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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세계사

우야마 다쿠에이 지음 | 생각의길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세계사



우야마 다쿠에이 지음

생각의 길 / 2016년 10월 / 304쪽 / 15,000원





PART 1. 세계사의 기본 규칙



역사의 구조



역사의 필수 복선, 계급투쟁: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1848년)에서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계급투쟁이야말로 사회이며 역사다”라고 말합니다. 사회의 본질을 이만큼 명확히 꿰뚫은 테제(명제)는 없을 겁니다. 인간은 세 명 이상 모이면 반드시 파벌(동맹자)을 만듭니다. 그 경우, 힘의 관계를 가늠하면서 약한 두 명이 동맹해서 강한 한 명에게 대항하거나, 강한 두 명이 약한 한 명을 공동으로 제압하는 등, 힘의 관계에 따른 합종연횡이 전개됩니다.

힘에는 무력, 지력, 매력을 포함해 국력, 개인력, 씨족력 등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그러한 힘 속에서 인간이 파벌이나 세력을 형성할 때 가장 중요하면서 보편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경제력입니다. 경제적인 빈부 차이가 계급을 형성하면서 그 계급은 흔들림이 없는 파벌이자 세력의 결속을 나타내는 지표가 됩니다. 풍요롭게 사는 사람과 가난하게 사는 사람. 이 구분이 다른 구분보다 우선시되어 인간이 이루는 사회의 숙명적인 테제로서 존재합니다. 경제사회, 정치사회에서 현실적인 이해득실 관계가 복잡해지면 같은 편이나 동맹자를 원할 때, 그 기준은 예외 없이 경제적인 빈부입니다. 풍요로운 자, 가난한 자가 섞여 있는 사회 파벌이나 사회 세력 등은 쉽게 기능하지 않습니다. 양쪽이 확실히 구별됨으로써 본질적인 사회 파벌, 사회 세력이 형성되고, 그것이 계급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투쟁’의 테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될 수밖에 없지요.

인간 욕망의 누적: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부를 바랍니다. 부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어떤 시대든 부는 한계가 있기에 필연적으로 부를 둘러싼 다툼과 경쟁이 일어납니다. 특히 정치ㆍ경제 분야에서는 부야말로 모든 것이며, 제반 문제나 현상은 원인도 해결책도 결국 부에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사회문제를 파고들 때, 돈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 실체가 보이게 되고, 그 실체를 둘러싼 인간의 행동양식이야말로 역사라는 현상 그 자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 마르크스의 이 말에서 하부구조는 경제적인 것이고, 상부구조는 정치적ㆍ문화적인 것을 지칭합니다. 경제적인 요인이 근본 요인이고, 그에 따라 상부구조인 정치가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가령 나폴레옹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의 존재와 그의 언행은 정치적인 현상이지만 그 이면에는 그러한 인물을 원한 경제사회의 토대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대혼란 시기에 사람들은 독재적인 구세주를 원했고, 나폴레옹에게 새롭게 형성된 부의 분배 규칙을 조절하고 조정할 역할을 기대했지요. 나폴레옹이라는 정치적 상부구조는 경제사회라는 기초적 하부구조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 현상의 배후에는 이처럼 인간의 욕망에 따른 거대한 구조가 필연적으로 존재하기에, 그 구조를 알아야 비로소 역사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부를 둘러싼 다툼: 부를 둘러싼 다툼이 발생하면 혼자서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파벌과 세력을 만듭니다. 역사에서 파벌, 세력은 행동양식(패턴)이 거의 동일할뿐더러 되풀이됩니다. 이미 부를 획득한 풍요로운 세력은 그 부를 지키려고,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보수파가 됩니다. 반면 가난한 세력은 부의 획득에 실패했기에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부정하고, 새롭게 부를 분배받을 기회를 노리는 혁신파가 됩니다. 보수파는 우파, 혁신파는 좌파라고 말하지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대에 의회가 열릴 때, 의장석에서 바라보면 오른편에 보수파 부유층이 앉았고, 왼쪽에는 혁신파 빈곤층이 앉았기에 이런 명칭이 붙었습니다. 또한 근ㆍ현대사에서 우파는 자본주의ㆍ자유주의, 좌파는 공산주의ㆍ사회주의라는 속성도 띱니다. 우파의 엘리트 부유층은 자유경쟁을 원하면서 더욱 사회적 강자가 되려 합니다. 즉, 자본주의를 지향합니다. 이에 비해 좌파인 빈곤층 약자가 사회적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높은 곳에 군림하는 강자를 끌어내려 평등한 세상을 이루려는 것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겠지요. 따라서 좌파는 공산주의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우파와 좌파의 대립은 실로 복잡한 정치적인 측면이 얽혀 있기에 혼재된 양상을 띠기 때문에 우파와 좌파의 대립은 단순히 그 양상을 분리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 정의 자체가 오늘날 다양화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이해하려면 역시 ‘우파 = 보수ㆍ자본주의’, ‘좌파 = 혁신ㆍ공산주의’라는 단순화된 구조가 이해하기 편할뿐더러 적용과 응용도 가능합니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고도의 학술이론을 끌어들여 사회의 부를 분배하는 방법을 저마다 합리적이라며 주장해왔습니다. 고대, 중세 시대에는 칼을 휘두르며 부의 분배를 놓고 다투었던 인류가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논리로 싸우게 되었습니다(마지막에는 결국 군사적 충돌이 되지요).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역사는 ‘계급의 대립’이라는 축으로 움직여왔습니다.



