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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로 읽는 교양 세계사

오형규 지음 | 글담출판



경제로 읽는 교양 세계사



오형규 지음

글담출판 / 2016년 12월 / 375쪽 / 16,000원





1부 원시ㆍ고대 경제, 인류의 생각이 깨어나다



농엽혁명과 교환 ? 주석 안 나는 히타이트는 어떻게 청동기 제국이 될 수 있었을까?



원시시대 첨단산업으로 발돋움한 농업: 약 1만 년 전,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졌고 대기가 건조해지면서 인류가 살아가는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수렵과 채집만으로 살기 어려워진 인류는 야생식물을 직접 심고 수확하면서 드디어 농업에 눈뜨기 시작했다. 인구도 증가했고,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더 많은 농지가 필요해 화전 농업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뗀석기(구석기시대), 간석기(신석기시대) 같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농업은 더욱 발전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초기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원시 농업혁명이다. 기원전 3000년경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는 관개 농업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소, 말, 낙타, 양, 염소 등 야생동물이 가축화되면서, 가축은 인간에게 농업의 동력이자 이동수단이며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아울러 쟁기와 곡물을 저장하는 토기도 발명되었는데, 쟁기의 등장은 오늘날 컴퓨터의 발명에 버금가는 농업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부의 축적과 국가의 탄생: 농업혁명을 통해 인류는 먹고 남을 만큼의 식량을 확보하게 되었고, 먹을 것 이상으로 생산된 식량은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생산량 차이 때문에 계급 분화도 일어났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통제할 국가와 법률이 필요했는데, 기원전 35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에 형성된 수메르의 우르, 우루크, 라가시 등이 그런 도시 국가였고, 도시 국가들의 확장판이 고대국가였다. 고대국가는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군대와 세금 징수, 행정을 맡는 관료를 거느리고 새로운 농지 확장과 치수, 관개사업을 벌이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

필요가 교역을 낳다, 번성하는 중계무역: 물물교환으로 출발한 부족 간 교역이 도시 국가 형성 이후에는 국가 간 무역으로 급속히 확장되었다. 아시리아 상인들은 곡식과 직물을 이란 고원에서 나는 주석과 바꾸고, 이 주석을 다시 아나톨리아고원(터키)의 히타이트로 가져가 금, 은, 구리와 교환하는 중계무역을 했다. 청동기 제국인 히타이트에서는 정작 청동기의 필수 재료인 주석이 나지 않아 아시리아를 통해 조달했던 것이다. 필요가 교역을 낳은 셈이다.



2부 중세 경제, 종교 억압 속에 싹튼 상업



중세 봉건시대와 장원경제 ? 이자를 금지하면 어떻게 돈을 빌려 줄까?



농노의 아들은 농노, 귀족의 아들은 귀족: 서로마라는 단일 제국이 여러 왕국으로 분리되면서 유럽은 전쟁과 분열, 외침으로 약 600년간 혼란을 겪게 되었다. 크고 작은 왕국들이 세워졌다 망하기를 거듭한 끝에 496년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봉건제와 장원제라는 독특한 체제를 가졌다. 이는 북쪽으로 바이킹의 일족인 노르만족, 남쪽으로 이슬람 세력, 동쪽으로 마자르족의 위협을 받는 데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이었는데, 왕은 기사들에게 영지를 주고 기사(영주)들은 왕에게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는 식의 주종관계를 맺었다. 각 영지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장원으로 구성되었고, 장원마다 농사를 짓는 농민이 딸려 있었다. 농민은 일부 자유민도 있었지만 대부분 거주 이전과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는 농노였다. 영주는 농노를 보호하는 대신 그들에게 세금을 걷었다. 참고로 중세의 신분계급은 왕과 주변의 가신, 군사적 역할을 맡은 기사, 생산을 담당하는 농노로 구성되었는데, 신분은 매우 경직적이어서 한번 태어나면 직업이 평생 정해졌다. 신분 이동, 거주지 이전이 막힌 데다 의식주마저 장원 단위로 해결했고, 교역도 미미했다. 장원에서 만들 수 있는 재화가 형편없을 수밖에 없어 농민은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상권 부활시킨 이탈리아 롬바르드동맹과 독일 한자동맹: 10세기 들어 폐쇄적이고 경직된 중세 봉건시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상업이 부활하기 시작해 상업 활동에 유리한 해안이나 강변에 도시가 형성되고, 로마 시대에 건설된 도시가 되살아났다. 도시는 외적 방어를 위해 견고한 성으로 둘러싸였는데, 성안의 상인, 수공업자들은 신흥 중산층을 형성했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burger)’이란 뜻의 부르주아가 유산자를 가리키는 말이 된 이유다. 십자군 원정도 도시들이 번성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중세는 여전히 억압적인 체제여서 왕이나 영주들은 상인들의 왕래를 제한했다. 이에 상인들은 두 개의 동맹을 맺어 대항했다. 지중해 상권을 부활시킨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은 롬바르드동맹을 결성하여 자유로운 왕래와 자치권을 얻기 위해 왕 또는 영주들과 협상하고 때로는 대항했다.

