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인문학
박영순 지음 | 인물과사상사
커피인문학
박영순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9월 / 364쪽 / 19,000원
커피, 역사를 만들다
태초에 커피나무가 있었다
커피는 누가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을까? 이를 두고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오래도록 경쟁을 벌였다. 아프리카(에티오피아)냐 아라비아반도(예멘)냐, 그리스도 국가(에티오피아)냐, 이슬람 국가(예멘)냐의 자존심이 걸린 논쟁이기도 했다. 공방 끝에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유래했지만, 최초로 재배한 곳은 예멘’이라는 쪽으로 절충안이 나왔지만, 모를 일이다. 에티오피아와 예멘이 먼 옛날에는 같은 나라였다는 등 언제 어떤 이야기들이 튀어나올지…….
우리가 가장 먼저 접하는 커피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는 ‘염소지기 칼디(Kaldi)의 전설’일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아주 먼 옛날, 에티오피아에 칼디라는 목동이 살았다. 염소를 계곡에 풀어놓았는데, 어느 날 늙은 염소가 힘이 솟구치는 듯 활발히 움직이며 젊은 염소들을 제압하는 게 아닌가. 가만히 살펴보니, 빨간 열매가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늙은 염소는 빨간 열매를 먹으면 기운차게 움직였다. 칼디는 그 이유가 궁금해 열매가 많이 달린 가지를 꺾어 마을의 지혜로운 사람(대체로 수도승)에게 가져다주었다. 칼디는 ‘어르신! 염소가 이 열매만 먹었다 하면 날뜁니다. 그 이유를 알려주세요.’라고 청했다. 지혜로운 자는 ‘거기에 두고 가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 칼디가 지혜로운 자를 다시 찾았다. 그는 칼디를 보자마자 버선발로 뛰어나와 칼디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는 열매를 더 갖다 달라고 애원했다. 그 열매를 먹고는 밤새 졸지 않고 기도를 잘 올렸다면서 열매에 중독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칼디의 전설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우리네 구전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커피의 기원을 설명하는 정설처럼 굳어졌다. 비록 칼디가 우리를 관능적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커피의 향미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칼디의 존재 덕분에 커피 마시는 자리의 이야깃거리는 더욱 풍성해진다. ‘이야기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버전으로 전해지는 칼디 이야기의 허점을 파고들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칼디를 양치기라고 해놓고는 커피 체리를 먹고 춤추는 염소를 보았다고 말하는 모순, 2~3세기의 일이라면서 칼디가 이슬람 수도승에게 커피를 전했다는 역사적 착각.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것이 610년이니, 7세기 초 이전에는 이슬람 수도승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커피의 시원지는 어디일까?
커피나무가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자라나 예멘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은 지금에야 상식으로 통하지만, 1,000년을 훌쩍 넘는 긴 세월 동안 커피의 시원지는 예멘으로 알려졌다. 인류의 역사에서 커피나무를 처음으로 경작한 나라가 예멘이며, 커피나무가 이곳에서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거쳐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참고로 에디오피아에서는 커피에 관한 구전이 있을 뿐이지만, 예멘ㆍ사우디아라비아ㆍ시리아ㆍ이란 등 이슬람 권역에서는 9세기쯤부터 커피에 대한 기록들을 남겼다. 이에 따라 커피는 에티오피아를 제쳐두고 애초부터 이슬람의 음료인 것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18세기 커피가 유럽인들을 매료시키며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질 즈음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린네가 식물을 분류하고,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추적한 데 이어, 왓슨과 크릭이 1953년 유전자의 구조를 밝히는 등 일련의 과학적 탐구 끝에 커피의 시원지는 예멘이 아니라 에티오피아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하지만 예멘은 커피의 역사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커피, 카페를 창조하다
역사 속에서 커피는 후퇴를 모르고 질주해왔다. 커피 전문점의 주인이 바뀔 뿐, 매장 수와 커피를 파는 공간은 계속 늘고 있다. 미국 최대 커피 프랜차이즈인 스타벅스의 움직임은 그 답을 찾는 지표가 될 만하다. 1971년 원두 소매점으로 개점한 스타벅스는 1987년 현재 회장 슐츠가 인수하면서 커피 음료를 파는 전문점(카페)을 열었다. 1996년에는 북미 지역을 벗어나 일본과 싱가포르에도 매장을 개설하면서 전 세계 매장 수가 1,000개를 넘어섰다. 2017년에는 2만 3,187개로 늘었다. 한편 한국에서는 5~6년 전부터 ‘카페가 포화 상태’라는 등 비관적 전망이 쏟아졌지만, 정작 카페는 지속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과 개인이 운영하는 매장을 합치면 2015년 말 기준 4만 9,600여 개로 추산된다.
