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미래는 있는가
로제 폴 드루아, 모니크 아틀랑 지음 | 미래의창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
로제 폴 드루아, 모니크 아틀랑 지음
미래의창 / 2016년 11월 / 320쪽 / 15,000원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희망
전설에 따르면 모든 것은 판도라와 함께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최초의 희망은 상자 속에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이것은 누구나 한 번쯤 쓰는 표현으로, 고대 신화에서 유래했다. 저마다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이름 하여 판도라라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열자 온갖 해악이 잇따라 빠져나오는 장면 말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는 한 번의 불길한 행동이 온갖 재앙을 초래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나라에서든 상자 속에 갇혀 있던 온갖 화근이 봇물 터지듯 솟구쳐 나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는 장면을 꼭 포함한다. 현대인은 판도라 신화의 번역본에 익숙한데, 사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발표된 최초 원본과 비교해보면 중요한 부분이 많이 누락되어 있다.
기원전 7세기 초,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두 권의 저서를 통해 판도라 신화를 기록하고 언급했다. 『신통기』에서 판도라의 탄생에 관해 서술하고, 『노동과 나날』에서는 판도라의 상자에 얽힌 일화를 기술했는데, 사실 판도라의 상자는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였다. 줄거리를 한번 살펴보자. 옛날 옛적 인간은 죽음을 부르는 고통, 고된 노동, 괴로운 질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안전한 대지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판도라가 항아리 뚜껑을 열어버리면서 그 속에 있던 갖가지 해악이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인간은 걱정과 비탄에 빠지게 되었다. 단 한 가지, 희망은 빠져나가지 않고 단단한 항아리 속에 남았다. 방패를 든 천공신 제우스의 의지에 따라 판도라가 뚜껑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인간 세상에는 숱한 슬픔이 떠돌았고 대지와 바다는 온갖 악으로 가득 찼다. 밤낮으로 온갖 질병이 인간을 고통에 빠트렸다. 인간에게 말을 건네기 꺼린 제우스는 침묵 속에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무튼 인간은 제우스의 섭리를 피할 길이 없었다.
상자 또는 항아리: 판도라 신화의 원본을 접하고 맨 먼저 놀라는 사실은 판도라가 열었던 것이 결코 상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판도라가 들어 올린 건 고대 그리스인들이 피토스라고 불렀던 항아리의 뚜껑이었다. 당시 농부들은 흙을 구워 만든 거대한 항아리에 곡물과 기름이며 겨울을 날 먹거리와 각종 수확물을 저장했다. 너무나 육중해서 옮길 수가 없는 항아리였기에 주로 집 안에 묻어 놓고 사용했다. 이따금 시신을 매장하는 독무덤으로도 쓰일 만큼 부피가 큼직하고 널찍한 것들이 많았다.
미술사 학자 에르빈과 도라 파노프스키 부부에 따르면, 원본 신화의 항아리인 피토스가 수 세기가 훌쩍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자 혼자서도 쉽게 들고 옮길 수 있는 상자 또는 작은 함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다들 판도라의 ‘상자’로 알고 있는데 사실 판도라는 두 손에 상자를 든 적이 없다. 항아리에 깃든 심오한 의미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면, 상자가 전면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항아리는 어머니의 육체를 닮은 양식 저장 용기로 주로 생활필수품이었다가, 어떤 때는 시신을 매장하는 장례 도구로 바뀐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지닌다. 요컨대 판도라를 매개로 우회적으로 드러난 여성성, 즉 매혹적 외모ㆍ금기 위반ㆍ모성ㆍ걱정스러움의 속성을 인지하면 이 책에서 말하려는 희망과 ‘상자’로 뒤바뀐 항아리가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악과 선: 판도라의 이야기를 접하자마자 궁금한 점은 ‘상자’라고도 불리는 이 항아리에 정말로 희망이 들어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일반적인 판도라 신화 번역본에는 상자를 열었을 때 재앙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빠져나왔다고 묘사돼 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노화, 질병, 죽음, 폭력, 전쟁, 악, 잔인성 등도 함께 나왔다.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악이 하나도 빠짐없이, 돌이킬 수 없이 탈출했다. 그로부터 이 모든 해악은 한순간도 인간 역사를 떠난 적이 없다. 항아리를 탈주하면서 인간 불행의 근원이 된 것이다. 이렇듯 판도라 신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의 조건을 최초로 규정했으며, 우리 인간이 예고 없이 엄습하는 악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온전히 해명된 적은 없지만 분명 희망과 관련된 문제이며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사실이다. 