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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끼에서 4차 산업을 보다

석산 지음 | 평단



돌도끼에서 4차 산업을 보다

석산 지음

평단 / 2017년 4월 / 403쪽 / 17,000원





구석기시대



구석기의 1ㆍ2차 테크놀로지 혁명

오늘날 우리의 신체는 구석기인과 큰 차이가 없고 여전히 다른 동물들보다 약하다. 하지만 인류가 이 같은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해 도구를 찾고, 제작하고, 사용하면서 인지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직립보행을 시작한 원시 인류는 수백만 년의 세월을 지내며 자유로워진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무 돌이나 집어던지며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뾰족하게 깨진 돌을 썼더니 훨씬 더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돌을 떼어 내어 사냥도 하고 나무도 베었다. 인류 최초의 창의적 도구인 깬석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도구 제작이 우연한 발견의 누적인 것처럼 불도 마찬가지이다. 원시 인류가 어느 날 번개 치는 소리에 놀라 숨어 있다가, 잠시 뒤 벼락 맞은 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따뜻했다. 불꽃은 사라졌으나 아직 벌건 기운이 남은 숯덩이를 모았다. 그런 식으로 발견된 불씨는 인간의 의식주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깬석기, 불 등 원시 인류의 최고 발명품들은 모두 자연을 관찰하고 모방하고 변형한 것이다. 구석기의 1차 테크놀로지 혁명은 관찰과 모방에서 나왔다.

이 두 가지 발명품이 점차 발전하여 무기, 바퀴, 증기기관, 컴퓨터 인공지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의 창의성이란 안에서 밖으로 나온다. 따라서 무엇을 머릿속에 많이 집어넣으려 하기보다는 더 많이 생각해야만 한다. 책을 읽고 내용을 두뇌에 주입했으면 그 관심 주제에 대해 넓고 깊게 고찰해야 창의성이 나온다. 원시인들이 자연의 우연한 사건을 발견하고 유용하고 의미 있는 도구로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생각은 여유로움에서 나온다. 구석기인들은 쉬는 시간이 많았다. 인구증가가 미미했기 때문에 주변의 자원을 활용하며 하루 3시간씩 일주일 20시간 정도만 일해도 먹고사는 데 충분했다. 원시 인류는 자꾸 늘어나는 여유시간에 무엇을 했을까? 여유 시간이 많아지자 움막을 짓고, 부싯돌로 불을 피우는 법도 발견했다. 이 부싯돌을 버리지 않고 손잡이 도끼를 만들어 움막 지을 땅도 파고 나무도 베며 사냥 도구로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도구 제작의 혁명이 일어나는데 바로 ‘돌날떼기(blade technique)’였다. 구석기 초기에는 바위처럼 큰 돌에서 필요한 형태의 돌을 떼어 낼 때, 나무나 뼈, 돌 등으로 만든 망치로 내리치기만 했다. 하지만 후기에 와서 큰 돌에 짐승 이빨 등 날카로운 물체로 쐐기를 대고 망치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런 간접떼기 방식으로 만든 석기는 기존 석기에 비해 훨씬 정교하여 체계적 사고가 요구되었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도 간접떼기 방식이다. 구석기시대에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였으며, 발명은 또 다른 필요의 어머니’였다. 이것이 구석기의 2차 테크놀로지 혁명이었다.

