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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여인실록

배성수 외 지음 | 온어롤북스



조선왕조여인실록

배성수 외 지음

온어롤북스 / 2017년 2월 / 266쪽 / 13,800원





시대의 현모양처 ‘신사임당’

시대적 배경: 요즘 뉴스에서는 하루 종일 상식을 뛰어넘는 이야기들이 홍수처럼 밀려나오고, 세상살이가 이렇게 혼란한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어수선하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어수선하고 상식의 가치가 경계를 허물던 때가 있었다. 이른바 사화의 시대이다. 이때는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지가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오로지 나의 권력을 위해 상대를 무너뜨리고 제압해야만 했던 시대다. 지금의 세태와 너무도 닮아 있는 당시의 상황을 보면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들어가면서: 우리 사회는 남녀의 역할 분담에서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오히려 가정의 역할에서도 남성보다 여성의 지위가 우월해지는 과정을 겪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요즘 사회를 ‘신모계사회’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남존여비의 사상이 명명백백하던 조선 사회에서도 모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집안이 존재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이 집안이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신사임당 집안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씻고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사임당 집안: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임당의 집안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 유독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그것은 사임당의 어머니도 친정에서 살았고, 사임당 역시 많은 시간을 친정에서 보낸 사실이다.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시집생활을 하지 않고 친정에서 신혼을 보내며 자식을 낳고 기른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사임당의 집안이 조선 사회에서는 흔치 않았던 모계 중심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친정 중심의 생활권은 집안 내력: 사임당 집안의 이러한 모계 중심 분위기는 사임당의 부모를 봐도 쉽사리 알 수 있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결혼 후 부인을 본가로 데려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16년 동안 한양과 강릉을 오가면서 생활했다. 신명화는 강릉에 사는 이사온(장인어른)의 외동딸과 혼인했는데, 혼인 후 이 씨 부인(사임당의 어머니)은 남편을 따라 시댁이 있는 한양으로 올라와 시부모를 모셨다. 그러던 중 친정어머니가 병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댁의 허락을 얻어 강릉 친정으로 가서 어머니의 병수발에 전념하게 된다. 그 후 신명화가 강릉으로 내려와 함께 한양으로 가자고 했을 때, 이 씨 부인은 자식이라고는 자기 하나뿐인데 늙고 병든 어머니를 뒤로한 채 떠나기 어렵다며, 각자 자신의 부모를 모시자고 제안했고 신명화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16년 동안 한양과 강릉에서 각자 살게 되었고, 신사임당을 포함한 그들의 딸 다섯도 모두 외가인 강릉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사임당 집안의 이러한 친정 중심의 생활은 할아버지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사임당의 외할아버지인 이사온 역시 강릉 사람인 부인 최 씨에게 장가든 후 처가에서 딸을 낳았으며, 따라서 이 씨 부인 역시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이렇듯 신사임당의 집안은 조선시대와 같은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외가를 중심으로 친정과의 유대가 매우 강했던 특이한 집안이었다.

‘현모양처’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 이 글을 쓰면서 주변인들에게 신사임당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물어보면 ‘백이면 백’ 모두 ‘현모양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신사임당이 처음부터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사임당이 살았던 시대에는 예술적 재능이 부각되어 그림과 화가로서 더 유명했다. ‘화가 신씨’로 알려졌던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 사후 100년이 지난 17세기 중반부터이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 정치세력들은 그들이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었던 율곡의 업적을 강화하기 위해 신사임당을 ‘현모’의 대표인물로 만들었다. 즉, 신사임당을 현명한 어머니의 대표명사로 만들어 율곡의 훌륭함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는 식민지배 이데올로기 주입의 일환으로 신사임당이 ‘군국의 어머니’로 둔갑되었고,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는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대통령 부인 육영수를 신사임당에 투영시키려는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는 육영수를 20세기의 신사임당으로 우상화하여 독재정권의 방패막이로 이용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면서 ‘현명한 어머니’의 이미지와 ‘착한 아내’의 이미지를 덧붙여서 오늘날의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신사임당에 대한 평가는 그녀가 갖고 있는 예술적 능력이나 시ㆍ글씨ㆍ그림에 능한 탁월함보다는, 율곡과 같은 훌륭한 대학자를 길러낸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다. 즉, 사임당을 둘러싼 이미지는 그녀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유교적 사회이데올로기, 정치적 관점 등이 맞물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사임당의 삶은 그녀가 갖고 있던 능력과 자기 계발, 노력 등을 중심으로 재인식되어야 한다.

