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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릭 빅뱅

한근우 지음 | 사과나무



일렉트릭 빅뱅



한근우 지음

사과나무 / 2017년 1월 / 338쪽 / 16,000원





Chapter 1 보이지 않는 힘, 전기를 찾아서



전기는 왜? 어떻게?



전기란 무엇인가?: 전기에 대한 수수께끼는 수십 세기를 거쳐 연구가 지속되었지만, ‘전기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러한 궁금증은 1897년 영국의 물리학자 존 톰슨의 음극선관 실험을 통해 전자의 존재를 발견하면서 일부 해결된다. 이후 1913년에는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에 의해 모든 물질은 기본적으로 원자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이 제시된다. 즉, 보어는 (+)전하를 가진 원자핵 주위를 (-)전하를 가진 전자가 회전한다는 원자 모형을 제시한 것이다. 원자 모형을 기초로 도체와 부도체의 물질의 특성을 살펴보면, 그 특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체의 경우 최외각에 위치한 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이를 자유전자라 부른다. 이에 반해 부도체는 최외각에 위치한 전자가 주변의 전자들과 공유결합이 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체의 경우 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다. 도체에 전압이 공급되면 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며, 전위차가 발생한다. 때문에 전자들이 전위차가 높은 쪽으로 끌려가는 흐름이 발생한다. 즉 전류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전류가 흐르는 방향’이다.

전기를 다루는 이론에서는 전류가 흐르는 방향을 (+)전하에서 (-)전하로 이동하는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물질 내부에서의 전기의 움직임은 이와 정 반대이다. (-)전하 전자가 (+)전하의 방향으로 전류가 이동하는 것이다. 전류의 방향이 실제와 차이가 있는 것은 전자의 움직임이 밝혀지기 전에 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기준을 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과학자들은 전류의 흐름이 물의 흐름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생각했다. 이는 곧 전류가 (+)전하에서 (-)전하로 흐른다는 것으로 판단되어 약속된 규칙이었던 것이다. 이후 보어가 제시한 원자 모형에 의해 전자의 이동방향이 새롭게 제시되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사용해온 규칙이기 때문에 전류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레카! 라이덴병



전기를 만든다고?: 윌리엄 길버트는 그의 저서 『자석에 관하여』를 통해 숨겨져 있던 전기와 자기에 관한 많은 답을 찾아주었다. 당시 유럽의 많은 학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전기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작은 횃불이 된 것이다. 길버트가 전기에 관한 실험을 할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주위에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호박이나 그와 유사한 물질을 이용해 정전기를 발생시키곤 했다. 이러한 방식은 쉽게 정전기를 발생할 수는 있지만 유지 시간이 턱없이 짧았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은 전기를 보다 쉽고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늘 고민했다. 이 같은 고민은 물리학자이자 독일 마그데부르크 시장이었던 오토 존 게리케가 마찰전기 발생 장치를 발명하면서 일부분 해결된다. 게리케는 호박 등을 문질러서 정전기를 발생시키는 방법 대신 커다란 유황으로 만든 공을 이용한 회전장치로 전기를 발생시킨 것이다. 게리케의 전기 발생장치는 전기학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그 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게리케의 마찰전기 발생장치가 개량되어 실험에 필요한 전기를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장치로 각광을 받는다. 그러나 개발된 장치로는 많은 전기를 일정하게 공급받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된 전기도 쉽게 사라져 버렸다. 마찰전기 발생장치로 만들어진 전기는 저장할 수도 없고 고정된 장소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 큰 단점으로 작용했다.

전기를 체포한 두 사람: 18세기의 과학자들은 보다 쉽고, 보다 많은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고민했고 일부 과학자들은 ‘전기를 병과 같은 용기에 담을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으며,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1692년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레이던에서 과학기기 제조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피터 반 뮈셴브루크는 전기에 매료되어 전기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다.

