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유벌 레빈 지음 | 에코리브르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유벌 레빈 지음
에코리브르 / 2016년 11월 / 352쪽 / 18,500원
경기장의 두 인생
최초의 만남: 버크와 페인은 1787년 말에 아주 잠깐 처음으로 만났을 수도 있다. 그 후 1788년 여름 그들은 식사를 위해 만났을 뿐 아니라, 버크의 집에서 며칠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페인은 주로 자신의 교량 사업을 진척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고, 두 사람은 정치 이야기는 대체로 피해갔음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둘은 상당히 죽이 잘 맞았고,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다.
프랑스혁명: 1789년 7월 폭등, 약탈, 정부군과 민중의 대치가 일어났고, 바스티유 ? 국왕의 권력을 상징하던 감옥이자 요새 ? 습격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8월 말경 혁명 지도자들은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원칙을 담은 성명서를 공표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프랑스 인권선언)’으로 알려진 이 성명서는 대의 정부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촉구했다. 혁명 초기에 영국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긍정적이었다. 특히 버크의 동료들인 휘그파는 프랑스인이 영국의 자유를 거울삼아 자국 정부를 자유화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믿었다. 반면 버크 본인의 반응은 신중했다. 그는 구정권의 부당성은 인정했지만, 혁명가들의 격렬한 열의를 걱정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혁명가들의 성향(그리고 특히 철학적 야심)이 한층 뚜렷해지면서, 버크는 회의주의자에서 확고부동한 반대자로 돌아섰다.
1789년 10월, 군중이 젊은 왕비를 공격해 하마터면 죽일 뻔한 베르사유 폭력 사태를 보면서 버크는 혁명이 통제 불능일 뿐 아니라, 국민 결속에 필수적인 뿌리 깊은 정서와 사회적 애착을 허물어뜨리는 데 열중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버크가 혼돈과 테러를 보았던 곳에서, 페인은 아메리카의 혁명과 더불어 합법적인 정부와 제국의 권리가 자연스럽게 확대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페인은 혁명이 발발하기 몇 개월 전 프랑스로 갔다. 그즈음 페인은 혁명 초기의 지도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들의 심의회에 몇 번 참여했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의 사건들은 페인을 고무시켰고, 그는 앵글로-아메리카 세계에서 혁명가들의 지지를 구축할 책임을 떠맡기에 이르렀다. 또 혁명에 대한 버크의 시각이 자신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모른 채, 페인은 버크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대여섯 장의 편지를 부쳤다. 버크가 혁명가들의 대의에 동조하는 런던의 중요한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페인은 분명 버크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을 온갖 종류의 소식을 전했다. 결국 이 편지는 버크의 걱정을 확인시키고, 프랑스혁명에 관한 최악의 공포를 부추기는 데 확실히 한몫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은 철학적 가식과 혁명의 야만성이 결합하는 것 ? 중우정치가 형이상학적 관념 안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 ? 이었다. 아울러 이런 철학이 전염 ? 특히 혁명적 정서의 영국 내 확산 ? 될 것이라는 전망이 저명하고 존경받는 유니테리언교 반체제 인사 리처드 프라이스의 1789년 11월 연설을 읽고 난 뒤 버크의 마음에 크게 다가왔다. 프라이스는 영국 헌법에는 개인적 권리가 존중받지 못할 경우 국민이 정권을 무너뜨릴 권리를 본질적으로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고유의 원칙을 실천함에 있어 영국 정치는 프랑스에 뒤떨어져왔다고 주장했다. 협회는 이 연설을 소책자로 발간했고, 그중 한 권을 프라이스의 주제에 기반을 둔 편지 한 통과 함께 프랑스 국민의회에 보냈다. 버크는 훗날 프라이스의 연설과 첨부한 그 편지를 읽는 것이 자신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고 썼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특히 프랑스혁명의 틀 안에서 영국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프라이스의 시도에 버크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버크는 자신의 당과 나라 전체에 팽배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프라이스의 강연에 답신을 보내기로, 아울러 기회가 닿는 한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겠노라 결심했다. 군비를 둘러싼 1790년 2월의 하원 토론이 그 첫 번째 기회였다.
