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싱킹
이진수 지음 | 미다스북스
빅 싱킹
이진수 지음
미다스북스 / 2017년 8월 / 326쪽 / 15,000원
난쟁이 인류
별 볼 일 없는 존재
인류는 우주 앞에서 난쟁이다. 몸만 작은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작다. 인류는 우주에 대해 알면서도 모른 체하거나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류는 별과 우주의 전폭적인 호의 덕분에 탄생했다. 빅뱅에 의해 우주가 만들어진 직후 아주 작은 차이에 의해 중력이 생겼고, 이 중력에 의해 흩어졌던 것들이 뭉쳐 별이 생겼다. 그 별이 죽거나 폭발하면서 원래 있었던 헬륨과 수소 외에 탄소, 질소, 철, 우라늄 같은 원소를 만들어냈다. 그런 원소들이 질서 있게 모여서 사람, 고래, 안개꽃, 돌멩이 등을 만들었다. 이처럼 인류는 뼛속까지 우주적 존재다. 따라서 인류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속 좁은 일이다. 인류를 말하려면 별과 우주부터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 인류의 조상격인 지구상의 존재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인류가 난쟁이가 된 것은 이성에 대한 과신과 작은 생각 때문이다. 인류는 존재들을 이성을 가진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누고 이성을 가진 유일한 종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이는 인류 출생의 비밀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작은 정의다. 지독한 자기애다. 물질인가 생명인가, 인류인가 아닌가, 친족인가 아닌가, 국민인가 아닌가, 같은 종교인가 아닌가 하는 이분법적 사고 탓에 우리의 시야는 형편없이 작아져있다. 인류는 이성적 존재이기 이전에 우주적 존재다. 우주적 존재는 이성을 가볍게 뛰어넘어 무조건적 호의를 베푼다. 무엇보다 뭇 존재들과 조화를 이루며 생명의 약동에 기여하는 존재다. 따라서 인류의 정의도, 신의 의미도, 국가의 정체도, 역사의 개념도, 존엄의 기준도 통째로 다시 쓰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난쟁이 인류’와 이별하고 ‘우주적 인류’와 만나는 길이다.
작은 것으로의 후퇴
눈앞의 이익은 카라멜 마끼아또처럼 달콤하다. 달콤함을 놔두고 굳이 힘든 길을 가지 않는다. 인류가 사는 방식이 그렇다. 그 결과 생명은 멸종되고,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은 훼손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크게 보지 않고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것이 바로 ‘스몰 싱킹(Small Thinking)’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정책이나 결정은 대부분 스몰 싱킹에 속한다. 공교육의 활성화는 학원의 운영시간 규제로 이뤄지지 않으며, 대학 입시제도도 학벌 사회를 손대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입시 제도가 수차례 개선되었지만 사교육은 여전히 과도하고,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 풍토는 바뀌지 않았다. 입시제도만 복잡해졌다. 수천 개의 대학 전형이 이를 보여준다.
우리는 스몰 싱킹에 익숙하다. 스몰 싱킹은 생각해내기도, 실행하기도 쉽다. 그 효과를 확인하기도 용이하다. 반면에 빅 싱킹은 생각해내기도, 실행도 어려운 데다 시간이 오래 걸려 결과를 확인하기도 어렵다. 스몰 싱킹은 그로 인해 바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데 반해 빅 싱킹(Big Thinking)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빅 싱킹은 인기가 없다. 수요와 공급의 즉각적이고 끊임없는 확대를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스몰 싱킹과 잘 맞아떨어진다. 회계연도마다 그 전년도보다 나은 실적을 보여줘야 하는 시스템 속에서 빅 싱킹은 한가로운 이야기로 치부된다. 빅 싱킹은 멀어져만 간다. 빅 싱킹의 시작
자기 울타리에 갇힌 인류에게 빅 싱킹 이외에는 출구가 없다. 빅 싱킹은 우리가 우주적 존재라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우주적 존재 인식이란 인류는 결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아주 미미한 일부에 불과하지만, 별, 태양, 달, 다른 생명과 존재들로부터 커다란 호의를 받아 출현한 생명체로서, 아량, 관용, 호의 등을 우주적 규모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라는 점을 깨우치는 일이다. ‘빅 싱킹’은 ‘통 큰 생각’이다.
