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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

김영조 지음 | 인물과사상사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

김영조 지음

인물과사상가 / 2017년 4월 / 328쪽 / 16,500원





제1장 국악과 춤



양반을 거침없이 비꼬는 말뚝이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예에에. 이 제미를 붙을 양반인지 좆반인지 허리 꺾어 절반인지 개다리 소반인지 꾸레 이 전에 백반인지 말뚝아 골뚝아 발 가운데 쇠뚝아 오뉴월에 말뚝아 잔대뚝에 메뚝아 부러진 다리 절뚝아 호도엿 장사 오는데 할애비 찾듯 왜 이리 찾소?”

한국 전통탈춤의 하나인 봉산탈춤 제6과장 <양반과 말뚝이 춤>에서 양반이 말뚝이를 찾자 말뚝이가 양반들을 조롱하는 사설입니다. 옛날 양반이나 벼슬아치들이 타는 말을 다루는 사람을 말구종이라 했고, 이들이 머리에 쓰는 것을 말뚝벙거지라 했습니다. 말구종이 말뚝벙거지를 썼다 해서 ‘말뚝이’라고 부른 듯합니다.

한국 탈춤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말하라면 당연히 말뚝이입니다. 말뚝이는 소외받는 백성의 대변자로 나서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대사로 양반을 거침없이 비꼽니다. 특히 말뚝이는 양반을 희화화하는 것을 넘어서 봉건 질서까지 신랄하게 비판해대지요. 그래서 양반들에게 고통받고도 울분을 배출할 데가 없던 이들은 탈춤에서 말뚝이를 보고 신이 납니다.

거문고 명인 백아는 왜 거문고 줄을 끊었을까?

거문고 타던 백아는 그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는 종자기가 죽고 나자 세상이 텅 빈 듯하여 이제 다 끝났다 싶어서 허리춤의 단도를 꺼내고 거문고 다섯줄을 북북 끊어버리고 거문고 판은 팍팍 뽀개 아궁이의 활활 타는 불길 속에 처넣어 버리고 스스로 이렇게 물었겠지. ‘네 속이 시원하냐?’ / ‘그렇고말고.’ / ‘울고 싶으냐?’ / ‘울고 싶고말고.’- 신호열ㆍ김명호 옮김, 『연암집』



연암 박지원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한양 벗들의 안부를 묻는 편지 일부입니다. 특히 이덕무가 죽고 나서 백아처럼 홀로 남은 박제가가 걱정이 되어 쓴 것입니다.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친한 벗이 죽었을 때 백아(중국 춘추전국 거문고 명인)의 심정 같은 박제가의 심정을 박지원은 마치 곁에서 본 듯 절묘하게 묘사합니다.

종자기는 백아가 산을 생각하며 연주하면 “좋다, 우뚝하기가 마치 태산 같구나.”라고 하였고, 흐르는 물을 마음에 두고 연주하면 “좋다, 도도양양하기가 마치 강물 같구나.”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백아의 음악을 뼛속 깊이 이해하던 벗이 죽었을 때 어찌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판을 빠개지 않을 수 있을까요? 종자기처럼 뛰어난 연주는 못해도 남의 음악을 깊이 새겨들을 줄 아는 사람을 ‘귀명창’이라고 합니다. 음악 연주자는 곁에 자기 음악을 뼛속 깊이 사랑해주는 귀명창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역신을 쫓는 처용무

서울(오늘날 경주) 밝은 밤에 밤늦게 노니다가 /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 가랑이가 넷이도다 / 둘은 나의 것이었고 / 둘은 누구의 것인가? / 본디 내 것이지만 /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처용가>입니다. 이 처용가를 바탕으로 한 궁중무용 ‘처용무’가 있습니다. 처용무는 원래 궁중 잔치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평온을 빌거나 음력 섣달 그믐날 나례에서 복을 빌면서 춘 춤이었지요.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에 보면, 동해 용왕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에게서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가 나옵니다.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는 동서남북과 가운데의 오방을 상징하는 흰색ㆍ파랑ㆍ검정ㆍ빨강ㆍ노랑 옷을 입은 남자 5명이 추지요.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처용무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이 다섯 사람으로 구성되었고, 성종 때에는 더욱 발전하여 궁중의식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1920년대 말 이왕직 아악부가 창덕궁에서 공연하기 위해 재현한 것을 계기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요. 처용무는 가면과 옷ㆍ음악ㆍ춤이 어우러진 수준 높은 무용예술로,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그 맥을 즈믄 해(천 년) 넘게 이어오고 있습니다.



