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 담긴 음식문화 이야기
린다 시비텔로 지음 | 린
인류 역사에 담긴 음식문화 이야기
린다 시비텔로 지음
린 / 2017년 5월 / 464쪽 / 23,000원
선사시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 - 날것에서 익힌 것으로
땅 위로 떨어진 번개에서 불을 얻고 그 불을 꺼뜨리지 않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게 되었다. 불 위에 던져놓은 고기는 맛도 더 좋고 소화도 잘될 뿐 아니라 금방 상하지 않고 오래 보존되었다. 이처럼 불은 채집과 사냥의 식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인류는 남는 에너지를 춤과 예술로 승화시키면서 좋은 사냥감 잡기를 기원하고 부족의 안녕을 비는 축제의 서막을 열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착한 인류는 밀과 보리를 경작했고, 떠돌아다니는 생활에선 만들 수 없었던 빵과 꿀술, 맥주, 와인 등 발효음식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선사시대
불을 발견하다(조리의 시작): 과학자들은 어느 날 땅 위로 떨어진 번개에서 우연히 불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인간은 이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계속 타오르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고, 이제 불은 무력했던 인간이 마음대로 죽일 수도 다시 살려낼 수도 있는 대상이 되었다. 인류 최초의 직업인은 바로 불을 지키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 불은 신성한 것이어서 초기 종교에서는 불을 관장하는 신이 가장 강력한 존재로 군림하였다. 대부분의 창조 신화에는 인간이 신에게서 불을 훔치거나 물려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불을 사용할 수 있는 신성한 지혜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불을 다스리면서 인류는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막강의 무기를 손에 쥐게 되었다. 불은 캄캄한 밤의 공포를 잠재웠고 짐승들의 접근을 막았으며 음식을 더 이상 날것을 먹지 않아도 되도록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이에 때라 인류는 그때까지 소화할 수 없었던 음식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상하기 쉬운 음식을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불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식재료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하면서 인류의 생존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는 인류가 어떻게 불을 지배하고 조리를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단지 50~100만 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처음에는 그저 불 위에 고기를 던져 구웠을 것이고, 그 후에 땅을 파고 숯을 놓아 그 위에 재료를 올린 후 흙으로 덮어 서서히 익혀내는 구덩이 조리법이 뒤따랐을 것이다. 이 방법은 오븐처럼 열효율이 높으면서도 시커멓게 타지 않아 맛도 좋은 더 세련된 방법이었다. 그러다가 오늘날의 바비큐같이 고기를 날카로운 창에 꽂아서 불 위에 매달아 놓고 슬슬 돌려가면서 익히는 꼬치구이 조리법이 발달했는데, 이것은 불길이 직접 닿지 않기 때문에 타지 않으면서도 연기와 열기를 쐬어 맛도 훌륭했다.
또 날카로운 돌칼로 고기를 잘게 잘라서 더 빨리 익도록 손질할 수도 있었고, 거북이 등껍데기나 대게 같은 갑각류 껍데기 아니면 동물의 가죽 속에 잘게 썬 식재료를 넣고 끓여낼 수도 있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은 기원전 1만 년 전까지는 발명되지 않았고, 불에 올려도 될 만큼 튼튼한 진흙으로 만든 냄비는 기원전 5000년쯤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다양한 조리법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런 시기를 거쳐 과학자들이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는 현생인류의 조상이 10~100만 년 전에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 - 밀과 포도 그리고 올리브
지중해의 고대음식들은 빵과 와인 그리고 올리브유 이 세 가지로 집약된다. 이러한 음식들은 일상생활의 주식인 동시에 신성시되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곡식의 여신인 데메테르,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 그리고 올리브나무를 아테네인들에게 준 아테나는 특별한 숭배를 받았다. 로마는 카르타고산 밀로 만든 공짜 빵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프랑스까지 이르는 넓은 식민지에 포도나무를 심었으며, 동방에서 난 정향과 계피에 열광하였다.
