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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맛있어서 잠 못 드는 세계지리

개리 풀러, T.M. 레데콥 지음 | 생각의길



너무 맛있어서 잠 못 드는 세계지리

개리 풀러, T.M. 레데콥 지음

생각의길 / 2017년 9월 / 280쪽 / 15,000원





볼리비아의 감자가 유럽을 지배하다



농업 혁명은 인류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사실 농업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혁명’이라기보다는 수천 년간 계속되고 지금도 진행 중인 하나의 과정이다. 또 단순히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추수하게 된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농업 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야생 식물을 작물화하고 야생 동물을 가축화하게 된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에게 더욱 이롭게 동식물의 종을 개량시키는 선발 육종이 가능해졌다는 데 있다.

선발 육종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개와 코끼리를 비교해보자. 우리는 DNA 연구를 통해 개가 늑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같은 늑대의 후손이라도 치와와를 사냥개와 비교해보면 선발 육종이 가져온 결과가 명확해진다. 인간이 수천 년간 수송수단으로 이용한 아시아 코끼리는 긴 세월 동안 별로 달라진 점이 없다. 인간은 코끼리를 길들였지만 코끼리는 여전히 야생동물이다. 선발 육종을 통해 코끼리를 지금보다 더 크게, 혹은 더 작게 만들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하겠지만, 실현된 적은 없다.

볼리비아가 북미와 남미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다른 점은 수도가 라파스와 수크레 두 곳이라는 점이다. 볼리비아는 감자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감자는 미국인들이 아이리시 포테이토 또는 화이트 포테이토라고 부르는 덩이줄기 식물이다. 감자는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고구마나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얌(마과 식물의 통칭)과는 다르다. 볼리비아 원주민들은 수백 어쩌면 수천 종의 감자를 개발했고 그중 일부는 칠레에서도 나는 품종이다. 현재 미국인들이 먹는 감자의 99퍼센트는 칠레산 품종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감자는 초기 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유럽에 들어왔지만 유럽 농부들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감자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감자는 땅속에서 자라기 때문에 농작물을 망치는 여러 질병으로부터 안전했고, 다른 작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다.

감자를 주식으로 삼는 민족들이 여럿 있지만 프랑스인들만큼 감자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흔히 ‘프렌치프라이’라고 부르는 감자튀김이 프랑스에서는 거의 모든 메뉴에 딸려 나온다. 미국인들이 감자튀김을 프렌치프라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역시 감자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은 감자를 ‘칩’이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무엇이든 프랑스와 연관 짓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인 듯하다. 최근 파리에 갔다가 매시드포테이토 전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아마 이곳이 세상에서 유일한 매시드포테이토 전문 식당일 것이다.

1960년, 나는 처음으로 프랑스 센 강 어귀의 르아브르에 갔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5년이나 흘렀지만, 르아브르는 여전히 전쟁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까지 가본 도시들 가운데 가장 볼품없었던 곳으로 기억한다. 2014년 다시 르아브르를 방문했을 때 변화한 그 모습은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전쟁의 상처와 폐허 대신 건축과 디자인 관련 상을 휩쓴 조형물과 건물들로 완전히 새로운 도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찾은 음식점에서는 메뉴에 있는 모든 요리에 감자튀김이 딸려 나왔다.

화이트 포테이토는 아일랜드와 인연이 깊다. 1840년대, 아일랜드 농부들의 감자(‘아이리시 럼퍼’라는 품종) 의존도는 대단했다. 아일랜드의 남성 노동자들은 하루에 최대 60개, 그 아내들은 그것의 절반 정도의 감자를 소비했다. 아일랜드 감자에 병충해가 발생하자 즉시 엄청난 기근으로 이어졌다. 기근의 정도가 어찌나 심각했던지, 아일랜드인들이 ‘초록 입병’에 걸려 죽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농촌 사람들이 들판의 풀과 잡초를 뜯어먹다가 입가를 초록색으로 물들인 채 길가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19세기 내내 인구가 줄었고, 인구 감소는 1960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로는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고 지금의 아일랜드는 연간 경제성장이 약 2퍼센트에 이르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다.

감자는 미국 여러 지역에서 자란다. 내가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물론 친구들 집에서도 모두 저녁마다 감자를 꼭 먹었다. 아버지는 온타리오 호수 남쪽 연안을 따라 늘어서 있던 노점에서 감자를 잔뜩 사오곤 하셨다. 과거 온타리오 호의 바닥이었다는 그 지역은 흙과 흑단처럼 검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오시는 싸구려 감자를 ‘흙감자’라고 부르며 싫어하셨다. 감자가 흙투성이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왠지 어머니의 말투는 세상에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때때로 어머니는 메인 주에서 자란 감자를 사오셨다. 감자 봉지에는 ‘메인 주, 아루스투크 카운티’라고 적혀 있었다. 아루스투크 카운티는 감자산지로도 유명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밝혀진 바로는 미국 본토에서 유럽에 가장 가까운 카운티이기도 하다. 아마 미국 육군성 관계자 중에 지리학자가 있었나 보다. 아루스투크의 공군기지는 전후에나 완성되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루스투크는 감자가 아니라 방위산업으로 먹고사는 곳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감자 칩은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거리다. 내 고향의 작은 식료품점에만 가봐도 알 수 있다. 감자 칩의 연간 매출은 150억 달러가 넘는다. 그렇다면 감자 칩은 어디서 처음 만들었을까?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리지만, 19세기 중반 뉴욕 사라토가 스프링에서 조지 크럼이라는 요리사가 발명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요리는 적어도 뉴욕 주 북부에서는 ‘사라토가 칩’이라는 이름으로 팔렸다. 내 조부모님들은 항상 감자 칩을 사라토가 칩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역시나 영국인들은 감자 칩을 ‘크리스프’라고 부른다.