제2장 그림



서양에는 고흐, 동양에는 천재화가 최북

“저런 고얀 환쟁이를 봤나. 그림을 내놓지 않으면 네놈을 끌고 가 주리를 틀 것이야.”“낯짝에 똥을 뿌릴까보다. 너 같은 놈이 이 최북을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낫겠다.”최북이 짐을 퇴퇴 뱉고는 필통에서 송곳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양반 앞에서 송곳으로 눈 하나를 팍 찌르는 것이 아닌가. 금세 눈에서는 피가 뻗쳤다. 비로소 그가 놀라 말에 오르지도 못한 채 줄행랑을 쳤다.

민병삼 장편소설 『칠칠 최북』에 나오는 대목인데 최북이 왜 애꾸가 되었는지를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은 탁월한 그림으로 양반과 세상에 맞섰던 천재화가 최북이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를 기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북 탄신 300주년 기념전시’를 열었지요. 최북이 그린 산수화와 화조영모화(꽃ㆍ새ㆍ짐승을 그린 그림), 인물화 23점을 소개하여 그가 왜 ‘최산수’, ‘최메추라기’라고 불렸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호응박토도>는 매의 부라린 눈, 붉은 혀가 도망가는 토끼를 당장이라도 낚아챌 것만 같은 긴장감이 넘치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는 어쩌면 백성을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달려드는 양반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닐는지요.

자신의 귀를 자른 서양화가 고흐는 알아도 자신의 눈을 찌른 한국의 천재 화가 최북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한국인이라면 “천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라고 외치면서 몸을 날려 못으로 뛰어들었던 자존심의 화가 최북의 그림을 한번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사임당 딸이 그린 <매창매화도>

화뿌연 매화꽃은 더욱 빛나고

새파란 대나무는 한결 고와라

난간에서 차마 내려가지 못하나니

둥근 달 떠오르기 기다리려 함이네



선조 때 여류시인 이옥봉의 「등루」입니다. 매화는 예부터 우리 겨레가 사랑해온 꽃입니다. 매화를 사랑한 여성으로 신사임당의 딸인 이매창이 있는데, 그녀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뛰어난 매화 그림을 그렸지요.

강릉 오죽헌 율곡기념관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이매창의 ‘매화도’가 전해옵니다. <매창매화도>로 불리는 이 그림은 가로 26.5cm, 세로 30cm의 종이에 그린 묵화입니다. 굵은 가지와 잔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은은한 달빛 아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는 매화를 실제로 보는 듯하며, 깔끔한 분위기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요즈음 피는 매화는 예쁜 꽃을 보기 위해 여러 품종을 접붙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매화라도 야생의 멋을 흠씬 풍기는 매화가 화엄사 길상암 앞 급경사지 대나무 숲에 자라고 있어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원래 매화나무 네 그루가 있었으나 세 그루는 죽고 이제 한 그루만 남았지요. 2007년 10월 8일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된 귀한 매화입니다. 이 매화나무는 속칭 ‘들매화’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이 재배한 매화보다 작으나 꽃향기는 오히려 강한 것이 특징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예부터 시ㆍ서ㆍ화에 자주 나오는 매화가 지금 우리 곁에서 한창 그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를 뽐내고 있습니다.

풍류,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에 취하기

예전 선비들은 풍류(風流)를 즐길 줄 안다고 했습니다. 풍류란 무엇일까요? 바람 ‘풍’ 자와 물흐를 ‘류’ 자를 합친 ‘풍류’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 또는 ‘운치가 있는 일’로 풀이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학자는 ‘속된 것을 버리고 고상한 유희를 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또 ‘음풍농월’ 곧 ‘맑은 바람과 달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즐겁게 노는 것’으로 보기도 하지요.

