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글로벌 모더니티

아리프 딜릭 지음 | 에코리브르



글로벌 모더니티



아리프 딜릭 지음

에코리브르 / 2016년 12월 / 254쪽 / 16,000원





서론: 전 지구적 근대성



세상은 통합되어 있고 그것을 지탱하려고 공통의 조직적 구조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양한 크기로 파편화해 있으며 내부가 여러 갈래 방식으로 분열되어 있는가? 세상은 공공복지와 번영을 폭넓게 실현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것이 더욱 확장된 미래를 추구하는가, 아니면 현재의 자원들을 완전히 동 내버림으로써 생명력을 잃고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인가? 미래에는 평화와 평등과 민주주의를 박탈당한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협치 체계를 선사할 것인가, 아니면 현재 세계 창조에 어느 정도 근본적 토대로 작용한 식민주의ㆍ국민국가ㆍ초국적 자본 등이 서로 수렴하면서 상승 작용하는 가운데, 강력한 권력과 물질적 부의 독재를 자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 그리고 주안점은 다르지만 비슷한 다른 질문들은 지난 10여 년간 전 지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했다. 전 지구화가 학계 안팎에서 최신의 지적 유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쏟아졌다. 제시된 답들은 통상 그 개념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인식한 표현일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미래 전망으로 전유하고자 한 상반된 이념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게다가 그 용어의 사용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확산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와 같은 대답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그것들에 내재하는 환원주의와 그런 식의 대답들에 강박적으로 동기를 부여하려는 사고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인용한 종류의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하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우리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통합되어 있기도 하도 파편화해 있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전 지구화 패러다임이 서술하고 설명하려는 우리 시대의 세계 상황으로 말미암아 급부상한 문제들을 조금 해명하려 한다. 나의 독해에서 ‘전 지구화’는 세계의 진행과정이자 세계에 관하여 사고하는 방식을 말한다. 나는 이 작업에서 전 지구화 개념 자체와 실제 세계에서 진행과정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며 ‘현세적 사고’를 유지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지식인, 학자 및 예술과 집단들이 당대에 사용하는 개념들 ? 특히 탈근대성과 탈식민성 개념 ?에서 가장 큰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 또한 세계를 설명하는 그런 개념들의 준거뿐 아니라, 근대화나 세계체제 분석같이 전지구화 개념이 대체했던 다른 개념들에 대한 준거 자체에도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

나는 전 지구화 개념에 정확한 정의를 부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전 지구화를 그것의 적용 대상을 찾는 과정이 생성 중인 담론으로 보고, 그것을 폭넓은 개념들의 배열로 이해한다. 전 지구화에 역사적 맥락 안의 한 패러다임이라는 위치를 부여하고, 그것이 무엇을 대체하려 했던가를 검증하고, 1990년대에 그것이 출현할 시기에 동반되었던 물질적 및 이념적 결합을 고찰한다.

담론으로서 전 지구화가 제시하는 가장 흥미로운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끝인지 시작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에 관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한 개념을 목적론으로 구성하는 것은 이미 실현된 것으로서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지, 또는 세계가 아직도 미래에 놓인 한 전망을 이제야 겨우 알아채고 인정하는 상태에 도달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전 지구화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그들은 그 담론이 둘 다에 해당되고,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가 전 지구화의 역사적 필연성과 도덕적 선이라는 두 요소를 증가시킨다고 주장한다. 나는 전 지구적 근대성(내가 단수로서 취급하는)은 전 지구화의 전조라기보다는 결과물이고, 그것이 생산했던 역사의 모순들 ? 역사와 그것의 부정, 그리고 가장 중요한 쟁점인 식민지 과거에 대한 그것의 관계성 ? 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제시할 것이다.



전 지구화를 역사적으로 사고하기



패러다임으로서 전 지구화



전 지구화의 제안자와 선전가들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전 지구화를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서술하는 데 포함된 함정을 잘 간파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전 지구화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생각하는 위험을 감수하며 그런 생각에 함축된 바를 천착하는 것이 생산적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비록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역사적 과정을 가리키는 서술적 과정으로서 전 지구화는, 세계를 바라보는 자의식이 담긴 새로운 방식으로서 ‘전 지구화’라는 용어의 배치와는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내가 전 지구화를 패러다임이나 담론으로 언급할 때는 이런 전 지구화 용어의 배치 문제를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이다.