PART 2. 고대



로마1



지중해의 비즈니스: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의 칼날을 오직 동방인 오리엔트로만 향했기에, 서쪽에 있었던 이탈리아 반도는 정복당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지중해 동쪽 연안 지역까지 확장되면서 지중해 교역이 활발해지니, 그 서쪽에 위치한 로마와 카르타고(현재의 튀니지)도 덕분에 호경기를 맞아 점차 발전했습니다. 지중해 서쪽의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에서 로마와 카르타고가 엇비슷하게 발전하면서 이해관계가 충돌했습니다. 기원전 3세기에 두 나라 간에 마침내 전쟁이 벌어집니다. 포에니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무려 100년간 지속되었고 끝내 로마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포에니 전쟁 후, 로마는 지중해 교역을 사실상 독점합니다. 로마는 영리하게 지중해 교역을 운영했는데, 로마에 납세만 하면 인종을 불문하고 자유롭게 교역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상인들의 신분과 재산도 각종 법률에 의해 보호받았습니다. 그러자 능력 있는 사람들이 동쪽을 떠나 서쪽의 로마로 향하면서, 지중해 교역이라는 무대에 각종 벤처 기업들이 생겨났습니다. 또한 로마는 도로ㆍ항만 개발을 최우선 프로젝트로 삼고, 유통 네트워크의 구축도 서둘렀습니다. 넉넉하게 걷히는 세금 덕분에 투자와 융자가 용이해지고 이러한 프로젝트의 조기 완성을 가능하게 했지요. 더욱 강대해진 로마는 지중해 동쪽의 그리스ㆍ헬레니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게 됩니다.

격차 사회: 순조롭게 경제발전을 이룩하던 로마는 중대한 사회적 문제에 직면합니다. 경쟁사회에서 경제성장이 눈부시면 늘 빈부의 격차가 커집니다. 성공한 사람은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반면 길거리에는 홈리스가 넘치면서 치안이 악화되고 폭동과 내란이 빈발했습니다. 이러한 기원전 2세기의 상황을 ‘내란의 1세기’라고 부릅니다. 빈곤층을 어떻게 구제할지가 정치의 당면 과제가 되면서, 그라쿠스 형제 등이 개혁을 추진합니다. 그라쿠스 형제는 부유층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빈곤층에게 나눠주고 부유층에 더 많은 세금을 물려 빈곤층의 구제 자금으로 할당하는 좌파적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당시의 부유층은 의회인 원로원 의원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라쿠스의 방침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결국 그라쿠스는 음모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부자에게 돈을 몰수해서 빈민에게 나눠주는 정치 수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있는 일이지만 부자의 반감을 사게 되면서 대부분 실패하게 됩니다.