신들의 열매, 카카오



향기로 지역을 구분할 수 있을까? 이것은 잘 알려진 방식도 아니고,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 환경을 이해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가령 나는 우리 집에서 친척 아주머니 댁까지 냄새만으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대체로 고약한 냄새였다. 무슨 가스를 생산하는 시설에서 특히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가스를 공기 중으로 그냥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냄새가 나는 곳도 있었는데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유제품 가게였다. 어떤 곳에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비좁은 인도 위에 생선 튀김을 파는 가판이 잔뜩 모여 있었다. 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생각해보면 어떤 도시는 지도나 GPS도 없이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만으로 찾아갈 수 있다. 특히 펄프나 제지 공업으로 유명한 조지아 주 밸도스타와 펜실베이니아 주 타이론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특정 지역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 가운데 나는 매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갈 때 맡았던 냄새를 특히 좋아한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으로 향하다 보면 특별히 주 경계를 넘었다는 표시가 없어도 후각으로 먼저 변화를 알아챈다. 석유화학 공장에서 나오는 냄새들이 뒤섞인 뉴저지의 공기와 신선한 건초 향기로 가득한 펜실베이니아의 공기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나는 오스위고 강변을 따라 차를 달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뉴욕 풀턴의 네슬레 공장에서 나오는 초콜릿 향기를 맡았다. 나는 초콜릿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 향기만은 매혹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식물을 속명과 종명으로 분류하는 체계를 확립한 린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카카오나무에 테오브로마(Theobroma), 즉 신들의 음식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말이다.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의 원산지는 메소아메리카 지역이다. 유럽인들이 들이닥치기 전, 멕시코와 과테말라에서 카카오를 재배했다. 당시 카카오에서 음료를 추출했는데 아마도 굉장히 쓴맛이었을 것이다. 향신료를 찾아 이곳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네 번째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귀환할 때 카카오를 가지고 갔다. 스페인의 부자들은 카카오 음료에 푹 빠졌지만, 당시에는 카카오가 너무 귀하고 맛이 너무 써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에 무너진 아즈텍 문명은 초콜릿 음료를 다량으로 소비했지만 직접 재배하지는 않았다. 아즈텍인들은 멕시코의 고지대에 살았는데(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높이는 해발 2,200미터가 넘는다), 카카오는 저지대 열대기후에서만 잘 자랐다. 따라서 아즈텍인들과 저지대 부족 간의 카카오 거래가 매우 활발했다.

유럽인들은 카카오의 활용법을 더 개발시켰는데 특히 설탕을 첨가한 달콤한 초콜릿에 대한 수요는 거대 시장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카카오가 유럽과 미국의 초콜릿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점차 초콜릿 산지가 원래의 중앙아메리카가 아니라 아프리카로 옮겨가면서 초콜릿은 돈이 되는 환금작물로서 재배되었다. 오늘날 세계 카카오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아이보리 코스트를 비롯해, 전 세계 생산량의 70퍼센트가 서아프리카에서 생산된다. 최근 수년간 초콜릿 수요는 꾸준히 증가했고 세계 카카오 생산량은 지난 30년 새 두 배가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초콜릿 공장은 바로 내가 대학 시절 맡았던 초콜릿 향기의 주인공, 풀턴의 네슬레 공장이다. 내가 그렇게 확신하는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풀턴 공장이 언제 가동을 시작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스위스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 풀턴 공장이 스위스에 본사가 있는 네슬레의 일부가 되었고 네슬레는 세계 최대의 식품 회사로 성장했다. 밀크 초콜릿은 네슬레의 후원을 얻어 다니엘 피터라는 사람이 발명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밀크 초콜릿은 풀턴 공장의 주요 생산품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풀턴의 생산시설 다수가 미국 북동부 ‘러스트 벨트’의 여느 공장들처럼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설비들 때문에 경영난을 겪었다. 풀턴 공장은 2003년에 문을 닫았다.허쉬는 미국 최대, 아마도 내가 알기로는 세계 최대의 초콜릿 제조사다. 밀턴 허시는 허쉬 초콜릿 이전에 랭커스터 캐러멜 컴퍼니로 제조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캐러멜 사업은 크게 성공했지만 그는 회사를 팔고 자신의 고향, 지금의 펜실베이니아 허쉬에서 1903년부터 초콜릿 생산을 시작했다.

