용을 했으므로 정확히 밝혀내기 한층 더 어렵다.

불평등은 명 왕조 치하에서 또 한 번 증가했다. 국제 표준으로, 그 전반적 수준은 청 말기나 마오쩌둥의 혁명 이전까지도 특별히 높지 않았다고 보는 게 유익하긴 하지만 말이다. 남아시아에 관해서는 18세기 무굴 제국과 200년 후 영국 통치 아래 높았던 불평등이 대제국의 약탈적 지배나 식민 통치가 갖는 불평등화 영향을 좀 더 확인시켜준다는 점을 빼면 얘기할 수 있는 게 훨씬 적다.

한편 지난 600년간 신세계의 불평등 추세는 다분히 인상적인 방식으로만 밑그림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공물의 이동이 장거리로 확대되고 강력한 엘리트가 갈수록 세습 자산을 축적함에 따라, 15세기의 아즈텍과 잉카 제국 형성은 경제적 불균형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을 확률이 크다. 다음 두 세기 동안은 길항하는 힘들이 작용했다.

즉, 에스파냐의 팽창과 소수 정복 엘리트에 의한 약탈적 식민 통치가 기존의 부 집중 수준을 유지하거나 틀림없이 확대시킨 반면, 새로운 전염병의 구세계 도착으로 치명적 인구 감소가 일어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적어도 잠시 동안은 실질 임금이 치솟도록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전염병이 누그러지자 인구는 회복되었고, 토지/노동 비율은 하락했고, 도시화는 증대했으며, 식민 통치는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18세기까지 중남미의 불평등은 아마 어느 때보다 높았을 것이다. 19세기 초의 혁명과 독립은 같은 세기 후반에 상품 호황이 불평등을 역대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때까지 평준화 효과를 미쳤을 것이다. 이 소득 집중 과정은 간헐적으로 멈추었을 뿐 20세기 후반까지 줄곧 이어졌다.

기나긴 19세기: 우리는 근대적 경제 성장의 출발점인 19세기로 넘어왔다. 그와 동시에 일련의 지역적 데이터로부터 소득과 부의 분배에 관한 국가 단위의 측정으로 이동하는데, 여기에는 적잖은 불확실성이 뒤따른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산업화가 영국의 불평등을 악화시켰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기가 놀라우리만큼 어렵다는 게 드러난다. 요컨대 잉글랜드 혹은 대영제국의 소득 불균형이 19세기에 대부분 변치 않고 유지됐다는 걸 아무리 확신할 수 없다 해도, 우리에겐 그렇지 않았다는 걸 확인시켜줄 능력이 없다. 이탈리아의 결과물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또 이 시기 독일에는 국가 데이터가 없다. 그리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추이 역시 기록의 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한편 훗날의 미합중국 지역에서는 불평등이 잠깐씩 일시 정지했을 뿐, 아마도 25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증가했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동향에 대한 기록은 취약하다. 그렇지만 노예제 팽창이 17세기 말과 18세기 대부분 동안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높였을 공산이 크다. 독립 전쟁과 그 즉각적 여파는 일시적 압박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교전으로 자본이 파괴되고, 군 복무와 사상자 그리고 도망친 노예가 노동력 공급을 감소시키고, 해외 교역이 붕괴하고, 도시의 엘리트가 이런 혼란으로 말미암아 과중하게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00~1860년 급속한 노동력 성장, 산업과 도시에 편중된 기술적 진보, 그리고 개선된 금융 제도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불평등을 치솟게 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