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지 上
현이섭 지음 | 인물과사상사
중국지 上
현이섭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6월 / 419쪽 / 18,000원
혁명전야
반항아 마오쩌둥
마오쩌둥(毛澤東)은 청나라 말엽인 1893년에 후난선 샹탄현 사오산충에서 농민인 아버지 마오순성(毛順生)과 어머니 원치메이(文七妹)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오는 4세 때부터 둘째 외삼촌의 사숙에서 ‘청강생’으로 《가범잠언》과 《3자경》 같은 책들의 글을 줄줄 외워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9세 때 마오는 외가에서 사오산으로 돌아와 6군데의 사숙에서 《논어》와 《맹자》 등 사서오경의 유학 경전을 배웠다. 또한 《좌전》, 《춘추》, 《사기》, 《강목》, 《일지록》 등 고전을 읽었다. 또 《삼국지연의》, 《수호지》, 《손자병법》 등의 역사소설도 즐겨 보았다.
마오가 17세 되던 1910년 봄, 창사에서 기민폭동이 일어났다. 놀란 청나라 정부는 영국,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의 국가와 함께 10여 척의 군함을 끌고 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큰 충격을 받은 마오는 폭압 통치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깊이 새겼고, 훗날 이 사건이 자신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했다. 마오는 이 시기에 사오산충에 돌아온 개화사상가 리수칭을 만났다. 그 뒤 마오는 고향을 떠나 동산서원으로 갔고, 여기서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학교 쪽은 마오의 뛰어난 능력을 아껴 큰 도시로 나가 공부하기를 권했고, 마오는 1911년, 성도인 창사 샹샹주성중학당에 들어갔다.
어느 날 후베이성 혁명군의 한 대표가 학교에 와서 ‘우창기의(武昌起義)’에 대해 강연하면서 반청운동을 고취시켰다. 마오는 이 혁명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결심한 뒤 학업을 중단하고 창사혁명군의 일반 사병으로 들어갔고, 병영생활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어느 날 마오는 신문에서 ‘사회주의’에 관해 쓴 한 편의 글을 읽었는데, 사회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몰랐으나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한편 당시 신해혁명의 앞날은 불투명한 상태였다. 청 왕조가 정권을 포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북양군벌 우두머리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겁박해 자신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위안스카이의 야욕에 반대하는 불길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촉즉발의 전쟁 발발 직전 난징에 있는 쑨원을 대총통으로 한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베이징의 북양군벌 위안스카이 간에 협상이 타결되어 남북통일을 이루었다. 이로써 267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청 왕조가 사라졌다. 위안스카이는 국민혁명의 과실을 따먹어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되었고, 신해혁명은 시나브로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마오는 혁명이 끝난 것으로 보고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1912년, 마오는 몇 개 학교에 들어갔다가 마음에 차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리고 차라리 독학을 하며 공부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마오는 도서관을 다녔고,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장ㆍ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을 읽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지리와 역사 서적, 그리스와 로마의 시, 소설 등의 문예작품도 보았다.
마오와 은사들
마오의 1913년 봄, 후난 제4사범학교(1년 뒤 후난 성립 제1사범학교로 통합됨)에 들어가 5년 동안 다녔다. 마오는 이때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선생들을 만났다. 윤리학을 가르쳤던 양창지는 천두슈가 발행하던 《신청년》 잡지를 마오에게 보내주고 투고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는 마오의 실제적 첫 부인 양카이후이의 아버지로 은사이자 장인이 되었다. 또 다른 선생은 쉬터리이다. 그는 창사에서 초등학교를 설립해 학업의 때를 놓친 학생들을 데려다가 학비를 면제해 가르치는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위안털보’ 별명의 위안지류는 중국 고전의 기초와 문장, 서법 등을 가르침으로써 마오가 깊고 폭넓은 문사철(文史哲) 지식과 시서(詩書)에 일가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 보조원
졸업 후 양창지는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에게 마오를 부탁했고, 차이 총장이 도서관 주임 리다자오에게 써준 소개장을 갖고 마오와 함께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마오는 1918년 10월부터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 리다자오의 사무실 옆에 있는 제2열람실 사서 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신문화운동의 기수들인 푸스녠과 뤄자룬, 후스 등을 보았다. 참고로 리다자오는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다.
