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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간다움을 말하다

송용구 지음 | 평단



인문학, 인간다움을 말하다

송용구 지음

평단 / 2017년 2월 / 240쪽 / 14,000원





인생의 궁극적 가치는 상생이다



인간의 기계화를 비판한 작가, 카프카

20세기 초반에 독일어권 지역의 소설을 세계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체코 프라하 출생의 유대인 프란츠 카프카입니다. 카프카는 세상을 떠나기 전 절친한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작품을 모두 폐기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브로트는 친구의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카프카의 사후 막스 브로트의 주선으로 출판된 소설들은 수많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카프카의 작품은 인간의 ‘소외’와 ‘실존’의 문제를 다룬 대표적 문학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특히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전범으로 칭송되어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 사르트르와 카뮈. 현대 프랑스 문학의 대들보 역할을 했던 이 두 작가에게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카프카의 문학세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리 현상들이 페스트처럼 번져가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생각에 의지하여 어떤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길이 될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실존’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물질 만능의 풍조로 인해 소외의 아픔을 겪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가는 21세기의 한국 사회에도 카프카의 작품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만 40세에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키를링의 호프만 요양소’에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프라하는 카프카의 본향이자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는데 독일어권 지역의 작가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의문을 품는 독자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동유럽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유럽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의 시절부터 수백 년간 게르만 민족의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식민통치 기간에 게르만 민족의 언어인 독일어가 식민정책의 하나로 동유럽 지역에 보급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말살정책’의 목적으로 일본어가 한국인들에게 주입된 양상과 같습니다. 체코, 폴란드, 리투아니아, 헝가리 등 동유럽의 수많은 나라가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게르만 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말해줍니다. 식민 지배의 오랜 세월 동안 동유럽 지역에 뿌리를 내린 독일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독일어는 슬라브인들의 토속 언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언어입니다. 게다가 카프카의 생존 당시에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게르만 민족의 나라로 독일어를 국어로 사용합니다.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작가 카프카가 일평생 독일어로 소설을 창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카프카는 1901년 유서 깊은 명문 프라하 대학교에 입학하여 지성을 쌓아갑니다. 1906년에는 프라하 대학교의 법학박사 학위를 받아 법학 전문가의 위치에 오릅니다. 카프카의 소설 중에서 『선고』와 『심판』처럼 ‘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것은 ‘법학 전공’이라는 작가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대학교수의 길을 택하지 않고 샐러리맨으로서 청춘을 보냈습니다. 보험회사에서 1년, ‘노동자 재해 보험국’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던 경험은 그의 대표적 소설 『변신』의 줄거리를 구성하는 체험적 요소가 되었습니다.

특히 돈과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비인간적 ‘소외’ 현상이 카프카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를 형성하게 된 것도 ‘보험’ 관련 직장생활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직장인들의 고충과 애환을 카프카만큼 깊게 이해하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직업이 회사의 ‘출장 영업사원’이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고민하며 밤을 지새웠던 카프카의 청춘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카프카의 대표작인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갑충(딱정벌레)’으로 변신한 이야기는 만화, 영화,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대중에게 친숙한 교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변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카프카는 ‘알레고리’라는 문학적 기법으로 ‘변신’의 의미를 전합니다. ‘알레고리’란 우리말로는 ‘우의(寓意)’라고 번역됩니다. 요즘에는 번역하지 않고 ‘알레고리’란 낱말을 그대로 표기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우의’란 “어떤 의미를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사물에 빗대어 넌지시 비춤”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른 사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비유는 무엇일까요? 『이솝 우화』에서 볼 수 있듯이 문학작품에서 ‘다른 사물’의 역할을 주로 담당하는 비유는 동물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알레고리’를 ‘우의’보다는 ‘우화적 비유’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을 우화적으로 ‘갑충’에 비유하려는 작가의 궁극적 의도는 무엇일까요? 존엄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임에도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기계나 물건으로 취급받는 ‘소외’의 아픔을 알리려는 것이 아닐까요?

“상대가 늘 바뀌어 결코 오래갈 수 없는 만남과 결코 진실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적 교류 등등. 악마여, 제발 좀 이 모든 것을 다 가져가다오.”라고 절규하는 그레고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보험회사에서 일했던 카프카의 실생활이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레고르는 회사의 순이익을 높여주는 도구의 역할만을 담당합니다. 그레고르는 영업의 할당 ‘실적’을 달성하는 부품의 기능만을 발휘합니다. 그레고르는 가족의 호주머니에 돈을 빼곡이 채워주는 기계의 임무만을 두 손에 장착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비인간적 인생의 절망을 ‘갑충’의 몸짓으로 보여주려는 알레고리의 의도가 갈수록 분명해집니다.