토론이 개시되자 폭스를 비롯한 대여섯 명의 다른 동료 휘그당원은 물론 토리당의 총리 윌리엄 피트까지도 혁명에 대해 신중하지만 굳건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마침내 연단에 올랐을 때, 버크는 자신의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알았다. 버크는 프랑스인이 기존 정권의 근간을 뿌리째 뽑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여, 정치의 균형과 민중의 자유를 무너뜨리며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역설했다. 또 버크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어리석게도 “어린 학생에게조차 망신을 당할 초보적 원칙의 오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무정부주의에 관한 일종의 연구소이자 요약본”이고, 정치적 재앙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버크는 이 시점부터 ? 당내의 지위와 많은 친구의 노여움이라는 크나큰 대가를 치르면서 ? 매우 공개적이고 굽히지 않는 프랑스혁명 반대자가 되었다.
1790년 중반, 버크는 프라이스에 대한 최선의 대응을 샤를 장 프랑수아 드퐁이라는 이름의 프랑스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태로 대응했다. 버크는 『프랑스혁명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해 런던의 몇몇 협회가 취한 행동에 관한 성찰: 파리의 한 신사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에서』라는 긴 제목의 소책자로 발간하기로 하고, 수개월 동안 무수한 초안과 수정을 거친 다음, 훗날 간단하게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이하 『성찰』)로 알려진 소책자가 마침내 1790년 11월 1일 모습을 드러냈다. 『성찰』은 수사학의 걸작이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정치사상에 대한 심오하고 진지한 작업이었으며, 혁명 시대의 자유주의적 급진주의 주장에 대한 최초의 일관된 평가이자 해부였다.
이 책에서 버크는 프랑스혁명을 영국 자유주의의 확장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은 프랑스인과 영국인 모두를 기만하고 위험천만한 급진적 참신함을 상대편의 선물로 받아들이게끔 한다고 프랑스인 수신자에게 경고한다. 또 버크는 군주제를 지속시키는 점, 그리고 국민의 자유와 법에 대한 충성을 확보한다는 면에서 영국 체제에 전해 내려온 원칙의 중요성을 표명한다. 그리고 국민의 변화하는 요구에 부응하도록 하기 위해 서서히 진화하는 동안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국민 생활을 제공한 데서 이뤄온 막대한 성과로 볼 때 영국의 혼합 체제는 정당하다는 묘사로 마음을 뒤흔든다.
버크의 거센 혁명 반대론은 1790년 2월 버크의 격분한 의회 연설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 있는 페인에게 도달했다. 페인은 즉각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결과 나온 『인권』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은 부분적으로는 버크에게 보내는 답장이며, 부분적으로는 프랑스혁명의 원칙에 대한 독자적인 방어였다. 1791년 3월 출간한 『인권』은 버크와 그의 견해에 맹렬한 공격을 개시한다. 심지어 버크의 재정 비리에 관한 추측성 소문을 언급하고, 『성찰』과 특히 그 편지 형태의 문체를 “자기 모순적 광시곡을 거칠고 체계 없이 드러낸다”고 표현했다. 또 버크는 프랑스 사회와 정치를 사실상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혁명의 원인과 성격 모두를 완벽하게 곡해했다고 말한다.
혁명에 대한 페인의 논거는 눈에 띄게 철학적이다. 그는 버크의 요점을 반박 또는 일축하려는 체계적인 시도로 시작해 재빨리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렬한 주장으로 옮겨간다. 혁명은 정치에서 피해갈 수 없는 원칙의 작용이며, 따라서 그 성공과 확대는 본질적으로 불가피하다고 역설한다. 페인이 말하는 것은 원칙을 응용한 정치다. 그는 잘못된 원칙 위에 세워진 정치적 조직체를 구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해체하고 원점에서부터 재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년 전 『상식』에서 썼듯 그는 “우리에겐 세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분명히 믿는다. 나아가 『인권』에서는 사실상 이것이 공평한 사회를 건설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세습적 지배와 귀족 제도에 맞서고, 한 세대가 자신의 관념과 방식을 다음 세대에 부과하는 권리에 대항하는 빈틈없고 활기찬 논리도 제공한다. 세습 정권의 시대는 왔다가 사라졌다고 그는 주장한다.
