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박민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박민영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8월 / 311쪽 / 15,000원
최후의 식민지에 갇힌 청소년
청소년들은 왜 욕을 입에 달고 살까?
‘패드립’을 아시나요?: 패드립은 ‘패륜’과 ‘애드리브’의 합성어로 부모나 어른을 욕설 및 성적 비하의 소재로 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 할매미(할머니) 명절만 되면 그냥 가만히 누워서 멍 때리고 있다가 그냥 쳐 자, XXX.” 십대들의 이런 패드립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나 인터넷 게시판, 게임 사이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패드립을 하는 데 별로 윤리적 문제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십대들은 인터넷 패드립 카페나 카카오톡에서 누가 더 패드립을 잘하는지 서로 배틀을 벌이기도 한다. 새로우면서도 가장 자극적이고 지독한 패드립을 던진 사람은 ‘패드립 종결자’로 인정받는다. 십대들은 패드립을 하는 이유를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청소년들이 가장 욕을 많이 하는 대상은 또래 친구들이다. 2011년 방송된 EBS 다큐멘터리 〈욕해도 될까요?〉는 이런 실태를 잘 보여주었다. 제작진은 등교 이후 점심시간까지 중고생 각 2명씩 4명의 호주머니에 소형 녹음기를 넣어 다니게 했다. 학생들에게는 ‘신체 활동량을 조사하는 기구’라고 했다. 4시간 동안 주고받은 말을 녹음한 결과, 학생 1명이 내뱉은 욕설은 평균 194.3회였다. 75초에 한 번씩 욕을 내뱉은 셈이다. 반드시 악의가 있어야 욕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욕을 섞어서 말한다. 청소년들은 욕을 섞지 않으면 대화가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말하는 지경이다.
청소년의 게토화와 욕: 모름지기 억압과 불만이 있는 곳에 욕이 있다. 청소년의 욕을 양산하는 가장 큰 주범은 입시 스트레스다. 입시제도는 예전부터 있었는데, 그것이 왜 새삼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요즘 청소년들이 겪는 입시 스트레스의 강도는 기성세대가 겪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높다. 아이들은 아침 7시부터 밤 12시, 심하면 새벽 2~3시까지 공부를 한다. 아이들의 욕은 기본적으로 비인간적이고 폭압적인 입시교육 시스템을 향한 비명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스트레스는 위에서 아래로 전가된다. 부와 권력과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서 없는 사람에게로, 어른에게서 어린 사람에게로 전가된다. 청소년에게는 아무런 부와 권력, 지위가 없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다. 같은 미성년자라도 유아나 어린이는 보호 대상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청소년은 다르다. 청소년은 가장 만만한 사회적 스트레스 전가 대상이다.
‘욕을 많이 쓰는 하위집단’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감옥의 수감자나 조직폭력배 정도가 떠오를 것이다. 청소년들은 이들보다 욕을 더하면 했지, 덜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면에서 청소년은 이들보다도 하위집단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소년’이라는 존재 영역은 ‘게토(ghetto, 빈민가)’나 다름없다. 게토가 그렇듯, 청소년들은 사회에서 생성되는 사회적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아 안아야 한다. 그 부당한 폭력과 대우에 대한 반응으로 욕이 튀어나온다.
교사에게 욕을 배우는 아이들: 교사의 욕설이나 폭언은 내 시절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다. 아이들은 교사를 통해 욕과 폭언을 많이 배운다. 교사가 하는 폭언들을 분류해보면 이렇다. 첫째, 통상적인 욕. “싸가지 없는 놈” “대갈빡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등. 둘째, 자기 비하를 유발하는 폭언. “돌대가리” “멍청한 자식” “쓰레기 같은 것들” 등. 셋째, 비아냥거림. “니 꿈이 가당키나 한 줄 아냐!” “넌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 등. 넷째, 협박. “나한테 걸리면 죽어!” “맞기 전에 알아서 기어.” 등. 다섯째, 낙인. “넌 뭘 해도 안 되는 놈이야.” “너는 구제불능이야.” 등. 여섯째, 모욕.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디?” “애비 없이 큰 자식이 그러면 그렇지.” 등.
