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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모종혁 지음 | 서교출판사



술로 만나는 중국ㆍ중국인



모종혁 지음

서교출판사 / 2016년 9월 / 560쪽 / 23,000원





술로 만나는 천부지국



쓰촨 두장옌이 탄생시킨 청두의 자존심 ‘수이징팡’



19세기 청나라 동치제 때 일이다. 쓰촨성 청두의 상인 온씨에게는 온교교라는 자색이 고운 딸이 있었다. 온교교는 집안이 좋고 아름다웠지만, 얼굴이 얽었다. 부모는 하는 수 없이 딸을 대갓집에 시집보내길 포기하고 착하고 성실한 청년을 수소문했다. 마침 목재상에 일하던 진지호를 찾아 결혼시켰다. 부지런했던 신랑은 결혼 후 밥 먹을 때를 빼곤 문밖에 나오질 않았다. 부부간 금슬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시댁 식구들이 험하게 흉보자, 신혼부부는 살림을 따로 차렸다. 진씨는 기름집에 취직하고 온씨는 집 앞에서 차를 끓여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생활이 안정되던 어느 날 진씨가 기름을 운반하다 사고를 당해 죽었다. 온씨는 비통한 심정을 추스르고 과부인 시누이 진교교와 ‘시누이 올케 두부팽조’라는 식당을 차렸다. 온교교와 시누이는 시장 주변의 두부집, 푸줏간, 기름집 등에서 사들인 두부, 돼지고기, 고추, 콩기름 등을 볶아 음식을 만들어 팔았다. 다행히 장사는 잘됐고 식당은 커져갔다. 이웃 사람들은 온씨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온씨는 거절하고 평생 수절했다. 온씨가 죽고 나서 청두 사람들은 이름 없던 요리에 ‘마파두부’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는 ‘곰보 할머니의 두부요리’라는 뜻인데, 온씨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 널려 있는 중국식당 메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마파두부의 탄생 설화다. 마파두부는 중국을 대표하는 음식이자 청두에서 시작된 쓰촨요리다. 음식재료부터 쓰촨요리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먼저 두부는 가장 서민적인 식재료로,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다. 고추와 화자오는 맵고 얼얼한 맛을 낸다. 발효 소스인 더우반장은 짙고 깊은 맛을 낸다. 이처럼 마파두부는 쓰촨요리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파두부의 고향 청두는 3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다. 춘추전국시대 청두 일대에서는 촉나라가 흥기해서 황하문명과 전혀 다른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316년 진시황이 보낸 대군은 촉을 멸망시켰는데, 뜻밖의 선물을 청두에 남겼다. 태수 이빙이 건설한 두장옌이 그것이다. 두장옌은 청두 서쪽에 흐르던 민강을 막아 여러 갈래로 흐르게 한 수리관개시설이다. 중국 고대 수리사업의 효시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두장옌에서 갈라져 나온 수십 줄기의 물은 쓰촨과 청두를 비옥하게 했다. 기름진 땅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물산이 나오자, 중국인들은 쓰촨을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렀다. 본래 이 말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시안 일대의 관중평야를 일컬었다. 두장옌은 천부지국 타이틀을 빼앗아 쓰촨에 안겨다 줬다. 우리에게 청두는 친숙한 역사 무대다. 삼고초려 끝에 출사한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삼분책을 내놓는다. 이에 유비는 당시 익주였던 쓰촨에 들어와 촉한을 세웠다. 제갈량은 유비와 유선 두 임금을 모셨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충심과 기개는 지금도 사당 무후사에 남아 있다.