인간을 포함해 진화 중인 개체는 모두 한계가 있는데, 이런 한계를 극복하려는 수단이 도구이다. 그리고 그 도구가 획기적일수록 그것은 창의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지 객관적으로 정의하는 곳에서 창의력이 생긴다. 구석기인들도 열악한 자연조건을 접하며 그 조건을 바꿔 보고자 했다. 이것이 호기심인데 여기서 상상력이 생겼고, 상상력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다. 원시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세대를 거듭해 진화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경험의 누적과 전승이다. 문자가 없던 시대의 경험 전승과 누적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경험을 전승한다는 것은 나와 외부적 사건을 분리해 기억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과연 어느 시점에 인류가 자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구석기시대의 유물에 일정한 패턴이 새겨진 것은 3만 5천 년 전쯤인데, 이 같은 ‘새김유물(corded ware)’이 충북 단양에서 발견되었다. 원시 인류의 경험이 전승되어 쌓이다가 후기 구석기에 이르러 자의식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자 눈금 돌을 만들어 수를 측정하기 시작했고, 인간 얼굴을 새겨, 이것은 ‘나’와 저것은 ‘너’, 그리고 ‘우리’와 ‘너희’들을 구분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원시인들에게 자의식이 생긴 뒤 바라본 밤하늘은 달랐다. 전에 무심히 보았던 별들이 묘하게 선을 이으면 특이한 별자리가 되었고, 이 별자리들이 신기하게도 저녁부터 새벽까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호모사피엔스의 지능은 기본적으로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큰 차이가 없다. 단지 시대변화에 따라 어떤 기능과 인지 능력이 더 강화되고 축소되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구석기시대의 조직과 경영 방식 역시 인지기능처럼 환경과 조응하며 진화하였다. 가장 오래된 전곡리의 구석기인들은 어렴풋이나마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인지했다. 무리를 이루며 분업을 하게 되었고, 피치 못할 갈등을 해결할 소통의 능력도 갖추게 되었다. 조부모까지 구성원으로 받아들인 호모사피엔스는 급기야 이전 세대의 경험을 누적하고 전승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다양한 사회적 조직의 형태가 문명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신석기시대



한국ㆍ중국ㆍ일본의 분리

오늘날 한반도의 지형은 신석기시대(BC 10000~4000)에 완성되었다. 신석기를 대표하는 것은 빗살무늬토기인데, 빗살무늬토기에는 빗금무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번개무늬, 물고기 뼈무늬, 곡선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그림을 토기 표면에 그리면서 신석기인은 어떤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시름을 잊고 몰입하며 행복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상상력과 창조의 꽃인 예술의 힘이다. 이런 상상력이 있었기에 과학지식이 전무한 신석기시대에도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 중국 동북 연안, 러시아 등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신석기인은 그들과 물자를 교환하고 도구제작기술을 공유하고, 자원의 분포 정보 등을 교환했다.



고조선, 청동기시대



사회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다

조직은 목적달성을 위해 인위적 상호작용이 작동되는 하나의 유기체인데, 유기체인 조직을 강화하려면 그만큼 많은 자원을 소모해야 한다. 그런 자원이 석기시대인 환국과 배달국에 없었다. 하지만 고조선시대는 달랐다. 청동기라는 도구로 잉여생산물이 생겼고, 거대 조직도 관리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청동기를 만든 것은 산업혁명의 증기기관, 정보혁명의 컴퓨터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어느 날 석기인들 여럿이 바위틈에서 불길에 휩싸인 채 흘러내리는 물질을 보았다. 두려움이 컸던 사람들은 도망치거나 불붙은 바위 앞에 엎드려 살려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은 주변을 살피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았다. 이들 중 누가 청동기를 발명했을까?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컸던 사람들이다. 합리적 해법은 문제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에서 나온다. 호기심이 컸던 원시인들은 청동기를 만들고, 공포가 컸던 원시인들이 종교를 만들어 냈다. 종교를 만든 원시인들은 작은 수확을 얻고도 다음에 더 큰 수확을 얻게 해달라고 자기들이 만든 신에게 공희(供犧)하기 바빴다. 그러나 호기심이 큰 원시인들은 돌과 나무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찾았기 때문에 청동 도구가 탄생했다. 청동기의 등장으로 고대국가라는 다소 복잡한 사회 조직이 등장하자 계급분화가 이루어진다.

전문화된 분업화

석기시대인은 전인적 인간이었다. 한 사람이 사냥꾼, 어부, 의사, 약사, 공예가 노릇을 했다. 청동기시대 이후에는 전문성이 강화되면서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전인성을 상실하고 종단(縱斷)적으로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인공지능시대가 도래하면서 원시인적인 횡단(橫斷)적 관점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한 뒤 사회적 분업이 늘어났다. 이 시기에 구릉지에서 화전을 일구며 집약농경 형태인 다작물 농경 구조가 나타난다. 또한 대규모 취락지가 형성되고 대가족이 장방형 주거지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사회가 분업화되고 복잡해지자, 2대 단군 부루가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2대에 걸친 토지사유화, 거래 표준 방식, 공정상벌 등 세 가지 정책을 세웠다.

