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쉽게 읽기
김광민 지음 | 인물과사상사
헌법 쉽게 읽기
김광민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0월 / 384쪽 / 16,000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의미
헌법 제1조 제1항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한다. 박근혜가 탄핵되기 전까지 수개월 동안 토요일만 되면 광화문을 메웠던 촛불 시민들은 이 구절에 음을 붙여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민주’는 쉽게 이해하겠는데 ‘공화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공화제를 찾아보면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공화제’를 ‘공화정치를 하는 정치 제도’라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공화제는 공화제다’라는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화’는 “두 사람 이상이 공동 화합하여 정무를 시행하는 일”이라 정의되어 있어 좀 낫다. 하지만 이 역시 난해한 것은 마찬가지다.
‘공화제’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자신을 비방하지 못하게 하고자 백성의 눈과 귀를 막았다는 고사성어 ‘오능미방(吾能?謗)’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기》의 「주본기」에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주나라의 려왕에 대한 일화가 있다. 려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오만하며 사치를 좋아했다. 때문에 민심은 왕을 외면했고 백성은 왕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소공이라는 충신은 왕의 폭정을 보다 못해 “백성들이 왕의 통치를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며 간언했다. 그러나 려왕은 소공의 간언에 오히려 대노해 위나라의 신무를 불러 백성을 감시하도록 했다. 신무는 백성을 철저히 감시했고 만약 왕을 비난하는 이가 있다면 곧바로 려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면 려왕은 자신을 비난한 백성을 가차 없이 죽였다.
신무를 앞세운 려왕의 폭정이 이어지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마디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길을 지나다 서로 마주쳐도 눈짓만 주고받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려왕은 크게 기뻐하며 소공에게 “내가 비판을 막았으니 이제 그 누구도 감히 나를 함부로 비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공은 물러서지 않고 “그것은 백성의 입을 막은 것에 불과합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한 일입니다. 흐르는 물을 막으면 터져서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됩니다. 백성 또한 이와 같습니다.”라고 간언했다. 려왕은 소공의 충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폭정은 계속되었고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렇게 3년이 흐르자 결국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난을 일으켰다. 결국 려왕은 체나라(현재의 산시성 훠저우시)로 도망가야 했고 다시는 주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려왕이 체나라로 도망가자 소공과 주공 두 상(相)이 정치를 돌보았다. 이 시기를 공화(共和)라 한다. 공화라는 명칭에 대해 《죽서기년》에는 다소 다르게 기술돼 있다. 려왕이 체나라로 도망가자 제후에게 추대된 공백 화라는 인물이 부재한 천자를 대신해 정무를 맡아서 이 시기를 공화라 한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땡전뉴스’라는 말이 유행했다. 땡전뉴스는 ‘뚜뚜전뉴스’라고도 했는데 전두환 정권은 언론을 통제해 매일 저녁 9시 뉴스 앞머리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정이 보도되도록 했다. 매일 9시 10초 전이 되면 텔레비전에서는 “뚜뚜뚜” 하는 시계음이 흘렀고 9시 정각이 되면 “땡” 소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이라는 멘트로 뉴스가 시작했다. 사람들은 9시 정각을 알리는 ‘땡’과 전두환의 첫 글자 ‘전’을 붙여 ‘땡전뉴스’라 하거나 시계음 ‘뚜뚜’ 뒤에 ‘전’을 붙여 ‘뚜뚜전뉴스’라 부르곤 했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은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을 통해 거의 매일 각 언론사에 보도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각종 사건 기사는 ‘가’, ‘불가’, ‘절대불가’ 등으로 구분되었고 이들의 보도 여부뿐만 아니라 보도 방향과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어 사실상 언론의 제작을 정부가 주도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국민은 정권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 보고 들어야 했다.