책들의 전투: 페인의 책은 버크의 『성찰』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답장이었다. 물론 그것이 유일한 답장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상 수십 권의 반대 소책자가 곧이어 등장했다. 대부분 영국 급진파 및 반대파에게서 나온 것으로 버크가 휘그당의 원칙은 물론 그 자신의 원칙도 모두 유기했다고 비난했다. 버크는 그런 비난에 기분이 상했고, 페인의 『인권』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폭스와의 급격한 결별로 인해 자신이 휘그당원들 사이에서 초래한, 커져가는 균열도 경계했다. 그 때문에 또다시 글을 써서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걸 입증하기로 결심했다.
1791년 8월 버크는 『신휘그가 구휘그에 올리는 항소』(이하 『항소』)를 발표했다. 『항소』는 『성찰』 및 초기 저술에서 볼 수 있는 내용과 동일한 생각을 대부분 담고 있지만, 한층 밝고 차분하게 그 원인을 기본적인 정치적ㆍ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진 한층 심오한 논거에서 찾는다. 버크는 자신이 위대한 휘그당의 전통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내에 있는 자신의 적을 과격한 민주주의에 굶주린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아울러 직접적으로 페인의 많은 주장을 다루는데, 『인권』의 내용을 길게 인용하면서도 페인의 이름을 일절 거론하지 않는다.
한편, 1791년 7월 영국으로 돌아간 페인은 자신의 이념을 전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부분 자신에게 보낸 답장이라고 (정확히) 감지한 버크의 『항소』가 출판된 후, 페인은 추가적 응답에 착수했다. 『인권』의 2부 형식으로 1792년 2월에 발표한 저서가 그것이다. 이 책은 많은 측면에서 전작보다 한층 더 야심만만하고, 모든 면에서 한층 더 과격했다. 버크와 페인은 서로의 핵심적 차이, 즉 정부를 정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더 큰 사회 안에서 개인의 위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각각의 세대는 자기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상대를 몰아붙였다.
『인권』 2부는 군주제 정부에 관한 총공세였으며, 극명하게 영국 왕정도 포함시켰다. 이는 또한 가난의 원인과 하층민의 참상에 대한 성찰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계몽주의적 자유주의 이론가들의 근본 사상이 급진적 정치 이후의 형태를 어떻게 시사하고, 그것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지극히 유용한 모델을 제공했다. 아울러 빈곤층을 위한 공공 연금 제도, 무상 공교육, 부모를 위한 공공 보조금, 하층민을 대변하는 더 많은 의회 대표, 그리고 혁신적인 소득세를 제창했다.
그러나 페인의 후속편이 출간된 1792년 2월 무렵, 많은 영국인에게 프랑스의 상황은 훨씬 더 불길해 보이기 시작했다. 혁명가들 사이의 파벌 싸움이 심화함에 따라 권력 장악력은 갈수록 불확실해졌고, 영국의 정권을 뒤엎으라는 노골적인 페인의 요구는 이런 우려가 증대하는 시점에서는 현명하지 못한 것임이 드러났다. 마침내 1792년 5월, 피트의 토리당 정부는 상당수 휘그파의 지지를 받으며 불온한 저술 ? 명백하게 페인을 겨냥한 처사 ? 에 반대하는 포고령을 제정했다. 그리고 런던에 있던 페인은 새 법률 아래 기소되었고, 9월에는 재판을 받는 대신 다시 프랑스로 떠났다. 이후 부재중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그는 두 번 다시 영국 땅을 밟지 못했다. 한편 더욱 극렬한 파벌들이 파리를 장악함에 따라 영국의 여론은 꾸준히 프랑스에 반대하는 쪽으로, 그리고 소책자와 연설을 통해 줄곧 표명했던 버크의 혁명 비판 시각을 찬성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도 버크와 페인이 그토록 열정을 다해 끄집어냈던 심오한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1790년대 중반 무렵 미국에서도 정치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양대 분파로 뚜렷하게 갈렸고, 우파와 좌파는 버크와 페인이 개괄해온 노선을 많은 부분 따르면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본인들의 이념이 추종자와 분파를 양산한 반면, 버크와 페인은 대결의 마지막 막이 내린 뒤 현역을 떠난 지 오래였다. 페인은 혁명의 나머지 기간 대부분 ? 1802년 가을까지 줄곧 ? 을 프랑스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들이 점점 과격해지고 자신의 친구들이 갈수록 배후로 물러나면서, 페인은 권력 실세로부터 멀어졌다. 이후 페인은 자신의 지적 프로젝트의 다음 장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에 몰두했다. 바로 이신론 ? 신의 존재와 창조 행위는 계시나 종교 조직의 필요 없이 이성적으로 접근 가능하다는 시각으로서, 대부분의 기성 종교에 반대하는 관점 ? 을 옹호하는 책이었다.