주체적 부인으로서의 신사임당: [사임당은 좋은 부인이 아니었다?] 사임당은 현모양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런데 사임당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의외로 사임당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부정적인 입장이 양극단의 입장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신사임당이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대표인물로서,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뛰어넘어야 할 인물이기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신사임당이 알려진 것과는 달리 좋은 아내가 아니었기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이 입장에서는 사임당을 콧대가 높고 최소한의 도리와 체면을 지키며 자기답게 살았던 여성으로 본다. 심지어 사임당은 훌륭한 아내도 아니었고 훌륭한 며느리는 더욱더 아니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임당은 자신의 재능세계를 위해 아내와 며느리로서 역할을 최소한으로만 하면서 어느 부분에서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는 남편이 벼슬자리를 위해 거주지를 옮길 때 사임당은 따라가지 않고 친정에서 머문 것에 대해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내가 죽은 뒤 새장가를 들지 마시오!] 기록에 따르면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사대부로서 갖추어야 할 태도부터 학문적 교화에 이르기까지 스승의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사임당의 다른 일화에서는 자신이 죽은 뒤에 남편에게 새장가를 들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가 가부장주의 사회이고,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었던 사회였음을 생각해볼 때, 남편에게 자신이 죽은 뒤 재혼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가히 파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부부관계에서 사임당이 매우 높은 주체성을 바탕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려준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사임당은 여성이 유교적 이념에 발목 잡히던 조선의 현실을 날카롭게 파악하여 지혜롭게 행동을 취한 과감한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그녀는 남존여비의 당시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진취적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신사임당은 기존의 이미지처럼 유교사회의 순종적인 전통적 여성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현모로서의 신사임당: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신사임당은 19세에 출가해서 7남매를 낳아서 길렀다. 친정에서 받았던 훌륭한 교육으로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높은 학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자녀들 한 명 한 명의 첫 번째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사임당은 자녀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그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며, 동시에 자신감을 갖도록 했다. 그리고 자녀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하는 말에 화내지 않고 경청하며, 묻는 말이 있으면 일일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또한 온화한 행동과 태도를 가지고 부모를 섬기는 방법, 형제와 친척 간에 화목할 수 있는 방법, 제사 지내는 방법, 일을 부지런히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 친구 사귀는 방법 등 당시 사회에서 꼭 필요한 여러 가지 도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사임당 식 자녀교육] 신사임당이 살았던 조선 전기 자녀교육은 유교적 가치관 중심의 교육이었고, 특히 여성교육은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학문은 제외되고 오직 집안일과 관련된 내용이나 유교정신을 나타내는 정신적인 측면만 강조되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남녀에 차별 없이 교육을 하였으며, 자녀들이 예술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실시했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보면 무척 진취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자녀교육의 결과 율곡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그녀의 자녀들은 각기 다른 재능을 발휘하여, 7남매 모두 한결같이 이름난 학자, 철학자, 예술가 그리고 뛰어난 덕을 함양한 여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성장 배경에는 사임당의 현명한 자녀 양육이 밑바탕이 되었다.

화가로서의 신사임당: [편견과 오해] 우리나라에서 과거에 예술 방면에 뛰어났던 여성들을 몇 명 꼽을 수는 있겠지만, 사임당처럼 종합적인 면에서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 그 위에 시와 그림과 글씨에까지 다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은 사임당이 유일할 것이다. 신사임당이 살았던 시대는 이른바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하여, 여성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이 제약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학문은 물론 글씨와 그림도 스스로 깨닫고 익히지 않고서는 배울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임당은 다양한 예술방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올렸으니 불가사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임당의 예술가적 기질이 배우고 익힌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천재적 재능의 화가 신사임당 / 그림을 보면 인품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신사임당이 남긴 그림들을 보면 왜 그녀가 조선 최고의 화가로 평가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특히 포도와 산수 그림은 어찌나 절묘했던지 당대 조선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에 비교되었고, 그녀가 그린 풀벌레 그림은 마당에서 먹이를 쪼던 닭도 실제 벌레로 착각하여 그림을 쪼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사임당의 그림에 대한 평가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정밀하다’와 ‘타고났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표현할 때 흔히 “인품과 예술은 서로 통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임당의 그림을 보면 그녀의 다정하고도 훌륭한 인품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윽하고 고와서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측면이 보이는가 하면, 은은하고 경쾌하여 인품이 높고, 학문적 식견이 높은 사람의 측면도 엿볼 수 있다.