1919년 3월, 후난으로 돌아온 마오는 본격적으로 중국 현대사의 무대에 올라섰다. 마오는 신민학회를 애국운동의 전위로 삼아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1920년 4월 11일, 마오는 상하이로 갔고, 그곳에서 신민학회 회의를 열어 시대상황에 걸맞은 조직으로 학회를 확대 발전시키기로 했다. 1920년 7월, 창사로 돌아온 마오는 신사조의 흐름을 연구, 비교 감별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심화시켜갔다. 참고로 차이허썬과 마오는 회원들과의 사상 교류를 더욱 촉진시켰는데, 그들은 10월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 모델을 따와 ‘러시아의 길’을 답습하고, 이를 위해 ‘공산당 창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중국공산당 창립, 시대조류를 타다 / 중국공산당 탄생
1920년 겨울, 마오와 허쑤헝의 지도 아래 창사 공산주의 소조(小組)가 만들어졌다. 이를 전후해 상하이, 베이징, 우한, 광저우, 지난 등지에 잇따라 공산주의 소조가 생겨났다. 이는 중국공산당 창립을 다지는 기초가 되었다. 1921년 7월 23일 밤, 드디어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마오는 기록을 담당했다. 전날의 준비 모임에서 24세의 장궈타오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대회의 의사일정, 당면한 정치상황, 당의 기본임무, 당장과 조직문제 등이 제안되었다. 회의가 열린 뒤 밀정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대회 참석자들은 안전을 고려해 대회 마지막 날 회의는 7월 31일에 난후에서 열었고, 대회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강령을 통과시키고 당의 중심 임무는 노동자계급을 조직해 노동운동을 펼쳐나가기로 확정했다.
그리고 무기명투표로 진행된 선거에서 전국 대표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천두슈가 만장일치의 몰표를 받아 ‘중앙국’의 초대 서기로 뽑혔다. 제1차 전국 대표대회를 주재한 장궈타오가 조직 주임, 리다가 선전 주임으로 각각 뽑혀 이들 3인이 중앙국을 구성했다.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끝난 뒤 후난으로 돌아온 마오는 허쑤헝과 함께 후난지방 당 조직 결성에 힘을 기울여 그해 10월 10일에 정식으로 후난 지부를 설립했다. 중국 전역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공산당 지부였다. 마오가 서기로 뽑혔다.
한편 1923년 6월 12일부터 20일까지 광저우에서 열린 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는 전당 사상을 통일하고 첫 국공합작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에서 공산당 역사상 중요한 회의로 기록되고 있다. 또 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 중앙위원은 투표 결과 천두슈, 리다자오, 마오쩌뚱, 탄핑산, 차이허썬 등이 당선되었다. 천두슈가 서기를 맡고 마오가 조직, 취추바이가 선전 책임자로 뽑혔다.
장제스 ‘4ㆍ12’ 쿠데타
1926년 7월에 국공합작의 국민혁명군은 북벌에 나선 뒤, 1927년 봄에 우페이푸와 쑨촨팡 등의 군벌을 물리치고 우한, 난징, 상하이 등 창장 유역의 중요 도시를 탈환했다. 이런 좋은 형세에 공산당은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나는 국민당 내 우파인 장제스를 대표로 하는 대지주와 대자산계급들이 노골적으로 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공산당 내 천두슈를 대표로 하는 우경 투항주의가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국공합작의 혁명 열기는 급전직하로 식어갔다.
북벌 총사령관 장제스는 이런 틈을 타 4월 12일에 상하이에서 ‘4ㆍ12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뒤, ‘청당(淸黨)’을 내세워 대대적인 공산당 소탕에 나섰다. 당시 국민당은 우한에 좌파 우두머리 왕징웨이가 정부 수반을 맡고 있었는데, 장제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에 국민당 난징정부를 세웠다. 장제스가 국민당 내 좌파를 압박하자 왕징웨이와 탕성즈 등은 머리를 조아리고 공산당 탄압에 나서 국공합작은 완전히 깨졌다. 국공합작을 주선하고 배후에서 지원했던 소련 고문들도 중국을 떠나 국민당과 소련과의 관계도 끝났다. 공산당원들은 장제스의 검거령과 백색 테러를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해 말까지 공산당원의 5분의 4에 이르는 3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의 쿠데타를 간파하지 못하고 군부대의 함정 초청에 걸려들어 체포되었으나, 다음 날 아슬아슬하게 풀려났다. 그 뒤 저우는 장제스군의 잔혹한 백색 테러가 상하이를 들쑤시자 홍콩으로 탈출했다. 우창에 있던 마오도 7월 15일에 왕징웨이가 공산당원 검거령을 내려 체포될 뻔했다. 집으로 돌아온 마오는 당을 구하고 좌절된 국민혁명을 이루기 위해 농촌에 들어가 무장투쟁을 벌일 결심을 했다.