옛 그림을 살펴보면 선비들 풍류의 삶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는 천하가 알아주는 멋진 풍류객이었는데, 꽃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거문고나 젓대를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풍류는 <포의풍류도>라는 그림에서 잘 드러나지요. 또 작자를 알 수 없는 <후원아집도>라는 그림에서는 연꽃 핀 네모난 연못이 있는 뒤뜰에 멍석을 깔아 놓고 바둑을 두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선비들에게는 바둑을 두는 것도 또 하나의 풍류 즐기기였지요. 예나 지금이나 열심히 일하는 것 못지않게 잘 노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작은 일에 생각이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분방해야 하며, 뜻이 맞는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려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옥황상제도 홀린 금강산의 절경

옥황상제가 금강산의 경치를 돌아보고 구룡연 기슭에 이르렀을 때, 구룡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고는 관을 벗어 놓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때 금강산을 지키는 산신령이 나타나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물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큰 죄다.”라고 말하고 옥황상제의 관을 가지고 사라졌다. 관을 빼앗긴 옥황상제는 세존봉 중턱에 맨머리로 굳어 바위가 되었다.

금강산에 전해지는 설화입니다. 금강산이 얼마나 절경이었으면 옥황상제마저 홀렸을까요? 심지어 중국인들조차 금강산에 가보는 게 소원이라 할 정도였지요. 《태종실록》 4년(1404년) 9월 21일 기록에는 태종이 이렇게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속언에 말하기를, 중국인에게는 ‘고려 나라에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원이라’ 하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그 금강산을 가장 잘 그린 그림으로 겸재 정선이 금강산을 멀리서 한 폭에다 넣고 그린 <금강전도>가 있으며, 단발령에서 겨울 금강산을 바라보고 그린 <단발령망금강>도 있지요. ‘단발’은 머리를 깎는다는 뜻인데, 단발령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에 반해 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다는 뜻이 들어 있지요. 또 이 그림에서 인간이 사는 속세는 번뇌와 더러움을 상징하듯 짙은 먹으로 그렸고, 그와 대비되는 건너편은 맑고 깨끗한 신선의 세계를 나타내듯 티끌 하나 없이 하얗고 맑게 그렸습니다. 마치 신선의 세계를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림입니다.



제3장 도자기와 탑



연꽃을 형상화한 아름다운 청자 주전자

2013년 2월 12일 미국 브루클린 박물관의 수장고에서 조선시대 임금과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투구가 공개되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고려청자의 걸작품인 ‘청자 연꽃 모양 주전자’도 함께 공개되었지요.

이 청자 연꽃 모양 주전자는 몸체와 뚜껑이 연꽃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또 뚜껑 손잡이는 아직 피지 않은 연꽃 봉오리를 표현했지요. 그 옆에는 백토로 나비를 만들어 붙여서 마치 나비가 연꽃에 앉은 듯합니다. 손잡이와 굽 부분은 대나무무늬를 형상하여 더욱 아름답습니다. 이 주전자 제작기법은 주로 돋을새김(양각)과 오목새김(음각)으로, 상감기법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12세기 중반 무렵에 빚은 것 같습니다.

브루클린 박물관은 미국 7대 미술관 중 하나로 특히 고대 이집트 미술 수집품이 유명합니다. 1974년부터 한국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국보급의 <아미타삼존도> 등 우리 문화재 665점을 소장하고 있지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곳 브루클린 박물관을 네 차례 조사한 끝에 2006년 『미국 브루클린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라는 도록을 펴냈는데 「도판」편에 주요 문화재 163점의 컬러 사진을 수록했습니다. 우리 겨레의 뛰어난 미술품인 청자 연꽃 모양 주전자가 남의 나라에 나가 있어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부끄러움으로 눈물 흘리는 백자 무릎 모양 연적