무후사에서 동남쪽으로 두장옌에서 흘러나온 진강을 건너면 우리에게 낯익은 유적지가 나온다. 오늘날 한국 주당들이 가장 좋아하는 중국 술 수이징팡(水井坊)의 유적이다. 1998년 8월 일단의 인부들이 주류기업 취안싱의 낡은 공장 시설을 보수하기 위해 땅을 파던 중 특이한 유물을 발견했다. 즉시 이 사실을 회사에 알렸고 공사는 중단되었다. 이듬해 3월 청두박물원 물물고고연구소 주도로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수개월에 걸친 발굴 작업 끝에 13세기 원대부터 청대까지 술을 양조했던 수이징팡이란 걸 알아냈다. 발굴팀장은 “각기 다른 지층에서 곡식 발효지, 아궁이 터, 술 저장고, 나무기둥과 주춧돌 등이 발견되어 맥이 끊겼던 중국 고대 양조장의 원형이 세상에 드러났다.”고 말했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수이징팡을 ‘1999년 중국 10대 고고학 발굴’ 중 하나로 평가했고, 2001년 6월 전국중점유적지로 지정했다. 현재 이 유적지에서 바이주 수이징팡의 원료가 발효된다. 그 배경에서 취안싱의 상품 개발 및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됐다. 취안싱은 1993년 쓰촨제약이 청두술공장을 흡수 통합해 성립된 국유 기업이다. 청두술공장은 1951년 문을 연 주류업체로, ‘취안싱다취’라는 중저가 술을 생산했다. 취안싱다취는 1786년 청대 건륭제 때부터 빚어진 전통 깊은 술이다. 1824년 취안싱양조장에서 상품 판매를 시작해 20세기 전반까지 청두 술시장을 독점했다. 이를 1949년 사회주의 정권 수립 후 정부는 청두술공장을 국영화했다. 취안싱다취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1963년 중국 전역의 술이 자웅을 겨루던 술품평회 2회 대회에서 8대 명주 중 하나로 선정됐다. 1984년과 1988년에 열린 4, 5회 술품평회에서도 국가명주로 뽑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우량예, 루저우라오자오, 젠난춘 등 쓰촨성 내 강력한 경쟁자들이 개선된 물류환경을 발판으로 취안싱을 위협했다. 홈그라운드에서도 시장점유율이 떨어지자, 청두시 정부는 청두술공장을 취안싱에 통합해 몸집을 키웠다. 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청두인만 마시는 서민 술로 고정된 브랜드 이미지가 문제였다. 취안싱은 1996년 증시 상장을 통해 모은 자금을 기반으로 고급 바이주 개발에 나섰다. 당시 신상품 개발의 총지휘자는 라이덩이 취안싱 부사장이었다. 라이 부사장은 10대부터 품주사로 일하며 40년 이상 술과 함께해 왔다. 품주사는 바이주의 맛과 향을 가려내고 품질을 관리하는 양조 장인이다. 현재 중국에서 수천 명이 활동하고 있다. 라이 부사장은 중국정부가 지정한 국가 1급 품주사다. 그는 내게 “미각과 후각을 관리하기 위해 담배를 피우거나 과음, 과식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라이 부사장은 “1997년부터 4년의 시간과 1억 위안(약 170억 원)을 투입해 고급 술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때마침 수이징팡 유적이 발견되자, 취안싱은 새 술 양조에 필요한 곡식을 수이징팡에서 숙성시키기로 결정했다. 라이 부사장은 “과학적인 조사 결과 유적지는 풍부한 미생물의 보고로 판명됐다.” 면서 “국가문물국의 까다로운 심사와 허가 절차를 거쳐 이용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취안싱의 출시 전략은 치밀했다. 2000년 600위안(약 10만 2,000원)에 수이징팡을 내놓았다. 당시 바이주로는 최고가였다. 취안싱은 고급 브랜드에 걸맞은 품격을 위해 일정한 규모와 수준을 갖춘 도매상과 판매점에만 수이징팡을 공급했다. 고가의 술을 소비할 수 있는 연해 대도시와 청두 시장을 타깃으로 집중 공략했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TV나 길거리 광고보다 고급 신문이나 잡지, 다운타운 디스플레이 등 평면 광고에 주력했다. 특히 수이징팡 유적을 이용한 광고는 중국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수이징팡의 독특한 맛과 향은 중국 주당들을 열광시켰다. 수이징팡의 맛은 부드러우면서 입에 달라붙는 듯 했는데, 이는 다른 바이주에서 맛볼 수 없는 신선함이었다. 수이징팡은 병마개를 따면 코를 자극하는 은은한 향을 풍긴다. 이런 맛과 향으로 갖춘 경쟁력 덕분에 수이징팡은 중국 술시장에서 큰 돌풍을 일으켰다. 출시 후 10여 년이 지난 지금 마오타이와 자웅을 겨루는 고급 바이주로 자리매김했다.

수이징팡의 약진은 생산지인 청두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굳힌 것이 결정적이었다. 2015년 청두 상주 인구는 1,465만 명에 달한다. 이는 중국에서 충칭, 상하이, 베이징 다음으로 많다. 인구만큼 소비시장의 규모가 커서 소비총액은 4946억 위안(약 84조 820억 원)으로, 중국 내 도시 중 6위를 차지했다. 1위인 베이징(1조 338억 위안)의 절반 수준이지만, 연해 대도시인 쑤저우나 난징보다 앞선다. 내륙 최대 소비도시답게 청두에서 고급 상품의 매출은 고공행진 중이다. 청두 사람들은 풍족한 물산을 바탕으로 차 마시기를 좋아하고 한담을 즐기길 좋아한다. 평소 그들의 삶은 여유가 넘친다. 또한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강하고 개방적이다. 이런 생활문화와 사고방식으로 인해 저축보다 소비 성향이 강하다.

