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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야욕 아베신조를 말하다

이춘규 지음 | 서교출판사



일본의 야욕 아베 신조를 말하다

이춘규 지음

서교출판사 / 2017년 4월 / 348쪽 / 15,000원





아베 신조 가(家)의 역사적 배경



아베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막부 말기 들어 변혁기에 접어들자 조슈의 반막부 감정이 부글부글 끓다가 일순간에 폭발하면서 메이지유신의 핵심동력 역할을 했다. 이때 타도 막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사람이 아베 신조가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1830~1859)은 일본인에겐 메이지유신 설계도의 밑그림을 그린 선각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요시다 쇼인에 대한 아베 신조의 존경심도 대단하다. 아베는 고향사람인 요시다 쇼인의 묘를 매년 중요한 순간마다 참배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등 자신의 정치사상의 준거로 삼는 듯하다. 요시다 쇼인은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라며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해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제국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세워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초대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 조선침탈 주역들을 길러냈다. 한국인에게 요시다 쇼인은 일본 우익 세력의 원조로 여겨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요시다 쇼인은 1830년 조슈 번 하급 무사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 군사학자이자 당주인 숙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어린 시절 숙부에게 병법을 배웠고, 11세 때에는 번주에게 병법을 강의할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1850년 규슈에 가서 병법을 연구했고, 이듬해에는 에도에서 사쿠마 쇼잔으로부터 서양 학문과 군사학을 배웠다. 1853년 7월 에도만(도쿄만) 우라가 항에 미국 동인도 함대 소속 사령관 페리 제독이 이끄는 4척의 흑선이 나타났다. 페리 제독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는 국서를 전달한 후 떠났고, 다음 해 다시 요코하마에 상륙했다. 그때까지 나무로 건조한 선박이나 유럽의 상선만 보아 왔던 일본인에게 초대형 대포를 장착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증기선은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페리의 내항 이후 일본은 서양 문물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근대 국가의 틀을 갖춰 나갔다.

쇼인은 1854년 페리 함대의 압박으로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자 현 시즈오카 현 시모다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군 함선에 승선하여 밀항을 시도했다.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국법을 어긴 죄로 노야마 감옥에 수감되었다. 14개월간 감옥에서 생활하면서 쇼인은 『유수록』을 집필했다. 이 책에는 그가 밀항하려던 이유와 그 배경이 된 사상이 담겨 있다. 특히 무력을 갖추어 주변국을 공략해야 한다는 쇼인의 주장은 훗날 정한론과 대동아공영권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일본을 위기에서 구하려면 막번 체제에 기대서는 안 되며, 민중이 단결하고, 조속히 무력 준비를 갖추어 훗카이도를 개간하여 제후로 봉하고, 류큐(오키나와)를 다른 번과 동등하게 취급하며, 조선을 공격하여 인질과 공물을 바치게 한 후 만주와 대만, 루손 등까지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미국의 강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구미 열강과의 마찰을 피하고, 서구식 무기를 도입하여 그들과의 교역에서 입은 손실을 인근 만주나 조선 등을 침략해 되찾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후 일본이 그대로 실현했으니, 그가 얼마나 우리나라에 패악을 끼쳤는지 짐작된다.

쇼인은 학문을 닦고,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을 위기에서 구할 방법을 강구했다.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모아 일본의 위기와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던 그는 출옥 후 고향집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세워 젊은 개화 지도자들을 길러 냈다.

1858년 막부는 천황의 칙허 없이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각지에서 반막부운동이 일어났다. 막부는 이들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을 일으켜 100여 명 이상의 인물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시켰는데, 이때 쇼인도 체포되었다. 쇼인은 서양 오랑캐에게 일본이 굴복한 것은 국체가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으로, 천황의 친정이 이루어지던 고대에는 국체가 온전하였으나 무인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명나라 조공무역을 하는 등 국체가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 때문에 쇼인의 쇼카손주쿠는 존왕양이 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막부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결국 쇼인은 에도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29세 젊은 나이였다. 그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문하에서 이토 히로부미,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등 세 명의 총리와 여섯 명의 장관이 배출되는 등 메이지유신의 지도자들이 탄생되었다. 그 중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정미 7조약을 체결한 후 쇼인의 무덤에 이를 고했으며, 아베 신조 총리도 수차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쇼인을 꼽을 정도로 근대 이후 일본의 정치계에 그가 끼친 영향력은 그 누구보다 크다. 그의 위패는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신위 제1호로 모셔져 있다.