“뭐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깨알같이 작고 흰 반점들로 뒤덮여 있었다.”라는 ‘갑충’의 몸에 대한 묘사가 녹슬어가는 폐기처분 직전의 볼트나 너트를 그려놓은 듯합니다. 인간의 자존감을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지독한 소외감이 갑충의 ‘단단한 껍질’처럼 그레고르의 몸을 휘감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 현실을 폭로하고 비뚤어진 인간성을 고발하기 위해 카프카에게는 알레고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효용의 저울 위에서 쓸모의 눈금으로 읽히는 그레고르

이마누엘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에서 “네 인격 안에 있는 인간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격 안에 있는 인간성까지도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도 사용하도록 그렇게 행위하라.”고 말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했습니다. 칸트의 눈으로 소설 『변신』을 읽는다면 ‘목적’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그레고르의 존재가치가 상품의 가치로 환산되어 유통기한이 정해진 수단으로 취급받는 비인간적 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21세기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리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비극적 현실을 ‘갑충’의 몸짓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탁월한 상상력의 결실이며 기발한 묘사의 기법입니다. 생산의 수익을 올리는 기계로 변해가는 도시인들의 삶을 “생산의 수치밖에 모르는 전자두뇌”라고 비판했던 시인 한스 카스퍼의 쓴소리가 들려옵니다. 카스퍼와 카프카. 두 작가는 인간을 기계부품으로 ‘변신’시키는 악몽 같은 현실을 알레고리의 기법을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동반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목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 유통기한이 정해진 소모품처럼 취급당하는 아픔을 회사에서 겪었다고 한다면 그 상처를 어루만져줄 곳은 가정이 아닐까요?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수익의 증감을 표시하는 그래프의 한 꼭짓점으로 분류당하는 슬픔을 직장에서 겪었다고 한다면 그 모욕감을 위로해줄 손길은 가족의 몫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그레고르는 환멸이 뼛속 깊이 사무칠 정도로 피붙이와 살붙이에 인격을 짓밟힙니다. 그레고르는 회사의 사장에 이어 가족에게도 ‘돈 버는 기계’로 취급당합니다. 그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날부터 이어지는 부모와 여동생의 가혹한 냉대는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로부터 때로는 연민을, 때로는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비인간적 냉대의 이유는 단 하나, ‘돈을 벌지 않으니 이제는 쓸모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 모양으로 흰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져 내릴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버둥거리며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인간답게 살고 싶어도 인간의 자존감을 잃을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소외감이 화자의 말처럼 ‘애처롭게’ 다가옵니다. 존엄성을 지닌 인간의 존재가치가 ‘효용’이라는 저울 위에서 상품과 자본의 가치로 환산되어 ‘쓸모’의 눈금으로 측정되는 비애가 느껴집니다. ‘흉측한 갑충’처럼 인간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그레고르. 그의 인생은 존엄성과 인격을 박제당하여 갑충의 등급 판정을 받은 인간입니다.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신했다는 것은 가족이나 회사의 구성원들과 더 이상 내면적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레고르의 언어와 그들의 언어는 이해의 접점을 도무지 찾을 수 없습니다. 지향하는 인생의 가치가 대립적이고 중요성을 부여하는 영역이 판이하게 다르니까요.

신학, 정치학, 사회윤리학의 융합을 통해 독창적인 가치론을 제시했던 라인홀드 니부어. 그의 눈길로 소설 『변신』을 읽는다면 그레고르의 회사 사장과 가족이 추구하는 ‘가치’를 어떻게 논평할까요? 그레고르의 인생은 라인홀드 니부어에게서 어떤 말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랑과 상생, 그 ‘궁극’의 과녁을 겨누는 인간의 화살