마무리하면서: 오늘날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이미지 때문에 본받고 따라야 할 모델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되고 극복해야 할 의미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것은 ‘현모양처’라는 의미가 여성들의 삶을 단지 남성들의 종속물로 보거나 보조자로서만 파악하여 여성 자신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시각 때문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에게 덧씌워진 ‘현모양처’의 이미지는 신사임당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신사임당에 대한 평가는 그녀가 살아온 삶과 자기 계발 노력 등을 중심으로 다시 인식되어야 한다. 신사임당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대한의 것을 추구했다. 자신의 지적인 취향은 유명한 문학 작품들을 서예로 옮기면서, 또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충족시켰다. 조선시대 양반가 여성들에게 금기시되던 표현 욕구는 예술적 행위들인 그림과 시, 글씨 그리고 딸들과 자수를 하면서 실현해 갔다. 그리고 자신보다 학문적 성취가 낮았던 남편에 대한 기대감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아들 율곡에게 대신 투영되었다. 그러면서도 남편과 시댁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결론적으로 신사임당은 여성이 유교적 이념에 발목 잡히던 조선시대의 현실을 적시하여, 지혜롭게 행동을 취한 과감한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그녀는 남존여비의 당시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진취적 여성이었다.



시대의 비선실세 ‘김개시’

시대적 배경: 선조와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함께 극복했던 왕이다. 그러나 선조는 난세에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으로, 광해군은 백성을 살린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난세에 각기 다른 행보를 보인 두 임금이 곁에 두고자 했던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광해군의 여인이라 불리며 선조의 죽음, 광해군의 즉위 그리고 인조반정까지 두 임금의 시대에 걸쳐 등장하는 궁녀 ‘김개시’이다.

들어가면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27명의 임금 중에 광해군만큼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왕은 없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폭정을 휘두르다가 결국 폐위당한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승리자 반정 세력들이 패배자 광해군을 기록했으니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2012년 개봉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계기로 대중들에게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광해군이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형제들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가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성군’으로서의 면모가 영화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강력한 복구 사업을 추진하고 백성들의 삶을 보살폈던 광해군. ‘후금과 명’ 사이에서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판단하여 실리외교를 통해 무고한 백성들의 희생을 막았던 광해군. 권력에 눈이 멀어 저지른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던 임금의 면모도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언제나 시대적 가치관이 반영된 현재의 해석을 통해 재탄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대한민국은 ‘232만’ 명이 참가하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촛불 집회를 경험했다. 광장의 촛불 민주주의를 촉발시킨 계기는 일명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국정 농단 사건이다. 민주주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번 사건에 ‘이게 나라냐’며 전 국민은 분노했고, 시민들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드러난 민간인 ‘최순실’의 또 다른 이름은 ‘비선실세’이다. 2016년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태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역사 속 ‘비선실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광해군의 여인이라 불리는 궁녀 ‘김개시’이다.

김개똥? 못난이?: 그녀의 이름 ‘개시(介屎)’는 끼일 개, 똥 시로 한글로 풀이하면 ‘개똥’이다. 궁녀들의 신분은 대부분 천민, 노비 출신들이고, 이 여성들에게 오래 살라는 의미로 개똥이라는 아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김개시 역시 ‘개똥’으로 불리다가 궁에 들어오면서 ‘개시’로 불리게 되고,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가희’란 이름도 얻게 된다. 그러나 〈광해군일기〉의 기록에는 ‘김가희’보다 ‘김개시’란 이름으로 더 많이 등장한다. 참고로 역사 속에서 왕의 여인이 될 수 있는 조건으로 보통 왕을 유혹할 수 있는 뛰어난 미모와 예술적 재능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김개시는 이런 조건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일기〉에는 오히려 상당히 못난 얼굴로 기록하고 있다.

선조와 광해군 사이: 김개시는 약 14세 때 입궐하여 광해군이 세자로 머물고 있던 ‘동궁전’ 궁녀로 배치되었다. 궁녀 김개시는 ‘못난 외모’ 덕에 처음에는 광해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궁녀 김개시와 광해군의 만남은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해볼 때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후궁인 ‘공빈 김씨’가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장자인 임해군은 무식하고 성질이 난폭해 세자가 될 자질이 부족했다. 반면 광해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다.

세자 책봉에 관한 조정과 민간의 여론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선조는 광해군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눈치 빠른 김개시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 가능성이 임해군보다 크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김개시는 광해군을 극진히 보필했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고뿔(감기)을 앓으면 밤새 곁을 지킬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혈기 왕성하고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광해군은 점점 김개시에게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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