아베의 출생



아베의 출생

아베 신조는 1954년 9월 21일 당시 마이치니신문 기자이던 아베 신타로와 그 아내 요코의 차남으로 도쿄도에서 태어났다. 아베의 남동생도 있지만, “세 번째도 아들이면 친정인 기시가에 양자로 보내주겠다”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 곧바로 외할아버지 기시 총리의 큰아들에게 양자로 보내졌다. 3형제 중 둘째라서 형이나 동생보다 관심을 적게 받는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가족들, 특히 정치활동에 바쁜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강하게 고집을 부리곤 했다고 한다. 본적지는 아버지, 할아버지의 고향인 야마구치 현 오쓰 군 유다니초(현 나가토시)이다.

아버지 쪽 혈통, 즉 할아버지는 중의원을 지낸 아베 간이다. 아버지 신타로는 외무상을 지낸 정치인이다. 외가 쪽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물론 그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도 일본 총리를 지냈다. 한 마디로 명문 정치가 일족이었다. 아베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는 정치가 가깝게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집안의 정치적 자산을 가장 충실히 이어받았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형에 비해 그는 어려서부터 “나는 아버지를 이어 정치를 하겠다.”고 자주 말하곤 해 기시 전 총리나 아버지 신타로의 정치적 응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급서하자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 기반과 지역구, 후원회 등 이른바 3반(지반, 간판, 가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를 더욱 확장했으니 반드시 금수저 덕만은 아닌 듯하다.

물론 그가 전후 최연소, 최초의 전후세대 총리 등 각종 기록을 세우며 52세이던 2006년 처음으로 총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시 총리나 아베 신타로 외상 등 아베가의 신세를 지지 않은 일본 자민당이나 야당 정치인이 드물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배경이 작용했다.”는 평을 들을 만큼 그의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었던 집안이 있었다.

일본 정계의 대모, 모친 아베 요코

아베 신조의 어머니 요코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장녀,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의 아내, 정치가 아베 신조와 가시 노부오 등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특히 아베 일가의 선거 출마나 역할 분담 등 정치적 연결고리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친정아버지 기시와 시아버지 아베 간으로부터 두 아들까지 3대에 걸치는 정치일가 기시ㆍ아베가의 대모, 오랜 세월 자민당 주요 파벌 가운데 하나인 세이와정책연구회 소속 의원 부인들의 리더를 맡아 정계에도 신봉자가 많은 ‘정계의 대모’로도 칭해진다.

요코는 기시 노부스케ㆍ요시코 부부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부스케가 식민지 만주국 정부에 부임중(1936년~1939년)이었을 때에는 나카노 집에서 외할머니가 길렀다. 2차 대전 말기 일본 정부와 군부는 여성과 노약자 등을 도쿄에서 지방으로 소개시켰다. 요코도 야마구치은행 다부세 지점에서 근무했다. 1949년 도쿄로 귀환해, 1951년 5월에 훗날 중의원이 되는 신타로와 결혼했다. 신타로와의 사이에 아들 3명을 낳았다. 1953년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야마구치 2구에 입후보했을 때 처음으로 선거 지원을 했다. 그 후 기시는 외무상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기시의 정계 은퇴 후 요코는 남편 아베 신타로의 선거구(야마구치1구)에서 지역구 활동을 지휘했다. 그 후에도 역시 야마구치 현이 지역구인 두 아들의 선거를 적극 지원했다.

요코는 현재 도쿄도 시부야구 도미가야에서 자신이 소유한 맨션에 거주한다. 총리공저로 들어간 아베 신조 부부도 같은 맨션의 다른 방에 살고 있다. 현재도 국제부인복지협회 모금위원, 아카마진구숭경회 회장 등 다수 단체의 직책을 맡고 있다. 요코의 정치 인연은 화려하다. 2003년 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아직 49세의 아베 신조를 자민당 간사장에 발탁했다. 그러면서 신조의 어머니 요코는 3대에 걸쳐 집권 자민당 간사장을 배출하는 전설이 되었다.