2000년 수이징팡을 출시한 취안싱의 총판매액은 12억 8055만 위안(약 2,176억 원), 영업이익은 5억 998만 위안(약866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기업 구조조정 이후 오직 주류 판매에만 의지해 이룬 성과였다. 2009년 취안싱은 회사 이름을 아예 수이징팡으로 고쳤다. 지난 10여 년간 성공가도를 달려왔지만 수이징팡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2012년 수이징팡은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변혁기를 거쳤다. 조니 워커, 베일리스 등을 생산하는 영국 주류업체 디아지오가 수이징팡을 사들였다. 디아지오는 잉성 투자홀딩스가 보유하고 있던 수이징팡 주식을 모두 매입해 수이징팡 전체 지분의 39.71%를 확보하여 대주주가 됐다. 2005년 말부터 지분 투자를 시작해 7년을 공들인 성과다. 중국에서 외국기업이 국유 주류기업을 M&A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주인이 바뀐 뒤 일부 직원들이 사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철밥통’ 국유기업에서 외자기업으로 신분 변화에 따른 불안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은 2013년 현실로 나타났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벌이는 반부패 운동에 따라 공무원들의 고급 술 소비가 대폭 감소했다. 이에 따라 수이징팡의 실적도 2013년부터 급전직하했다. 2014년 총판매액은 3억 6,486만 위안(약 620억 원)에 불과했고, 4억 2,982만 위안(약 730억 원)의 기록적인 손실을 맛보았다. 다른 주류업체의 상황도 비슷하지만, 고급 술 판매에 치중한 수이징팡이 받는 타격이 훨씬 컸다. 이 때문에 2년 동안 총판매액이 급락했고 엄청난 영업손실을 겪었다. 다행히 2015년에는 상황이 호전됐다. 총판매액은 8억 5,500만 위안(약 1,453억 원)을 거둬 전년 대비 134%나 성장했다. 영업이익도 8,800만 위안(액 149억 원)을 냈다. 지난 10여 년 바이주의 황금기를 선두에서 거침없이 달려온 수이징팡. 간신히 가시밭길에서 빠져나와 성공신화를 재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쓰촨 천하제일 대나무숲 촉남죽해의 ‘죽통주’



쓰촨성 동남부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주 우량예의 고향 이빈 시가 있다. 우량예는 고급 바이주뿐만 아니라 수십 종의 술 브랜드를 거느린 종합 주류업체다. 2015년 216.6억 위안(약 3조 6,822억 원)의 판매고를 올려, 중국 주류업체 중 마오타이(326.6억 위안)에 뒤이어 2위를 기록했다. 영업이익도 61.6억 위안(약 1조 472억 원)으로 마오타이(155억 위안) 다음으로 많다. 우량예 역시 지난 2년간 중국 술시장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도하는 반부패 운동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정부가 당ㆍ정ㆍ군과 국영기업의 삼공경비에 강력한 제재를 가했기 때문이다. 삼공경비는 관용차, 접대비, 출장비를 가리킨다. 이런 현실 속에서 2015년 영업이익을 50억 위안 이상 달성한 중국 주류업체는 마오타이와 우량예뿐이다. 마오타이는 지방정부, 군대, 공안, 세관, 기업 등에 연회ㆍ접대용이나 선물용으로 공급되는 특공주다. 이에 반해 우량예는 주로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판매하면서 선전했다.

오늘날 이빈 시에서 우량예가 가지는 위상은 절대적으로 높다. 2015년 시 전체 공업생산액의 1/4을 차지했고 세수 공헌도가 가장 컸다. 농업, 유통업 등 연관업종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고, 2015년 말 호적주민 552만 명 중 10% 가까이 주류업과 관련 산업에 종사한다. 거리, 주거단지, 공단 등 지명 곳곳에 우량예가 들어간다. 도로에서 운행하는 모든 버스와 택시에 우량예 광고판이 달려 있다. 심지어 2012년 2월에 착공해 짓고 있는 신공항의 이름도 우량예공항으로 명명됐다.

이런 지명도와 달리 우량예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이빈에서 술을 양조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남북조시대부터다. 당시 이빈에 살던 이족은 곡물을 혼합해 잡주를 제조했다. 당대에는 관영 양조장에서 4가지 곡식으로 춘주를 빚었다. 명ㆍ청대에는 오곡으로 술을 제조했으나, 원료가 다른 지방 바이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지금처럼 수수ㆍ쌀ㆍ찹쌀ㆍ밀ㆍ옥수수 등 오곡을 쓴 것은 1909년이었고, 1929년에 우량예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에 반해 고대부터 이빈을 대외에 알린 명소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촉남죽해다.

