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이영미 지음 | 인물과사상사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이영미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2월 / 399쪽 / 18,000원





혁명과 정변, 그 격변의 시기를 향하여



불안정하고 어설픈 1950년대

“한국의 오늘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권보드래와 천정환은 『1960년을 묻다』에서 “한국의 오늘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 말에 대체로 동의한다. 비단 21세기까지 박정희란 인물이 뚜렷하고 선명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화 분야로 국한해보더라도, 지금의 문화를 틀 짓고 있는 수많은 법과 제도가 1960년대에 만들어졌고, 그 시대에 꼴을 갖춘 이데올로기가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예는 많다. 일제강점기에는 쇼와 등 일본식 연호를 쓰다가, 해방이 되고 나서 1950년대까지 십수년간 단기로 연도를 표시했다. 그러나 1962년부터 서력기원이 정착하고 공문서에 서기 연도가 쓰이기 시작했다. 여러 제도와 정책을 보더라도 1960년대는 매우 중요하다. 주민등록법이 제정된 것도 1962년 5월이다. 언론계에서도 지각변동이 발생했다. 4ㆍ19 이후 언론사는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지만, 1961년에 발표된 신문ㆍ통신사시설기준령으로 인해 서울에서만 324개나 되던 언론사 대부분이 발행 취소되었다. 이 때문에 대형 언론사만 남게 되었고, 지금의 언론재벌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술 분야에서도 예는 많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어 유적ㆍ유물뿐 아니라 공연예술까지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원형 보존을 하는 현재의 방식이 정립되었다. 그리고 1961년에 공연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근거해 1966년에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설립해 검열성 사전심의를 제도화했다. 한편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를 거치면서 예술계 중심으로 자리 잡았던 구세대에 대항해 이 시대에 젊은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켰던 1930년대생 인물들은 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30년 동안 예술계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문학계에서 창작과비평사와 문학과 지성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4ㆍ19세대, 연극계에서 동인제 극단을 만들어 1950년대의 중심 극단인 신협을 밀어내고 한국의 대표 극단으로 자리 잡도록 성장시킨 세대들이 모두 1960년대에 등장한 20대 예술인들이었다.

대중예술사에서 1960년대는 확실히 새로운 시대: 이 책의 핵심인 대중예술 분야로 들어가 보자. 1960년을 전후한 시기의 변화는 뚜렷해 보인다. 해방기부터 1950년대까지 대중예술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개 일제강점기 후반에 데뷔했다. 예컨대 정비석ㆍ김내성ㆍ박계주 등의 대중소설 작가, 대중가요계의 박시춘ㆍ이재호 같은 작곡가, ‘눈물의 여왕’이라 불렸던 대중극계의 전옥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1960년대가 되면, 싹 물갈이되는 느낌이다. 새로운 작곡가와 가수, 새로운 배우와 감독들이 유행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이런 변화가 모두 5ㆍ16 군사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집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단순화다. 하지만 큰 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도록 역사가 흘러가고 있었고, 거기에 박정희의 집권이라는 정치적인 사건이 묵직하게 배치되어 있었다고 말한다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즉, 1960년대는 한국 대중예술사에서 확실히 새로운 시대였던 셈이다.

1950년대 한국에 웬 인도와 페르샤?: 1950년대 대중예술이 보여주는 독특한 특성 중 몇 가지는 꼭 강조하고 싶다. 반공주의와 반일주의, 혹은 독재 성향을 보이는 권위주의적 정권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특성들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 말고,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몇 가지 특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다름 아닌 기묘한 자유주의와 국제성에 대한 욕망이다. 여기서는 국제성에 대한 욕망만 이야기해보자. 대중예술에서 이 욕망이 발현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지금 감각으로는 엄청나게 어설프고 생뚱맞아서 심지어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 정도다.

