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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을 위한 인문학 사전

이안 뷰캐넌 지음 | 자음과 모음



교양인을 위한 인문학 사전

이안 뷰캐넌 지음

자음과모음 / 2017년 6월 / 728쪽 / 38,000원





게슈탈트 Gestalt

배치(configuration), 패턴(pattern), 전체(whole)를 뜻하는 독일어. 영어에는 이에 정확히 상응하는 말이 없기 때문에 독일어 그대로 유입되었다. 비평이론에서 이 용어의 사용은 막스 베르트하이머, 쿠르트 코프카, 볼프강 쾰러에 의해 발전한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비롯한다. 이들은 인지심리학을 연구했고 인지의 작동 원리가 전체론적(holistic)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먼저 사물의 전체 윤곽을 보고 그다음 단계별로 세부적인 것을 파악한다. 게슈탈트 이론은 쉽게 예술이론으로 바뀌었다. 영향력 있는 예술사가인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형상(figure)과 토대(ground) 간의 변증법을 만들어내려고 게슈탈트 이론을 사용했다.

급진적 페미니즘 radical feminism

현대사회의 구조에 본질적 변화를 요구(그래서 ‘급진적’이라는 이름이 붙는다)하는 페미니즘 내에서 느슨하게 조직 되었지만 크게 주목받았던 분파. 1960년대 미국에서 여성해방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하나의 혹은 통합된 이론적ㆍ정치적 원리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남성을 향해 일관된 태도를 취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가 여성 억압의 주요하고 보편적인 원인이라고 파악한다. 이는 가부장제가 여성의 생식능력, 성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지만 훨씬 모호한 방식으로 여성성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같은 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생식능력 자체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게 한다고 주장했다. 임신과 육아가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게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에서는 피임약 같은 수단으로 생식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진보로 여겨진다.

이와 비슷하게, 남성의 욕망과 필요를 충족한다는 관점(포르노 그래피와 매춘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을 떠나 섹스를 재정의하며 급진적 페미니즘은 여성의 섹슈얼리티 통제에 저항한다. 일부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옹호하는 하나의 해결책은 이성애 기반에서 이탈해 레즈비언 생활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널리 선택되고 저메인 그리어 같은 페미니스트들이 옹호한 해결책은 여성들이 결혼 전까지의 정절, 결혼 후의 자기부정이라는 문화적 기대가 가하는 제약을 떨치고 자신들의 쾌락적 요구를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최근의 포스트 페미니스트들은 이 전략을 최선의 경우에도 그 결과에 비해 대가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이 전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헌신이나 사랑이 없는 우울한 섹스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장 큰 변화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전복하고자 했던 여성성의 이데올로기에 일어난 변화일 것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메리데일리 같은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으로 여성적 인식론(여성이 중심이 되는 관점을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구축했다.



남성성 masculinity

남성에게 적용되며, 문화적으로 상대적인 젠더 정체성의 이상을 말한다. 이제 방대한 규모가 된 남성성 연구는 남성성의 구체적 내용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19세기 영국의 남성들에게 기대되는 행동 규범은 지금 이라크의 남성들에게 기대되는 행동 규범과 상당히 다르다. 따라 서 비평 담론에서는 보통 남성성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말한다. 남성성 연구는 페미니즘과 문화 연구가 선구적으로 주도한 젠더 연구에서 파생되었으므로 그 핵심에 정체성 형성 문제가 자리한다.

남성성 연구는 젠더화된 행동(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보다 더 힘이 강하고 공격적이라서 사냥꾼-전사이게끔 타고난다)이 생리학의 기능이라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관점을 전복했고 남성성이 문화적으로 규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분야의 연구는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그녀는 이것을 언어학자 존 랭쇼 오스틴의 수행성 개념에서 착안했다)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에 따르면 젠더 역할은 지속적인 자기관리를 요구하는 수행의 행위다. 이 아이디어에 기대어, 일부 연구자는 남성이 여성만큼 이상적인 육체에 대한 문화적 기대에 순응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사태를 과장했다고 보는 편이다.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가부장제가 여전히 강고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다 Dada

제1차 세계대전을 선동하고 수행했던 제국주의 부르주아 문화와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된 문학, 공연예술, 시각예술을 포괄하는 예술운동. 다다는 급격히 변화했고 그 생명 또한 짧았다. 대략 1916년부터 1924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번성했다. 다다는 초현실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고 종종 초현실주의와 같은 범주에 묶이기도 하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 상황주의자들이 주장했듯 사실상 다다의 미학성은 초현실주의와 차이가 있다.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의 교황이라면, 다다이즘의 교황은 후고 발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다다이즘 운동은 1916년 취리히의 슈피겔가세에서 발이 문을 연 카바레 볼테르에서 탄생했다고 본다. 카바레 볼테르를 자주 드나들었던 인물로는 트리스탕 차라, 한스 아르프, 리하르트 휠젠베크, 한스 리히터가 있다. 발은 다다라는 이름을 다다이즘 운동의 잡지 제목으로 만들어냈다. 발이 설명했듯 다다는 루마니아어로는 ‘예, 예 (yes, yes)’, 프랑스어로는 ‘흔들 목마’, 독일어로는 ‘천진난만함’을 나타내고 아기의 입에서 나오는 첫 번째 말이기도 하다. 즉, 다다는 이 모든 것을 뜻하면서 동시에 아무것 도 뜻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이 바로 다다의 미학이다.