혁명의 횃불
징강산 무장투쟁 / 유격전
이후 마오는 불퇴전의 투혼을 가슴에 품은 채 직접 노농혁명군을 이끌고 뤄샤오 산맥에 자리한 징강산으로 출발했다. 마오가 처음 징강산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병력은 1천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주더와 마오 군이 합류하면서 병력이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후난과 장시의 국민당군이 여러 차례 포위공격을 해왔다. 홍군은 처음 3년 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장제스가 다섯 차례의 대규모 포위공격 소탕전을 벌이기 직전에 홍군의 병력은 4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장제스는 제1차 공격 때 10만 명, 제2차 공격 때 20만 명, 제3차 공격 때 30만 명, 제4차 공격 때 50만 명, 제5차 공격 때 100만 명 등 다섯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을 펼쳤다.
장정
전략적 대이동
국민당군의 제5차 포위공격 소탕전에 대비해 중국 전역에서 홍군의 대이동이 잇따랐다. 맨 먼저 근거지를 탈출한 홍군부대는 제7군을 이끄는 팡즈민 부대였다. 팡즈민은 ‘북상항일 선견대’라는 기치를 내걸고 제일 남쪽 푸젠성 북부에서 국민당군의 봉쇄선을 뚫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두 번째 부대는 샤오커가 지휘하는 제6군으로 징강산 지구에서 이동을 시작했다. 샤오커는 후베이와 후난 변계지역에 있는 허룽이 이끄는 부대와 합류해 홍군 제2, 6군단을 결성하고 ‘후난-후베이-쓰촨’의 경계지역에 소비에트 근거지를 마련했다. 세 번째 부대는 ‘후베이-허난-안후이’ 변계에서 근거지를 마련했던 장궈타오와 쉬샹첸, 리셴넨 부대로 이들은 쓰촨지역으로 떠났다. 이곳에 잔류했던 쉬하이둥과 우환셴이 인솔하는 제25군은 후난-안후이 근거지에서 산시로 북진했다. 애초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제7군과 제6군이 국민당군의 봉쇄선을 돌파해 탈출하면서 9월에 들어 장제스의 직계부대들이 본격 군사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앙홍군은 국민당군의 남쪽 포위망을 책임지고 있는 광둥군벌 천지탕과 비밀협상을 벌여 안전한 탈출로를 보장받아 앞당겨 10월 상ㆍ중순께 이동을 하기로 했다. 이는 중대한 군사정책 문제임에도 보구와 리더는 군사회의는 물론 정치국에서 토론 한 번 거치지 않고 결정해버렸다.
