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 밥상견문록
윤덕노 지음 | 깊은나무
종횡무진 밥상견문록
윤덕노 지음
깊은나무 / 2017년 8월 / 318쪽 / 15,000원
까다로운 세 개의 미각이 인정한 불멸의 맛
조선 임금도, 중국 성현도, 일본 대장군도 즐겨 먹은 뜻밖의 별미 - ‘물에 만 밥’
귀한 손님에게 대접했던 별미 중 별미, ‘물에 만 밥’: 더운 여름날, 찬물에 보리밥 말아 풋고추를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어 보았는가. 그 자체가 별미다. 추운 겨울에는 뜨거운 물에 찬밥 말아 김장김치 쭉쭉 찢어서 얹어 먹는 맛도 특별하다. 조금 고급스럽게 먹자면 물에 만 밥에 보리굴비 가닥가닥 찢어 고추장에 찍어 얹어 먹으면 아예 밥도둑이 된다. 물에 말아 먹는 밥은 가장 소박한 식사법이지만 맛만큼은 유별날 정도로 맛있다. 다만 어디서 대놓고 먹기에는 조금 민망할 수 있는 식사법이다. 점잖은 자리에서 다소 어려운 관계에 있는 사람과 먹을 수 있는 식사는 아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물에 말아 먹는 밥은 공개적으로 남들과 먹을 수 있는 밥은 아니다.
대충 때우는 식사법 같지만 물에 밥을 말아 먹는 식사법에도 음식문화가 있다. 특히, 몇 가지 흥미로운 것은 첫째, 물에 밥 말아 먹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음식문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밥 문화권에서는 공통적으로 있는 식사 습관이다. 중국, 일본 사람들도 대충 먹을 때는 물에 밥을 말아서 먹는다. 우리는 맹물에 밥을 말지만 중국과 일본은 주로 찻물에 마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 한 가지, 중국에서도 점잖은 자리에서는 찻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지 않는다. 다만 일본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찻물에 말아 먹는 밥이 아예 요리로 발전했다. 오차즈케가 그것이다. 음식점에서도 별도 메뉴로 팔고 심지어 컵라면처럼 인스턴트식품으로까지 발전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대충 먹는 밥이지만 일본에서는 요리로까지 발달한 이유가 무엇일까? 두 번째 흥미로운 사실은 물에 만 밥이 지금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후다닥 대충 먹는 음식이지만 옛날에는 허드레 음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역시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공통된 현상이다.
40일 넘게 점심을 수반으로 때운 조선의 임금: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손님이 왔을 때 물에다 밥을 말아 내놓았어도 전혀 흉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임금을 비롯해 대갓집의 양반들도 수시로 물에다 밥을 말아 먹었고, 손님이 왔을 때에도 물에 만 밥을 대접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격식을 따졌을 것 같은 옛날 문헌에 물에 밥을 말아서 먹고 또 대접을 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고려 말기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이 젊었을 무렵의 일이다. 촉망받는 젊은이였던 이색은 개각으로 새로운 인사들이 재상으로 임명되자 그들의 집으로 인사를 다닌다. 여러 사람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지만 만나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윤영평의 집에 갔을 때는 그가 마침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어 술과 밥을 차려주어 먹고 나왔다고 했고, 이정당의 집에 갔을 적에는 물에 만 밥을 얻어먹고 돌아왔다고 자신의 문집에 적어놓았다.
영평과 정당은 모두 벼슬 이름인데 정당은 고려시대 왕명과 조칙의 선포를 담당하는 문하성 종2품의 벼슬이다. 지금 관직으로 차관보 정도에 해당하는 고위 공무원이다. 이색은 또 문집에다 “어제는 광평시중은 만나 뵙지 못했고 철성시중 댁에서는 수반을 먹었다. 박사신의 집에서 또 수반을 먹었고, 임사재의 집에 가서 성찬을 대접 받았다.”고 했다.
시중이면 정승에 해당하는 벼슬이니 지금으로 보면 장관급의 벼슬이다. 정승 집에 인사를 하러 갔다가 수반(水飯), 그러니까 물에 말아서 내온 밥을 얻어먹고 돌아왔다는 것인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다. 천하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인사를 핑계로 고위직에 있는 집을 찾아갔다가 따뜻한 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기껏 물에 만 밥을 얻어먹고 돌아온 꼴이니 이런 천대가 없다.