다다는 전쟁 이전의 예술이 보이는 퇴폐적 허세에 칼을 들이대는 예술 형식, 즉 반예술로 기능하는 예술 형식의 생산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다다의 반예술은 사회적 성명서를 작성하려고 의도된 것이기도 했다. 다다의 특징적 모습은 ‘기성품’과 예술로 재문맥화되고 변형된 소변기 같은 일상적 대상, 예술을 생산하려 강제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병치된 일상 용품들의 ‘콜라주(collage)’나 ‘절개(cut-up)’다.

다다 운동은 구성원들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닌 만큼 여러 도시를 옮겨 다녔다. 다다라는 단어에 여러 의미가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다다가 있다. 뉴욕에서는 카바레 볼테르에서 다다와 관련된 이벤트들을 벌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 미국에서 거주하던 프랑스 예술가 마르셀 뒤샹과 프랑시스 피카비아가 유명한 ‘아머리 쇼(Armory Show)’에서 뒤샹이 칭한 ‘반망막적 예술(anti- retinal)’, 즉 눈을 즐겁게 하기보다는 자극하기 위한 예술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생산하는 예술이 포스트모던 예술의 특징이라고 설명하면서 뒤샹을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주요한 선구자적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뉴욕과 취리히의 다다 이외에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적어도 서로 다른 두 다다의 형식, 즉 베를린 다다와 파리 다다가 있다. 뉴욕과 취리히와 다르게 파리와 베를린은 중립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전쟁이 말 그대로 그 도시의 코앞에서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베를린과 파리의 다다는 그 이전에 있었던 선 임 다다보다 더 삭막했다. 조지 그로스의 피로 흠뻑 젖은 <오스카 파니차에게 바치다(Homage to Oskar Panizza, 1917~1918)>가 이렇게 변화된 관점을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다. 또한 베를린 다다는 포토몽타주(사진 합성법)로 알려진 기술을 발명했다. 가장 잘 알려진 주창자는 맨 레이다의 포토몽타주 기술은 여전히 아방가르드 예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리 다다는 뒤샹과 피카비아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이 두 사람은 1919년 뉴욕에서 돌아와 차라, 그리고 단호히 관습에 도전하고 급진적으로 새로운 것을 생산하려고 했던 폴 엘뤼아르 같은 활기찬 젊은 지식인들, 예술가 그룹과 교류했다.

사실상 다다는 끝났다기보다 자체적으로 무너졌다. 다다 그룹이 너무 많은 괴팍한 유명 인사들을 견뎌낼 수 없다 보니 허물어졌다. 그러나 개척했던 아이디어와 기술은 오늘날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로맨스 romance

중세 초기에 시작되어 이후 많은 변천을 겪은 문학 장르. 이 장르의 최초 사례들이 이른바 로망스어(당시 대부분 책들이 쓰인 라틴어가 아니라 지역적 방언이었던 언어)로 쓰인 데서 이 용어가 비롯했다. 궁정 이야기로 불리기도 하는 로맨스는 대체로 중세 왕과 여왕의 삶에 초점을 맞춘 모험담 혹은 탐색 이야기였다. 주제 면에서 이 이야기들 대부분이 용기, 사랑, 명예, 예절, 정절(혼인 상대에 대한 정절이면서 동시에 그리고 더 중요하게, 자기 영토에 대한 정절) 등과 연관된 기사도적 문제에 집중한다.

로맨스 텍스트 중 가장 많이 연구된 예는 몇 가지 이본이 있는 아서왕 이야기다. 최초의 현대 소설로 여겨지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1604)는 궁정 로맨스의 패러디이면서 한편으로는 이 장르를 붕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해방시킨다. 오늘날 로맨스라는 용어는 주제적 핵심이 사랑인 소설의 한 하위 장르를 가리킬 때가 많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1813)이 로맨스 장르의 이와 같은 변천의 효시로 여겨진다.

이렇게 이해되는 로맨스는 밀스앤드분에서 펴내는 대중 로맨스로까지 확장되었다. 이 로맨스의 경우 모험 요소는 포함되지 않을 때가 많고, 서사는 여주인공 관점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이 로맨스 장르가 살아남은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로맨스 장르는 J. R. R. 톨킨의 ‘반지 3부작’ 같은 판타지 소설에서도 계속된다.

