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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철학

히라하라 스구루 지음 | 시그마북스



처음 만난 철학

히라하라 스구루 지음

시그마북스 / 2017년 6월 / 390쪽 / 16,000원





고대 그리스 - 신화에서 벗어나 개념으로 세계를 설명하다



국가_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서양 철학 역사상 처음으로 사물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 철학자다. 소피스트나 변론가가 사물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불이익 등 다양한 귀결부터 논하는 데 반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이어받아 사물 그 자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최초의 주제로 삼았다. 이는 철학의 역사를 크게 진보시킨 중대한 한 걸음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이자 주요 저서이기도 한 이 작품의 중심 논제는 옳음(정의)이란 무엇인가이다.

정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어린이는 영웅이나 선생님, 젊은이는 경찰관이나 재판관, 혹은 법률을 정의라고 답할 것이다. 어른이라면 진정한 정의 따위는 없으며 저마다 자신의 이해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정의의 구체적인 사례,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표상(이미지)이며 정의 그 자체, 즉 본질은 아니다. 도대체 정의의 본질은 무엇일까. 정의에는 과연 근거가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정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작품에서 플라톤은 이런 질문을 파고들어 해답을 내리려 한다.

기게스의 반지: 정의 그 자체란 무엇인가? 플라톤이 이런 문제를 제기한 까닭은 도대체 왜 정의를 택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그에게 절실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화편의 중반부에서 등장인물 중 하나인 글라우콘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이야기한다.

어느 날, 양치기 기게스는 양들에게 풀을 뜯게 하던 도중 대지에서 커다란 구멍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금 반지를 손에 넣게 된다. 기게스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무심코 반지의 구슬을 돌렸다가 자신의 모습이 투명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기게스는 그 반지를 사용하여 왕비와 사통하고 국왕을 죽인 뒤 왕권을 손에 넣는다.

언뜻 대단치 않은 에피소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정의를 둘러싼 근본적 문제가 상징적으로 제기되어 있다. 기게스는 부정을 저지르기 위해 반지를 찾아내지도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우연히 그 반지를 발견하여 자신이 투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뿐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 같은 것이다. 가령 우연히 교무실 쓰레기통에서 다음 주에 치를 시험지를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 시험지를 못 본 척할 수 있을까? 시험 문제를 알면 높은 점수를 받기도 쉽고 부정을 의심받지도 않을 것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 우리는 모두 기게스와 같은 입장에 처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을까?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그저 단순히 공동체가 강제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강제가 없는 곳에서 정의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허울뿐인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는 정의의 본질을 생각할 때 누구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문제다.

이데아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가 정의의 근거라고 논한다. 선의 이데아란 선 그 자체, 어떤 사물을 좋은 것이라 여기는 선의 본질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선의 이데아가 모든 이데아의 근거, 즉 이데아의 이데아라는 규정이다. ‘정의’나 ‘선’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에 기초할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또 선의 이데아는 지식, 진리의 근거다. 그러므로 선의 이데아 없이는 정의나 미를 충분히 알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정의의 근거는 진리의 이데아가 아니라 선의 이데아라는 것, 또 진리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를 근거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진리는 선의 이데아에 의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그 통찰을 기초로 플라톤은 우리가 어떻게 선의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파고든다.

동굴의 비유: 정의의 근거인 선의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 플라톤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논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하 동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어릴 때부터 몸이 묶여 있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머리가 앞만 보도록 고정되어 있어 뒤를 볼 수 없다. 그들의 뒤에는 동굴 안을 비추는 불빛이 있고, 그 불빛과 그들 사이에 벽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벽 뒤에서 누군가가 인형극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두고 비춘다고 생각해보자. 즉, 동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불빛의 존재를 모른 채 태어나 줄곧 그림자극만 보며 살아온 상태다. 당연히 그들은 그림자를 허상이 아니라 실제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뒤를 돌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전혀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만약 묶여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속박에서 풀려나 불빛이 있는 쪽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본 것이 불빛에 비친 그림자라는 말을 듣더라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림자가 진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오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는 눈이 부셔서 주변을 전혀 보지 못할 것이다. 주변을 보려면 눈이 빛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빛에 익숙해져 태양을 볼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동굴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려면 영혼을 그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림자가 아니라 빛, 그리고 그 빛에 비춘 본질을 보자는 것이다. 좋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모두 영혼이 선의 이데아를 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영혼의 방향을 바꾸는 데 사용된 기술이 다름 아닌 교육이다. 선의 이데아는 한정된 사람들만 깨달음이나 신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길잡이만 있다면 누구든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이 작품의 논의를 뒷받침하고 있다.