어느 날 뮈셴브루크는 실험을 위해 물이 반쯤 채워진 실험용 대전 유리병을 이용한 실험을 했다. 뮈셴브루크는 준비된 유리병을 오른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은 전기발생 장치에 연결된 철사를 잡았다. 그리고 곧 이어 손으로 전기발생장치를 회전시켰다. 뮈셴브루크는 다음 단계로 실험장치에 연결된 철사의 한쪽 끝을 유리병 주둥이를 거쳐 물 속 깊이 넣었다. 그 순간 크나큰 전기적 충격이 그의 손가락 마디를 타고 들어왔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이었기에 그 충격은 매우 컸다. 평소에도 간간히 마찰전기로 인해 찌릿함을 느끼곤 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다. 그가 고통을 느꼈던 전기적 충격은 유리병에 충전된 전기가 철사의 한 끝을 통해 순간적으로 뮈셴브루크에 몸을 타고 들어간 것이다. 뮈셴브루크의 고통스러운 실험은 18세기 전기의 역사에 있어서 크나큰 발견의 순간이었다. 뮈셴브루크의 라이덴병 발명은 전기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전기학자들은 라이덴병을 여러 개 연결하면 더 큰 전기를 충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이덴병의 발명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과학자가 또 있었다. 그는 독일의 과학자 에발트 게오르그 폰 클라이스트였다. 1700년 독일에서 태어난 클라이스트의 목표는 쉽사리 사라지는 정전기가 아닌, 크고 오래 지속 가능한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수십 번의 실험 끝에 클라이스트는 강한 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전체의 질량을 크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745년 11월 4일 실험이 진행되었다. 대전체로 사용된 유리병에 물을 반쯤 채우고 전하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리병을 부도체로 에워쌌다. 클라이스트는 이렇게 실험 장치를 꾸미면 대전되는 전기량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험 장치가 모두 완성되었다.

클라이스트와 뮈셴브루크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라이덴병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라이덴병 발명의 우선권 논쟁은 두 사람이 독립적으로 발명한 것을 인정되었다. 그래서인지 일부는 이 축전지를 클라이스트의 이름을 따서 클라이스트병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라이덴병이라는 이름이 주로 사용되었다.



Chapter 2 전기시대를 열다



못 배운 과학자의 생각



자기를 전기로 바꿔라!: 19세기 초 외르스테드와 앙페르가 전기와 자기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을 때, 많은 과학자들은 몹시 흥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기와 자기는 전혀 다른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다. 마이클 패러데이 역시 전기와 자기에 관한 관련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특히 외르스테드가 발견한 “전류가 도선 주변에 자기장을 만든다”와 앙페르가 수학적으로 입증한 “자기력이 도선 주위에 둥근 형태로 자기효과를 나타낸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전기와 자기에 관한 실험을 꾸준히 진행했다. 그는 반복된 실험을 통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발상을 했다.

1822년 패러데이는 자신의 실험 일지에 “자기를 전기로 바꿔라”라고 기록한다. 즉 “전류가 흐를 때 그 주위에 자기장이 생긴다면, 그 반대로 자기장을 변화시키면 전류가 발생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같은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패러데이는 1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험을 진행했다. 그리고 1831년 8월 29일 패러데이는 마침내 새로운 실험장치를 완성했다. 속이 빈 원통형 철심에 코일을 감은 후 검류계를 연결한 뒤 원통형 철심 안으로 막대자석을 이용해 넣고 빼내기를 되풀이했다. 그러자 자기가 전기로 전환되었고, 전기량이 이전보다 더욱 크게 발생되었다. 패러데이는 이후 보다 개량된 실험장치를 만듦으로써 연속적인 전류까지 발생시킬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그 동안의 연구 결과인 전자기유도 법칙을 정리하여 1831년 11월 24일 영국 왕립학회에 논문으로 제출했다.