철기시대의 청동기적 조직

고조선은 왜 멸망했을까? 그 첫 번째 요인은 내부 분열이다. 영악한 한 무제는 고조선의 연맹체적 특징의 허점을 파고들어 직접 공격하는 대신 결속을 약하게 하기 위해 각 연맹체의 지도자들을 매수했고, 여기에 고조선의 국론이 분열되었다. 두 번째 요인은, 철기시대에 맞는 조직을 형성하지 못한 점이다. 당시 철제 농기구가 등장하며 각 지방의 소국들이 크게 성장했는데, 연맹왕국의 조직 형태로는 정치ㆍ경제적으로 막강해진 이들을 장악하기가 어려웠다. 참고로 철기문화는 중앙집권적 조직이 알맞다. 그래야 일사불란한 목표관리(MBO)가 가능하다. 그런데도 고조선은 2,300년가량 연맹체 수준의 조직으로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며 영광을 누려 왔던 그 전승(傳承)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시대의 변화 앞에 과거의 성공방식에 집착하는 경로 의존성을 버리지 못했다.



열국시대와 사국시대



고조선의 공백을 채운 열국

2천여 년 동안 만주 벌판과 한반도를 지배한 고조선이 사라진 뒤, 그 빈 공백을 고조선의 거수국들이 서로 차지하겠다고 치열하게 다투며 열국시대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 새로 탄생하고 사라져 간 수많은 나라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나라는 십여 개에 지나지 않는다. 최씨낙랑국, 북부여,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 예, 맥, 고리국(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

한편 BC 50년경부터 만주와 북부 지역은 고구려가 통합해 나갔고, 남부는 변한이 가야로, 마한은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성장하며 고대국가로 발전해 갔다. 특이하게도 부여만 연맹체를 그대로 유지했는데, 인접한 고구려와도 다투었으나 잘 버티다가 346년 연나라 왕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기울기 시작해 고구려의 보호를 받더니 494년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건국되는 기원 무렵부터 부여가 망할 때까지를 오국시대로, 그 뒤 가야가 망할 때까지를 사국시대라 불러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삼국시대로 각인이 되어 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영향 때문이다.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



4세기의 승부사 고구려 미천왕, 낙랑과 대방을 점령하다

삼국 중 백제가 제일 먼저 율령과 관직을 정비한 뒤 체계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면서 4세기에 동아시아 최강자로 부상한다. 중국에서는 북방 유목민들이 세운 5호 16국(304~439)이 등장해 130년 난세가 시작된다. 때마침 고구려에 탁월한 승부사 기질을 지닌 미천왕(300~331)이 즉위한다. 미천왕은 즉위 3년째부터 정복전쟁에 돌입한다. 302년 9월 고구려군 3만이 현도군을 공격해 8천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이후 미천왕은 내실을 기하다가 311년 요동의 관문인 서안평을 점령했고, 그 기세를 몰아 313년부터 연달아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켰다. 요서와 요동반도의 400년 한사군시대를 끝낸 것이다.

동아시아를 경략한 백제 근초고왕

요서를 경략한 근초고왕을 중국에서는 “백제도래지왕(百濟到來之王)”이라 불렀다. 어떻게 근초고왕이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중국 요서와 산동반도, 일본 열도까지 이어지는 환서(環西)의 해양 대제국을 이루었을까? 한 국가의 경영전략이란 경영자원을 배분하는 원리인데, 종과 횡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수직적인 일련의 흐름인 경영전략의 구도는 국가의 시책과 그에 따른 사업, 각 사업의 세부적인 실행과 기능 등 세 가지로 정리된다.

다음 횡적인 경영전략은 예를 들어 민츠버그의 5P 같은 것이다. 첫 번째는 계획(Plan)이다. 장기적인 목표달성을 위한 행동방향과 의도적인 지침인데, 이런 계획을 세울 때 구성원의 열망이 반영되어 있어야 추진력이 생긴다. 참고로 백제인은 자신들의 뿌리인 부여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근초고왕의 북진 정책도 이 같은 열망에 부응한 것이다. 두 번째가 구체적인 책략(Poly)이다. 아무리 좋은 목표라도 구체적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근초고왕이 북방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세운 구체적 책략은 두 가지이다. 내부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왕실을 튼튼히 한 뒤, 지방 통치 조직도 정비했다.

