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평전
김삼웅 지음 | 깊은나무
김준엽 평전
김삼웅 지음
깊은나무 / 2017년 9월 / 436쪽 / 19,000원
조국이 나를 부른다
역사의 바람이 오고가던 국경지대 / 일본 게이오대학 유학시절
김준엽은 1920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4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김준엽은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의주고보에 입학하였다. 김준엽은 신의주고보 시절에 의식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단둥)을 왕래하면서 우리 역사와 중국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의주고보를 졸업한 김준엽은 1940년 일본 도쿄에 있는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준엽이 게이오대학을 선택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설한 대학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학교(학문) 분위기 때문이었다. 김준엽은 1944년 1월 학병에 끌려가면서 게이오대학을 중퇴할 때까지 4년 동안을 도쿄에서 학구생활을 하였다.
일본 학도병 탈출 1호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43년 10월 26일 이른바 ‘조선인학도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공포하였다. 학도지원병은 표면으로는 자의에 의한 지원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강제동원과 다르지 않았다. 극소수 기회주의자들의 일본군 지원자 이외 다수의 청장년들이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나 전쟁물자 조달의 소모품으로 끌려갈 때, 김준엽은 독립군이 되고자 지원서에 서명하였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고향에 와 있던 1943년 11월 말, 23세 때의 일이다. 일제는 이해 12월 ‘학도병 지원자’들을 서울로 소집하였다. 김준엽은 각지에서 모인 학병들을 통해 조선인 학병들을 십중팔구 중국으로 배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김준엽은 탈출에 필요한 세심한 준비를 했다.
1944년 2월 13일 김준엽과 한인 학병들은 일본군 장교ㆍ하사관들의 인솔 아래 기차로 평양부대를 떠났다. 김준엽은 서주의 병전부대에서 4일 동안 대기하다가 2월 25일 대허가에 있는 일본군 경비중대 쯔카다부대로 배치되었다. 경비중대는 고참병 70명과 신병 54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신병 54명은 다시 3개분대로 구성되어 김준엽은 적탄통반으로 편입되었다. 김준엽에게 행운이 따랐다. 훈련교관이 게이오대학 4년 선배 육군 소위 소후에 로이찌였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한다. 어느 날 밤, 점호가 끝난 후 소후에 로이찌가 김준엽을 불렀다. 자신은 입대한 지 2년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전황과 인근 적(중국군) 부대의 위치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는 후배에게 호의를 베푸느라 이것저것 알려주었지만, 김준엽에게는 황금 같은 정보였다. 그를 통해 중국군 유격대가 40리 밖에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김준엽은 고참병들이 작전에 나가고 신병들만 부대에 남은 3월 29일을 탈출의 날로 작정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마침내 3월 27일 달이 없는 캄캄한 새벽 2시, 보초 교대 시간을 이용하여 부대를 이탈하여 끝없는 들판을 몇 시간이나 뛰어서 날이 밝을 녘에 간신히 국부군계 유격부대를 만나게 되었다. 탈출에 성공한 김준엽은 중국군 한치융 유격대 사령부로 안내되었다. 사령부에서 한 사령관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부대에 배치되어 유격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생활 중국어를 배웠다. 김준엽이 소속한 유격대가 일본군을 공격한 것은 일본군이 운영하는 가왕 탄광이었다. 중국 인부들을 수탈하는 악명 높은 탄광이었다. 탄광을 빼앗는 중국군의 공격이 개시되고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공격과 반격이 거듭되고 이틀 후 7월 9일 가왕 일본군사령관이 한치융 사령관에게 협상을 제의하고, 김준엽은 한 사령관의 통역으로 선발되었다. 이날은 김준엽에게는 또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전해왔다. 장준하ㆍ윤경빈ㆍ홍석훈 세 사람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유격대에 나타난 것이다.