예컨대 대중가요에서 <럭키 서울>, <럭키 모닝>, <슈샤인 보이>, <내가 울던 빠리>, <청춘 아베크>, <샌프란시스코>, <아리조나 카우보이>등 영어나 프랑스어의 과시적 사용은 기본이고, 다음과 같은 뜬금없는 노래도 유행을 한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샤 왕자 / 눈 감으면 찾아드는 검은 그림자 / 가슴에다 불을 놓고 재를 뿌리는 / 아라비아 공주는 꿈속의 공주 / 오늘 밤도 외로운 밤 별빛이 흐른다. - <페르샤 왕자> 1절, 1954년, 허민 노래, 손로원 작사, 한복남 작곡’

이런 노래들은 왜 인기를 모은 걸까? 가장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에 인기를 모은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이다. <아라비아 공주>, <시자와 크레오파트라>, <인도의 별> 같은 제목으로 개봉된 영화가 적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정도 설명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이런 영화는 1960~1970년대에도 들어오고 크게 인기도 있었다. 그런데 대중가요는 유독 이 시대에만 이렇다. 이는 소재나 호기심 차원을 넘어선 그 무엇이 대중의 감수성의 심층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건 확실히 좀 독특하다. 나는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시대가 국제성에 대한 열망이 아주 높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얼떨결에 맞은 일본 패망과 해방, 남북 분단은 우리가 얼마나 국제정세에 어두웠던가 하는 생각을 대중들에게 뿌리 깊이 심어주었을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상상지리’를 그리다: 1950년대 한국인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삼아 세계에 대한 ‘상상지리’를 그려내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한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주조된 미국 중심의 상상지리를 아주 대중적으로 드러낸 것이 당시 대중가요들의 이국성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해도, 그중 하필 ‘아시아적’ 이국성이 과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이는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아야 설명이 가능하다. 이미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이런 아시아적 이국성을 다루어본 적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말의 시기가 바로 그때다.

이때는 ‘대동아공영권’이 주창되던 시대였고, <북경 아가씨> 같은 중국풍 노래는 물론이고, <밀림의 달밤> 같은 동남아시아 소재의 대중가요가 흔했다. 심지어 <페르샤 점쟁이>란 노래도 있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전반에 나타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내걸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며 자신들의 시각으로 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려나간 흔적이다. 그러나 페르샤니 인도니 하는 서남아시아 지역이 등장하는 것은 태평양전쟁 때의 실제 체험과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지역까지 소재로 삼은 이유는 무얼까?

서구 백인들의 식민지가 되어 사는 아시아인들을 일본이 나서서 해방시키고 아시아가 하나로 단결해야 한다는 대동아공영권의 상상력이 대중문화의 방식으로 주조된 것이리라. 즉, 이 시기는 일본이 일본 중심의 국제화 욕망을 드러낸 시기였고, 이런 대동아공영권이란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식민지 조선’의 대중예술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 후 1950년대에 우리는 또 다른 방식의 국제적 경험을 하게 되고, 일제강점기 말의 아시아적 이국성을 담은 노래들이 고스란히 표면만 바뀌어 재등장하게 된다. 심지어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재활용’도 많다. 예로 해방 후 불렀던 <꽃마차>란 노래는 일제강점기 말에 ‘노래하라 하루삔’이라 불렀던 노래였다. <신라의 달밤>과 <백제의 밤>은 일제강점기 말에 만들어진 <인도의 달밤>, <몽고의 밤>을 개사해 새 노래처럼 포장해 발표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일제강점기 말 대동아공영권과 관련 있는 노래를 해방 후에 재활용할 수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이 정도는 정말 별 게 아닌 일이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군국 가요들조차 일장기를 태극기로 살짝 바꾸는 수준의 개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애국적 노래가 되어 널리 불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사람이 같다는 점이다. 같은 창작자들이 짓고 같은 대중들이 즐겼던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어설픈 아시아적 이국성의 노래들은 대중의 시야에서 싹 사라진다. 10년도 안 된 시간 안에 이루어진, 놀랍게도 빠른 변화다. 박정희 시대는 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과 맞물려 있다.