이색은 젊었을 때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다. 그래서 고위 공직자로 임명된 사람들에게 인사를 다닐 정도로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아무리 스스럼없는 사이라고 해도 물에 만 밥을 내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유추해보면 예전에는 물에다 밥을 만 수반이 요즘처럼 대충 끼니나 때우는 허드레 음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왕이나 재상의 밥상에도 물에 만 밥이 자주 보이니 지체 높은 사람들이 평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였다. 때문에 손님이 왔을 때 가볍게 내놓는 밥상이고, 때로는 식사 시간이 되지 않았을 때 부담 없이 먹는 별식이었다.
심지어 임금도 물에 만 밥을 먹었다. 조선의 임금은 가뭄으로 흉년이 들면 먼저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물에다 밥을 말아 들면서 솔선수범하며 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의 9대 임금 성종은 무려 40일 동안 계속해서 물에 만 밥을 먹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인 1470년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가뭄이 갈수록 심해지자 성종은 5월 29일에 교지를 내려 이제는 대비전과 대전 그리고 왕비가 있는 중궁전을 비롯해 각 궁전의 낮수라는 반드시 ‘물에 만 밥’만 올리라고 했다.
물에 밥을 말아 간단하게 식사를 하기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자 신하들이 성종에게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이제는 물 만 밥을 그만 드시라고 간곡하게 청한다. 그리고 6월 1일 자 기록에는 수라상의 반찬을 줄인 지가 이미 오래됐고 또 낮에는 물에 만 밥으로만 수라를 드셨으니 선왕들도 그 정도까지는 하지 않으셨다며 그만 중지할 것을 요청한다. 뿐만 아니라 찬 음식은 속에도 좋지 않으니 계속해서 밥을 찬물에 말아서 드시면 비위를 상할까 걱정된다며 제대로 된 수라를 드시라고 간청했다. 성종은 신하들의 요청에, 세종 때에는 비록 풍년이 들었어도 물 만 밥을 수라상에 올렸는데 지금처럼 가뭄이 든 때에 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고 해서 무엇이 해롭겠냐며 신하들의 요청을 물리친다.
7월 8일이 되자 정승과 승지들이 또 간청을 한다. 비가 내려 가뭄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으니 반찬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고 물 만 밥은 그만 드시라는 간청이다. 그러자 성종은 반찬 수를 줄인 것이 반드시 가뭄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지금도 수라상에 반찬이 남아돈다고 말하면서 낮수라 때 밥을 물에 말아 먹는 것은 더운 날씨에 오히려 알맞은 일이라며 신하들의 청을 또 물리쳤다. 7월 8일이면 가뭄을 이유로 5월 29일에 각 궁전의 낮수라는 반드시 물에 만 밥으로 올리라고 명령을 한 지 꼭 39일이 되는 날이다. 성종실록에는 더 이상 물에 만 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40일 정도를 점심식사 때면 찬물에다 밥을 말아서 들었다는 이야기다.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려는 성종의 의지가 대단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음식점 메뉴로 대접받은 어엿한 요리: 중국은 고대부터 물에 밥을 말아 먹는 문화가 있었다. 한자에서도 그러한 음식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자 중에는 손(?)이라는 글자가 있다 옥편에는 보통 ‘저녁밥 손’이라고 풀이해놓았지만 ‘물에 만 밥’이라는 뜻과 ‘묽은 밥’이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아예 물에 만 밥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가 있었던 것을 보면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물에 밥을 말아서 먹었던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공자도 물에 밥을 말아서 들었다. 《예기》에 공자가 계씨와 식사를 할 때 사양하지 않았으며 고기는 먹지 않고 물에 만 밥을 먹었다고 나온다. 그러니 약 2500년 전 춘추시대의 중국에서는 다른 사람과 식사할 때 물에다 밥을 말아서 먹는 것이 식사예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도 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인 10세기 무렵의 후당 때의 사람 유승원이 쓴 <금화자잡편>에 저녁밥을 먹기 전에 점심으로 수반 몇 수저를 떴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점심은 오찬이 아니라 정식으로 식사를 하기 전에 가볍게 먹는 간식이라는 뜻이니 물에 밥을 말아서 가볍게 요기를 했다는 의미다.