세 번째가 유형(Pattern)이다.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조직에 나타나는 일관성 있는 흐름이다. 이 행동패턴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이해하고 성과도출에 도움이 될 전략을 짜야 한다. 참고로 고구려 고국원왕이 369년 치양에 쳐들어가 민가를 노략질할 때였다. 백제 태자가 달려가 싸우려 할 때 백제사람 사기(그는 백제왕의 말을 관리하던 중 실수로 말발굽에 상처가 나자 처벌을 피해 고구려로 도망쳤음)가 나타나 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구려 군사가 숫자는 많지만 붉은 깃발을 든 기병대만 날쌔고 용맹합니다. 그들만 무너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흩어질 것입니다.” 태자는 사기의 말대로 붉은 깃발의 기병대만을 집중 공략했고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그해 11월 근초고왕이 한수(漢水) 근처에서 대대적인 황색 깃발로 뒤덮인 열병식을 개최한다. 고구려가 빨간 깃발을 사용하자 백제는 황제의 색깔인 황색 깃발을 높이 든 것이다. 치양성 전투를 기점으로 백제의 군사력이 고구려와 대등해졌다. 이리하여 백제군도 의도치 않았으나 위세와 자긍심을 주는 황색 깃발을 휘날리기 시작한다.

네 번째, 위치선정(Position)이다. 조직의 경쟁적 환경을 이해하고 기회를 발현하여 요충지를 선정하는 것이다. 백제가 특별히 선정한 위치는 요서였는데, 인구도 적었고 척박하여 중원에 난립해 있던 5호 16국이 주력을 기울이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백제는 바로 이곳을 북방 무역과 정벌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마지막, 관점(Perspective)의 변화이다. 어떤 관점이냐? 집단이 공유하는 의도와 행위에 대한 관점이다. 대국가들처럼 백제도 정복국가이다. 그러나 다른 정복국가들과 달리 백제는 게임의 룰을 바꾸었다. 무역업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보해 나갔던 것이다.

백제에 팽창이 저지된 고구려 소수림왕, 일대 개혁을 단행하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모용씨의 전연에게 큰 타격을 입었고, 심지어 백제와 평양성 전투에서 왕까지 전사했다. 이로써 고구려의 팽창이 서와 남에서 동시에 저지되었다. 이런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국가 체제의 전면적 개혁이 시급했다. 이에 17대 소수림왕(371~384)이 체제 정비에 나선다. 먼저 372년에 불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불교를 수용한 소수림왕은 태학(太學)도 설립했고, 다음 해에 율령을 제정했다.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정비되자 곧이어 전성기가 시작된다. 소수림왕의 동생 고국양왕(384~391)이 선왕이 했던 국가 정비의 치적에 힘입어 요동을 놓고 후연(384~409)의 모용씨에게 적극적 공세를 폈으며 백제와도 격돌을 벌였다. 태조대왕에 이어 국가 체제를 더욱 정교하게 정비한 고구려는 양방향에서 동시에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생긴 것인데, 이 능력을 잘 활용한 왕이 다음에 살펴볼 19대 광개토대왕(391~413)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5세기의 문을 열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우리 역사상 최대로 넓혔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할 때 무조건 덤벼든 것이 아니다. 영토의 크기보다 전략적 요충지에 초점을 두어 요동 지역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고구려가 요동 지역에 집착한 이유는 옛 고조선의 땅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요하의 동쪽에 이르는 요동의 넓은 평야는 농사짓기가 적합했고, 철과 석탄도 풍부해 농기구와 무기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관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의 말발굽은 남부에도 미쳐 임진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참고로 광개토대왕이나 근초고왕, 진흥왕 등 고대국가의 뛰어난 왕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현장에서 후퇴해 있지 않고, 일상에 열중하면서 창조적인 전략을 추출해 냈다는 점이다. 현장을 등한시한 채 구중궁궐에 앉아 보고서에 의존한 사전분석과 의도된 전략계획은 현장의 흐름과 겉돌 수 있다. 그것은 문제의식 없는 전략이다. 그것보다는 현장에서 시행착오 등을 거치며 내리는 창발적 전략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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