격변의 시기, 개혁과 희망



개혁의 청년이여, 근대적 기술로 성실히 일하라

4ㆍ19와 5ㆍ16사이, 어떤 작품을 기억하는가?: 대중예술사에서는 4ㆍ19 이전부터 시작해 5ㆍ16 이후까지 상당한 연속성과 지속성을 지닌 민심도 읽을 수 있다. 예로 『광장』 같은 본격문학이나 <오발탄> 같은 작가주의적 영화에서는 혁명의 배반과 퇴보의 서사가 선명하게 읽힌다. 그에 비해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보다 잘 먹고 잘사는 욕구ㆍ욕망을 표현하는 거에 충실한 대중예술에서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그것과는 결이 다른 민심이 읽힌다. 방송드라마이자 영화인 <박서방>과 영화 <마부>야말로, 4ㆍ19와 5ㆍ16 사이에 만들어져 인기를 모은 영화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은 이승만 정권 말의 작품인 <로맨스 빠빠>에서부터 시작해 5ㆍ16 이후 <삼등과장>을 거치며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이른바 ‘김승호 영화’라 일컬어지는, 늙고 무기력해진 ‘아버지’를 대신해 젊고 능력 있고 성실한 장남이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를 구축하는 이야기가 4ㆍ19 이전부터 시작해 5ㆍ16 이후까지 이어지며 이 시대 한국 영화의 주류 경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을 좀 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늙고 무기력해진 아버지를 대신해 젊고 능력 있고 성실한 장남이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를 구축하는 이야기가 지속적인 흐름이었지만, 5ㆍ16 즈음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직한 젊은이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날라리에서 노동하는 인간으로: 이들 영화에서 조연급 인물로 눈을 돌려보자. 1959년에 방송드라마로 제작되고 1960년 초에 영화로 개봉된 <로맨스 빠빠>에서는 그나마 젊고 자유주의적인 ‘날라리’ 대학생에 대해 그리 날을 세우지는 않는다. 이 작품 속의 장남과 차녀가 바로 그런 대학생들 아닌가. 대학생 장남은 부모 몰래 대학을 휴학하고 영화판 조감독으로 일하며 여배우와 연애를 하고, 여대생 차녀는 친구들과 하이킹을 가고 싶은데 마땅히 입을 만한 바지가 없다고 부모에게 징징거린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이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경제력 없는 두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전당포에 맡겨진 아버지의 시계를 찾아오는 사람은 듬직한 관상대 직원 맏사위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날라리 대학생이 골칫덩이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나름 최선을 다해서 부모를 도우려 노력하는 효성스러운 자녀들이다.

그런데 4ㆍ19와 5ㆍ16 사이에 나온 <박서방>과 <마부>속의 날라리 젊은이들의 형상화는 좀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물론 두 작품은 <로맨스 빠빠>의 다소 넉넉한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하지 않았고, 미장이나 마부 아버지의 가정 이야기였다는 점도, 차이를 만들어낸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박서방>의 장녀 용순은 집에서 살림 거드는 혼기 찬 처녀다. 그런데 아버지 박서방은 용순이 동네 건달 재천과 사귀면서 으슥한 곳에서 입까지 맞추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재천은 용순 아버지의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건달패에서 손을 끊는 등 온갖 노력을 하지만, 아버지가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자, 결국 용순은 가출해 재천과 살림을 차려버린다. 예상한 대로 작품은 모든 가족 간 갈등이 해결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재천의 변화다.