한국광복군이 되다
1944년 7월 20일 새벽, 김준엽이 소속한 유격부대는 갑자기 적의 습격을 받았다. 김준엽은 수류탄이 터지는 아비규환에서도 침착하게 동료들의 소지품을 챙기는 장준하를 도우면서 그의 인간성에 감명받고, 이후 평생의 지우가 되었다. 며칠간의 천신만고 끝에 안전지대에 도착했을 때 김준엽이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적군이 일본침략군이 아니라 중국의 팔로군이라는 것이다. 장개석 소속 부대를 모택동 소속 부대가 공격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치융 사령관이 전사했다. 유격대는 유 참모장이 사령관직을 대행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고, 팔로군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준엽 등은 자기들끼리 전투하는 부대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유 사령관 대행과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참모에게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떠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흔쾌히 허락받았다. 마침내 장정(長征)이 시작되었다. 김준엽은 3월 29일 일본군을 탈출하며,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5개월여 만에, 임천에 있는 꿈에도 그리던 우리 독립군 부대에 도착했다. 도착한 부대는 중국 중앙 육군군사학교인데, 그 안에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이 특설되어 있었다. 한광반(韓光班)이라 약칭되었다. 김준엽 일행은 김학규 장군이 지휘하고 있는 한광반에 도착하여 마침내 광복군이 되었다.
이후 부대에서 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김준엽 등은 각자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를 발표하는 강좌를 열기로 하였다. 강좌가 계속되는 동안 문학을 전공한 윤재현이 잡지를 내자는 제안을 하였다. 학병동지들의 뜻이 모이고, 김준엽은 장준하ㆍ윤재현과 편집 책임을 맡았다. 제호를 《등불》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 임천에서 이렇게 시작된 ‘잡지’는 중경에서 《제단》으로, 환국 후 장준하에 의해 《사상》과 월간 《사상계》로, 김준엽에 의해 《계간 사상》으로 이어졌다. 중국 군관학교 간부훈련반의 교육기간은 4개월이었다. 한광반에 배속된 김준엽 등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4개월 만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식 날에는 중앙군관학교 교장 장개석 명의의 졸업장과 중국 육군 소위 임명장을 받았다.
6천 리 장정 - ‘우리는 대한의 광복군’
임시정부 찾아 6천 리 행군 / 임시정부와 김구 주석
김준엽과 그의 동지들은 언제까지고 임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당초의 목적지 중경으로 가야만 했다. 그곳에는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과 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충정을 이해한 김학규는 지원자들을 중경으로 보내주기로 결정하였다. 김준엽과 그 동지들이 6천 리 길을 걸어 도착한 중경(중칭) 임시 정부는 사천성의 중심 도시에 있었다. 마침내 김준엽과 그의 동지들은 감격적인 심경으로 임시정부 청사 앞에 도열하였고, 이청천 사령관의 훈시가 있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말했다. “그간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여러 동지들이 이와 같이 씩씩한 모습으로 당도했으니 무한히 반갑소이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많은 말이 소용없습니다. 우선 좀 쉬도록 하고, 오늘 저녁 정부에서 동지들에게 베푸는 환영회에서 또 만납시다.” 김구 주석의 환영사는 극히 짧았다.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장광설이 필요하지 않다.
일제의 한국 지배를 미화하고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식민지근대화론’ 신봉자들은 임시정부의 역할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이명박근혜’ 정부가 1948년 8ㆍ15정부수립을 ‘건국절’로 바꾸려 했던 것도 이 같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참고로 중경의 임정요인들은 대부분 조국을 떠난 지 20, 30년이 되는 망명객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하루 두 끼의 식사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고, 일제에 쫓기고 가는 곳마다 밀정이 득실대서 항상 신변이 위태로웠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치켜세우는 친일파들이 호의호식할 때 독립운동가들은 생명을 걸고 일제와 싸우고 밀정들에게 시달렸던 사람들이다.