전 지구화에 대한 두 가지 전망 ? 역사적 지속성을 제공하는 장기적 전망과 최근 역사의 단기적 전망 ? 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 지구화는 진전과 후퇴로 표시되는 시간 과정이 주기적으로 재발하는 국면적 현상을 표현한다. 당대의 전 지구화는 역사에서 전 지구화하는 힘의 존재를 부정함 없이 그 의미를 물질적이고 이념적인 근대화라는 전제가 지배하는 현재와 근접 과거 사이의 대비에서 끌어낸다. 자의식적 패러다임으로서 전 지구화는 근접 과거의 산물이고, 지난 2세기 동안 사회과학과 문화적 사고를 형성하며,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계 인식 방식에서 이탈을 표현한다.

이러한 전환에 근본적인 것은 근대성의 개념화에서 ‘공간적 진화’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에 대한 공간적인 것의 우세이고, 이는 우리가 현재 직면하는 전 지구화 관념의 피할 수 없는 모순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그런 양상은 또한 과거에 세계 이해를 착상하던 방식과는 구분된다. 곧 로컬화 또는 더 강력하게는 파편화야말로 전 지구화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한편 전 지구화는 그런 파편화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천명하는 준거로 삼는다.

이러한 전환에는 세방화(Glocalization)가 더 정확한 용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모순의 최우선적인 양상인 전 지구화를 충실히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파편화와 통합성의 동시 수용은, 비록 체념은 아니지만, 근대성의 사고방식과 단절을 표현한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는 단순히 다른 방식의 알기를 마음 편하게 망각하며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견해들 ? 그것들 자체가 근대성의 산물 ? 에 맞서 그들 자신의 지식 분야를 의식적으로 표명하는 견해에 있다는 다른 주장으로 귀환하는 것이기에 어떤 전근대적 조건으로의 귀환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전 지구화는 변화와 사회적 상상력의 패러다임으로서 근대화 담론을 대체했다. 전 지구화 담론은 중요한 방식으로, 특히 실제의 경제적ㆍ정치적 및 문화적 도전을 통해 여러 방식으로 추진된, 유럽중심주의적 변화를 지향하는 목적론의 포기에 동의함으로써 과거의 근대화 담론과 단절을 주장한다. 그것은 새로운 경제적ㆍ정치적 권력 중심지의 출현으로, 분명한 문화적 공통성 가운데서 문화적 다양성의 주장들, 경계선을 향하여 돌진하는 민중의 강화된 움직임들, 그리고 국가와 지역을 초월하는 문제들을 다루는 새로운 전 지구적 제도들의 출현 ? 이것들은 모두 유럽중심주의적 근대화 과정이 세계의 문제들을 다루고 파악하는 데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 으로 개연성을 가지게 되었다. 전 지구화는 정치적 좌파들에게 분명한 호소력을 가진다. 전 지구화에 가장 가시적 반동이 정치적 우파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전 지구화는 더욱더 좌파 운동 또는 적어도 자유주의 좌파의 열망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전 지구화에 대한 도취감은 단순히 과거의 잔여물이 아니라 새로운 발전의 산물인 바로 그 실제의 사회적ㆍ경제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다. 일부에서는 전 지구화가 유럽중심주의적 근대화의 종말인지, 아니면 그것의 성취인지 여부를 묻기도 한다.