근대 - 보편성을 탐구하다



정념론_ 정념의 의미를 설명하다 (르네 데카르트)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논의되어 온 문제가 있다. 몸과 마음의 관계를 탐구하는 심신 문제가 대표적이다. 심신 문제는 현대의 ‘심리철학’에서 중요한 주제이자, 오늘날에도 철학적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은 의식뿐만 아니라 ‘연장’을 갖는다. 연장이란 공간 안에서 일정한 장소를 차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철학적 개념이다. 신체는 연장을 갖고 공간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반면 정신은 연장을 갖지 않는다. 의미가 있다고 해서 사물처럼 공간 안에서 위치를 점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의식으로서도 신체로서도 존재한다. 존재 방식이 다른 두 가지가 도대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애초에 마음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심신 문제다.

별개로 존재하는 정신과 신체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 어떤 대답을 제시했을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신체의 기능에 주목하면, 신체 운동의 물리적 원리는 심장의 열이다. 심장에 흐르는 혈액은 정기를 만들어내고 그 정기는 뇌로 흘러 들어간다. 정기의 흐름은 뇌의 깊은 곳에 있는 솔방울샘이라는 기관에서 조절된다. 솔방울샘은 정기를 뇌의 공간에서 방출하여 신경을 통해 근육에 도달시켜 근육을 움직인다. 또 정신은 솔방울샘 안에서 발생하는 운동을 통해 지각을 받아들인다. 이처럼 솔방울샘은 정신과 신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솔방울샘이란 뇌 안에 있는 작은 내분비 기관으로 최근에야 그 기능이 밝혀졌다. 물론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에 그런 것을 알았을 리 만무하다. 데카르트가 솔방울샘에 주목한 까닭은 뇌의 깊은 곳에 있으며 뇌에서 유일하게 좌우로 나뉘어 있지 않은 기관이라고 믿었고 여기에 몸과 마음을 잇는 중요한 무엇인가가 감춰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데카르트의 이 주장이 의학적으로 볼 때 틀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철학의 규칙에 반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과 신체는 별개로 존재하며 뇌의 일부(데카르트에 따르면 솔방울샘)를 통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통찰이다. 심신을 개별적인 것으로 나누고 그 관계에 착안한다는 태도 자체가 데카르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념의 도래성: 정념이란 오늘날의 감정과 거의 동일한 개념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정념은 뇌의 정기가 심장의 움직임을 변화시키는 신경에 흘러 들어가서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밤길을 혼자서 걸을 때, 갑자기 눈앞에 괴한이 나타난다면 누구든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런 종류의 감정을 데카르트는 정념이라고 불렀다. 데카르트는 경이, 사랑, 미움, 욕망, 기쁨, 슬픔을 우리의 기본적 정념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 개수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념이 의식의 저편에서 도래해 의식에 대해 어떤 행동을 일으키도록 작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기쁠 때는 자연히 기뻐지고 슬플 때는 자연히 슬퍼진다. ‘자, 이제 슬퍼져야지’ 생각하고 슬퍼질 수는 없다. 이런 정념들은 의식의 저편에서 북받쳐 올라, 억누를 수 있기도 하고 억누를 수 없기도 하다. 데카르트는 이런 ‘도래성’이 정념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욕망은 미래의 선을 향한 원동력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여섯 가지 기본 정념 중에서도 욕망은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왜냐하면 경이를 제외한 네 가지(사랑, 미움, 기쁨, 슬픔)는 오로지 욕망을 통해서만 특정한 행위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작용해야 우리는 미래의 대상을 목표로 행위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선(좋음)’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의 정념이 생겼다고 해보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상대방에 대해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사나 데이트를 제안하고 싶어진다. 더 가까워지고 싶어진다. 상대방의 아름다움에 닿고 싶다는 ‘좋은’ 것을 향한 욕망이 생기기에 상대방에게 어떤 접촉을 시도한다.

욕망이 작용하지 않으면 정념은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봐도 이 점은 확실하다. 물론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훈련을 통해 무엇이 선인가를 판단하고 지향해야 할 선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고 여긴 것이다. 이 책의 결론에 이르러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정념이 도래하면 우선 침착하라. 그리고 정념을 부정하지 말고 지혜를 통해 그것을 잘 활용하라. 왜냐하면 정념은 인생에서 즐거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유론_ 행복의 조건으로서 자유를 설명하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란 무엇인가. 밀은 공리주의의 원리에 기초하여 시민 사회 안에서 개인의 시민적 자유에 대해 논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하려 한다. 밀은 자유를 옹호한다. 이는 밀이 단순히 ‘자유로울수록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책에서 밀은 개인적인 가치관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옹호되어야 하는 원리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러면 밀은 자유의 원리를 어디에 두었을까. 바로 공리(행복)다. 공리주의의 원리에서 보면 자유란 ‘무엇을 하든 괜찮다’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행복 추구를 방해하지 않는 한, 개인은 자기 고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밀이 생각한 자유란 기본적으로 이런 것이다. 따라서 그때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위해 원칙: 밀은 우선 벤담처럼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통치의 형태에 대해 논한다. 만인이 자유롭게 자기 고유의 행복을 추구하고 누리는 상태를 밀은 ‘최대 행복 상태’라고 불렀다. 그리고 모든 통치는 최대 행복 상태를 실현하기 위한 기초 조건을 정비하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통치의 형태는 필연적으로 자유주의 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밀에 따르면 통치의 형태가 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는 국민과 정부 사이뿐만 아니라 국민 내부에서 다수와 소수 사이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민적인 자유에 있어 정치 체제가 자유주의적이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수자가 소수를 부당하게 억압할 때 어떤 대책을 실시해야 한다. 이를 위한 원리로 밀은 ‘위해 원칙’을 제시한다.