획기적인 발견에 대해 찬사와 함께 일부 사람들로부터는 부정적인 의미로 “그것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당시 일부 학자들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전자기 현상이 전기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패러데이는 이 같은 질문에 흔들림 없이 “그럼 갓 태어난 아기는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패러데이의 발견이 현대 전기산업의 기초가 되고 인류 문명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인간, 어둠을 지배하다



빛을 지배한 사나이: 1876년 에디슨은 미국 뉴저지의 멘로 파크에 산업 연구소를 차리면서 생애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연구소에서는 20여 명의 전문 인력이 고용되어 조직적 차원의 발명을 시도했다. 에디슨은 조직적인 연구개발 인력과 함께 본격적으로 백열전구를 상용화하기 위한 실험에 착수했다. 실험은 수백여 가지의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물질의 전기저항을 하나씩 측정하여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온갖 물질을 수집해 필라멘트의 주재료로 삼았고, 이를 이용해 시제품 제작을 했다. 하지만 제작된 시제품들은 대부분 10분도 채 견디지 못하고 곧 끊어지고 말았다. 실험을 통해 전기로 불을 밝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상용화와는 거래가 먼 수준이었다.

그 후로도 실험을 계속되었지만 별 다른 진전이 없었다. 에디슨은 마치 깜깜한 미로를 헤매는 것만 같았다. 고심 끝에 에디슨은 백열등 제작에 있어서 극복해야 할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압축했다. 그 중 하나는 백열등 내부의 공기를 모조리 빼내 내부를 진공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내부의 산소가 필라멘트의 수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에 반드시 진공상태를 유지해야만 헸다. 하지만 에디슨이 사용하던 수동펌프는 늘 말썽이었고 좀처럼 완벽한 진공상태를 만들기에는 성능이 턱없이 부족해 결과는 늘 참담했다. 에디슨은 고민 끝에 1865년 영국에서 개발된 고성능의 수은 펌프를 도입해 백열등 속의 공기를 모조리 빼내다시피 했고 최적의 진공상태를 구현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하나의 큰 문제를 해결하였지만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수명이 길고 일정한 밝기의 빛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필라멘트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일정한 밝기의 빛을 발산하기 위해서는 필라멘트가 엄청난 양의 열에너지를 견뎌야 하는데, 그러한 물질을 찾는 건 ‘깜깜한 방 안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 에디슨은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 등 전 세계를 뒤져서 수천 가지의 재료들을 이용해 테스트를 했다. 그 결과 탄화된 목화실을 이용한 필라멘트가 선택되었다. 목화실을 이용한 팔라멘트는 전기저항이 크고 고온에서도 잘 끊어지지 않아 백열등에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1879년 11월 1일 에디슨은 이 필라멘트가 적용된 백열전구로 특허를 등록하게 된다. 에디슨과 멘로 파크 연구진의 힘으로 마침내 전기조명 시대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에디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고성능의 재료를 이용해 계속해서 시험을 진행했다. 그 중 하나가 대나무였다. 에디슨은 대나무를 태워서 만든 필라멘트를 이용해 무려 1200시간이나 백열등의 수명을 끌어올려 실용화에 크게 이바지한다. 이후 백열등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로 보급이 확산되었다.

이 같은 백열등의 확산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1887년 3월 6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최초로 백열등 설치된다. 미국에 다녀온 사절단이 깜깜한 밤에도 주변을 밝혀주는 백열등에 대해 고종에게 설명하여 설치를 건의했다. 이후 에디슨 전기회사에 전기 공사를 의뢰했고, 건청궁 앞 연못(향원지)의 물을 이용한 증기기관으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들어냈다. 발전된 전기를 이용해 백열등을 밝히게 되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백열등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물을 이용하여 불을 밝힌다고 해서 ‘물불’ 그리고 발전기가 동작할 때 발생하는 요란한 굉음 때문에 ‘괴불’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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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 온 천재, 니콜라 테슬라: 전기의 발명을 얘기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토머스 에디슨이다. 이렇게 뛰어난 발명가로 인정받았던 에디슨에게도 영원한 라이벌이 존재한다. 크로아티아 출신 공학자 니콜라 테슬라이다. 그는 에디슨에 비해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공학자로 무선통신, 리모컨, 형광등, 전자레인지 등 800여 개의 특허권을 보유했다(무선통신 특허의 경우 마르코니에 비해 10년이나 앞서 특허를 출원했다).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니콜라 테슬라는 어려서부터 발명가의 자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테슬라는 1875년에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 있는 종합기술학교에 진학을 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테슬라는 군 당국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생활했는데, 전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을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장학금이 끊겨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테슬라는 종합기술학교에서 훗날 전기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놓을 엄청난 발명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것은 교류로 구동하는 전동기였다.