이명박 정권은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언론통제 의혹에 휩싸였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언론사 간부와 산하기관 단체장 등의 성향 조사를 정부 부처에 지시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인수위원회는 문화관광부 소속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의 개인적 돌발 행동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언론통제는 기우가 아니었다. 2009년, ‘언론사의 소유권 규제 완화’와 ‘신문사의 종합편성채널 진입 확대’를 골자로 하는 일명 ‘미디어법’은, 야당의 극렬한 반대에도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종합편성채널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와 《매일경제》라는 보수 신문들에 돌아갔고 한국의 언론 다양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KBS 보도국장 김시곤이 이길영 KBS 사장의 보도 통제를 폭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길영 사장이 대통령과 여당을 비판하는 기사를 삭제하고 그 자리를 대통령 동정 보도로 채우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청와대가 세월호 침몰 사고 보도에 수시로 외압을 행사했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이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던 이정현 의원의 세월호 보도와 관련된 외압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박근혜 정권은 문화ㆍ예술계 인사 1만여 명을 좌파 성향으로 분류해 정부 지원 사업에서 제외하는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언론을 통제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데 그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국민의 입까지 막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결국 한국은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하는 언론 자유 지수에서 이명박 정권 시기 세계 69위로 내려앉았고 박근혜 정권 시기에는 70위까지 떨어졌다.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자 했던 전두환 정권은 국민이 직접 들고일어난 1987년 6월 항쟁으로 무너졌고 박근혜는 광화문을 메운 100만 명이 넘는 촛불 시민들의 손에 끌려 탄핵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공화국은 권력이 독점되지 않고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도록 분산된 통치 체제다. 이런 의미에서 왕이 백성에게 쫓겨나고 권력이 분산되었던 주나라의 공화 시기를 차용한 ‘공화제’는 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권력을 독점하고 백성의 입을 틀어막으려던 주나라 려왕은 기원전 9세기 무렵 백성에게 쫓겨나 타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소공이 이미 2,800여 년 후 려왕과 같이 백성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던 한국의 대통령은 소공이 말했던 것과 같이 강물을 막던 둑이 터진 것 같은 국민의 분노에 탄핵되고 말았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언론 적폐 청산을 공언하며 언론인 해직 관련 재발 방지 방안을 마련하고 해직 언론인의 복직과 명예 회복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YTN 노종면 기자 등 해직 언론인들이 복직되었다. 지금까지는 문재인 정부가 언론을 장악해 국민의 입과 귀를 막으려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3,000년 가까이 지난 소공의 충언을 다시 끄집어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과 조선 사람
헌법 제2조 제2항 -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3년 넘게 지속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도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자리에 우두커니 남아 있어야 할 뿐이었다. 전쟁의 상처는 땅만 할퀴고 간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생채기를 냈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아직도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남과 북은 휴전선이 갈라놓았지만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은 서로에 대한 분노가 갈라놓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당사자면서도 제삼자의 위치에서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전쟁의 당사자면서도 어느 편에도 설 수 없었다. 전쟁이 멈추고 난 후 남과 북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으르렁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남과 북이 모두 고향이었다. 그러나 둘로 갈라진 고향은 오히려 그들에게 어느 한편에 설 것을 강요했다.
일본에는 조선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후 일본을 점령한 미 군정은 재일 조선인 가운데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외국인 등록 제도의 편의상 조선적이라는 임시 국적을 부여했다. 조선적을 가진 재일 조선인들은 조국이 둘로 갈라진 현실에서 남한과 북한 중 어느 하나의 국적 선택을 거부했다. 남한과 북한 모두를 조국이라 여겼던 이들은 일본 국적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일본이 패망한 지 7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공격수로 활약했던 축구 선수 정대세는 K리그에서 활동하기 전 북한 축구 대표팀 선수로 활약한 경력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2014년 6월 보수 논객 변희재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는 “과거 해외 방송 등에서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며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정대세를 고소했다.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정대세는 큰 고통을 겪어야 했고 결국 한국을 떠나 일본 J리그로 이적하고 말았다.
정대세의 국적은 한국이다. 한국 국적인 정대세가 북한 축구 대표팀 선수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조선적이라는 한반도의 슬픈 과거가 있다. 정대세는 일본에서 한국 국적 아버지와 조선적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대세의 국적을 한국으로 신고했는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출생 당시에 부 또는 모가 대한민국의 국민인 자”는 출생과 도시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도록 규정한 국적법에 따라 정대세는 출생과 동시에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한국 국적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를 총련계 조선인 학교에 보냈고 정대세는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성장하게 되었다. 정대세는 2006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북한이 일본에 지는 모습을 보고 북한 축구 대표팀에서 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부여된 한국 국적이 문제였다. 정대세는 FIFA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북한 대표팀에서 활동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FIFA는 정대세의 한국 국적취득 과정, 어머니의 조선적 그리고 조선인 학교를 다닌 점 등을 고려해 북한 축구 대표팀 활동을 허가했다. 2011년 AFC 아시안컵에서 북한 대표팀 선수로 활동할 수 있었고 한국 국적인 정대세가 북한 대표팀에서 활동하는 것이 한국 방송에 보도되면서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이후 정대세는 독일 FC 쾰른을 거쳐 수원 삼성 블루윙즈 공격수로 K리그에 진출해 한국에서 활동했다.