전 지구화가 유럽 권력에 의해서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 근대성의 역사에서 마지막 장인지, 혹은 어떤 구체성도 제대로 나타나지 않은 어떤 것의 시작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전 지구화 담론은 전 지구적 관계에서 변화하는 배치 및 구성 ? 새로운 통합과 새로운 균열 ? 과 그들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새로운 인식론의 절박한 필요에 대응하여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 지구화는 또한 이념적이기도 하다. 그것이 세계를 어떤 이익에 다른 세계보다 더 기여도가 높은 새로운 전 지구적 상상력과 일치하는 세계로 재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전 지구화에 대한 승리주의자의 고찰은 ? 초국적 자본가에게 끼치는 호소력 못지않게 세계시민주의적 자유주의자나 좌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며 ? 세계의 내재적 통일을 축하한다. 그리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문제들이 과거로부터 남겨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전 지구화의 과정에 이념으로 장착된 발전론자의 가설들의 산물이라는 것을 간과한다. 그 가설은 전 지구화 과정에 참여하는 비(非)유로 아메리칸에게는 이념으로서 의미가 별로 없거나 그 결과 파국적이 될 뿐인 단순한 전 지구적 계급 구성과 배치에서 변화를 지적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중심주의 문제와 더불어 전 지구화 담론에 몰두하는 태도는 그에 대립하는 새로운 형식의 권력에 대한 성찰을 느슨하고 산만하게 만든다.

오늘날 전 지구화가 단순히 자본주의의 ‘자연적’인 역사적 산물인지 또는 미 제국주의를 은폐하려는 것이 아닌지와 연관시켜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 지구적 근대성 개념의 지지자들은 기존이 제국주의 개념은 현재의 복잡성을 파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럼에도 ‘전 지구적 다문화주의’ 이념에서 보듯 근대성의 다른 길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자율성 인식은 현재의 근대성을 형성 중인 식민지적 과거의 유산의 빛에서 심각한 성격 규정에, 다시 말해 전 지구적 경제와 정치를 넘어 과거 식민지 자본주의의 결절지 권력 인식에 필요하다.

역사적 전망에서 전 지구화



전 지구화에 관한 논의적 선구자인 롤런드 로버트슨은 역사에서 전 지구화를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발생적 단계”(15~18세기 중반), “초기 시작 단계”(18세기 중반~1870년대), “도약 단계”(1870년대~1920년대), “패권 투쟁 단계”(1920년대 중반~1960년대 말), “불확실성 단계”(1960년대~1990년대)이다. 패러다임으로서 전 지구화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마지막 시기를 “불확실성 단계”로 묘사한 것은, 우리가 되짚어보아야 할 흥미로운 요점이다. 더욱 적합한 것은 전 지구화와 이매뉴얼 월러스틴 같은 세계체제 분석가들이 주장한 “자본주의 세계체제” 역사의 윤곽에서, 그리고 “이전 시대와 장소들이 전 지구화하는 경향들과 단일한 형식, 불변의 냉혹한 형식에 양보하는” 187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을 “도약 단계”로 논증한 시기와 전 지구화 시기가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특수한 시기에 전 지구적 형성에 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결코 로버트슨뿐만 아니다. 폴 허스트와 그레이엄 톰슨은 최근 발표한 전 지구화 개념 비평에서 우리 시대에 전 지구성에 대한 견해들을 평가하면서 같은 시기를 하나의 기점으로 작용하는 정렬선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지구상의 국가와 지역 사이에서 경제활동의 양과 강도라는 조건에서, 20세기의 마지막 사분기가 19세기의 마지막 사분기보다 전 지구성의 조건을 더 잘 표현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결론 내린다.

19세기 후반부터 국민국가 형식의 전 지구적 확산은 다시 전 지구화 과정에 두 가지 방식으로 더욱 크게 공헌했다. 첫째는 국가 간의 관계뿐 아니라 국가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인 유권자들의 관계를 규제하는 사법적 원리의 전 지구적 확산이다. 둘째는 국민국가의 문화적 동종성을 빌미로 국가 내부에서 로컬의 차이가 지워졌다. 이 과정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경로로 진행되었고, 불완전하게 실현되었다. 우리는 20세기에 그들이 수행한 혁명적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패러다임으로서 전 지구화에 대한 어떤 고찰이든, 그것의 출현에 중요한 계기가 되는 세계의 동시적 통합과 파편화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습득할 필요가 있다. 전 지구화라는 용어는 냉전 말기가 아니라 1980년대에 특히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의 출현에 대한 관심이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정치경제학과 문화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 탁월한 지위를 획득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까지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 전 지구화 경제가, 유럽과 미국의 그림자 아래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던 이들 사회에 침잠해 있던 문화적 차이에 관한 견해를 재주장하면서 함께 출현한 사실이다. 또 전 지구화 경제의 출현은 그들이 새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교역과 투자(또는 부유한 이민자)를 포획하고자 새로운 경쟁에 돌입했기 때문에 북미와 유럽 경제의 관계에 흥미로운 충격효과를 제공했다.