그라쿠스가 추진한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빈곤층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그러자 부자들은 사재를 털어 길거리에 넘쳐나는 홈리스를 자신의 군대에 고용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결행, 로마를 벗어난 타 지역의 토지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홈리스 고용에 들어가는 투자비용은 외지 정복으로 인해 생기는 막대한 이익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액수였으니까요. 이처럼 부자들이 개인적으로 군대를 거느리면서 빈곤층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었고, 로마의 실업률은 극적으로 떨어져 사회가 안정되었습니다. 원로원이 중심이 된 부유층도 잃을 게 없었기에 새로운 흐름에 반대하지 않았지요. 부유층이 개인 군대를 이용해 외지 정복이라는 투자 비즈니스에 열광하면서 그들은 군대 확장에 돈을 더 많이 쓰게 됩니다. 다만 이 비즈니스는 이익(리턴)이 큰 만큼 위험(리스크)도 컸습니다. 외지 원정에 나선 군대가 게르만인 같은 현지 부족과 싸워 패하면 투자 금액을 회수하기는커녕 목숨까지 잃어야 했습니다. 또한 정복에 성공했어도 군대를 이끌던 장수가 배반하거나, 전리품을 가로채거나, 반란을 일으키거나, 따로 독립하는 등 뜻밖의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외지 정복에 성공해서 커다란 부와 명성을 거머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출현: 그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카이사르는 개인 군대의 장군 신분이었는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외지 정복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부유층에게 어필함으로써 투자를 권유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스폰서를 확보해 거기서 나온 투자 금액으로 군대를 막강하게 키운 후, 외지 정복을 차례로 성공시켰습니다. 부자들은 경쟁하듯 카이사르의 스폰서를 자청했고, 로마의 돈이 모여든 덕분에 카이사르의 군대는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군인들의 생활수준도 크게 개선되었지요. 카이사르는 민중의 지도자로서 부상했고,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스폰서였던 부유층, 원로원 세력을 제압하고 독재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늘어난 빈곤층에 의해 지지받고, 그 빈곤층에 의해 태어난 리더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카이사르의 출현은 심층에 깔려 있는 빈곤층의 불만이 쌓인 결과였고, 그야말로 로마를 세계제국으로 이끈 원동력이었습니다.

민중과 엘리트 사이: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기원전 46년에 딕타토르(독재관)가 된 카이사르는 자신이 키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원로원 세력을 제압하고, 그들의 특권과 기득권을 차례로 빼앗아 자신 휘하의 지휘관들에게 배분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이전에 자신의 고마운 스폰서였던 부유층을 배반하고 민중의 편에 섰습니다. 이에 격분한 브루투스를 비롯한 원로원 세력이 카이사르를 암살합니다. 그러자 지도자를 잃은 민중은 분노에 들끓었고, 그 상황에서 부상한 인물이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군대를 이끌고 브루투스를 비롯한 카이사르 반대파를 숙청하고 원로원 세력을 제압합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의 전략은 교묘해서 결코 카이사르처럼 원로원 세력을 대놓고 억누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대결하는 척하면서 민중의 분노, 불만을 잠재우는 동시에 뒤에서는 원로원의 보수 세력과 여러모로 협력했습니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의 양보심에 경의를 표해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선사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치란 타협의 산물’이라는 비스마르크의 말이 딱 들어맞는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파괴자라면, 옥타비아누스는 사회에 포진한 각 세력의 균형을 잡으면서 그 미묘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마치 유리 세공처럼 정밀하게 로마의 정치 체제를 만들어낸 창작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민중의 좌파 세력과 엘리트의 우파 세력 중 어느 한쪽이 너무 강해지면 정치적 균형이 깨지고 옥타비아누스 자신도 양부인 카이사르처럼 암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남들이 결코 ‘황제’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신에 프린켑스(princeps, 원수)라고 부르도록 했지요.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실질적으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PART 3. 중세