중세의 기독교와 이슬람, 비잔틴 세계 - 미친 빵, 커피 그리고 궁중예법
로마의 영광이 사라진 후, 중세시대 농촌은 보릿고개와 기아로 허덕이는 농민들로 넘쳐났다. 그러다 보니 배고픈 농민들은 맥각균에 오염된 호밀로 빵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 빵은 종종 환각증상을 일으켜 ‘미친 빵’이라고 불렸다. 서구에서 맥각중독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동안 동방에서는 반짝거리는 녹색 잎과 빨간색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졸음을 쫓아주고 머리를 맑게 하는 음료라는 커피가 출현하였다. 커피는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과 함께 동서양으로 퍼져나갔다.
서유럽의 초기 중세사회, 기독교 세계
중세 온난기와 북유럽의 농업혁명: 950~1300년 사이에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전 지구상의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얼어 있던 북쪽바다에서도 선박의 항해가 가능해졌고 작물의 생장기간 연장으로 곡식의 수확량도 크게 늘었다. 바이킹은 약탈을 중지하고 탐험을 시작하여 아이슬란드와 그란란드에 정착했는데, 그린란드는 사실 아이슬란드보다 더 추웠다. 하지만 정착민을 유도하기 위해 희망적인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린란드로부터 남서로 이동한 사람들은 오늘날의 캐나다에 해당하는 뉴펀들랜드로 들어갔다. ‘포도의 땅’이라는 뜻의 바인랜드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서 이주민들은 야생 크랜베리 등의 덩굴식물을 발견하고 경작했다. 지금도 캐나다의 샌트로랜스강 입구에는 바이킹 거주민의 흔적이 발굴되고 있다.
맥각균에 오염된 ‘미친 빵’: 중세시대 식품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빵이다. 지난해의 수확을 다 소진했을 늦겨울, 곡식은 자라지만 아직 거둘 수 없는 한여름, 해마다 이렇게 두 차례씩 기아가 반복되었다. 다급해진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설혹 그 작물이 직병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도 상관하지 않고 먹어치웠다. 호밀은 종종 맥각균에 오염되었는데, 이 균에 중독되면 헛것을 보거나 경련을 일으키거나 팔다리에 괴저가 생겨 검게 변하거나 마비가 온다. 맥각균은 수확과 건조, 제분 심지어 제빵과정을 거쳐도 없어지지 않았고, 이 균에 오염된 빵은 무서운 병을 자주 일으켜 ‘미친 빵’이라고 불렸다. 11~16세기까지 500년 동안 맥각독이 널리 퍼지자 중세인들은 이를 전염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위험한 맥각을 생활에 이용할 때도 있었는데, 아주 적은 양의 맥각을 출산촉진제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세 유럽인의 생활은 온난화 덕분에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여전히 더 개선할 것이 많았다. 농노들은 영주의 토지에 구속되어 질 나쁜 빵을 먹으며 단조로운 노동에 매달렸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설교했다. 하지만 이에 반하여 하나님이 좀 더 혁신적인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교황들도 나타났다. 한편 로마제국이 유럽에서 쓰러져갈 때 지중해 동부지역에서는 새로운 종교가 폭넓게 힘을 얻고 있었다.
바그다드, 이슬람제국
커피(붉은 열매와 춤추는 염소들): 커피는 반짝거리는 녹색 잎과 빨간색 열매가 열리는 나무에서 자란다. 춤추는 염소이야기가 사실인지 후대인들이 지어낸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처음에 사람들은 염소들처럼 커피의 잎과 열매를 따서 씹어 먹었다. 그러다가 잎과 열매를 물에 우려서 차처럼 마시거나 열매를 갈아서 페이스트로 만들어 동물의 지방과 섞어서 먹기도 했다. 16세기가 되어서야 열매를 볶고 빻은 다음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는 현대적인 커피가 만들어졌다. 이슬람교의 성직자들은 커피가 기도 중에 졸음을 쫓아준다며 선호했다. 또 소화를 돕고 두통을 낫게 하며 기침을 가라앉혀 폐병 같은 소모성 질환이나 부종, 통풍, 괴혈병과 유산을 방지한다는 등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겼다.