학교에서는 당시 최신 기술로 취급받던 직류 전동기를 이용한 물리 수업이 한창이었다. 물리 수업에서 실험용으로 사용된 직류 전동기는 회전할 때마다 정류자와 브러시가 반복적으로 스파크를 일으켰고, 이내 멈추고 말았다. 테슬라는 정류자가 없다면 전동기의 효율을 좀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날 이후 교류 전동기에 대한 생각이 테슬라의 뇌 속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교류 전동기 개발에 대한 해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은 채 5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학업을 중도에 하차한 테슬라는 1880년 체코 프라하로 이주하여 전화회사의 수석 전기기사로 일하게 된다. 물론 시간은 흘렀지만 테슬라의 뇌 속에서는 언제나처럼 교류 전동기가 맴돌고 있었다.

1883년 테슬라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정류자 없이 회전하는 최초의 교류 전동기를 발명하게 된다. 이후 1888년에는 전자기 전동기로 특허를 출원하기도 한다. 이듬해 테슬라는 교류 전동기의 아이디어를 간직한 채 또 다시 이직해 프랑스 파리의 콘티넨털 에디슨 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이곳에서 테슬라는 전기 분야에 있어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내었고, 지사장 찰스 배첼러는 테슬라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본다. 배첼러는 테슬라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에디슨과 함께 일할 것을 권하며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후 테슬라는 배첼러의 추천서와 단돈 4센트를 가지고 미국행 여객선에 몸을 싣게 된다. 추천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 주변에는 위대한 두 사람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물론 당신(에디슨)이고, 나머지 한 사람이 바로 이 청년이다.”

영원한 라이벌 : 에디슨 VS 테슬라: 배첼러의 추천서 덕분이었을까? 테슬라는 큰 어려운 없이 에디슨과 함께 일을 시작하게 된다. 깐깐한 에디슨조차도 테슬라의 능력과 집중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에디슨과 테슬라에게는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보기가 정말 어려웠다. 에디슨의 경우 99% 노력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을 가졌지만, 테슬라의 경우 99% 영감이 그의 사고방식을 지배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는 급기야 직류와 교류에 대한 차이로까지 번져 두 사람은 격돌하게 된다. 테슬라는 자신이 개발한 교류 전동기를 에디슨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교류를 극도로 혐오했던 에디슨은 어설픈 이론과 아직 검증되지 않는 시스템이라고 폄하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테슬라는 에디슨과 여러 가지 견해 차이로 1885년 봄, 급기야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후 테스라는 1년 동안 별다른 연구 활동을 못한 채 생계를 위한 막노동 현장을 전전하게 된다. 훗날 테슬라는 그때가 생애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다행히 어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1887년 새로운 협력자의 도움으로 자본금 50만 달러가 확보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테슬라는 자신의 전기회사를 설립하고 그 동안의 어려움을 한방에 날려버린다. 테슬라는 준비된 천재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교류 시스템에 대한 이미지들이 둥둥 떠다니곤 했다. 테슬라의 끝없는 아이디어는 곧 실용 가능한 특허로 확장된다. 그가 출원한 특허는 단상, 삼상 교류시스템을 기본으로 하고 각 시스템에 필요한 발전기, 전동기, 변압기, 자동 조절 장치 등이었다. 무명에 가까웠고, 게다가 이민자였던 테슬라의 명성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명성을 말해주듯 1888년에는 미국 전기공학자 협회의 초청으로 ‘새로운 교류 모터와 변환 시스템’에 관한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전기공학에 대한 테슬라의 전문성과 명성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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