이런 폭언은 비열하다. 교사는 아이들의 발전을 꾀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교사가 오히려 아이들의 약점을 파고들어, 무자비하게 마음에 상처를 낸다는 점에서 비열하다.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디?” 같은 말은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책임 회피’이자 ‘책임 전가’다. 폭언은 주로 돈 없고 빽 없는 서민이나 하층민의 자식들에게 집중된다. 교사의 폭언이나 체벌은 서민이나 하층민 아이의 열정, 의지, 기대를 꺾는다. 그 아이들은 입시경쟁에서 일찌감치 도태된다. 한편 우리는 ‘학교 폭력’ 하면 일진이나 문제아를 떠올린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장 많은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교사다.
부모에게 욕을 배우는 아이들: 교사의 언어폭력보다 아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부모의 언어폭력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절대적인 통제와 관리 아래서 생활하고 있으며, 그것은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가 폭언과 폭력을 일삼을 경우, 아이도 그런 사고방식과 문제 해결 방식을 스펀지같이 빨아들여 내면화한다. 그것은 청소년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성인이 되어서 닮기 싫었던 부모의 언행을 따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십대들의 패드립에 유독 엄마 욕이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녀 양육과 교육을 엄마가 맡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이와 마찰을 빚는 대상도 주로 엄마가 된다. 엄마는 자신을 입시경쟁에서 아이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파트너’로 여긴다. 그러나 아이들이 느끼는 엄마는 ‘간수’다. 교사라는 간수는 매년 사람이 바뀌지만, 엄마라는 간수는 변함없이 그대로다. 누구에 대한 반감이 더 많이 축적되겠는가? 당연히 엄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엄마에 대한 감정은 애착에서 애증으로, 애증에서 증오로 변해갈 수 있다. 입시제도가 멀쩡하던 엄마와 자식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다.
청소년의 일그러진 생존법, 쿨
노예의 쿨과 청소년의 쿨: 딕 파운틴과 데이비드 로빈스의 『세대를 가르치는 반역의 정신 COOL』에는 쿨한 태도를 이루는 주요 개념으로 ‘역설적 초연함’이 언급된다. 역설적 초연함이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단원고 학생들의 반응이 그렇다. 학생들이 동영상 속에서 장난치고, 웃고, 노래를 부르고, 무언가를 먹는 것은 결코 의연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불안과 공포를 숨기는 행동으로 ‘역설적 초연함’이라 할 수 있다.
역설적 초연함이 십대들에게 보편적이고 일상적이라는 것은 인터넷을 뒤져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십대들은 인터넷 게시판에 우울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쓸 때에도 흔히 “ㅋㅋㅋ”를 붙인다. 이런 식이다. “엄마랑 아빠랑 이혼한데요 ㅋㅋㅋ. 이혼이래 XX.” 여기서 “ㅋㅋㅋ”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이없어 웃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자기감정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럼에도 청소년들은 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답을 『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에서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쿨’한 정서와 태도는 기본적으로 방어기제다. 쿨은 본래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노예들의 정서와 태도였다. 노예들이 백인들의 가혹한 억압, 착취,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너무 비참한 기분에 빠뜨려서는 안 되었고, 함부로 분노해서도 안 되었다. 어떠한 학대와 모욕에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초연함과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쿨은 노예들의 성공전략이기도 했다. 백인의 야만적 질서를 거부하거나 그에 대항하면 죽음을 면하기 힘들었지만, ‘세상이 뭐 다 그렇지’ 하는 식으로 쿨한 태도를 취하는 노예는 주인의 인정을 받으며 다른 노예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쿨은 노예들에게 자신의 신변과 자존을 지키는 지혜로운 태도이자 덕목이었던 것이다. 십대들의 쿨도 그렇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억압과 차별,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는 입시경쟁과 그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기제다. 십대들이 노예들의 덕목이었던 쿨을 행동강령처럼 따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십대의 처지가 흑인 노예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이 조장하는 청소년의 쿨: 청소년들에게 ‘쿨하다’는 말은 ‘멋있다’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쿨은 현대인 모두의 이상적 기질이자 코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가 체화되는 시기는 청소년기다. 청소년들이 쿨을 멋있게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쿨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저항’과 ‘자유’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쿨이 이런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은 순전히 대중문화산업 때문이다. 쿨한 정서를 ‘멋진 것’으로 대중에게 처음 각인시킨 것은 제임스 딘 주연의 〈이유없는 반항〉(1955)이었다. 이 영화의 세계적 성공을 기점으로 쿨을 청(소)년의 주된 정서로 그리는 영화들이 대거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흐름에 편승한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그 첫 성공작이 신성일 주연의 〈맨발의 청춘〉(1964)이었다.