3겹 봉쇄선 돌파 / 칼 2자루로 혁명한 허룽 / 홍군 피로 물들인 샹장전투
1934년 10월 10일 밤, 중앙홍군 5개 주력군단과 중앙,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종대 등 8만 6천여 명이 앞날의 명운을 헤아릴 수 없는 상황에서 비통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장정(長征) 길에 올랐다. 중앙과 혁명군사위원회 지도자들로 보구, 저우언라이, 리더, 마오쩌둥, 장원톈, 왕자샹 등이 이 종대에 편입되었다. 천지탕군은 비밀협약을 지켜 홍군이 행군하는 방향에서 40리를 철수해 ‘비밀통로’를 확보해주고, 각 부대에 “적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총을 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홍군은 순조롭게 국민당군의 제1봉쇄선을 돌파해 광둥 북쪽인 난슝 경내로 진입했다. 장제스는 홍군이 제1봉쇄선을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고 맥이 풀렸다. 10월 27일, 혁명군사위원회는 제1봉쇄선을 뚫은 홍군이 후난과 광둥 변경으로 진격해 제2봉쇄선을 돌파하도록 명령했다. 그 뒤 중앙홍군이 세 번째 봉쇄선을 돌파하자 장제스는 40만 명의 대군을 나누어 후난 서쪽의 샹시에 제4차 봉쇄선을 구축해 홍군의 앞을 가로막고 뒤를 추격해 샹장 언저리에서 섬멸하려 했다. 그 뒤 1934년 11월 말, 중앙홍군은 만신창이가 되어 최후 봉쇄선을 뚫고 힘겹게 샹장을 건넜지만 전투 결과는 경천동지할 만했다. 8만 6천여 명으로 출발했던 홍군이 3만여 명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쭌이회의 / 마오, 병권을 잡다
중앙은 1935년 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주재한 보구는 장제스의 제5차 포위공격 소탕전과 그 이후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보구는 정치, 군사상 당의 지도는 정확했고, 군사상의 실패 원인은 적의 역량이 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투의 자기변호에 급급했다. 저우언라이는 군사에 관한 총결 보고에서 ‘3인단’이 군사를 지휘하는 데 큰 과오를 저질렀다고 자아비판을 하고 책임을 인정했다. 이어 장원톈이 중앙 지도자들의 단순방어 군사노선에 반대한다는 ‘보고’, 이른바 ‘반보고’를 했다. 보구는 휴회를 선언했다. 휴회 뒤 시작한 회의에서 첫 발언에 나선 마오는 이론에서부터 실천, 국내정세에서 군사정세, 공산당의 종지와 혁명전쟁의 특징에서 정치, 군사책략에 이르기까지 이야기했다. 마오는 군사문제에 관해 좌경 모험주의의 소극 방어와 방어에서 나타는 보수주의, 즉 진공 시의 모험주의와 이동할 때의 도망주의를 비판했다.
마오의 발언은 대다수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왕자샹은 마오의 발언을 들은 뒤에 더욱 마오를 지지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왕자샹은 보구와 리더의 군사 지휘와 군사 이론상의 문제를 비판했다. 결국 회의는 마오와 왕자샹, 장원톈 등 3인의 발언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결의’를 작성했다.
① 반(反) 제5차 포위공격 소탕전은 군사 지휘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② 회의는 중앙 지도기구를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3인단과 보구, 리더의 군사지휘권을 취소한다. 주더와 저우언라이는 여전히 최고 군사수장으로서 군사를 지휘하며, 저우언라이는 당이 위임한 군사문제를 최후 결정하는 책임자다. 마오쩌둥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임명하고,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군사 지휘를 보좌한다. ③ 장원톈은 쭌이회의 결의를 기초해 상무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지부에 보내 토론에 부의토록 한다. 장원톈이 보구를 대신해 중앙의 모든 책임을 관장할 수 있도록 권한을 명확히 규정한다. 중앙홍군은 쭌이회의 이후 면모를 일신했다. 당정군(黨政軍)의 최고 핵심기관인 ‘3인단’을 없애고 ‘저우언라이ㆍ마오쩌둥ㆍ왕자샹’을 축으로 한 비공식기구 ‘신 3인단’이 머리 구실을 했다. 저우가 형식적으로 군권을 장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마오가 전투를 총괄 지휘하는 시스템이었다.
마오 군사전략의 백미 츠수이 전투
마오가 창안한 기동력을 생명으로 한 운동전(運動戰)으로 츠수이 강을 네 번씩 건너다니며 싸우는 ‘츠수이 전투’가 시작되었다. 홍군이 윈난성 자시에 도착했을 때 국민당군의 쓰촨, 구이저우, 윈난, 후난군과 장제스의 직계부대 중앙군은 홍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추격군의 후방이 비어 있었다. 홍군은 두 번째 츠수이를 건너 후방의 빈틈을 이용해 퉁주를 점령했다. 구이저우 군벌 왕자례는 급히 쭌이와 주변 일대의 부대를 동원해 러우산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홍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홍군 제3군단 제10, 11, 12, 13연대가 러우산관과 반차와 사이에서 왕자례군을 격파하고 그날 밤에 쭌이를 두 번째 점령했다. 중국에서는 츠수이 전투를 허허실실과 성동격서의 전술에 마오의 기민하게 치고 빠지는 운동전을 종횡무진으로 펼친 명전투로 평가하고 있다. 이로써 홍군은 진사장 상류에서 창장을 도강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중앙홍군, 홍군 제4방면군과 합류 / 북상 남하 논쟁 / 야심 드러낸 장궈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