하늘 선녀가 어느 해 젖가슴 한쪽을 잃어버렸는데

오늘에 우연히 문방구점에 떨어졌다네

나이 어린 서생들이 앞다퉈 손으로 어루만지니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눈물만 주르륵 흘리네



이름 모를 한 시인이 쓴 연적에 관한 한시입니다. 원래 벼루에 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쓰임새로 썼던 연적을 선녀의 젖가슴으로 표현하고, 젊은 서생들의 손길에 부끄러워 눈물을 흘린다고 한 묘사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자 무릎 모양 연적’은 아무런 그림도, 무늬도 없는 그야말로 순백의 백자입니다. 그러나 백자 달항아리가 아무런 그림도 조각도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처럼, 이 백자 연적도 보는 이를 한참 동안 붙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위쪽에는 물이 들어가는 입수구, 왼쪽 약간 위의 튀어나온 부분이 물을 벼루에 붓는 출수구지요. 이 모양을 보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고 최순우는 ‘한복을 입은 젊은 처자가 한쪽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은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벼루에 물을 따르는 연적 하나에서도 옛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밥사발도 황금으로 만들어 먹던 신라인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화려한 황금문화를 꽃피운 나라였습니다. 8세기에 나온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는 신라를 ‘눈부신 금은의 나라’라고 기록했으며, 또한 966년 아랍의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는 “신라에서는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라고 했습니다.

신라에서 금이 처음 등장한 때는 4세기 후반으로 추정합니다. 이 무렵 신라는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고,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했으며,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전진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을 신라 황금문화의 전성기로 보는데, 이 기간에 조성한 신라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매우 정형화된 꾸미개(장신구)가 출토됩니다.

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대체로 금관을 비롯하여 허리띠, 귀걸이, 팔찌, 반지, 목걸이, 금동신발 등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황금 제품은 임금이나 왕족, 귀족이 신분을 과시하고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주로 썼습니다. 이러한 황금문화는 처음에는 신라 중앙(경주)에서만 사용했으나, 황남대총이 만들어지는 때에 이르러 지방으로 널리 퍼집니다. 국립경주박불관에서는 신라인이 썼던 밥그릇을 비롯하여 목걸이, 팔찌 따위의 금제품을 수두룩이 전시하여 당시 신라가 ‘황금나라’였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제4장 민속품



사랑방에 꼭 있었던 선비의 애장품, 고비

조선시대 선비의 사랑방에는 책을 놓고 읽거나 붓글씨를 쓰던 서안, 사방이 트여 있고 여러 단으로 된 사방탁자, 여러 권이 한 질로 된 책들을 정리ㆍ보관하는 궤인 책궤, 안방의 보료 옆이나 창 밑에 두고 편지ㆍ서류나 일상용 기물을 보관하는 문갑 같은 가구가 꼭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비들이 아끼던 ‘고비’도 있었습니다. 고비는 벽에 걸어놓고 편지나 두루마리 같은 것을 꽂아두는 실내용 세간을 말합니다. 가벼운 판자나 대나무 같은 것으로 만드는데, 위아래로 길게 내려 걸도록 했지요. 등판과 앞판 사이를 6~9cm쯤 떼어 2~3단 가로질러 놓아 편지를 넣어두도록 했지요. 또 두꺼운 종이로 주머니나 상자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종이띠를 멜빵 모양이나 X자형으로 벽에 붙인 소박한 형태도 있었습니다. 고비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가구입니다.

문갑과 책장이 하나인 목가구, 문갑책장

일상과 함께했던 목가구, 곧 소목은 우리 겨레의 슬기로움과 아름다움이 담겨 예술품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지내면서 그 훌륭한 목가구, 특히 장롱 문화를 버리고 일본의 보잘것없는 ‘차단스’를 들여다 우리말처럼 씁니다. 또 골동품을 수집하는 외국인이 시골에 가서 오래된 목가구와 양철 캐비닛을 맞바꾼 뒤 그 목가구를 외국에 팔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목가구의 귀한 값어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양철 캐비닛과 차단스에 주인 자리를 내주고 한참 뒤에야 후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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