이후 쿨은 〈고교 얄개〉, 〈엽기적인 그녀〉, 드라마 〈꽃보다 남자〉처럼 다소 경쾌하게 그려지기도 하고, 〈바보들의 행진〉이나 〈비트〉, 〈친구〉, 드라마 〈학교〉처럼 다소 무겁게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쿨이 청(소)년 주연의 영화, 드라마, 광고 그리고 청소년을 타깃으로 삼은 대중음악의 지배적 정서로 군림해온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편 오늘날 문화산업이 쿨을 구현하는 주요 방식은 나르시시즘(자기애)이다. 나르시시즘은 특히 대중음악에서 심하다. 요즘 유행하는 힙합 용어 ‘스웨그(swag)’도 나르시시즘을 드러낸다. 스웨그는 잘난 체하기, 허세 부리기, 허풍 떨기, 도도하게 굴기, 거만하게 굴기, 뻐기기를 뜻한다. 여기서 스웨그는 ‘쿨하다’와 마찬가지로 ‘멋지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그러면 무엇으로 잘난 체하고, 뻐기는 것일까? 자신의 외모, 멋, 재능, 부, 권력 같은 것이다. 이를 자랑하는 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럴 수 없는 것이 창피한 일이 된다.
잘난 체하고, 허세를 부리는 주체가 사회적 약자라면,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웨그는 이런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외모와 부를 가진 사람도 스웨그를 한다. 스웨그를 하면서 상대방의 가난과 외모를 차별한다. 나아가 그 차별과 배제를 멋으로 치장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스웨그는 결코 진보적인 정서가 아니다. 무엇보다 차별과 배제를 근간으로 삼는 신자유주의적 정서와 매우 잘 어울린다. 현재 청소년의 세계는 협력과 우애가 아니라 극심한 경쟁과 서열화가 지배하는 세계다. 학생들은 우선 성적에 따라 서열화 된다. 성적이 안 되면 외모, 부모의 돈과 빽, 춤 실력이나 유머 등으로 자신의 존재를 어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과 소외를 당한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정서를 조성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교육제도다. 그러나 문화산업도 큰 역할을 한다.
학생들은 사실 쿨하지 않다: 사실 청소년들은 쿨하지 않다. 높은 자살률과 정신질환이 그것을 반증한다. 지금 이 땅에는 뜨겁게 사랑하며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우울하고 외로운 청춘들이 있을 뿐이다. 청소년들은 살인적인 입시경쟁으로 친구와 진정한 우애를 나눌 수도 없고, 관료화된 교사를 존경할 수도 없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감이 된 부모를 사랑할 수도 없다. 청소년들은 고립되어 있다. 어차피 혼자일 수밖에 없다면 ‘혼자인 것이 오히려 좋다.’고 마음먹는 편이 낫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심리가 쿨로 나타난다. 지금의 사회는 계급 상승의 기회가 거의 차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민이나 하층민의 자식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계급 상승이 어렵다는 것을 부모의 삶을 통해서 깨닫는다. 그런 아이들은 ‘무기력한 비관주의’에 빠진다. ‘어차피 해도 안 될 거 뭐 하러 노력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매사에 쿨의 정서로 나타난다. 쿨은 청소년의 무관심, 무기력, 불만, 분노를 광범위하게 흡수해간다.