또 다른 움직임은 12~13세기 라인 강과 발트 해 연안 도시들이 결성한 상인조합 ‘한자(Hansa)동맹’이다. 한자동맹은 공동 이익을 위해 해군을 보유하고 자체 법률과 법정도 운영했으며, 상권 확장을 위해 전쟁도 벌였다. 1361년에는 한자동맹 연합군이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이겨 발트 해 상권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신항로 개척으로 무역 중심지가 이동하고, 이들의 독점을 깨려는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상인 세력과 스웨덴 제국의 압박에 밀려 급속히 쇠퇴했다.



3부 근데 경제, 패권 다툼에서 살아남기



대항해 시대와 해양 패권 ? 작은 후추 알갱이가 어떻게 세계사를 바꿀 수 있었을까?



무엇이 중세를 붕괴시켰을까: 중세를 붕괴시킨 근본 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구의 극단적인 변화다. 14세기 페스트로 유럽 인구가 갑자기 3분의 1이 줄어 농노에 의존했던 봉건 장원 경제는 심각한 인력 부족에 직면했다. 둘째, 상업의 활성화로 부유해진 도시와 신흥계급이 생겨난 점이다. 동방무역으로 재미를 본 유럽의 도시마다 상인, 수공업자, 기술자 등 신흥 중산층, 즉 부르주아(성안 사람들이란 뜻)가 두텁게 형성되었다. 이들은 분업과 특화, 지역 간 거래로 더 많은 부를 쌓았고, 그럴수록 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 셋째, 장원 밖에 드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다. 이슬람이 전한 나침반, 화약, 천문학, 항해술 등의 과학기술이 먼 바다로 항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는 15~17세기 대항해 시대로 이어졌다.

주식회사의 등장과 투기 거품: 먼 바다로 나가는 해상무역은 매우 위험하고 모험적인 사업이었다. 이런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 주식회사다. 각국이 설립한 동인도회사들은 이런 주식회사 형태로 무역의 독점권을 부여받아 해상무역에 뛰어들었다. 또한 해상무역을 하려면 배와 상품 구매를 위한 막대한 초기 투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채권도 발행했다. 그리고 이런 주식회사의 주식과 채권을 거래하는 증권거래소도 설립되었다. 한편 금융업에도 주식회사와 같은 형태의 위험분산 방법이 고안되었다. 해상무역의 손실 위험을 다수에 분산시키는 보험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1720년경 영국과 프랑스에서 동시에 쌍둥이 같은 초대형 투기사건이 터졌다. 영국 남해회사는 남미의 에스파냐 식민지와의 무역거래를 위해 설립된 주식회사였지만 실상은 전쟁 비용으로 누적된 영국 정부의 부채를 해소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영국 왕실과 의회가 남해회사에 각종 특혜를 주어 승승장구하던 남해회사의 주가가 갑자기 폭락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큰 피해를 입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미시시피상사라는 주식회사의 주가가 폭등했다가 10분의 1로 폭락하는 ‘미시시피 버블’ 사건이 터졌다. 미시시피상사가 해외 식민지 개발로 돈방석에 앉을 것이라는 환상에 수많은 사람이 투기에 가담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파산 직전이던 프랑스 정부는 재정 문제를 해결했지만 무수한 피해자를 낳았다. 두 사건으로 인해 초기 자본주의의 핵심인 주식회사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주식회사 제도는 철도 건설로 대규모 자본과 위험 분산의 필요성이 고조된 1830년대 이후에야 자리를 잡았다.