900년 송나라 무렵에는 물 만 밥이 아예 식당 메뉴로 등장했던 모양이다. 당시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의 생활을 묘사한 맹원로의 <동경몽화록>에는 야시장에서 물에 만 밥과 구운 고기와 마른 육포를 팔 고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송나라 사람들은 저녁 무렵이면 시장에 나와서 물에 만 밥에다 육포나 고기반찬을 얹어 먹으며 하루를 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역시 진작부터 물에 밥 말아 먹는 식사습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고려 때인 11세기 후반의 일본 설화집인 《금석물어》에 물 만 밥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이 무렵 일본에 너무 살이 쪄서 고민인 귀족이 있었다. 의사가 체중을 줄이는 방법으로 물에 밥을 말아 먹는 한편으로 반찬의 가짓수를 줄여 살을 빼라고 권했다. 아무래도 밥과 반찬을 덜 먹을 테니 체중이 줄어들 것이라는 충고였다. 귀족이 의사의 말에 따라 마른 생선 한 가지를 반찬 삼아 찻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그 결과 살이 훨씬 더 쪘다. 물에 말아 먹는 밥이 너무나 맛있어서 과식을 했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서는 주로 상류층에서 물에 만 밥을 많이 먹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을 통일한 장군 오다 노부나가가 즐겨 먹었던 음식도 물에 만 밥이었다. 간소한 음식인 데다 빨리 먹을 수 있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훌훌 먹고 떠났다고 하는데, 간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맛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 찻물에 만 밥, 오차즈케가 아예 요리로 발전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에도시대 중반부터라고 한다. 이전까지는 주로 상류층의 기호품이었던 차가 서민들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되면서부터인데 19세기의 일본 산업발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상점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하루 종일 바쁘게 일을 해야 했기에 밥 먹는 시간조차도 줄여야 했다. 때문에 상점 주인들은 종업원들이 식사를 빨리 마칠 수 있도록 밥에 찻물을 부은 후 한두 가지 반찬을 곁들여 내왔다. 오차즈케가 개화기 일본 산업의 발달과 함께 서민들의 패스트푸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당시 에도의 거리에는 찻물에 만 식사인 오 차즈케를 파는 음식점이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일본에서 지금도 오차즈케가 음식점 메뉴로, 그리고 즉석식품으로 만들어 팔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된 배경이다.
‘물에 만 밥’이 대접을 받았던 비밀: 지금은 일본을 제외하고 한국과 중국에서 물에 만 밥은 집에서 대충 끼니를 때울 때 먹는 식사이지, 집 밖에서 그리고 점잖은 자리에서 먹는 제대로 된 식사는 아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왜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모두 물에 만 밥이 상류층에서도 즐겨 먹는, 그래서 손님을 접대할 때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식사로 대접받았던 것일까?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직접적으로는 밥 자체에서 이유를 찾는다. 옛날에는 솥에 지은 밥을 밥통에 옮겨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쌀도 지금처럼 품질이 개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밥을 따뜻하게 보관하는 기술이 떨어졌기에 시간이 지나면 밥이 식을 수밖에 없었다. 식은 밥은 수분이 감소하고 굳어지는 녹말의 노화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식감이 떨어진다. 식은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다시 덥히는 중탕을 하지 않는 한에는 뜨거운 물을 부어 밥을 데우거나 아니면 찬물이라도 부어서 수분을 새롭게 보충하는 방법이 있다. 요즘은 한번 지은 밥을 갓 지은 밥처럼 먹는 방법 중 하나가 밥을 냉동 보관했다가 해동하는 것인데, 냉장고가 없던 옛날에는 뜨거운 물로 덥히거나 찬물로 수분을 보충하는 방법을 활용했던 것이다. 옛날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모두 물에 만 밥이 발달했던 까닭이다.
‘같은 재료, 다른 음식’이 빚어낸 맛과 멋의 향연
한반도에서 쏟아낸 지독한 사랑과 냉대 - 명태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극명한 차이: 명태는 이름만 얼추 쉰 가지가 넘는다. 신선도에 따라 생태, 선태, 동태로 구분하고 어떻게 말렸는지에 따라 황태와 북어로 나눈다. 계절에 따라 봄에 잡히면 춘태, 가을에는 추태가 되고, 지역에 따라 강원도에서 잡히면 강태, 북해에서 잡혔으면 원양태다. 구분하기조차도 어려울 정도로 이름이 다양한데, 최근에는 새로운 이름이 하나 더 생겼다. 금태(金太)다. 귀하기가 황금 같다는 의미다. 명태 찾기가 금덩어리 발견하는 것보다 힘들어서 금태고, 값이 금값보다 비싸서 금태가 됐다. 금태는 명태 중에서도 우리나라 동해에서 잡히는 명태를 말한다. 지금도 수산시장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러시아산 생태나 동태는 해당되지 않는다.
명태에 금태라는 별명이 붙은 까닭은 동해에 명태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남획과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오죽하면 명태에 현상금까지 붙었다. 동해에서 살아 있는 명태를 잡아오면 한 마리에 50만 원, 죽은 명태를 가져와도 5만 원을 지급한다. ‘동해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명태의 알과 정자를 채취하기 위해서다, 1980년대 한 해 최대 13만 톤에 이르던 어획량이 1991년에는 2만 톤으로 줄었고, 지금은 현상금까지 내걸었어도 잡히는 명태 숫자가 수십 마리에 불과하다.