이는 단순히 인류의 차원을 넘어서 우주적 차원에서 생각하며, 모든 생명은 물론 생명이 없는 존재까지도 함께 고려하는 통섭의 생각이나 태도다. 즉, 인종ㆍ문명ㆍ국가에 상관없이 인류를 하나로 보고 인류와 다른 존재들을 연결하며 우주와 지구의 맥락 속에서 인류의 의미를 찾는 통합 지향적 생각이다. 이렇게 되면 인류가 모든 것을 쏟아붓는 문명ㆍ국가ㆍ종교ㆍ이념의 건설과 그 사이의 갈등은 하나의 종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로 전락한다.
우주적 인류
우주, 모든 생명의 어머니
생명의 탄생과 역사: 지금으로부터 45억 년 전, 우주에 지구라는 별이 탄생했다. 지구는 태양계의 아주 작은 행성에 불과한데 그 태양계조차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생명체는 지구가 만들어진 때로부터 10억 년 후쯤인 35억 년 전에 탄생했다. 이후 수없는 작은 변이들이 거듭되면서 생명은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 현재와 같은 다양성은 이러한 진화의 결과이다. 그중 하나인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는 약 600만 년 전쯤 침팬지와 함께 갈라져 나왔다. 그리고 겨우 30만 년 전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이 출현했다.
인류가 말하는 몇백 년이나 몇천 년은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한순간이다. 그 한순간의 시간에 인류는 엄청난 일과 끔찍한 일을 동시에 벌였다. 인류는 욕심이 많고 조급하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50억 년 이상 지속될 핵융합이 끝나 태양이 사라지지 않는 한 생명의 역사는 이어질 것이다. 만일 인류가 사라지면 그 후에 등장할 생명이 인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할지도 모른다.
‘두 발로 걸을 줄 알았던 인류는 어느 종보다 똑똑했다. 호기심이 많아 뭐든 배우고자 했고 새로운 것을 발명할 줄 알았다. 오랜 수렵ㆍ채취 생활 끝에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겨우 1만 년만에 커다란 문명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기적이었다. 지구와 우주로부터 온갖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 탓에 생명은 멸종되었고, 자원은 고갈되었으며, 환경은 훼손되었다.
인류는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 싸웠다. 그런데 그들이 전쟁의 이유로 내세운 해방, 평화, 구원 등은 하나같이 실체가 없는 것들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우주적 존재이면서도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주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들은 우주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속도, 권력, 자원 등 눈앞의 것들에만 매달렸다. 인류가 전쟁을 그만두고 자신들의 역량을 우주 탐험에 쏟았다면 불행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에는 모든 자원과 지혜가 있으므로.’
우주에 대한 무지: 우주적 존재란 인류가 우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겨우 4%뿐이다. 우주의 24%를 차지하는 암흑물질, 72%를 차지하는 암흑에너지, 채 1%가 안 되는 블랙홀 등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밝혀낸 것이 없다. 이는 기술적인 한계 탓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눈앞의 것에만 관심을 둔 탓이다. 유럽 학자들의 동양의 종교와 형이상학에 대한 무지가 고의적인 것처럼, 오늘날 인류의 우주에 대한 무지도 고의적이다.