중경체류 90일간의 질풍노도
2월 20일 김준엽 일행은 토교로 옮겨 ‘광복군토교대’로 편성되었고,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인 최용덕 소장이 대장으로 임명되어 통솔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4월 20일경) 이범석 장군이 토교에 왔다. 당시 이범석은 서안에서 미군 정보ㆍ유격 활동을 벌이는 OSS부대와 합동으로 국내 진공훈련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범석은 김준엽과 그의 동지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자신과 함께 서안으로 갈 것을 요청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라야만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다음 날 김준엽과 장준하 등 19명이 서안행을 택하고, 나머지는 중경에 남기로 했다.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다
김준엽은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일행 19명은 부대 배치를 받고 5월 1일부터 특수공작 훈련에 들어갔다. 김준엽은 부관의 일을 맡으면서도 빠짐없이 특수훈련을 받는 고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통신반에 배치되었다. 한편 한국광복군은 미국의 OSS와 합동작전을 추진하였다. 김준엽은 함께 온 일행과 기존 제2지대 대원들 중에서 31명이 선발되어 50명 단위로 구성된 일종의 게릴라 부대에서 혹독한 OSS훈련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해방과 전쟁
물거품 된 국내정진대 훈련
훈련생이 훈련을 마치자 광복군과 미군 측에서는 이들을 국내로 침투(진공)시킬 계획을 세웠다. 국내 침투는 곧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지원의 형식을 밟아, 50명을 선발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조기에 항복하자 이는 무산되었다. 예정대로 결사대원 50명이 국내에 잠입하여 적어도 몇 곳에서만이라도 군부대나 총독부 건물이 폭파되고 왜적 수괴급이 처단되었다면, 전후 한반도의 운명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국으로 대우되어 임시정부가 ‘개인자격’으로 환국하는 수모를 겪지 않았을 터이고, 미ㆍ소의 한반도 진주나 외국의 군정, 나아가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참석이 배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 남아 학문의 길을 선택하다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었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방법은 쉽지 않았다. 한참 후에 알려졌지만 미국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 귀국케 하면서 귀국길이 지연되거나 막혔다. 요인들이 그랬으니 광복군들의 경우는 더욱 막막했다. 9월 1일부로 한국은 중국 전구에서 태평양 전구로 이관되었다. 맥아더 장군의 관할로 넘어간 것이다.
김준엽은 귀국을 앞두고 향후 진로에 대해 고심을 거듭하였다. 독립운동에 그의 공적은 적지 않았다. 임정 요인들과 함께 환국하면 그야말로 ‘개선장군’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그는 “이 길이냐 저 길이냐”를 두고 고심을 거듭하였다. 나의 적성은 무엇일까? ‘학문에 대한 나의 정열도 정열이려니와 정치에는 흥미도 없을뿐더러, 권모술수나 머리 숙일 줄 모르는 내 성격은 관료로는 맞지 않는다.’라고 판단하였다. 중국에 남아서 학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김준엽은 이청천 사령관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중경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중경에는 임시정부가 떠나면서 임정 주화대표단을 조직하여 한인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귀국을 돕기로 했다. 이청천은 잔류하겠다는 김준엽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광복군 총사령부가 국내로 들어갈 때까지 총사령관의 부관을 맡아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두 장군의 부관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 뒤 중국 국립 동방어문 전문학교에서 한국어과를 신설하고 한어를 담당할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주화대표단에 요청해왔다. 대표단은 김준엽을 추천하였다. 김준엽은 1946년 2월 16일부터 전임강사로 취직하여 학계에 입문하게 되고, 이후 40년에 걸쳐 학문의 길을 걷는 첫 출발이 되었다.