모든 종류의 악이 항아리에서 빠져나갔는데, 희망은 왜 나머지 악처럼 빠져나가지 않고 항아리 바닥에 남아 있었을까? 희망이 안 나가고 바닥에 버티고 있었는지, 아니면 나가려고 했는데 뚜껑이 닫히는 바람에 못 나갔는지를 두고 고전 해설자들의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어쨌든 희망은 항아리 속 나머지 것들과 종류가 달랐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고대인의 정신적 풍경에 등장하는 희망의 위상과 의미를 오롯이 이해하려면, 희망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그 이면에 감춰진 핵심을 파악하려면 좀 멀리 물러나 폭넓은 시야에서 조망하며 판도라 신화의 각종 번역본을 두루 읽어봐야 한다. 그리하여 ‘희망’이라는 기이한 감정, 판도라라는 여성 이야기,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근원적 연결고리를 명확히 밝혀내야 한다. 판도라의 정체는 뭘까? 항아리를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항아리 내용물은 누가 결정했을까? 이에 대한 답이 원본 신화 속에서 희망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단서로 작용할 것이다. 어쨌든 판도라는 뭔가 범상치 않은 여성이다. 여성의 원형과 외양을 인간 세상에 최초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악: 판도라라는 여성은 왜 인간 세상에 보내졌을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면 희망이 항아리에 남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역사가 그렇듯 신화도 늘 이런저런 방식으로 기이한 양상을 보인다. 사실 판도라 신화는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를 상대로 펼친 기나긴 다툼의 일부분이었다. 인간과 신이 각자의 전유물을 분배, 결정하기 위해 일종의 내기를 벌인 것이다. 옛날에는 인간과 신이 한데 어울려 살았으며 인간은 남성뿐이었고 대지에서 태어났다. 남성은 일하지 않았으며 신이 주재하는 향연을 함께 즐기고 연회에 참석하며 지냈다. 먹을거리를 생산하거나 장만하지 않았으며 먹기만 했다. 늙지도 않았고 병에 걸려 죽지도 않았다.
신들 가운데 최고 권력을 쥐고 있던 제우스는 신과 인간의 세계를 분리하기로 마음먹고 프로메테우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내다보는 자, 앞서 생각하는 자, 앞일을 예견하는 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교활한 데다 다소 도발적인 면이 있었다. 제우스의 권력을 빼앗을 의도는 없었지만 제우스에게 도전장을 내밀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일 함정을 만들어서 인간에게 유리하게 세상을 분리할 작정이었다. 이 계략을 알아챈 올림포스의 주인 제우스는 분노에 휩싸여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 외에도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고 신에게 헌신할 의무를 기만하자 그를 벌하려고 잔뜩 별렀다. 제우스는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선물을 위장한 함정을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의 아우 에피메테우스에게 주었다. 참고로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알아차리는 자,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정황을 파악하는 자’라는 뜻이다. 에피메테우스가 받은 선물은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흙으로 빚어 만든 인조 여성으로, 여신처럼 아름답고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며 욕망을 자극했다. 바로 판도라였다.
올림포스의 주요 신들은 판도라에게 매력을 불어넣기 위해 선물을 한 가지씩 해줬다. 그 선물들이 다 모이니 거부할 수 없는 함정이 완성되었다. 현대판 판도라 신화라 할 수 있는 영화 <판도라>에서 판도라를 연기한 에바 가드너의 자태를 떠올려보라. 판도라 신화는 이렇듯 치명적ㆍ매혹적ㆍ파멸적 미를 소유한 여인을 중심인물로 내세워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여성의 미를 형상화해왔다. 제우스를 통해 인간 세계에 소개된 판도라는 모든 신이 협력해서 만든 ‘신들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 그리고 매력적인 겉모습과 달리 가혹하고 냉정하며 심지어 표독한 속성이 깃든 신의 속임수였다. 헤시오도스는 판도라에게 ‘암캐’의 기질까지 불어넣었다. 본색을 숨기고 있기에 더더욱 위험한 판도라다. 요컨대, 판도라는 사랑하고 싶은 악이다. 헤시오도스의 말처럼 ‘아름다운 악’으로서 ‘아름다움’과 ‘선’이 항상 같다고 여긴 그리스인의 눈에 최악의 속임수였고 가장 위험한 함정이었다.
여성성과 모성의 양면성: 판도라를 통해 세상에 소개된 여성의 외양상 중요한 특징은 양면성이었다. 판도라의 양면성을 이해하면 희망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한결 도움이 된다. 판도라와 희망은 구조적으로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안나 포타미아누는 판도라가 여성성과 모성, 어둠과 밝음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 존재라고 강조했다. 즉 판도라는 생명을 선사하는 어머니이면서 한편으로는 대지에 근원적 근심을 초래하는 존재다. 그래서 판도라가 항아리 뚜껑을 들어 올리자 전지전능한 대지와 모성 속에 감춰진 암담한 속성이 나타나 이 세상에 근심을 초래했다고 풀이했다. 여성의 창조와 더불어 양면성이 인간의 근본으로 자리 잡았고, 이로 인해 인간은 신과 영원히 분리되었다.