반면 인류의 정치, 경제, 사회, 스포츠, 연예, 건강, 재테크에 대한 지식은 흘러넘친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그런 지식과 정보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유통시킨다. 사람들에게 자질구레하고 자극적인 온라인의 정보나 뉴스는 휘핑크림과 시럽으로 가득한 달콤한 커피와 같다. 사람들이 그 달콤함에 중독되어가는 사이 우주를 담는 큰 생각은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별, 인류의 공동 운명
사람들은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중에는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것 같은 주름살을 보면서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주름살을 피할 수는 없다. 중력이 없는 우주 공간에 살면 몰라도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한은 나이가 먹을수록 주름살은 늘게 되어 있다. 한편 우리는 도시에서는 하늘을 볼 일이 거의 없지만 시골로 가면 맑은 하늘로 자꾸 눈이 간다. 특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밤하늘은 신기하고도 아름답다. 그때 우리는 잠깐이나마 광대한 우주의 존재를 느낀다. 주름살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이 둘은 통하는 데가 있다. 주름살과 별은 모두 중력 작용에 의해 생긴 것들이기 때문이다. 몇 십 년 동안 중력을 받다보니 피부가 처진 것이 주름살이고, 빅뱅 이후 온도가 식어가는 과정에서 ‘아주 작은 차이’가 발생하면서 중력이 작용해 생긴 것이 별이다. 별들은 중력을 매개로 이웃을 만든다. 중력에 의해 생긴 태양은 자신의 중력으로 지구를 이웃으로 삼고 그 지구는 다시 자신의 중력으로 달을 이웃으로 삼는다. 이에 달은 지구의 자전축이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것으로 지구에 보답한다. 중력은 우리의 얼굴에 주름살을 만들지만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우리를 꼭 안아준다.
인류, 우주를 비추는 거울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이기 이전에 같은 인류다. 인류이기 이전에 지구적 존재이며 우주적 존재이다. 그러나 우주나 지구에 대한 관심은 적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국가나 그것보다 더 작은 조직, 단체에 대해 관심을 둘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위적인 존재들은 우주나 지구와 달리 자연적이지도 지속적이지도 못하다. 국가는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구조물이며 짧게는 며칠, 길어 봤자 몇백 년을 넘기기 힘들다. 그런데 국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역사부터 가르친다. 마치 국가가 있고 나서 지구나 우주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국가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지구나 우주에 관한 것은 덤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앞뒤가 바뀐 스몰 싱킹의 전형이다.
국가 이전에 지구와 우주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고 난 후 인류에 대해 배우고 나서 국가를 배우는 것이 순리다. 우주와 지구부터 알면 통합주의자가 되지만 국가에 집착할 때는 분리주의자가 된다. 분리주의자는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면 이방인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지구나 우주에 먼저 관심을 두면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우주에서는 인류가 만든 국경선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인류와 존재들은 모두 광대한 우주 속에서 같은 하나의 환경을 공유하며 그로 인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우주철학이 필요하다. 우주에 대한 새로운 철학은 인류중심에서 벗어나 인류는 우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 특히, 다른 생명과 존재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제적 인류
작은 생각의 모순
인류의 치명적 모순은 바로 ‘작은 생각’에서 나온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변모했다. 규율 사회는 근본적 피로를 가져오는 반면, 성과 사회는 분열적 피로를 야기해 사람들을 개별화시키고 고립시킨다. 분열적 피로는 모든 공동의 삶을,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한다. 세계를 지워버리고 타자와의 모든 관계를 파괴해버린다. 반면 근본적 피로는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하여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으로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자아를 줄이고 세계를 확장한다. 빅 싱킹도 마찬가지다. 자기중심주의라는 중력에 짓눌려온 생각이 광대한 세계로 두둥실 떠오르게 해준다.
세 가지 모순은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자란다. 인류중심은 이것이 동일한 종만을 위해 확대된 것이고, 현재중심은 통제 가능한 눈앞의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며, 분리중심은 존재들을 울타리에 가둬놓겠다는 것이다. 일부에 불과한 자가 전부인 척하다 보니 모순이 생긴다. 사람은 빼도 박도 못할 아집에 빠져 있다. 자아는 미혹의 원인이며 생사의 끝을 모르는 근원이다. 자아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어렵다. 우리는 꿈에서조차 자기중심적이다. 꿈은 모두 극단적으로 이기주의적이며 꿈속에서 채워지는 소망은 언제든 자기의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표면상의 일에 불과하며 타인이 나올 경우에도 그 인물의 배후에 내가 숨어 있다.