돌이켜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어획량이 13만 톤에 이르렀다는 숫자를 떠나서라도 명태는 한국인의 겨울철 밥상에 빠지지 않는 생선이었다. 동태찌개에서부터 북엇국, 명란젓에 이르기까지 겨울철이면 밥상에 명태 반찬 한두 가지는 반드시 놓였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명태를 알뜰살뜰 다양하게 먹는 민족도 드물다. 몸통은 물론이고, 아가미와 내장에서부터 껍질을 벗기고 눈알까지 빼내어 요리했다. 명태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 동태찌개는 물론이고 생선살은 별도로 발라내 전을 부쳤고 내장으로는 창란젓, 알은 명란젓, 아가미는 따로 모아 아가미젓을 담갔다. 명태 껍질 하나만 갖고도 다양한 음식을 만들었다. 명태 껍질과 함께 소고기와 두부를 넣고 끓이면 시원하고 맑은 맛이 일품인 어글탕을 만들 수 있고, 껍질만 푹 고아서 만든 명태 껍질 묵은 탱글탱글 씹히는 맛이 별미다.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명태껍질 무침과 볶음은 밥반찬이면서 동시에 군것질거리였다. 심지어 명태 눈알까지 빼내어 초무침으로 만들고, 내장을 빼내 젓갈을 담근 빈자리에 갖가지 소를 넣은 명태 순대에 이르면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태를 참 좋아한다. 그러기에 머리부터 꼬리까지, 그리고 껍질까지 벗겨서 살뜰하게 먹었다. 하지만 막상 명태에 대해 한마디 하라면 무슨 심술에서였는지 나오는 말이 곱지 못했다. 속담에 야릇한 심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가리 깐다.”는 속어다. 명태가 한꺼번에 많은 알을 낳는 것을 빗대어 한 말이다. 노가리는 명태 새끼다. 그렇지 않아도 명태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잡히는데 여기에 쓸데없이 새끼까지 낳았다는 소리다. 그러니 속된 말로 쓸데없는 소리를 할 때 노가리 까지 말라고 지청구를 놓았다.
“북어 한 마리 부조한 놈이 제사상 뒤엎는다.”는 속담도 있다. 옛날 제사를 지낼 때는 문중 어른들이 와서 이것저것 많은 참견을 하다 의견이 엇갈려 다툼까지 일어났다. 왕실의 삼년상 지내는 법을 놓고 당파싸움에 사화까지 일으켰을 정도니 제사상 엎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사상에 감 놔라 대추 놔라 참견하는 것도 그만한 권위와 권리가 있어야 말발이 먹힌다. 흔하디 흔한 북어를 그것도 달랑 한 마리 부조해놓고 자기 말 듣지 않는다고 제사상을 엎었으니 하찮은 것 내놓고 생색내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말이다.
“명태 만지고 손 씻은 물로 사흘을 국 끓인다.”고도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구두쇠는 자린고비다. 옛날 봄철이면 흔했던 생선인 조기를 말린 굴비 먹는 것이 아까워 새끼줄로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갈 떠먹고는 굴비를 바라보며 “짜다.”고 외쳤다는 자린고비다. 봄에 흔한 조기보다 더 흔했던 명태 만진 손을 씻은 물도 버리지 못하고 사흘 동안 국을 끓였을 정도니 자린고비보다도 인색하기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쓰임새는 많지만 늘 ‘천하고 흔했던’ 존재의 역습: 알뜰살뜰 먹으면서도 이렇게 험담을 늘어놓았던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명태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아서 귀한 줄을 전혀 몰랐던 것인데 옛 문헌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이렇게 적었다. “명태는 매일 밥상의 반찬으로 먹는데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먹는다. 명태 살은 포를 떠서 제사에 쓰며 제기에 담아 제수로 놓는데 물건은 천하지만 쓰이는 것은 귀하다.” 명태를 보고 너무나 많아서 천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동해안에서 잡힌 명태가 전국 팔도 방방곡곡까지 퍼지지 않았던 곳이 없었을 정도다. 정조 때의 학자인 성해응은 《연경재전집》에 겨울이 되면 철령 이남으로 명태 운반하는 방울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 마을에서 제사 지낼 때에도 제사상에 북어가 빠지지 않았던 이유다. 이렇게 북어가 후손에게 절 받는 생선이 됐으니 쓰임새가 귀했다는 평가는 틀린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