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량광야오 지음 | 성안당
사람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량광야오 지음
성안당 / 2017년 5월 / 260쪽 / 14,000원
도덕
왜 도덕이 필요한가?
영화 <할로우맨>에 등장하는 과학자는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방법을 개발한다. 동료의 조언을 무시한 채 실험에만 몰두하던 그는 결국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자신만이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상황은 과학자의 심적 변화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부도덕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벌이기 시작한다. 이웃집 여자를 강간하고 심지어 그의 비밀을 아는 동료를 죽이는 지경에 이른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통제 불능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의 도덕적인 행동은 단지 외재적인 제약 때문일까?
물론 투명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모두 악행을 저지른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영화 <판타스틱 4>의 케이트처럼 투명인간으로 변하는 능력을 통해 정의를 구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투명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둑질과 같은 악행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점퍼>에서 주인공이 은행을 털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듯이 말이다.
플라톤의 《유토피아》에서도 다음과 같은 얘기가 등장한다. 한 목동이 우연히 투명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얻은 후, 왕비를 유혹해 왕을 살해하고 왕좌에 오른다. 이 얘기는 인간은 외재적인 제약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지 못할 뿐,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내가 도덕 무용론을 제창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바로 사회 질서의 유지다.
외재적인 제약 외에 내재적인 제약도 존재한다. 이는 다름 아닌 ‘양심의 가책’이다. 이익은 막대한데 어느 특정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영화 <점퍼>의 주인공이 은행을 털었던 것처럼 대다수가 양심을 저버릴 것이다. 한편 혹자는 ‘도덕이 단지 질서 유지를 위한 수단이라면, 법률이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 과연 도덕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선 도덕과 사회 질서의 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사회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질서를 지키도록 하느냐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관습의 틀 안에서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역부족이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구성원들의 관습은 제각각이다. 이러한 연유로 법률에 의지해 질서를 유지한다. 외재적인 제약에 속하는 법률은 감시가 필요하고 그에 따른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이를 절약할 수 있는 최고의 방안은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는 내재적 제약, 바로 도덕이다. 따라서 법률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도덕 또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결론
‘왜 도덕이 필요한가?’라는 문제에 대해 나는 아래의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해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도덕을 위배했을 경우 처벌 받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우리는 도덕 규칙을 준수하며 안정된 환경에서 서로 협력해 각자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 셋째,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자아실현으로, 정신적인 쾌락을 맛볼 수 있다. 그렇다면 투명인간으로 변신시켜주는 절대반지가 지닌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대다수가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러한 반지를 손에 쥐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게 아닐까? 이 절대반지는 우리의 도덕적 소양을 테스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법률이나 다른 이의 시선과 같은 외재적 제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외부의 시선 없이 홀로일 때 더욱 삼가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유가의 ‘신독(愼獨)’은 참으로 일리가 있다.
죽음
죽음의 의미
영화 <데드 맨 워킹>과 <크리스마스 캐럴>은 공통적으로 죽음을 통해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주고, 죽음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가 감독의 영화 <살다>는 이 주제를 심도 있게 다뤄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원로 공무원이다. 일에도 가정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하루하루 그저 되는 대로 살아온 그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도 그저 편안히 여생을 보내려고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 동료의 일침에 죽기 전까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리라 결심한다. 바로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공원을 조성해주는 일이었다. 때때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공원을 완성한다. 그의 장례식에서 이 얘기를 전해들은 동료들은 그의 변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큰 감동을 받았고, 심지어 그를 본보기로 삼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안타깝게도 잠시뿐, 그들은 금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영화는 우리에게 죽음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반성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문제는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알지만, 도대체 그때가 언제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의 죽음은 분명 각성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일 뿐이다.
<이키가미>라는 영화 속에서 일본은 ‘국가 번영유지법’을 만들어 모든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예방 접종을 한다. 이 주사의 1,000개 중 1개에는 18~24세 사이가 되는 특정일에 폭발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나노캡슐이 들어 있다. 하지만 누가 그 주사를 맞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 죽기 24시간 전 사망 통지문을 받게 된다. 이 법률은 사망에 대한 공포를 조장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열심히 일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나아가 범죄율과 자살률을 낮추자는 취지도 있다.