리비도 libido

정신분석학에서 이드의 심리적 에너지를 명명하기 위해 욕망 혹은 소망을 뜻하는 라틴어 어휘를 차용한 용어. 이 용어를 이런 의미로 쓴 것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처음이다. 지금 리비도는 개인의 성적 욕구를 가리키는 정중한 은어로, 정신분석 문헌의 바깥에서까지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애초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그 본성이 전적으로 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경우 리비도는 본능에 국한된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이해한 리비도를, 본능과 타협한 산물인 에고와 대립 지점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프로이트는 에고에도 리비도 에너지가 있다는 방향으로 자기 이론을 수정했다. 프로이트의 완숙기 저작들에서, 리비도는 성적 흥분의 심리적 차원이다. 리비도의 힘은 몸으로 체험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리비도는 육체적 개념은 아니다. 본능이라기보다 충동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리비도를 더 잘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쪽이 리비도가 죽음 충동의 대척점에 있다고 보는 그의 후기 저작들의 견지와 더 잘 부합한다. 카를 융, 질 들뢰즈 같은 학자는 리비도가 필연적으로 성적 에너지라는 프로이트의 아이디어를 배격하는 대신 그것을 일종의 생(의)-힘/삶(의)-힘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리비도는 인간의 활동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에너지를 뜻한다.



마르크스주의 Marxism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촉발된 정치 담론, 혁명적ㆍ사회운동. 가장 기초적 차원에서 정의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더 정확히 말하면 생산양식이 모든 인간의 삶의 조건을 결정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 역사과학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신념은 사회 모든 구성원의 필요를 사회가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볼 때 여기에는 유토피아적 차원이 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이 신념이 실현되지 못한다.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생존하려면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 사이에 갈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것은 그가 보기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불평등을 자각하고, 그 불평등이 생산양식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시정되지 않을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저항 속에 힘을 합쳐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그것을 사회주의로 교체할 것이라고 보았다. 마지막 사항에 대해서 역사는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증명했다. 혁명적 사회운동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의 조직과 함께 시작해 어떤 면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끝났다. 두 연도 사이에는 물론 인터내셔널이 세 번 있었고 러시아, 중국, 한국, 쿠바에서 상당히 성공적인 혁명이 있었다.

정치 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다양한 역사를 겪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파를 겪으면서 정치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에는 중대한 단절이 있었다. 서유럽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 단절되었다고 느꼈지만, 동시에 그들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못했음에 패배감을 느끼기도 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마르크스주의가 이 시점에 부상했고, 소련에서 득세했던 더욱 실천적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와 별개로 발전을 시작했다.



모더니즘 modernism

건축에서 조형 예술, 영화, 문학에 이르기까지 전 예술 분야에서 일어났던 국제적 예술운동. 19세기 말에 시작해 20세기 중반에 완료되었다. 모더니즘은 그것이 거부했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선례에 따라 가능한 모든 예술적 실험이 이미 수행된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무엇을 찾으라는 과제를 앞에 두었던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 온다. 또한 그들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지만, 넓은 범위의 여러 예술운동을 그 안에 아우른다. 추상주의, 아방가르드주의, 구성주의, 큐비즘,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상황주의 등이 그 예다. 여기 언급된 명칭들은 모더니즘 시기에 융성했던 수많은 예술, 창작 분파의 일부일 뿐이다.

모더니즘을 규정하는 특징을 포착하는 유명한 구호가 둘 있다. 아르투르 랭보의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와 에즈라 파운드의 ‘새롭게 하라’가 그것이다. 두 구호는 모두 예술가들에게 전통을 폐기하고 모든 매체에 내포된 가능성을 실험하라고 명한다. 그 결과로 무의미 혹은 추악함이 얻어지더라도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파운드처럼 미국 태생 모더니스트인 거트루드 스타인은 추악함을 목표로 노력하는 것이 예술 작품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이 과거 전통의 잔재에 불과하므로 그럴 때에만 예술 작품이 진정 새로움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라는 명칭의 어근이 되는 ‘모던’은 현재, 당대를 뜻하는 라틴어 ‘modo’에 기원을 두며, 거의 2,000년간 쓰인 어휘다. 19세기 중반 무렵까지 이 어휘의 용법에는 특기할 점이 없었다. 『단독적 모더니티』(2002)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고전 시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모던’이라는 용어가 쓰인 14개의 다른 용례를 제시했다. 제임슨은 제기해야 할 진정한 질문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모던’이 새로움을 향한 요구가 되었는가라고 말했다.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은 없다. 세부로 들어가면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지만 흔히 모더니즘은 모더니티(사회 영역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한 미학적 보완이라고 이해되며, 미학적 혁신을 향한 모더니즘의 추동은 현대화(테크놀로지에서 일어난 변화)가 불러온 사회적 삶의 혼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여겨진다. 즉, 모더니즘을 꽃피운 것은 일상적 삶의 조건에 일어난 변화였다.

일례로 마셜 버먼의 『견고한 모든 것이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1982)에서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된 이런 주장에는 특정한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다. 모더니즘은 도시 미학이었다는 것이다. 모더 니즘은 산업화하고 있던 유럽의 대도시 환경에서 가능했던 새로운 삶의 형식과 그것이 불러온 다양한 문제를 찬미하고 또 그것을 고뇌했다. 핵심적 변화는 개인들이 그들의 가족, 고향 마을, 땅과 맺은 관계에서 겪게 된 소외다. 공장의 노동자들이 임금노동자가 되려고 도시로 이주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 들이 알았고 당연히 여겼던 모든 것에서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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