재천은 건달패에서 손을 끊고 ‘일’을 시작한다. 어렵사리 운전면허를 따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기사가 되는 것이다. 재천은 우연히 비를 맞고 걸어가던 아버지를 자동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저는 용순이 때문에 사람이 되었어요. 이제부터는 사람 구실을 해봐야겠어요.”라고 하고 이 대목에서 아버지는 재천에 대한 미움을 풀며 사위로 받아들인다. 집안의 기둥은 당연히 제약회사 부장인 장남이지만, 자녀 커플 중 오로지 노동하지 않는 인물이었던 재천까지 ‘사람 구실’을 하는 노동하는 인간으로 변화하면서 이 가족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근대적 기술자, 하얀 가운과 작업복: <로맨스 빠빠>의 맏사위는 관상대 직원, <박서방>의 장남은 하얀 가운을 입은 제약회사 부장, 며느리는 같은 회사 포장부 직원, 둘째 사위는 외국 항공회사 기술직 사원이다. 여기에 건달패이던 맏사위마저 자동차를 모는 운전기사가 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 영화들이 역설하는 바가 충분히 엿보인다. 즉, 근대적 기술을 가지고 성실히 노동하는 인간이야말로 이 시대 젊은이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잘살아보세’의 희망과 역사라는 난제



<동백아가씨> 토사구팽 전말기

한일 대중문화 교류는 예정된 수순이다?: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는 1964년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였는데, 나오자마자 엄청나게 인기를 모았다. 그런데 이 인기가 여론을 긴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트로트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와 정착한 것이었음은 상식인데, 겨우 몇 년간 주춤했던 이 경향이 보란 듯이 다시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주의 기타 반주는 일본 엔카의 거장으로 통하는 고가 마사오 스타일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설상가상 이때는 정부가 한일수교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해 온 사회가 술렁거리고 있던 때였다. 영화계는 한일수교 이후에 이루어질 영화 교류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줄 기대감을 은근히 갖고 물밑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역시 커졌다. 신문은 앞다퉈 일본 문화의 급작스러운 유입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여론의 흐름에서 가장 공격받기 쉬운 것은 바로 대중가요였다. 왜냐하면 예술성이라는 권위를 후광으로 업을 수 있는 문학과 달리 ‘시시껄렁한 유행가 따위’로 취급되어온 분야였으므로 가장 만만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동백아가씨>가 표적이 되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트로트의 왜색 시비 재연: 한일수교와 동반된 일본 문화 유입에 대한 비판적 여론은 급기야 방송국 관계자들을 움직였다. 1965년 9월 초 5개 방송국 음악 담당자들이 모여 ‘왜색조와 저속한 리듬, 멜로디의 음악’을 방송하지 않겠다고 합의했는데, <동백아가씨>를 비롯해 <마도로스 부기> 등 7곡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직격탄을 맞은 대중가요인들은 발끈했다. 한국연예협회 차원에서 대중음악인의 방송 출연 중단과 노래 사용 금지 등을 선언해 버렸다. 당연히 쇼와 다양한 음악 프로그램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방송국에서 부랴부랴 사과를 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리요시코의 <사랑의 붉은 등>: 1965년 한 차례 ‘왜색 파동’을 겪긴 했지만, <동백아가씨>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한일수교 체결 이후, 대중가요 분야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수혜자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그리 쉽지 않은 일본 진출까지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자는 1966년 7월 일본 빅터레코드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백아가씨>와 <황포돛대> 등을 취입했고, 일본의 TV에까지 출연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해외 공연은 물론 일반인의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활동은 범상치 않다. 양국 간 대중문화 교류가 활발해질 것을 예상하고 양국이 파격적인 배려를 해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것이 또 역풍의 계기가 되었다.

이미자의 음반은 악곡만 <동백아가씨>고 <황포돛대>일 뿐, 제목과 가사 모두 일본어로 바꾸고 내용도 대폭 수정한 것이었다. (<동백아가씨>의 일본어 제목은 <사랑의 붉은 등>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수 이름도 ‘이미자’와 ‘리요시코’가 함께 쓰였다. 이것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는 ‘창씨개명이냐’며 파르르 떠는 분노의 반응이 나와 외무부가 나서서 진상 조사 후 소환하겠다는 등의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자는 그로부터도 두 달 이상 멀쩡히 일본 활동을 하고 귀국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