더욱 깊어가는 학자의 길
김준엽은 동방어전에서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치면서, 대학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중국근현대사를 연구하고자 방법을 찾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렸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중경 소재 국립중앙대학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뒤 1948년 초 김준엽은 소변에서 피가 섞여 나오는 병을 앓게 되었고, 귀국하여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결석을 제거하는 데 실패하여 오른쪽 신장 하나를 떼어내야 했다. 해방 직후라 의료기술과 장비가 불비한 까닭이었다. 한편 김준엽이 귀국한 직후 남한에서는 5ㆍ10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한동안 상관으로 모셨던 이범석이 국무총리가 되었다. 국방부장관도 겸임하였다. 김준엽은 축하인사를 하러 총리실로 찾아갔다. 이범석은 총리실이든 국방장관실이든 희망하는 대로 들어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초심대로 관직 대신 학자의 길을 걷고자 하여 결코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중국 국ㆍ공 내전에서 얻은 교훈
중국으로 돌아온 김준엽은 건강이 회복되면서 9월 하순부터 동방어전에 나가 강의를 하고 대학원에도 다시 출석하였다. 그런데 학교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고 있었다. 중국 대륙이 바야흐로 국부군과 공산군 사이에 사활을 건 내전이 격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준엽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귀국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준엽은 1949년 1월 21일 가족과 함께 귀국선을 탔다. 한편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의 핵심 측근들이 모의하고 안두희가 하수인으로 지목되어 김구를 암살하였다. 환국한 지 4년이 못 되고, 이승만 정권이 수립하고 1년이 안 되는 시점이었다. 김준엽이나 장인(민필호, 주화대표단장)의 실망과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치가의 삶보다는 지성인의 양심을
진리 탐구와 《사상계》 참여
김준엽은 1949년 9월 학기부터 고려대학교 조교수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동방어전 교수를 지낸 경력으로 중국어 교수에 임용되었다가 곧 사학과 교수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시작한 고대와의 인연은 1951년 5월에 휴직을 하고 대만대학 역사연구소로 떠나 4년간 유학생활을 하다가 1955년 초에 귀국하여 복직하였다. 이후 27년간 고대에서 사학과 교수를 지내게 되고 2년 8개월 동안 총장직을 맡았다. 한편 김준엽이 국내외에서 학구에 전념하고 있을 때 장준하는 민족청년단의 중앙훈련소 교무처장, 국민사상연구원 사무국장을 지내다 1952년 9월 잡지 《사상》을 펴냈다. 이어서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발행하여 자유ㆍ민주ㆍ반독재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준엽이 귀국하자 장준하는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였다. 김준엽은 이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그 뒤 김준엽은 1959년 10월부터 1961년 1월까지 제3대 주간을 맡아 《사상계》의 기획ㆍ편집을 주관하였다. 이 시기가 《사상계》의 전성기였다. 주간을 마친 뒤에는 부대표를 맡아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4ㆍ19 혁명과 5ㆍ16 쿠데타의 격류 속에서
김준엽은 고대 교수와 《사상계》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또 하나의 일을 추진했다. 1957년 6월 17일 독일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조기준ㆍ김정학 교수와 아시아문제연구소(이후 ‘아연’으로 표기) 창설을 발기하고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김준엽은 해외 대학과 연구소에서 만나는 학자들과 학회를 만들어 연대와 교류를 지속하였다. 대만대학에 있을 때는 중국문학 전문가 차주환 교수 등과 ‘중국학회’를 설립하고, 하버드 연경연구소에서는 역시 객원교수로 와 있는 일본ㆍ대만학자들과 ‘하버드 연경학회’를 결성하였다. 이들 학회는 지금까지 유지되어 학술교류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의 학회 조직에 대한 집념은 이어져서 1979년에는 ‘공산권연구협의회’(1995년에 한국세계지역연구협의회로 개칭) 그리고 1981년에는 고려대학 내에 ‘중국학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이들 학회(연구회)들은 하나같이 그 분야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한편 김준엽은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나자 교수단 데모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참고로 4월혁명 후 장면 정부가 수립되면서 장준하는 장 총리의 측근 김영선 재무장관의 추천으로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김준엽은 1961년 1월 17일 영국과 독일 정부의 초청으로 유럽과 아연 관계로 미국의 포드재단에 들렀다가 4월 8일 귀국하였다. 그 무렵 김준엽은 김영선 장관으로부터 주일공사를 맡아달라는 청을 받았다. 주일공사는 독립운동가 출신이 맡아야 한다는 장면 총리의 의중이었다. 김준엽은 단호히 이를 사양했다. 학구에 전념하겠다는 신념에서였다. 주일공사 사양은 이후 역대 정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의해온 ‘감투’를 모두 사양 또는 거부하는 시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