절대왕정과 중상주의 ? 금은이 많아야 부강한 나라일까?



‘전쟁의 시대’, 중상주의와 경제 패권: 해외무역으로 국부를 쌓으려면 해양 패권을 차지하고 더 넓은 식민지와 무역거래선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인데, 이를 합리화하는 경제사상이 바로 중상주의다. 중상주의는 한마디로 화폐(금은)가 국부이고, 금은이 많을수록 부강한 나라라는 사고방식이다. 총량이 한정된 금은을 더 많이 차지하지 못하면 뺏기는 제로섬 게임으로 여긴 것이다. 이럴 경우 최대한 많이 수출하고 적게 수입해 무역수지 흑자를 극대화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된다. 그래서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물리는 것이 기본이다. 그 결과 제각기 수출시장을 넓히고 값싼 원료를 확보하려다 충돌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17~18세기는 ‘전쟁의 시대’라고 할 만큼 유럽 각국이 수시로 패를 갈라 싸웠다.

산업혁명과 자유무역 ? 진정한 국부란 무엇인가?



보다 빠르고 가깝게, 기술ㆍ속도ㆍ에너지 혁명: 산업혁명은 1760~1830년 사이 영국에서 일어난 공업화 과정을 일컫는데, 상징은 방적기와 증기기관이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출발해 벨기에,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 등으로 확산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아시아, 중남미, 중동 등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인류는 기나긴 결핍의 시대에서 벗어나 풍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국부는 금 보유량이 아닌 국민 생활 수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776년은 세계사의 중대한 분기점이 된 해다. 정치적으로는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미국)가 탄생했고, 경제적으로는 애덤 스미스(1723~1790)의 『국부론』이 출간되어 경제학이 태동한 해였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절대 왕정 시대에 국왕이 소유한 금은보화를 국부의 척도로 여긴 중상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국가의 부를 사회 전체가 소비하는 상품, 즉 국민의 생활수준으로 봤다. 따라서 효율적인 분업과 자유무역을 통해 생활수준을 높이는 것이 국부를 증진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곡물조례와 비교우위 ? 산업혁명을 가로막으려 했던 이들은 누굴까?



지주와 자본가의 한판 승부: 정치는 대체로 경제보다 뒤늦게 변화한다.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정치 권력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00년을 전후한 영국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영국 의회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 계급(귀족)이 장악한 반면, 새롭게 부를 축적한 신흥 자본가 계급(부르주아)은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제3계급인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먹고 사는 데 급급해 아직 계급화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때 최대 이슈가 된 것이 바로 곡물 수입 금지를 겨냥한 ‘곡물조례’였다. 곡물조례는 본래 영국이 곡물의 수입물량 조절을 위해 제정한 법령을 가리키는데, 1660년 이래 영국에서는 곡물의 국내 가격이 낮을 때는 수입 관세를 높게, 가격이 높을 때는 관세를 낮게 매겨 소비자 가격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1815년 밀 가격이 급락하자 토지 귀족이 장악한 의회는 밀 가격을 높게 유지하려고 곡물조례를 개정해, 밀 수입을 금지하는 가격 기준을 종전 쿼터당 54실링 이하에서 80실링 이하로 높였는데, 이는 사실상 수입 금지 조치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공장을 운영하는 자본가들은 밀 가격이 뛰면 덩달아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줘야 했기에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곡물조례 논쟁은 밀 가격이 높아야 이익인 지주 계급과 가격이 낮아야 이익인 신흥 자본가 계급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노동자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지주의 이익은 사회 이익과 항상 대립한다”: 이때 곡물조례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폐지를 강력히 주장한 경제학자가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였다. 토지 귀족들은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가 높아 곡물을 수입해도 가격이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리카도는 곡물을 수입해 가격을 낮추면 지대도 하락시킬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 자유무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리카도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자유무역의 근거로 제시한 비교우위론이었는데, 이는 국가 간 무역은 한쪽이 이익이면 다른 쪽이 손해를 보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비교우위에 의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플러스섬 게임이라는 이론이다. 리카도는 곡물조례의 폐지를 보지 못한 채 1823년 눈을 감았고, 자본가와 노동자를 괴롭힌 곡물조례는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100만 명이 넘게 굶어 죽은 1846년에야 폐지되었다. 그리고 영국 상품을 실어 나를 때는 자국과 식민지의 선박만 이용케 하는 항해 조례도 1849년 사라졌는데, 곡물조례와 항해조례의 폐지는 자유무역의 완성을 알리는 이정표였다.