학교와 군대가 폭력을 양산하는 방식
넓고 깊은 폭력이 닮았다: 학교와 군대에서 감시되고 처벌되는 대상과 범주는 가히 전방위적이다. 실존과 실존을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 전체가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된다. 가해지는 형벌은 죄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죄’ 아닌 것을 단죄하기 때문에, 넓고 깊은 폭력이 가능해진다. 군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괴롭힐 명분이 무한정 있다. 하찮은 형식주의와 세세한 규정 때문이다. 군대에서 병사들은 모포 각잡기, 군화 정렬, 관물대 정리, 내무반 청소, 총기 손질 여부 때문에 기합을 받는다. 하찮은 형식주의는 학교에도 많다. 책상 줄 맞추기, 복장, 정숙, 환경 미화, 손톱과 머리카락의 위생이 문제가 된다. 병사는 자기 신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병사는 정해진 장소에, 정해진 자세로 있어야 한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학생이 앉아야 할 좌석은 교사에 의해 정해지며, 특별한 명령과 동의가 없는 한, 자기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학교와 군대에서는 신체와 시간과 동작에 대한 통제가 태도와 정신(생각, 사상)의 문제로 육박해 들어간다. 태도와 정신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처벌하므로 ‘깊고 넓은 폭력’이 가능해진다. 기합과 구타를 당하면서 흔히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너는 태도와 정신이 글러먹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이 그른 놈’으로 찍히면, 그다음부터 폭력은 일파만파로 확대된다. 행동 하나하나가 정신이 그른 증거로 보여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 과정에서 처벌은 괴롭힘으로 변하기 쉽다. 정신과 태도를 문제 삼은 처벌이 궁극적으로 공격하는 지점은 실존성 자체인데, 그것은 ‘궁극의 파시즘’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파시즘적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내가 없어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느끼게 된다. 학교와 군대에 자살이 많은 이유다.
폭력의 조건 - 서열화와 폐쇄성: 폭력은 본래 위계질서가 뚜렷한 사회에서 잘 일어난다. 학교와 군대는 철저하게 서열화가 되어 있고, 상명하복의 문화가 지배한다. 게다가 작은 서열 격차도 크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학생 간부라는 이유로 동급생에게 명령하고 처벌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군대는 더 심하다. 서열 격차가 클수록 억압과 차별, 착취와 폭력 역시 많아진다. 그럴수록 소유욕, 지배욕, 정복욕은 고삐 풀린 말이 된다. 반면 평등하고 애정 어린 인간관계는 맺기 어렵고, 지배와 복종은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로 간주된다. 윗사람의 인권침해는 관대하게 용인되지만, 아랫사람이 대들거나 사고를 치는 것은 질서를 문란케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가혹하게 처벌받는다.
폭력이 번성하는 또 다른 조건은 폐쇄성이다. 학교나 군대나 폐쇄적인 공간에 가두어놓고 훈육한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말하자면 군대는 완전히 폐쇄, 학교는 반(半) 폐쇄다. 학교 폭력 피해학생은 담임교사는 물론이고 부모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 이유는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담임에게 알리는 것이 빌미가 되어 더 큰 보복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학교라는 폐쇄적 공간은 피해학생이 자신을 ‘독 안에 든 쥐’ 꼴로 인식하게 만든다. 부모에게 말해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자녀를 국가가 통제하는 학교에 위탁해야 하고, 그런 학교가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스템 속에서 부모는 이미 무기력해질 대로 무기력해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폐쇄적인 조직에서는 사건의 축소, 은폐, 조작이 수월하다. 학교나 군대에도 어떤 문제가 생기면 조사하기는 한다.
그러나 모두 조직 내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학교는 교육부나 시ㆍ도교육청에서, 군대는 국방부에서 조사한다. 교육부나 국방부는 각각 학교와 군대 운영의 주체이다. 학교와 군대의 구조, 제도, 문화도 사실상 여기서 만든다. 학교와 군대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건ㆍ사고는 개인의 잘못된 인성 때문이 아니다. 학교와 군대의 구조, 제도, 문화가 잘못되어 발생하는 것들이다. 사건ㆍ사고 발생의 가장 큰 책임은 교육부나 국방부에 있다. 그런데 문책을 받아야 할 교육부나 국방부가 오히려 조사ㆍ처벌자로 나선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벌하는 꼴이다. 이 과정에서 면죄부를 받는 이는 최상급기관의 책임자들이다. 권력자와 기관장들은 무슨 사건만 생기면 ‘엄벌’을 천명한다. 그것은 진실 규명과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잘못을 말단 책임자 혹은 직접적인 사건 연루자(가해자)에게 덮어씌우고 자신은 면책되려는 전형적인 레토릭(rhetoric)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