어떤 철학자는 죽음이 있기에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고, 인생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고 말한다. 만약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며칠이라면,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겠는가? 분명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찾아 나설 것이다. 누구나 죽음 앞에선 진지해지고, 내재돼 있는 선한 본능을 분출하기 마련이다. 물론 불치병에 걸렸거나 극도의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생존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겐 오히려 죽음이 일종의 해방구일지도 모른다. 이 또한 죽음의 다른 의미다. 하지만 부와 권력, 명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은 일종의 테스트다. 일부 사람들은 장생불사를 꿈꾸기도 한다. 목적은 바로 권력과 부, 명예를 유지하고픈 욕심에서다. 진시황제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래 사는 것도 불행일 수 있다.
영화 <굿바이>는 사실 죽음을 조명하는 영화다. 주인공은 납관사라는 직업을 통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 영화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죽은 연어를 통해 삶과 죽음은 자연의 순리일 뿐, 가슴 아픈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장자의 ‘삶과 죽음은 매한가지다’라는 말과 결을 같이 한다. 삶은 죽음의 시작이고, 죽음은 삶의 끝이다. 참고로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일본 영화를 제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일본 문화는 죽음을 중시한다. 이는 무사도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무사도를 대표하는 벚꽃은 세상 어떤 꽃보다도 조밀하게 꽃을 피워내지만, 금세 지고 만다. 일주일 남짓이나 될까? 다시 말해 벚꽃이 가장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것은 시들 시간이 다가왔다는 의미다. 무사의 죽음은 이처럼 쓸쓸하고도 비장하다.
교육
결론
이상적으로 얘기하면 교육은 개인의 품성과 재능을 함양하기 위함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에 필요한 노동력을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자본주의로 인해 사회는 경쟁에 찌들었고, 학교마저도 이런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 사회에서 교육은 한 사람의 경제적 소득과 사회적 신분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육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의 압박 속에서 배움은 시험과 입시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주입식 교육이 성행하게 됐다. 학생들은 단기간 내 성적을 올리기 위해 외우고 또 외우지만,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머릿속은 백지 상태가 된다.
영화 <세 얼간이> 속의 학생들처럼 시험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기계적으로 반복하면서 사고력은 떨어진다. 나는 엘리트주의를 반대하진 않지만, 교육을 통해 배출한 현재 엘리트들의 창의력과 담대함을 보고 있노라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현대 사회가 리더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이 두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기교육의 결과는 주입식 교육보다 더 참혹할 것으로 예상된다.
교육 분야에서 핀란드의 경험을 참고해보고자 한다. OECD는 2003년 15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국제학생 능력 평가 계획’이란 조사를 실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핀란드는 독해 이해 영역, 과학 소양 영역에서 1위, 수학 능력 영역에서 2위(홍콩 1위)를 차지했다. 독자들은 아마도 핀란드 사회의 경쟁 열기가 홍콩보다 훨씬 뜨거울 것이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다. 홍콩의 학생들이 하교 후 학원을 가거나 공부를 하는 것과 달리, 핀란드의 초등학생들은 하루에 단 한 시간 숙제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놀이를 하거나 자신의 좋아하는 일 등을 한다. 핀란드 교육은 학생 중심이다. 학생의 이해 정도에 따라 학습 진도를 결정하고, 학생들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한다.
핀란드와 홍콩의 실정은 다르다. 그런 만큼 그들의 교육방식을 맹목적으로 답습하자는 뜻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들의 교육에서 배울 점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핵심은 학생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사회 생존 능력을 갖추고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적어도 ‘고득점의 무능력’한 학생들의 양산을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환경 보호
왜 환경을 보호해야 할까?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큰 충격에 빠질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방대한 양의 과학적 근거를 통해 지구온난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결국 인류에게 큰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 경고한다. 영화 <투모로우>는 지구온난화가 대규모의 기후 이변을 초래하고 초대형 태풍이 지구를 강타한 뒤, 북반구의 기온이 급락하면서 지구는 새로운 빙하시대에 접어든다는 상상을 스크린에 옮겼다. 하지만 이는 결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얘기가 아니다. 약 1만 여 년 전 유사한 과정을 거쳐 빙하시대가 출현한 적이 있다. 참고로 <불편한 진실>의 사회자였던 전 미국 부통령 엘 고어는 지속적인 지구온난화를 용인하는 것은 매우 부도덕적인 일이라 지적했다. 지구온난화는 인류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로 초래된 인위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대로 지속된다면 우리의 후손은 앞서 말한 재앙을 겪게 될 공산이 크다. 다시 말해 환경을 보호하는 주된 이유는 인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의미다. 문제는 책임 소재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자연의 자원은 공유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때론 모든 사람이 져야 할 책임을 아무도지지 않곤 한다. 공유지의 비극에 대한 내용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좀 더 많은 공공재를 이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지나친 사용은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시킨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이러한 환경 문제를 꼬집었다.