커피의 향미에 빠지다
커피 열매에서 씨앗만 골라내 볶아 먹은 것이 언제부터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니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윌리엄 우커스는 『올 어바웃 커피』에서 16세기 예멘에서 커피가 대중화되고, 메카, 이집트, 이스탄불을 거쳐 17세기 초에는 이탈리아를 통해 유럽으로 퍼졌다고 적었는데, 이 시기쯤에 비로소 커피로스팅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18세기 유럽 여러 국가의 학자들이 쓴 문헌에는 변용된 ‘칼디설’과 ‘오마르설’이 등장했다. 이전의 문헌과 달리 “칼디에게서 열매를 받은 수도승이 불결하다며 불 속으로 던졌더니 멋진 향기가 났다.”거나 “오마르가 산속을 헤매다 열매가 달린 마른 가지를 땔감으로 쓰다가 향기 나는 커피 열매를 발견했다.”는 식이다. 씨를 로스팅해 마시는 커피 음용법이 자리 잡으면서 로스팅을 포함한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제작 시기가 15~16세기로 추정되는 커피 로스팅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손잡이가 긴 팬과 타지 않도록 저어주는 긴 손잡이의 숟가락이 한 짝을 이룬 형태다. 또 그물 국자 형태의 다공성 질그릇이나 철제 그릇 등 커피 볶는 도구와 분쇄기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1500년대를 전후해 커피를 로스팅하기 시작한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는데, 초기의 로스팅 도구들은 화덕이나 모닥불 위에 올려놓고 생두의 색이 변하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며 볶는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터키와 시리아의 장인들이 손잡이가 달린 냄비형 로스터나 긴 실린더형 로스터를 만들어냈다. 참고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손잡이가 달린 실린더형 로스터가 처음 발견되었는데, 1650년쯤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커피, 조선을 깨우다
커피와 항일운동
최초의 커피하우스, 가히차칸: 프랑스에서 커피는 계몽사상을 일깨운 각성제로, 카페는 민중의 혁명의식을 고취한 아지트로 프랑스혁명을 이끌어냈다. 미국에서 커피는 독립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처럼 시대적 각성, 혁명, 독립 정신을 불러일으킨 커피와 카페의 위력은 한반도에서는 통하지 못했다. 참고로 커피가 소비지로서 아시아에 퍼진 경로는 19세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 개척 또는 문호개방 압력과 궤를 같이한다. 1854년에 개항한 일본에서는 34년 뒤인 1888년 ‘가히차칸’이라는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등장했다. 조선에서는 1882년 미국, 1883년 영국ㆍ독일과 차례로 수교하고 14년이 흐른 1897년 상업적인 커피 판매점이 등장했다.
고종이 처음 커피를 마셨을까?: 고종 황제가 한국인 최초로 커피를 마셨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작금의 상황은 바로잡아야 한다. 누가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더욱이 고종 황제가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1896년 2월 11일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한 뒤 심적 위로를 받기 위해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같은 겨레로서 피를 끓게 만드는 엉터리 스토리텔링이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한국의 커피 역사는 고종 황제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고종 실록』, 『승정원 일기』 등 어떤 문헌에도 고종 황제가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서양 사람들은 차와 커피를 숭늉 마시듯 한다”: 일본의 커피 역사를 종합해볼 때 일본에서 커피 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고종이 황제에 오른 1863년 즈음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커피 역사는 그 깊이가 얼마나 될까? 우선, 문헌에 근거한 내용만 살펴보아도 커피를 처음으로 마신 한국인은 고종 황제가 아니다. 아관파천보다 10년 앞선 1886년, 관료이던 윤치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쓴 일기에 “돌아오는 길에 가배관(커피집)에 가서 두 잔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오다.”라고 적었다.