요코의 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막 결성된 자민당 초대 간사장(1955년 11월), 남편 아베 신타로는 다케시다 노보루 내각의 간사장(1987년 10월)이었으니 아버지와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3대를 계속해서 집권 자민당의 간사장을 배출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간사장은 정당의 사무총장이다. 특히 자민당 간사장은 우리나라 정당의 사무총장보다 권력이 세다. 총재 다음이지만 인사와 예산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고, 특히 일본 최고의 정보력으로 소속 의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막강한 간사장을 3대에 걸쳐 배출한 것은 전대미문이었다. 아베 신조가 간사장이 되었을 때 요코가 전한 일화는 유명하다. 가사도우미가 달려와서 큰 목소리로 “신조씨, 간사장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요코는 곧바로 믿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라는 것이 마지막 순간에 무엇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조심성 때문이다. 그래서 정식으로 결정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했다.

전후 최대의 정치투쟁을 견뎌낸 기시의 딸로서, 그리고 아들 신조의 정치사령탑으로서 각오를 헤아리게 하는 말이다. 더욱이 요코는 “신조가 간사장이 된다고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신조의 건강 문제였다”고 말했다. 신조가 업무 강도가 센 간사장직을 이겨낼까 걱정해서다. 신조가 고베제강 재직 시절에, 그리고 정치가가 되고 나서도 한 번 입원한 적이 있음을 요코는 상기했다. 아베 신조가 간사장의 격무를 견디어낼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신조의 건강에 대한 요코의 불안은 들어맞았다. 2006년 9월 신조가 총리에 오른 뒤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상의 자살이나 후임 아카기 노리히코의 사무소 비용 문제에 의한 사임 등이 잇따르자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최종적으로 궤양성대장염을 이유로 총리를 사임해야만 했다.

요코는 자신의 책을 통해 “신조는 아베 간, 아베 신타로의 좋은 피와 기시 노부스케의 좋은 피, 그리고 목숨을 걸고 일을 맞이하는 엄격함 등이 있다. 책으로 배운 것과 다르게 가까운 데서 공기를 흡입하듯 자연스럽게 정치를 체득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신조가 아버지 신타로를 닮았는지, 외할아버지 기시를 닮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정책은 할아버지를 닮고, 성격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이 평가는 아베 신조의 근원을 파악하는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되고 있다.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급해서 연설을 할 때 말이 빠르다고 한다. 요즘은 비교적 천천히 연설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처음 정치가가 되었을 때는 말이 지나치게 빨라서 나이 드신 분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라는 지적을 받았다. 아들 신조의 정책이 기시 노부스케를 닮았다는 어머니 요코의 지적은 아베 신조의 정치노선을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분석이라는 평을 듣는다. 요코는 “남자는 뭔가 한다면 정치가. 정치가가 된다면 총리를 목표로 해야 한다.”라는 말을 가끔 했다고 한다.

‘쇼와의 요괴’라는 평을 듣는 기시의 딸이자 외무상을 지낸 신타로의 부인, 총리를 두 번씩이나 하는 아들 신조의 어머니인 요코도 가정에서는 며느리를 둔 여성에 불과하다. 큰 문제는 없지만 대중매체에서는 요코와 개성이 강한 재벌집 딸 출신 아키에와의 고부갈등을 심심찮게 전하곤 한다. 시어머니는 깐깐하고 며느리는 할 말은 다 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더욱더 고부갈등이 불가피하다는 분석도 따른다. 이런 두 여자 사이에 끼어 아들이자 남편인 아베 신조 총리는 괴로워한다고 2014년 3월 일본의 대중지 《주간현대》는 ‘고부전쟁 고심하는 아베 총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아베 총리 부부가 고부갈등으로 불화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아키에와 깐깐한 시어머니 요코는 오랜 기간 물과 기름 관계였다고 한다. 가정 내 야당을 자처하는 아키에 부인 아닌가. 아키에는 남편의 정책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편에 철저히 순종하는 일반적인 일본 여성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페이스북 활동도 많이 한다. 그녀는 한류팬이기도 해 한일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며느리 아키에를 누구보다도 달갑지 않게 보는 이가 바로 신조의 어머니 요코다. ‘언제나 세 발짝 물러서서 남편의 그림자를 밟지 않아야 한다’는 자세로 살아온 요코 여사에게 아들 행보에 당당하게 제목소리를 내는 며느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본 제과회사 모리나가 사장의 장녀인 아키에가 아베 집안에 시집온 것은 1987년. 당시 아베 총리는 순수하고 자유분방한 그녀의 성격에 홀딱 반했지만, 시어머니 요코는 결혼 초부터 “치마가 너무 짧다.”고 지적하는 등 매사가 자유분방한 재벌가 출신 며느리를 마뜩찮게 봤다. 두 사람의 갈등은 2012년 가을 아베 총리가 재취임하기 직전 증폭됐다. 아키에 여사가 도쿄에 선술집 ‘우주(UZU)’를 개업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남편이 총리를 목표로 하는 중요한 순간에 아내가 술집을 내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격노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에가 뜻을 굽히지 않고 개업하자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낀 아베는 일본 영화 제목처럼 ‘오토코와 츠라이요(남자는 괴로워요)’ 처지가 되곤 했다. 흔히 일본의 정치 명문가로 불리는 기시, 아베, 사토 가문은 오랜 세월 서로 양자를 주고받으며, 때로는 정략결혼으로 세습정치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요코는 가문의 혈통유지를 중시한다.