인류가 자율적으로 공유 자원을 이용토록 하는 것은 부적합한 처사다. 특히, 기득권자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유일한 방법은 ‘규제’다. 홍콩은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할 계획이다. 대기층도 인류의 공공자원이다. 같은 논리로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한 사람이 가장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은 미국인들이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제안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일본은 지진으로 원전사고가 발생했고, 방사능 물질에 오염된 물이 바다로 흘러들면서 인접국의 해산물을 오염시켰다. 배상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지구촌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고, 환경오염이란 문제 앞에서 독자적인 행동은 어느 나라라도 용납될 수 없는 행태임이 분명하다.
자아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사람은 아마도 ‘진짜의 나’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진짜의 나’는 또 무슨 의미인가? 이 또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진짜의 나’는 변하지 않는 나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사람이 죽은 후 육신을 떠난 영혼은 영원하지만, 남은 육신은 부패하므로 영혼이 바로 진정한 나라고 봤다. 불가에서도 비슷한 견해를 찾을 수 있다. 영혼은 윤회하며 다른 이의 몸을 빌리기도 한다. 많은 영화가 이러한 부분에서 모티브를 얻기도 한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남자 주인공의 영혼이 한 점성술가에 빙의하면서 여주인공과의 스킨십이 가능해진다. 몸은 비록 점성술가지만, 실제론 남자 주인공이다.
중국의 도가에서는 영혼이 다른 이의 몸에 들어가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곤 한다. 이를 ‘탈사(奪舍)’라고 한다. 홍콩 영화 <워크 인>에 등장하는 경찰 토미(황즈화)는 사건 수사 중 큰 부상을 입지만 지혜로운 노인(우칭렌)의 도움으로 탈사를 통해 강도(리시우셴)에게 빙의되면서 두 인물 사이에서 갈등한다. 만약 영혼이 바로 자아라면, 영혼의 특성은 무엇일까? 플라톤은 영혼을 이성, 기개, 욕망으로 구분하고, 이를 자아의 구조라고 봤다. 프로이트 또한 자아의 구조를 세 부분인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구분했다. 프로이트는 육체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드는 욕망의 본능(플라톤이 말한 욕망과 유사)이자, 인간의 생명력이다. 초자아는 사회 규범을 말하며, 이상을 대표한다. 반면 자아는 자신이 인지하는 현실(플라톤이 말한 이성과 유사)의 이드와 초자아의 중간에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이드의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자아의 규범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자아일 때는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욕망을 지나치게 억제할 경우 이드, 자아, 초자아의 균형을 깨트려 정신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이성을 통해 욕망과 기개를 절제할 수 있어야만 정신이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
영혼은 과연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그 구조는 어떨까? 지금의 과학 수준으로는 이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하지만 플라톤이 제시한 영혼의 삼분법은 참고할 만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성을 통한 욕망의 억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감정의 가치를 간과했다. 이에 반해 프로이트는 욕망의 본질을 직시하고, 이를 예술이나 인생의 의미를 찾는 중요한 동력으로 파악했다. 흄도 ‘감정은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아무튼 욕망과 감정은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인생을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흄은 욕망과 감정으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를 화원의 잡초에 비유했다. 잡초는 제거할 수 있지만 또 자라기 마련이다. 만약 독성 제초제로 일거에 제거한다면 그와 함께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도 더 이상 즐길 수 없지 않겠는가?
나는 플라톤의 자아 구조를 지식, 감정, 기개로 고쳐봤다. 이는 칸트가 비판한 세 가지 주제이기도 하다. ‘지식’과 ‘기개’는 플라톤의 ‘이성’과 ‘기개’에 대응된다. ‘감정’은 플라톤이 말한 욕망을 대체한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자아실현이란 지식, 감정, 기개라는 잠재력을 발현해, 좀 더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 지식은 지성과 이성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얻은 지식과 사물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방대한 양의 지식과 끝없는 배움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자신과 관련된 지식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지식은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이해다. 감정은 인간의 감수성을 의미한다. 감수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잉태되는 것이 예술이다. 이성을 강조한 플라톤은 감정을 억눌렀다. 그의 유토피아에서 예술가들이 발붙이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이 감정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술의 가치에 대해 무지했을 뿐이다. 기개는 결단력을 말한다. 자아란 부단히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매번의 선택이 축적돼 기개를 배양하고, 자주성이란 꽃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