한편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1885년 펴낸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1884년 1월 한강 주위에서 커피를 접대 받은 사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선 고위 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 근처에 있는 ‘슬리핑 웨이브’라는 별장에 가서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커피를 식후에 마셨다.” 이 기록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겪은 것보다 12년이나 앞서 항간에 이미 커피가 후식으로 제공되었음을 보여준다.
손탁과 정동화옥: 1902년 한양에 ‘손탁호텔’이 세워졌는데, 이 호텔에 ‘정동구락부’라는 레스토랑이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 구실을 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손탁은 고종 황제에게 처음으로 커피를 만들어준 ‘국내 최초의 바리스타’로 불리기도 하는 인물인 만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커피의 왜곡된 역사는 손탁호텔과 정동구락부의 의미를 바로잡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다.
손탁은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인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를 따라 조선에 와서 ‘미세스 손탁’으로 불렸는데,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당시 조선 황실은 개항을 맞아 대외 교섭을 위해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이 절실한 상황이었고, 베베르의 추천으로 궁내부에서 통역을 담당한 손탁은 한국어도 재빨리 습득하면서 조선 외교의 귀와 입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 공사관을 연결하면서 갑신정변 이후 ‘조선 쟁탈전’에 혈안이 된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한 공로로 1895년 고종 황제에게서 정동의 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 부지에 있던 기와집 한 채와 그에 딸린 부지를 하사받았다. 손탁은 1898년 이 집을 방 5칸짜리 서양식 건물로 개조했는데, 고종 황제는 이곳을 영빈관으로 운용하도록 했고, 주한 일본 공사관이 1899년 5월 자국으로 보낸 공문에는 손탁의 사저를 궁내부의 별원인 ‘정동화옥’으로 칭했다.
손탁은 1898년 3월 휴가를 받고 2년간 알자스에 갔다가 1900년 4월 궁내부로 복직한다. 당시 조선 황실은 다변화하는 외교 상황 때문에 정동화옥의 규모로는 몰려드는 귀빈들을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증축 공사를 벌여 2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을 지었다. 1902년 완공된 뒤부터 ‘손탁호텔’로 불린 이 건물은 객실이 30칸에 달하는 규모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로 기록되기도 한다. 2층에는 귀빈실, 1층에는 일반 객실과 레스토랑이 들어섰는데, 바로 이 레스토랑에 친미ㆍ반일 성향의 외교관과 국내 지식인들이 몰려들어 커피를 마시며 일본의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손탁호텔 1층에 있던 레스토랑을 ‘정동구락부’라고 부르며 한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정동구락부는 커피를 마시는 장소나 모임 이상의 뜻깊은 가치를 지닌다.
정동구락부와 항일운동: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의식이 싹트고, 애국계몽 인사들이 외교관과 선교사와 연대해 항일운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손탁호텔의 커피하우스이며, 그 주체가 정동구락부다. 정동구락부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일본을 규탄하는 한국 최초의 배일(排日) 정치단체로 전면에 나서는데, 이 단체의 발족을 주도한 인물이 훗날 매국노가 되지만 당시에는 친미파로 분류된 이완용이다.
한편 미국과 프랑스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대거 참여한 정동구락부는 일본에 눈엣가시였다. 고종은 시종을 통해 정동구락부를 지원하면서 손탁이 운영하던 손탁호텔을 아지트로 활용하게 했다. 정동구락부 회원들은 손탁호텔이 세워진 뒤에는 호텔 커피하우스에 모여 구미 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을 무력화하려는 외교를 활발히 펼쳤다. 참고로 1896년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등을 주축으로 정동구락부는 독립파 관료세력을 흡수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자강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손탁호텔은 1905년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묵으면서 일본이 조선의 대신들을 불러 회유하고 협박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결국 손탁은 1909년 9월 일본의 압박에 손탁호텔을 프랑스인 보헤르에게 매각하고 조선을 떠난다.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8월 한일병합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조선에는 암흑의 시대가 드리워진다. 이후 1919년 3ㆍ1운동 때까지 일제가 잔혹한 무단통치를 벌이면서, 커피와 관련된 기록을 더는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3ㆍ1운동에 놀란 일본이 문화통치로 전략을 바꾸면서,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도 유학을 다녀온 조선의 ‘모던 보이’를 중심으로 커피하우스 개업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주권 회복을 위한 시대적 각성과 독립을 위한 저항심을 기르는 커피와 카페의 역할이 작동한 사례는 이 시기에서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커피, 문화를 만들다
커피, 와인, 스페셜티 커피
인류는 커피의 향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처음에 커피는 약이었다. 기원전 에티오피아 부족들은 커피나무 잎을 씹거나 줄기 끓인 물을 마시며 에너지가 솟는 효과를 누렸다. 또 7~8세기 아라비아반도로 전해진 뒤에 커피는 무슬림 사이에서 졸지 않고 밤새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각성제로 애용되었다. 1258년 예멘의 학자 셰이크 오마르는 커피로 병을 치료하고, 역병을 막기도 했다.