현재 전 지구화에 대한 개념화는 그것들의 참신성을, 중요하게는 부르주아들(그때까지 압도적으로 미국)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것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근대화가 제공한 것에 바탕을 둔 근대화 담론과는 단절하려는 견해에 바탕을 둔다. 이 두 대안들은 역설적으로 발전주의에 대한 공통의 진술을 공유하며, 각자의 궤도 안에 식민주의의 유산을 극복하고 국가적 자율성과 권력을 촉진시킬 발전을 열망하는 탈식민 세계의 국가들을 끌어들이고자 노력했다.

지금 유로-아메리칸 지배에 맞서 근대성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 견해를 만들고 있는 사회들을 생산한 것은 자본주의 근대성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의 소멸은 문화의 자율성 또는 문화의 지속성에 바탕을 둔 논증과 관련되는 견해가 상승세를 타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문화와 밀접한 경영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화적 단층선을 창조하는 것은 기업 자본의 새로운 중심지들의 출현 - 가장 중요하게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 그리고 초국적기업들에 점차 더욱 다양한 직원을 제공하는 노동력, 마케팅과 광고의 초국적화에서 자본의 전 지구화와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

문화는 주로 당대의 학문과 정치에서, 그러니까 근대성에 대한 반대에서, 근대를 로컬 차원에서 전유하는 양상의 설명에서, 또는 정치 및 기업 경영의 도구로서 새로 발견된 내재적 의미에서, 다수의 유능한 인물들이 전개했던 것처럼 돌발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새로운 상황은 근대성의 생산물이다. 그럼에도 그 근대가 유럽중심주의적 근대성의 시기와는 차이를 생성하며 현존하는 새로운 종류의 모순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 지구적 근대성은 지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하고 분열시킨다.



유산들: 전 지구적 및 식민지적 유산들



이 장은 전 지구성과 그것이 식민지적 과거와 맺고 있는 관계를 논의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식민주의를 전 지구화에 종속시키는 작금의 경향, 즉 식민주의를 전 지구화의 한 단계로 보는 경향을 뒤집고자 한다. 즉 전 지구화를 단순 명료하게 설명하는 단계에서 그 자체를 식민지적 과거의 시각에서 보려 한다. 그것이 함축한 의미는 단순히 지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동시에 심원하게 정치적이다.

전 지구적 근대성



나는 전 지구적 근대성을 프레더릭 제임슨의 문구를 사용해 “단일의 근대성”이며 유일한 것으로 이해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그 단일성은 온갖 갈등의 장으로 작용하는 근대성에 대한 온갖 모순적 견해들의 생산물로 이해한다. 내가 전 지구적 근대성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관점은 전 지구화와 그것이 함축하는 전 지구적 공유성 주장에 내포된 일정한 실증성을 인식한 산물이다. 동시에 개념으로서 전 지구적 근대성은 전 지구화라는 용어에 내장된 전 지구적 공유성과 동종성을 위한 목적론적(그리고 이념적) 편향의 극복을 의도한다. 또한 그 공유성과 동종성을 전 지구적 무대에 투사하면서 과장된 표현을 발견하는 전 지구화와, 과거의 역사적 유산들의 생산물인 파편화와 모순을 동등하게 근본적 경향들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전망에서 전 지구화는 지구촌의 어떤 유토피아화된 순진한 기대나, 정반대로, 바람직하지 않은 전 지구적 패권과 같은 전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