커피는 경건한 의식에 쓰이는 경건한 음료로 자리 잡았다. 부유층은 자기 집에 커피를 마시는 방을 따로 두었고, 그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대중적인 이스탄불의 커피하우스를 갔다. 커피는 금방 국제적인 상품이 되었고 1900년대 초까지는 아라비카 종의 커피콩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중세 아시아, 아메리카,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 차와 초콜릿 그리고 최초의 요리책
음양의 조화를 중시하는 중국의 요리는 송나라 시대에 크게 발달해 이때 이미 중국의 3대 요리가 확립되었다. 페스트가 휩쓴 유럽에서는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먹을 것으로 가득 찬 무릉도원을 꿈꾸었다.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인쇄된 요리책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향신료를 더 싼 값에 구하고자 했던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찾아 대탐험에 나섰다. 한편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 아메리카의 고대 제국들은 각각 독자적인 문화와 농업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종교개혁 - 설탕과 노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에서는 수많은 식재료들이 오고갔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의 교류는 양 대륙의 음식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 카리브해에서는 설탕 농장이 세워졌고 삼각무역을 통해 수많은 흑인노예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카리브해(설탕): 유럽의 이주민들은 이미 소비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구세계의 식품을 신세계에서 더 값싼 비용으로 대량생산하는 데 관심이 많았는데, 한 가지 식품이 이런 목적에 딱 들어맞았다. 이 식품은 세계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했고, 대서양 양안 모두에서 엄청난 부를 창출했으며, 수백만의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냈으며, 호모 사피엔스의 식습관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바로 사카룸 오피시나룸이라는 학명을 지닌 설탕이었다.
설탕은 초콜릿과 커피, 차가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그 수요가 증가했다. 그 후 설탕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거꾸로 초콜릿, 커피, 차의 수요가 증가했는데, 이는 설탕의 수요를 더욱 늘렸다. 설탕이 점점 더 구하기 쉬운 식품이 되자 가격이 떨어졌고, 자연히 더 많은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세에는 부유층의 약품이었던 것이 18세기 중엽에는 가난한 사람들까지 일상적으로 즐기는 식품이 되었다. 하지만 사탕수수를 기르고 수확하고 가공하는 일은 극도로 고된 노동을 필요로 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이 그 고통을 떠안았다.
신세계에서 구세계로
새로운 식재료의 출현: 영국작가 새뮤얼 페피스는 1669년 3월 9일 자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는 막 유럽에 도착한, 아시아에서 온 과일로 만든 새로운 음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매우 훌륭한 음료’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여전히 오렌지주스를 원한다.”고 했다.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전 세계의 모든 나라는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의 폭격을 맞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접촉에 의한 변화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 법이므로 사람들은 낯선 세계에서 생산된 낯선 음식을 쉽게 먹으려 하지 않았다.
유럽이 신세계의 식품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약 300년의 시간이 걸렸다. 옥수수를 포함한 일부 곡식은 가축의 먹이로는 괜찮았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새롭고 낯선 사물들을 묘사할 때에도 이미 익숙하고 오래된 것들과 연결해야 했다. 그래서 콜럼버스의 아들은 코코아빈을 ‘특별한 아몬드’라고 묘사했고, 탐험가 코로나도는 버펄로를 뿔을 가진 이상한 ‘소’라고 불렀으며, 감자는 ‘땅에서 나는 사과’라고 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토마토를 ‘황금사과’, 즉 포모도로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초기의 토마토가 노란색이었고 황금사과가 그리스 신화를 통해 익숙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반면, 구세계인들은 신세계에서 건너온 칠면조와 담배는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가금류에 익숙하고 닭고기를 특별한 날의 주요리로 여기던 유럽인들은 크고 새롭고 흥미롭고 맛 좋은 칠면조를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칠면조는 거창한 볼거리를 주던 왜가리나 백조, 공작 같은 새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또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인근에 위치한 체서피크에서 재배된 담배도 어디를 가든 인기를 끌었는데, 콜럼버스의 첫 항해 후 100년 안에 담배는 시베리아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세계의 콩도 쉽게 받아들여졌는데, 아마도 병아리콩이나 렌즈콩 등과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물들은 16세기 중반의 식물도감에도 등장했으며, 강낭콩은 전 세계에 프랑스 콩으로 알려졌다.