한편 커피는 17세기 초 유럽 땅을 밟은 뒤 더 빨리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커피를 마신 사람들은 쉽게 그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카페인 때문인지를 안 건 한참 뒤였다. 1819년 독일 화학자 프리들리프 페르디난트 룽게가 커피에서 카페인을 분리해냈다. 이어 1827년에는 차에서 테인이라는 물질이 추출되었는데, 분자구조가 카페인과 일치함에 따라 카페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커피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무엇이 이토록 커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 그것은 맛이다. 와인처럼 다양한 향미를 뿜어내는 커피의 매력이 인류를 커피 애호가로 꽉 묶어둔다. 알코올음료가 와인뿐만이 아닌데 와인 마니아를 만들어내는 것과 카페인 음료가 커피만이 아닌데 커피 애호가로 하여금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쏟게 하는 것은 향미로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커피가 문화적으로 격조를 높여가는 과정은 와인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다.
와인의 길을 따르는 커피: 와인이 지닌 맛의 가치를 처음 알아본 이는 프랑스 보르도 사람들이다. 1855년 보르도에서는 지역 내 61개 포도밭에서 나는 와인을 5개 등급으로 분류해 ‘위대한 포도밭’ 또는 ‘훌륭한 포도밭’을 뜻하는 ‘그랑크뤼’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러한 관리와 노력이 보르도 와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효과를 거두자, 보르도는 포도 재배 지역을 지리적으로 좀 더 명확히 나누기 시작했다. 참고로 “와인의 품질은 포도가 자란 땅과 기후, 재배자의 전통과 열정이 결정한다.”는 테루아(Terroir, 와인을 재배하기 위한 제반 자연조건을 총칭하는 말)를 존중하는 재배자들의 신념과 철학은 원산지 명칭 제도보다 훨씬 뿌리가 깊다.
그런데 이런 제도를 통해 와인 애호가들이 와인을 사이에 두고 주고받는 이야기는 더 풍성해질 수 있다. 예로 와인에서 나는 블랙커런트 향은 포도나무가 보르도의 석회암 토질에서 자랐기 때문이라는 등, 바닐라 향은 오크통 안쪽을 불로 다소 심하게 그을리는 재배자 가문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등, 자칫 모호해질 수 있는 관능에 관한 의견이 한결 명확해지면서 와인을 말하는 자리는 생동감이 넘치고 기쁨이 배가되었다.
최상의 향미를 지닌 커피: 커피에서 향미를 따지며 마시는 문화는 어디까지 왔을까? 앞서 언급한 내용에서 와인을 커피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커피가 단순한 음료에서 향미를 추구하는 ‘문화적 음료’로 발전하도록 작용한 원리를 와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이야기는 1855년 보르도가 아니라, 1974년 미국에서 처음 언급한 ‘스페셜티 커피’에서 시작된다. 5세 때 노르웨이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에르나 크누첸은 커피의 현대사에서 살아 있는 신화인데, 그녀는 40세쯤 커피 산지까지 찾아가 생두를 구매해오는 직거래와 제값을 치러 재배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공정무역을 전파한 주역이다. 그녀는 2014년 미국스페셜티커피협회에서 은퇴할 때까지 반세기 이상 오직 커피를 위해 삶을 던졌다. 그녀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 1974년 100년 전통의 잡지인 《차와 커피 무역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스페셜티 커피의 개념을 주창한 것은 커피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