인간 사회의 구성원 중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간섭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또 문명사회 구성원들의 의지를 거슬러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피해를 막는 데 있다. 타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은 그 타인이 최대 행복 상태의 이념에 반하는 행위를 하려고 할 때만 정당하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예를 들어 살인)는 그 자유를 인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행복을 목적으로 할 때(예를 들어 수술) 그 자유는 간섭받아서는 안 된다.

위해 원칙이란 행위의 자유가 최대 행복 상태의 원리에 적합한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위해 원칙에 기초하여 다수가 소수를 부당하게 억압하지 않도록 확인하고 각자가 자기 고유의 행복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정립하는 것이 공리주의의 원리에서 도출되는 방향성이다. 밀은 여기서 그 원리를 실질화하려면 ‘개성’을 완전히 꽃피워야 한다고 말한다. 개성을 자유로이 발휘하여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을 실현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촉발시켜 타인에게 유익하고 가치 있는 인간이 된다. 다시 말해 개성을 서로 표현하고 서로 비평하여 최대 행복 상태를 지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자신의 행복을 규정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평소 자신이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분명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며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권리로서의 자유가 반드시 실제 자유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밀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자유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리성의 원리에서 판단되는 것이다. 자유란 공리성의 원리에 기초하여 저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그로써 사회 전체의 행복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 개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행복을 규정할 수 있는가이다. ‘개성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주장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밀이 결코 그렇게 단순히 논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면 시민 사회에서 생활하더라도 우리는 자유를 실감할 수 없다.



현대 Ⅰ - 니체부터 하이데거까지



권력에의 의지_ 인식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이란 르상티망에 관련된 가치 해석이라는 것이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의 지적이었다. 이 책에서는 그런 통찰을 뒷받침하는 인식의 원리를 제시하는 동시에, 『비극의 탄생』에서 이미 제시한 ‘삶에 대한 긍정’의 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원래 완성되지 않은 단편을 모은 것이다. 니체가 사망한 뒤, 반 유대주의자인 버나드 포스터와 결혼한 동생 엘리자베스가 그의 유고를 편찬하여 간행한 것인데, 그녀는 자신이 신봉하던 나치에 아첨하기 위해 니체의 유고를 자의적으로 편집한 뒤, 그것을 니체의 사상이라고 속여 세상에 퍼뜨렸다. 이 사실은 사료를 바탕으로 한 실증 연구를 통해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중심 사상은 기존 가치 체계의 철저한 음미와 그 음미를 기초로 새로운 가치의 원리, 그것도 우리의 생을 더욱 ‘좋은’ 것으로 만들어줄 가치의 원리를 수립하는 데 있다. 후반에 정리된 단편에서 니체는 인식론적, 가치론적으로 볼 때 무척 혁신적이고 깊이 있는 원리를 제시한다.

인식이란 욕구에 상관한 가치 해석이다: 니체의 인식론에 대한 기본자세는 인식이란 결코 주관이 객관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욕구에 상관한 가치 해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유용성의 기준에 따라 이미 조정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인식 구조에 따른 인식 그 자체도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여기서 니체가 염두에 둔 것은 칸트의 인식론이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공통의 인식 구조가 갖춰져 있고 그것이 인식의 객관성을 보증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니체의 말에 따르면 주관이 객관과 대응한다는 구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자신의 욕구에 상관한 ‘원근법’에 따라 세계를 해석한다는 사고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플 때는 소복이 담긴 밥이 맛있어 보이지만, 배가 부를 때는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만약 우리의 인식이 ‘사실’을 올바로 반영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맛있어 보이는 밥은 언제나 맛있게, 맛없어 보이는 밥은 언제나 맛없게 보일 것이다. 주관은 어떻게 객관을 올바로 인식하는가를 묻는 ‘주객일치’의 구도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이란 욕구에 상관한 가치 평가로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니체 인식론의 기본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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