촉남죽해는 이빈에서 동남쪽으로 50km 떨어져 있다. 창닝과 장안 두 현에 걸쳐 면적이 12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 최대 대나무 자생지다. 해발은 600~1,000m이며 겨울에는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여름에는 30도가 넘지 않아 피서지로 알맞다. 촉남죽해 내에는 남죽, 면죽, 수죽, 자죽, 나한죽 등 58종의 대나무가 있다. 곳곳에 200종의 약재가 자라고 10여 종의 야생동물도 서식하고 있다. 촉남죽해는 우리에게 결코 낯선 무대가 아니다. 저우룬파와 장쯔이가 대나무숲에서 결투하고, 숲 사이 호수에서 검무를 펼친 명장면이 지금도 회자되는 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가 바로 촉남죽해다. 실제 트레킹으로 촉남죽해를 걷다 보면 각양각색의 대나무가 호수, 폭포 등과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곳곳에는 대나무와 함께 사는 순박한 주민들이 찾아간 이를 반긴다.

촉남죽해에서는 다양한 대나무 상품과 더불어 술을 제조한다. 바로 12가지 약재로 빚은 누룩을 첨가해 양조한 바이주를 대나무 통에 넣어 파는 죽통주다. 보통 죽통주는 통 안에 바이주를 주입하고 뚜껑을 밀봉 처리해 숙성시킨다. 밀봉된 술통을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실내에 2~3개월 동안 보관하면 대나무 향이 깊게 배어진다. 죽통주는 현재 중국에서 푸젠과 윈난을 주산지로 손꼽지만 촉남죽해 죽통주의 역사와 품질도 두 지방 못지않다. 단지 쓰촨 내 명주가 워낙 많다 보니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죽통주는 오래전에 한국에도 전래됐다. 영조 때 유중림이 쓴 <증보산림경제>에 그 양조법이 기록되어 있다. 일부 상인이 대나무 통을 여러 번 재활용해 곰팡이가 생기는 경우가 간혹 발생하는데, 이런 악덕 상행위만 근절된다면 죽통주는 누구나 즐겨 마실 수 있는 약주다.



술로 만나는 소수민족 대지



중국공산당이 사랑하는 국주 ‘마오타이’



구이저우성 구이양에서 서북쪽으로 216km나 떨어져 있는 한 오지마을. 이 마을은 평균 해발 423m로, 자동차로 험난한 산을 넘고 돌아 4시간여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입간판이 찾는 이를 반긴다. ‘중국 제1의 술 고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체 주민이 4만 9,000명에 불과한 산골마을답지 않게 자부심이 넘치는 문구다. 이곳이 그 유명한 중국 술 마오타이의 고향이다.

본래 구이저우성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하다. 2015년 1인당 GDP는 1만 3,696위안(약 232만 원)으로 중국에서 가장 낮다. 가장 높은 상하이(4만 9,867위안)의 1/4에 불과하다. 특히 농촌마을은 가난과 빈곤으로 찌들어 있다. 하지만 마오타이를 만들어내는 마오타이진은 다르다. 2013년 주민 1인당 GDP 는 2만 8,865위안(약 490만 원)로, 구이저우 향진 마을 중에서 가장 높았다. 이처럼 마오타이진이 부자 마을이 된 이유는 중국에서 ‘국주’라 불리는 마오타이주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중국을 방문한 해외 정상들이 연회 자리에서 중국 지도자들과 건배하며 마시는 술이 바로 마오타이주다. 이런 마오타이주의 명성은 한국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에서도 자자하다. 심지어 세계 주류업계는 마오타이주를 스코틀랜드 위스키, 코냑 브랜디와 더불어 세계 3대 증류주 중 하나로 손꼽는다.

오늘날 중국 주류시장에서는 수백 종의 술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다. 이들을 따돌리고 마오타이주가 중국을 대표하는 술로 등극한 데는 오랜 양조 역사 및 중국 공산당과의 깊은 인연에서 비롯됐다. 마오타이진에서 술이 제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이다. 당시 한무제는 남방 정벌을 위해 당몽 장군을 위시한 대군을 파견했다. 당몽 장군은 구이저우를 정벌한 뒤 우연히 츠수이허(赤水河)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 맛과 향에 매료됐다. 이에 그 술을 장계와 함께 한무제에게 바쳤다. 당나라 시대에는 마오타이진의 술이 조정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선정됐다. 그때부터 원대까지 술 생산은 관부가 독점했다. 명말ㆍ청초 한족 이주민이 마오타이진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민간 술도가가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했다. 19세기 초 20여 개의 이름난 양조장이 성업했고, 1840년 한 해 생산량이 170여 톤에 달했다. 당시 마오타이주의 명성은 한 시구를 통해 잘 대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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