이런 와중에 여러 질병도 대서양을 건너 서쪽으로 이동했는데, 특히 심각한 질환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이동하였다. 바로 매독이었다. 매독은 유럽에 삽시간에 퍼졌고, 전염성이 더 강해져서 다시 아메리카로 되돌아왔다.
17세기의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미국 - 오트 퀴진과 추수감사절
메디치가의 카테리나가 프랑스에 온 지 100년 후 프랑스요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라 바렌느의 등장은 중세요리에서 벗어나 섬세한 오트 퀴진의 시작을 알렸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화려한 연회가 이어졌고, 커피하우스는 정치적인 토론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근대화를 꿈꾸던 표트르 대제는 새로운 러시아요리를 만들어냈다.
18세기와 계몽운동 - 프랑스혁명과 미국
1789년 10월 6일, 빵을 구하지 못한 성난 여자들이 베르사유로 향했다. 프랑스혁명은 사람들의 먹는 것, 먹는 곳, 먹는 법 모두를 변화시켰다. 현대적인 레스토랑이 등장했고, 미식가라는 말이 생겨났다. 최초의 미식가라는 평가를 받은 브리야 사바랭에 이어 전설적인 요리사 카렘이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보스턴 차 사건이 미국독립의 불을 댕겼다.
프랑스혁명: “그들에게 케이크를 주어라.”
프랑스는 여전히 봉건주의 사회였고 중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국민은 세 개의 층으로 나뉘었다. 첫째 계층은 성직자로 프랑스 세금의 2%를 부담했고, 둘째 계층은 부유한 귀족으로 세금을 내지 않았다. 세금의 98%를 충당하는 셋째 계층은 전체 국민의 98%를 차지하는 농부, 도시 빈민, 부르주아였다. 이 셋째 계층은 수입의 50%를 세금으로 내고 있었지만 투표권은 없었다.
오트 퀴진과 본 차이나: 오트 퀴진, 즉 최고 수준의 요리는 부유한 프랑스 귀족층의 주방에서 시작되었다. 요리사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지만, 남자의 급여가 여자의 세 배 이상이었고, 지배인은 항상 남자였다. 빵은 요리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빵은 빵가게에서, 과자는 제과점에서 공급했다. 가정에서의 요리는 대부분 여주인이나 하녀의 몫이었다. 부유층에서는 가사를 전담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집사가 식단계획과 고용, 해고, 회계 관리를 비롯한 식재료, 와인, 린넨, 식기보관 등을 총괄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집의 하루는 수프 냄비를 불에 올려놓고 전날 남은 음식과 새 고기를 집어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8세기에는 프랑스를 비롯해 전 유럽에 걸쳐 정교한 중국산 제품을 식기로 사용했다. 유럽인은 수세기 동안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값비싼 중국산 도자기의 복제법을 연구했지만, 도자기는 누에고치와 함께 중국의 극비사항이었다. 얼마 후 유럽인은 아주 유사한 모조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프랑스의 하류층 사이에는 여전히 접시도 음식도 충분하지 못했다.
여자들의 시위, “제빵사와 제빵사의 아내 그리고 제빵사의 아들을 잡아라.”: 1789년 10월 6일, 바스티유 습격이 일어난 지 석 달 후 시장에서도 빵을 구할 수 없어 아이들이 굶주리자 성난 여자들은 돌과 몽둥이를 들고 베르사유로 향했다. 20km에 이르는 먼 길이었는데 내내 비가 내렸다. 그들은 왕비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으며, 오스트리아 출신에 결혼 후 8년간 왕자도 낳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빵이 없어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왕비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라.” 여기서 케이크는 달걀과 버터가 풍부하게 들어간 브리오슈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