자본주의가 부른 문제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물질적 토대(하부구조)가 그 사회의 사상과 문화(상부구조)를 결정하며, 모든 사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모순으로 계급 사이의 갈등이 불가피하고, 자본주의 사회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갈등을 피할 수 없으며, 결국 노동자 계급의 승리로 자본주의는 붕괴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실현되지 못했다. 오히려 역사는 공산주의가 실패한 모델임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서구 사회가 제도적, 문화적 발전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역사는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두 주장은 대조적이지만 시각이 좁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하부구조가 일방적으로 상부구조를 결정하기보다는 하부구조와 상부구조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사회가 변동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현실적이다. 더불어 공산주의가 이상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이 곧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이상 사회인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르네상스 이래 점차 모습을 드러낸 근대 자본주의는 어떤 전통으로부터도 영향 받지 않은 채 스스로 명확하고 확고한 경향을 띤다. 기업은 자율적 유기체가 되어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삼는 폭군이 된다. 사람이 만든 근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오히려 그것을 지탱하는 사람들로부터 독립해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는다. 존 러스킨에 따르면 ‘가장 값싸게 사고 가장 비싸게 팔라.’는 상업훈만큼 인류 지성에 수치스러운 사상은 없다. 경제학은 인류가 뼈만으로 되어있다고 가정하고 인류의 영혼을 부정한 뒤 그 토대 위에 진보의 골격이론을 세운 것이다. ‘부’라는 명목 아래 사람들이 실제로 욕심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며, 부자가 되는 것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자본주의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종교의 자리까지 넘본다. 우리의 현실적 ‘걱정’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법칙에서 비롯하는데 ‘걱정’의 원천인 자본주의는 동시에 우리에게 자본주의적 ‘구원’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지구상의 모든 종교를 집어삼킨 유일한 종교로 등극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사찰이나 교회 대신에 증권사 객장이나 복권 판매소 또는 은행 대출 창구를 찾는다. 돈의 위력은 이념의 벽도 가뿐히 뛰어넘는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사람들은 이념보다는 돈을 좋아한다. 또 자본주의가 그 근간으로 삼는 교환이야말로 인류의 본성으로 성장을 가져오는 열쇠라는 주장도 있다. 교환에 의한 선순환이 이뤄지면 시장은 자동적으로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최근 들어 시장은 난폭해지고 있다. 최고 실력자들의 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승자와 패자 사이의 간극은 점점 커지고 있다. 오랫동안 연예계, 스포츠계, 예술계 등에서 흔했던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보상구조가 다른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승자독식시장은 빈부의 격차를 확대하고, 미래를 소홀히 하며, 낭비적 투자와 소비에 몰두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뒤늦게 경주에 나선 사람들’이 기회를 얻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가 하루 한 순간도 기대지 않을 수 없는 시장은 복잡하기 짝이 없다. 시장은 사람들을 매료시키면서도 때로는 좌절시킨다. 엄청난 혁신을 낳지만 그만큼의 차이도 가져온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큰 인류
사유의 대전환
큰 생각은 잠에서 깨는 일과 같다. 달콤하기만 한 여름밤의 꿈에서 깨어나 달콤 쌉싸래한 현실과 맞닥뜨리는 일이다. 캄캄한 방에서 햇빛이 훤히 비치는 마당으로 나오는 것이다.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주의 존재들과 주고받는다. 인류가 자신의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들이 사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빅 싱킹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이성을 넘어서
이성만으로는 오늘의 문제를 풀 수 없다. 이성에만 의존하지 말고 퉁치기, 아량, 숙맥, 우신, 막연한 호의, 손해 보는 장사 등 인류가 평소 잊고 사는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주고받는 것의 가치가 동일하지 않아도 교환을 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반드시 주고받기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당장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같이 할 수 있다. 쌀 열 가마니를 빌려준 사람이 보리 한 가마니로 퉁친다. 과거에 이웃 국가로부터 침탈을 당한 국가가 일방적으로 이를 용서해준다. 상대의 실수를 무조건 아량으로 감싼다. 상대가 터무니없이 많이 차지해도 숙맥처럼 또는 우신처럼 웃고 넘긴다. 음식점 주인이 밥값에 턱없이 부족한 돈을 가져온 어린 아이에게 ‘에라, 맘껏 먹어라!’ 하며 푸짐한 밥상을 차려준다. 분석적인 이성에 매달릴 경우 이러한 교환이나 호의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