유럽3



영국의 이노베이션: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의 원정으로 유럽세계는 동방 오리엔트에 접촉할 수 있었고 이는 중세의 닫혔던 세계를 열어젖히는 계기가 됩니다. 십자군 원정 이후 레반트 무역(동방무역)이라 불리는 이집트ㆍ중동 지역과의 교역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면서 12세기의 유럽ㆍ지중해 세계에 유례없는 호경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호황에 힘입어 유럽의 남북을 잇는 간선 아웃렛(유통 판로)이 구축됩니다. 뤼베크를 맹주로 삼은 한자동맹권, 북해와 발트해를 무대로 번영한 플랑드르(벨기에) 교역권의 북쪽 마켓(지역)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중심이 된 롬바르디아 동맹권을 중심으로 한 유럽 남쪽의 마켓이 연결된 것입니다. 이처럼 남북으로 연결된 간선 루트는 12세기의 호황을 이룬 토대가 되었고 이 루트를 따라 유럽의 도시경제가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은 이 간선 루트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12세기의 호경기 덕을 거의 보지 못하고 경제가 정체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은 발전이 늦어졌고 거두어들이는 이익이 적었기 때문에 국왕의 존재는 허울뿐이었고, 도로나 항만 건설 등 인프라를 정비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는 재정 이익을 보충할 타개책으로 대외 확대 정책, 즉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약탈하는 고전적인 패턴을 취했으며 그 결과는 백년 전쟁(1339~1453년)으로 나타났습니다.

백년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왕이 프랑스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기에 프랑스 왕위도 자신들이 계승해야 한다며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사실 양국은 전쟁이 필요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도 남북으로 연결된 간선 루트의 호경기에 편승하고 싶었기에 인접한 플랑드르 교역권을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플랑드르는 영국과 프랑스의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양국 간 쟁탈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플랑드르 교역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토지가 척박해서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양을 키우는 목축업이 발달했습니다. 영국산 양모는 플랑드르에 수출되었고 그곳에서 고도의 기술로 가공되었습니다. 영국의 입장에서 플랑드르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양모 제품의 생산 공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 동시에 이익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경위로 인해 백년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 중 플랑드르에 거주하던 모직업자 대부분이 전쟁터가 된 자국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했고 결국 플랑드르의 뛰어난 기술과 자본이 영국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전쟁 말기에는 영국 내에 양모 제품의 원료제품화까지 원스톱 생산 공정이 구축되었고 1453년 전쟁이 끝나자 모직물 제품의 수출량이 급증하면서 영국은 선진적인 무역국으로 변모했습니다. 영국은 양모 제품을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생산해 대륙 각국에 대량으로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익을 올린 경영자ㆍ상공업자들을 신흥시민 즉, 부르주아라고 부릅니다. 백년 전쟁 후 영국에서 근대의 부르주아 시민 계급의 모태가 탄생되었고, 이후 부르주아의 영리추구가 근대자본주의를 형성합니다.

값싸고 품질이 좋은 영국의 양모 제품이 유럽 각국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자,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은 한층 더 양모 생산에 박차를 가합니다. 양모를 효율적으로 매니지먼트하려고 농지를 목양지로 통합해, 대규모로 조직화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식량 생산량이 적은 영국에서 더욱 농지가 부족해져, 굶어 죽은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상황을 당시의 철학자인 토마스 모어는 ‘양이 인간을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양모 제품이 인기를 끌자, 영국 경제는 크게 성장했고 자본주의경제의 기초가 구축되었습니다. 제품의 수송을 원활이 하기 위해 도로ㆍ항만 기반 시설의 정비, 상거래의 계약, 규칙을 정하는 법체계의 정비, 제품을 만드는 공장 라인의 건설이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면서 국가경영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봉건제후가 각지에서 난립하는 중세적 사회구조가 쇄신되고 거대한 관료조직을 통솔하는 국왕의 권위가 강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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