독일계 혈통의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를 아십니까? 영어식 이름으로는 ‘니버’라고 불립니다. 그는 개신교 목사이면서도 사회윤리학의 전문가입니다. 니부어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도 익숙한 책입니다. 니부어는 이 책에서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적’을 생명, 자유, 평등, 정의, 사랑, 상생, 나눔, 공동의 행복 등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 목적을 ‘궁극적 가치’, ‘본질적인 도덕적 가치’, ‘보다 더 포괄적인 가치’라고 이름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궁극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직접 도구로써 사용되는 것이 있다고 니부어는 말했습니다. 돈(물질), 권력, 명예, 지식, 기술 같은 것들입니다. 니부어는 이들의 이름을 ‘전통에 의해 답습된 도구적 가치’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이 선한 도구의 역할을 해줄 때 인간의 존엄성 같은 ‘본질적인 도덕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고, 사랑과 상생 같은 ‘궁극적 가치’가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치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거나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라인홀드 니부어의 견해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꿈의 길을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다수의 권익을 침해하는 오류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 가치’를 위하여 ‘도구적 가치’를 선용하는 본질적인 윤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부어의 희망이 무색할 정도로 그레고르의 가족과 회사의 사장은 ‘돈’이라는 도구적 가치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물질적 효용성에 의해 인간의 존재가치를 평가하고 자본적 기능성에 따라 인생의 등급을 매기는 물질 만능의 가치관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레고르가 슬픔을 ‘철갑처럼’ 온 몸에 두르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목적적 존재’가 아니라 ‘돈 버는 기계’처럼 도구적 부품으로 이용당하다가 폐기처분이 되듯이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목적적 존재인 그레고르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진실의 노래를 아무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가족의 귀가 닫혀 있는 까닭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 있는 언어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언어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레고르의 염려, 갈등, 고민, 비전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회사에서 반복되는 비인간적 생활의 패턴에 대하여 의논하고 싶어서 마음의 둥지로부터 부모와 여동생에게 날려 보낸 언어의 비둘기는 가족의 편지를 발목에 매달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날개가 잘린 채 대답이 실종된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할 뿐입니다. 그레고르가 애타게 그리워한 것은 가족의 사랑이 아닐까요? 인간의 따뜻한 관심이 아닐까요? 그레고르의 부모와 동생이 아들과 오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물질. 그것은 ‘사랑’이라는 궁극적 가치를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요?

인간의 삶에는 물질적 가치로 대체할 수 없는 행복의 조건들이 많습니다. 가족과의 유대, 친구와의 우정, 이웃과의 소통, 자선과 봉사, 자연과의 상생 등은 물질적 가치로 평가될 수 없는 행복의 조건들입니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관점에서 비평한다면 수많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궁극적 가치’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까맣게 잊고 살기도 하고 애써 외면하기도 합니다. 기술시대의 메커니즘은 인간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생산의 동력과 스피드를 고조시켜 왔으나 오히려 ‘행복’을 깨뜨리는 모순들을 생산하였습니다. 전진과 상승, 생산과 발전만을 추구하느라고 주변 세계를 돌아볼 줄 모르는 현대사회에서 무관심, 단절, 냉대, 소외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풍요와 편리를 누릴수록 행복과 평안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근심과 우울이라는 무거운 병의 무차별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빙하기를 맞은 지구처럼 인간의 가슴에서 감정이 박제되어 갑니다. 더 많은 물질과 더 빠른 기술, 그리고 더 강력한 무기를 소유하기 위해 세계의 곳곳에서 침략과 전쟁과 살육이 끊이질 않습니다. 컴퓨터에 자동으로 입력된 무궁무진한 데이터들이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기이한 문화가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현대인이 탑승한 인생 열차는 ‘본질적인 도덕적 가치’의 레일에서 이미 오래전에 탈선하여 ‘궁극적 가치’의 궤도와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노선을 질주하고 있습니다.

카프카와 니부어는 국적은 달랐지만 20세기 초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나는 ‘인간소외’라는 비인간적 현상을 누구보다도 슬퍼했던 사람들입니다. 도구적 가치로써 선용되어야 할 자본과 물질이 궁극적 가치의 자리를 찬탈하고 오히려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인간의 몸과 정신을 ‘도구적’ 물건으로 악용, 남용, 오용하는 현실을 누구보다도 혐오했던 선각자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책 속에 살아 숨 쉬는 그들의 정신만큼은 궁극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의 뒤바뀐 자리가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을까요? 인간의 활시위를 떠난 ‘가치’의 화살이 사랑과 상생이라는 ‘궁극’의 과녁을 명중시키길 염원하지 않을까요?

소설 『변신』이 발표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물신의 소돔성과 기술의 바벨탑을 향하여 앞만 보고 질주하는 맹목의 집단은 갈수록 팽창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레고르의 ‘변신’은 바이러스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 괴상한 현실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간의 땅에서 더 이상 그레고르의 불행한 ‘변신’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도…….



불의의 도전에 맞서는 인간의 응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인간, 헤르만 헤세

독일의 ‘칼브’에서 태어났지만, 스위스로 망명을 떠나서 그 나라의 ‘몬타뇰라’에 뼈를 묻었던 작가 헤르만 헤세. 그를 20세기 독일어권 지역의 대표적 작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목사인 아버지의 기독교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헤세는 어느 하나의 세계에 구속되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기질을 타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입학한 ‘마울브론 수도원’의 담장을 넘어 탈출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퇴학 처분과 가출이었습니다. 헤세는 이때부터 자유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 길은 작가의 인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 밤을 새우면서 자율적인 판단과 주체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 훗날 그를 독일의 대문호로 성장시키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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