1802년 벗인 새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초대로 미국에 돌아왔을 때, 페인은 자신이 기독교 공격과 정치적 급진주의로 인해 동네북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후에도 그는 집필을 계속했지만 정치계의 현역은 아니었고, 가끔씩 제퍼슨과 동료들에게 조언할 뿐이었다. 그리고 건강과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페인은 뉴욕시티의 하숙집에서 가난하게 여생을 보냈고, 1809년 6월 8일 숨을 거두었다.
버크 역시 페인과의 대립이 극에 달한 1790년대 중반에 정치적 과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7년간 끌어온 헤이스팅스 재판은 무죄 방면으로 1794년에 끝났는데, 버크는 이미 재판 종료와 함께 의회를 떠나겠다는 의향을 발표한 터였다. 나이도 64세나 되었고 반혁명 운동의 정당성 또한 대부분 입증했기에 기꺼이 정계를 떠날 수 있었다. 이후 버크의 희망은 아들인 리처드에게 넘어갔다. 버크는 아들이 하원에서 자신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계획이 성공할 즈음이던 1794년, 리처드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그해 8월에 숨졌고, 자신도 1797년 7월 9일 눈을 감았다.
자연과 역사
정치 이념이 철학사상 ? 삶에서 무엇이 옳고 선한가에 관한 어떤 이해 ? 의 적용이라고 한다면, 진지한 정치적 논쟁은 서로 다른 철학적 가정에 뿌리를 둔 것이어야 한다. 아울러 그러한 차이는 사건과 주장의 표면 아래 존재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우리가 인간에 대해 본래 옳다고 여기는 것에 관한 언쟁으로 종종 귀결된다. 정치 철학에 관한 논쟁이 흔히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에서 시작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따라서 버크와 페인의 연구 역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페인의 자연적 사회: 페인은 ‘사회는 자연의 작용인 반면, 정부는 인공의 산물’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은 정부를 창조하더라도 자연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별 인간의 특권과 권리를 보호하고, 모두의 자연적 자유와 최선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페인은 역사에 대한 자연의 우위를 일관되게 역설한다. 따라서 불법적인 정부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최근의 이해와 좀 더 연계된 정부로 대체하고, 그렇게 하여 자연스러운 평화라는 대의를 앞당기고, 정치적 혁명의 목표는 ? 제대로 이해한다면 ? 이런 목적을 가진 자연적 사회로의 회귀라 주장한다.
버크의 역사적 사회: 버크는 인간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을 그 자체로, 아울러 우리가 아는 지식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정부가 있는 조직 사회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생물이라는 것이다. 버크는 어떤 특정한 정치 제도는 인간에게 어느 정도 자연 발생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만, 어떻게 하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정치적 변화를 가장 잘 관리하고 이끌어나갈지 생각할 때 자연에서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지 그 모델을 주시하며 선택적으로 따르는 게 지혜롭다고 믿는다. 버크는 따라서 점진적 변화 ? 혁명보다는 진화 ? 의 모델을 제시한다. 페인이 역사보다 자연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한 행동 원칙에 대한, 즉 정의에 대한 호소다. 반면 역사를 통해 이해한 버크의 자연에 대한 탄원은 점진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며, 이는 질서에 대한 호소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적절한 자연 모델에 대한 양자의 의견차는 정의와 질서에 관한 분쟁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