4부 근대 경제의 질주, 번영과 몰락의 시절



제국주의와 식민지 ? 서양은 어떻게 200년 만에 동양을 앞질렀을까?



식민지에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 미국 이주의 역사는 400년이 넘지만 1776년 독립 이전에는 영국 식민지로서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만 여겨졌다. 그런 점에서 1776년은 세계사의 이정표가 되는 해였다. 정치적으로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가 등장했고 3년 뒤에는 프랑스혁명이 발발했다. 경제적으로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되어 경제학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미국은 19세기 말 영국을 제치고 세계 1위 공업국으로 부상했다.

과잉생산이 초래한 20년 불황 / 세계의 80%를 식민지로 만든 제국주의: 유럽에서는 19세기 들어 자유무역과 민족주의가 확산됐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는 보호무역으로 변모해갔다. 각국의 산업혁명이 완성되면서 모두가 서로를 산업의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특히 후발 주자인 독일은 관세동맹 출범(1834) 이후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 19세기 말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공업국이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도 19세기 말에는 공업화 대열에 합류했다. 너도나도 공업국이 되다 보니 상품은 넘쳐나는데 팔 곳이 부족한 공급 과잉 사태가 벌어졌고, 이로 인해 1873년부터 1896년까지 20여 년간 대불황이 닥쳤다. 각국이 경쟁적으로 수입 관세를 올리면서 국가 간 무역은 더욱 위축되었다.

한편으로는 불황 극복을 위한 기술혁신과 생산비 절감 노력도 가속화되었다. 철강, 전기, 화학 등 중공업 분야의 신기술이 개발되어 2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산업이 도약했는데, 독일이 그 선봉에 섰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독과점 대기업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세계 경제가 극심한 공급과잉에 직면하자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고,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질주하는 세계와 대량소비 ?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보호무역으로 돌아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량생산과 2차 산업혁명: 19세기 후반 경제의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아갔다. 1869년에 대륙 횡단철도가 개통된 것이 미국 경제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대륙 횡단 철도를 통해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동부의 공업, 서부의 자원, 남부의 농업 생산품이 쉴 새 없이 대륙을 누볐다. 미국의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인물은 철도왕 코널리우스 밴더빌트,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 석유왕 존 록펠러, 금융왕 존 피어폰트 모건 등이다. 듀폰(화학), 이스트먼 코닥(카메라, 필름)도 이 시기에 왕성하게 활동했다. 바야흐로 중화학 분야의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대기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세기 미국은 시장 확대, 기술혁신, 성공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덕에 산업혁명이 일어날 절호의 조건을 갖췄다. 그리고 대량생산이 대량소비와 결합해 더욱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노동자 불만 잠재운 비스마르크의 복지 제도: 2차 산업혁명을 계기로 노동자의 권리도 크게 신장했다. 유럽 각국에서 노동자의 선거권 부여, 노동조합의 합법화가 이루어졌고 의무교육도 단계적으로 확대되었다. 19세기 중반 질풍노도 같은 혁명과 계급투쟁을 겪고 난 뒤의 일종의 무마책이자 당근책이었다. 특히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복지정책을 통해 노동자를 사회주의자와 격리하는 색다른 방안을 강구했는데, 1883년 건강보험법을 시작으로 1884년 재해보상법, 1889년 폐질 및 노년보험법 등 일련의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세계 최초의 복지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나아가 비스마르크는 기존 자유무역질서에서 이탈해 보호관세를 높이는 등 보호무역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20세기 세계대전의 씨앗이 뿌려졌다. 영국, 프랑스 등 경쟁국들은 자국과 식민지를 블록화해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자국 산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지만 물건을 팔 충분한 식민지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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