허쉬의 대표 상품인 ‘키세스’는 1903년에 처음 개발되어 현재까지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해리 리스는 허쉬 소유의 낙농장에서 일하다가 허쉬 공장으로 옮겨갔고 결국 독자적으로 제품을 개발했다. 그는 허쉬 공장이 있는 바로 그 지역에 자신의 공장을 열었는데 미국이 설탕 배급을 시작한 1941년 무렵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 설탕이 덜 들어가는 피넛버터컵이라는 단일 제품에 생산력을 집중해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내가 수많은 아이들에게 물어본 결과 피넛버터컵은 지금도 할로윈에 가장 받고 싶은 제품 1위로 꼽힌다. 하지만 이후 해리스가 세상을 떠나자 허쉬는 리스사를 인수했다.



세계 곳곳의 유대인들



하와이 대학 구내식당에 베이글이 처음 등장했을 때, 내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계산대에 줄을 선 사람들 맨 뒤에서 베이글 판매원이 무료로 베이글을 나눠주고 있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저는 베이글 안 먹어요.”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만에 베이글은 구내식당 최고의 인기 아침메뉴로 떠올랐다. 이 같은 변화가 놀라운 이유는 당시 구내식당에서 나눠주던 베이글이 그다지 좋은 품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베이글은 유대인들이 미국 식단에 끼친 변화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누구일까? 인종 집단? 문화 집단? 종교 집단? 언제 어디서 질문하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 인종이라는 개념이 허구라는 인류학자들의 주장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그들은 집단 간 외형적 차이는 ‘인종’이라는 개념을 뒷받침하는 기준이 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고 말한다. 설령 인종의 구별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 해도 유대인을 하나의 인종으로 간주하기는 힘들다. 당장 아프리카 유대인, 인도 유대인, 중국 유대인을 비롯해 인종 분류가 애매한 집단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 내 유대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종교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지고 있는 것 같다. 유대교 예배당인 시너고그에 나가는 유대인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스라엘 내 유대인들의 경우 그 반대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을 규정하는 것이 인종인지 종교인지 가늠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세계 유대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세파르디계와 아시케나지계 유대인들이다. 세파르디계 유대인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스페인에 기원을 둔 유대인들인데, 이들의 역사는 매우 흥미롭다. 1492년까지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며 살았다. 하지만 그해 스페인의 유대인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들에게는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스페인을 떠나거나, 잡혀서 처형당하는 세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스페인인들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개종하리라고 기대했지만 많은 이들은 나라를 떠났다. 그들과 함께 그들의 언어인 라디노어도 퍼져나갔다. 세파르디계 유대인들이 이주해간 지역은 이슬람계 아랍인들이 정복한 땅이었는데, 그곳에 이전부터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세파르디계 유대교 풍습을 받아들였다. 한편 대다수의 세파르디계 유대인들은 라디노어를 버리고 아랍어를 쓰기 시작했다.

일부 세파르디계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로도 이주했는데, 이들이 식민지 시대 미국 땅으로 건너온 최초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뉴욕 시와 로드아일랜드 주 뉴포트에 최초의 시너고그를 세웠다. 식민지 시대에 미국에 존재하던 시너고그는 모두 세파르디계 예배당이었다. 당시 식민지 내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은,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1000년경이었고, 주로 중부 유럽에 모여 살았다. 세파르디계처럼 아시케나지계 유대인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언어가 있었다. 독일어 방언에 슬라브어와 히브리어의 형식이 가미된 이디시어였다. 아시케나지계 유대인들은 중세 유럽의 철저한 봉건 체제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극히 제한된 범위는 직업에만 종사할 수 있었고, 주변의 기독교 사회로부터 극심한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1700년대 말,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는 당시 러시아의 통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을 한정된 지역 내에 정착해 살도록 했다. ‘거주 한정지역’이라고 불리던 이 지역은 지금의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설 무렵, 이 지역의 아시케나지계 유대인은 약 500만 명에 달했는데 아마도 이들은 세계 유대인의 대다수이자 가장 빈곤한 층이었다.

1880년 전후로 아시케나지 유대인들은 큰 변화를 겪었다. 첫 번째는 서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사회에 크게 동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령 영국에서는 유대인 총리(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등장했다. 하지만 무고한 유대계 프랑스 육군 장교가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드레퓌스 사건처럼 유대인에 대한 불편한 시각은 여전히 존재했다. 두 번째는 러시아 내 거주 한정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이 국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880년부터 1920년 사이 거주 한정지역과 기타 동유럽 지역 출신의 유대인 수백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대부분 극빈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뉴욕 시에 집중적으로 정착하였다.

내가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고 한참 후였다. 이후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책, 영화, TV 프로그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와 나를 비롯한 수백 만 명의 정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정말로 실감했던 것은 학자들이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인 기록들을 발표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유대인들은 수백 년에 걸쳐 박해를 받았지만, 그들에게는 언제나 개종이라는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에서는 기독교도라 할지라도 조부모 중 한 사람만 유대인이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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