정대세는 단 한 번도 한국 국적을 선택한 적이 없다. 다만 한국 국적법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한국 국적이 부여되었을 뿐이다. 조선인 학교에서 성장한 정대세의 민족 정체성은 오히려 북한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정대세에게는 아버지의 국적인 남한 역시 정신적 고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남한과 북한은 모두 조국이었다. 때문에 정대세가 북한 국가 대표팀이 되었다가 남한 K리그에서 활동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남한의 보수 인사는 조선적 어머니의 아들이 북한에서 국가 대표팀 선수로 활동한 것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보았다. 남한과 북한을 모두 조국으로 여겼던 축구 선수 정대세는 검찰의 수사를 받아야 했고 결국 남한을 떠나야 했다. 북한은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정대세를 국가 대표 선수로 선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한은 남한과 북한을 모두 사랑했던 한국 국적의 정대세를 품지 못했다. 경계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정대세는 결국 다시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그에게 조선인으로서 한국 생활보다 외국인으로서 일본 생활이 편했던 것이다.
한국의 조선 국적자 차별은 정대세만이 아니다. 한국은 조선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조선 국적의 재일 조선인이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한국 영사관에서 여행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2009년에 조선 국적의 재일 조선인에게 한국 영사관이 한국 국적취득을 종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여행 증명서를 신청한 학생에게 한국 영사관은 한국으로 국적을 변경할 의사가 없는지 묻고 국적을 변경할 계획이 없다면 여행 증명서를 발급해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던 그 학생은 어쩔 수 없이 한국 국적취득을 조건으로 여행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이후 그가 대학 입학을 위해 다시 여행 증명서 발급을 요청하자 한국 영사관은 한국 국적 미취득을 이유로 여행 증명서 발급을 불허했다.
대한민국은 조선을 이은 나라다. 조선이 남한과 북한으로 나뉜 것은 반성해야 할 역사다. 아직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조선 국적자는 둘로 갈라진 조국 중 어느 한 곳을 선택할 수 없었던 이들이다. 그들은 남한과 북한 모두를 조국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감히 대한민국이 조선 국적자를 외국인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률적으로 조선 국적과 대한민국 국적은 다른 것이기에 여행 증명서를 받아 한국에 입국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절차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까지 조선 국적자에 대한 여행 증명서 발급률은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여행 증명서 발급률은 5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선 국적자의 한국 입국을 사실상 가로막았던 것이다.
나는 존엄할 권리가 있다
안락사는 왜 불법일까?
헌법 제10조 -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2008년 76세였던 김 할머니는 폐종양 검사를 위해 내시경 시술을 받았다. 시술 중 급작스러운 과다 출혈이 발생했고 심장은 더는 뛰지 않았다. 의사들의 신속한 심장마사지 덕에 다행히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장마사지에 소요된 몇 분이 뇌에서 치명적이었다. 저산소성 뇌손상이 발생했고 결국 김 할머니는 식물 인간 상태에 빠졌다.
병원은 김 할머니에게 인공호흡기를 연결하고 튜브로 영양분을 공급했다.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 치료가 시작되었다. 김 할머니의 자녀들은 연명 치료 중단을 요구했다. 연명 치료는 단순히 생명만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해 의학적으로 의미가 없고 김 할머니가 평소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병원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법은 심장과 폐가 정지하는 순간을 사망 시점으로 판단한다. 김 할머니의 심장과 폐는 약물과 인공호흡기에 의지했지만 분명 살아 있었다. 법적으로 김 할머니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병원은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데도 치료하지 않는 것은 의사의 생명 보호 의무에 위반되어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없다고 했다. 연명 치료를 중단한다면 김 할머니의 심장과 폐는 정지할 것이었고 이는 병원의 행위로 김 할머니가 사망하는 것이라 병원 측에 살인죄가 적용될 부담도 있었다.
김 할머니가 의식 없이 약물과 기계에 의존한 채 병상에 누워 있는 기간이 길어지자 자녀들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연명 치료에 “원인이 되는 질병의 호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호전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에서 오로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치료에 불과”하다며 “연명 치료를 환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기에 자녀들의 연명 치료 중단 요구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대법원 2009. 5. 21. 선고 2009다17417 전원합의체 판결). 법원의 판결을 받고 나서야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나 튜브 없이 잠들 수 있었다.
김 할머니의 자녀들은 헌법 소원도 제기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국회가 특정 법을 제정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위헌 여부를 판단한다면 국회에 법을 제정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되어 입법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삼권분립 체제에서 법은 입법부인 국회에서 만든다. 입법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위헌이 결정되면 입법부에는 해당 법률을 만들 의무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입법권이 침해된다는 해석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헌법에 따라 기본권이 침해되는 상황이 법률 제정으로만 해소될 수 있다면 해당 법률의 필요성에 대한 판단은 입법부 고유 영역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법률의 내용 판단이 아닌 필요성에 대한 판단이 입법부의 절대적 권한이라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입법 부작위가 헌법재판소의 심판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은 현존하는 기본권 침해를 방치하겠다는 것으로,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