요코와 아키에 간의 고부갈등이 아베 총리 부부에게 자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이도 많다. 2006년 아키에는 자신의 불임 때문에 아이가 없음을 언론에 공개하며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어린 시절 단란한 가정을 부러워하며 유난히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했다는 아베 신조 총리의 한 지인은 “당시 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 기시를 자랑스러워하면 엄마가 기뻐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기시를 존경한다고 자주 말했다. 어쩌면 아베가 A급 전범 용의자인 기시를 존경하게 된 배경과 총리로서 외조부가 유일하게 이루지 못했던 헌법 개정을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현 정권의 목표로 삼은 것은 어쩌면 어머니 요코를 향한 마음일지 모른다.”고 분석했다.



아베의 학력 및 이력



미국 유학

아베 신조 총리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그가 우리나라 행정고시인 고급 공무원 시험을 통해 관료가 된 다음 정치가의 길을 가길 원했다. 그러나 아베는 시험 치르는 것을 싫어해 이를 외면했다. 결국 관료를 거친 뒤 정치가를 시키려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영어나 미국 문물을 접할 기회를 주겠다며 미국 유학길에 오르도록 했다. 1977년 봄에 도미하고 캘리포니아주 헤이워드의 영어 학교에 다닌 뒤 가을에 남캘리포니아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아 1978년에서 1979년까지 정치학을 배웠다. 그러나 아베는 수료도 졸업도 하지 못했다. 그 시절 정에 굶주린 아베가 향수를 떨쳐내지 못해 어머니나 가족들에게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자주 걸어 전화비가 한 달에 10만엔을 넘는 달이 많자 화가 난 아버지 신타로가 일본으로 귀국시켜 버렸다.

아베 총리는 연설을 할 때 유난스러울 정도로 영어 단어를 많이 쓴다. 아베가 미국 유학을 한 경험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평범한 대학을 나온 학력콤플렉스 영향”이라는 지적도 있다.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 아버지 등 집안 어른들이 일본 최고 명문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수재들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도쿄 시내 외곽에 있는 사립대 세이케이 대학을 나왔다. 2006년이나 2012년 출범한 아베 내각 인물평을 할 때 일본 언론들은 “아베 내각에는 일본 최고 명문 도쿄대학 출신이 적다.”는 지적을 하고는 했다. 2015년 10월 발족한 3차 아베 내각에 도쿄대학을 졸업한 각료 역시 적었다. 이로 인해 아베 총리는 도쿄대학 출신과 엘리트 관료 출신들을 싫어한다는 평을 듣는다. 자신에게 도쿄대학 진학을 권했던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인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라는 해석도 있다. 아베 자신이 이에 대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자민당 간사장 시절에 그는 인터뷰를 통해 외할아버지가 대단한 수재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고, 학력 문제에 대한 부담이 있었음을 토로했다. 아베 총리는 자신보다 똑똑한 정치가를 주변에 두고 싶어 하지 않으며, 도쿄대학 수석 졸업생들이 주름잡는 재무성은 특히 싫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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