신들과 이별한 인간에게 부여된 노동의 의무: 인간과 신이 이별하자 맨 처음 나타난 결과는 노동이 인간의 전유물이 되고 신은 노동의 필요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점이다. 판도라 신화는 작품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하나의 시초(始初)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조건을 독특한 방식으로 성찰함으로써, 인간과 신의 세상을 분리하고 여성을 최초로 소개했으며 생계유지를 위한 경제활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를 테면 인간이 머무는 영역을 동물과 신의 중간지대라고 규정했다.
희망의 역사에서 매 시기마다 주의를 끄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양면성’이다. 항아리의 양면성, 여성의 양면성, 제우스가 인간에게 보낸 함정의 양면성, 인간 조건의 양면성이다. 이 모든 것이 맥락을 이뤄 ‘엘피스’라는 개념에 융화되어 있으며, 엘피스를 통해 결집해 있다. 역사가 장 피에르 베르낭은 엘피스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했다. “고대 그리스어인 ‘엘피스’는 대개 희망으로 번역되는데 엘피스를 현대어인 ‘희망’에 경솔하게 대입시키면 당시에 의도했던 의미를 놓칠 우려가 있다. 엘피스는 긍정적인 일에 대한 기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누구나 꺼리게 마련인 두려움과 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로도 엘피스라는 이름의 여신들은 기쁨에 찬 소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
요컨대 엘피스는 ‘미래를 앎’, 즉 앞으로 닥칠 일을 정확하게 예지함을 의미했을 것이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가 되는 순간부터 죽음은 물론 각종 질병과 사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런데 자신이 어느 날짜에 죽는지, 앞으로 어떤 사고에 처할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인간의 조건은 더더욱 비참해진다. 이 때문에 희망이라는 악이 항아리 속에 머물게 되었다. 언젠가는 죽게 될 인간에게 설상가상으로 최악의 고통까지 안겨주지 않기 위해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관해서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앎과 모름의 양립: 장 피에르 베르낭은 엘피스에 깃든 근본적 양면성에서 극단적인 개념이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엘피스는 그리스어로 희망을 뜻하는 최초의 단어로서, 앞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대하거나 정확히 예지함이 아니라 언젠가 악이 엄습할 것을 예상한다는 뜻이었다. 즉, 앎과 모름이 양립하며 예지력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희망은 악으로 인해 슬픔에 빠질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의미로 보면 인지의 상태를 나타내고, 그 불행이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는 의미로 보면 불확실한 인지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모순성은 인간이 얼마나 괴로운 조건에 놓여 있는지 보여준다. 앞날을 멀리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한 치 앞을 못 보는 맹목이 합쳐진 상태가 인간이 머물고 있는 특이한 영역의 상태 즉, 동물과 신의 중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동물은 자신이 필멸의 존재인지 조차 모르고 신에게는 엘피스가 필요하지 않다. 요컨대, 인간은 엘피스와 더불어 인간 고유의 조건으로 들어갔다.
희망의 원형인 엘피스는 인간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불확실성 위에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미래를 불확실하게 예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환상과 맹신에 빠지기도 하고 불안에 떨기도 하며, 때로는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지나친 자신감으로 자신을 안심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확실하게 때로는 불확실하게 미래를 내다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더없는 행복, 곧 지복(至福)이란 있을 수 없음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이 엘피스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엘피스가 인간중심적이고 불명확한 개념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기독교 성도들의 확신에 찬 기다림
“희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어로 낭독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지 57년이 되는 해, 그리스 고린도에서였다. 바울은 선교 여행지로 방문했던 고린도에서 가이우스에게 세례를 주고 그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곳은 고린도 내 기독교 성도들이 예배를 보는 곳이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말씀을 그리스어로 옮겨 설교했으나 사실 예수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바울의 나이가 당시 쉰 살이었으니, 예수가 사망하고 부활해서 승천했다고 예수 제자들이 증언한 해보다 일고여덟 해 뒤에 태어난 셈이다. 바울은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뜻밖에 기독교로 개종했고, 곧바로 교회를 만든 사상가로 변신해 신앙 체계와 핵심 교리를 전도하는 데 앞장섰다.
이제 고린도에서 불우한 자들을 위해 헌금을 거둔 바울은 다음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떠날 참이었다. 그리고 로마를 경유해 스페인까지 갈 계획이었다. 신앙심이 두텁고 평판이 좋은 데다 영원불멸의 천국으로 떠날 준비까지 마친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왜 당시 로마제국에서 통용되던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복음을 전했을까? 바울은 그때 처음으로 희망에 관해 언급했다. 희망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려고 고대 그리스의 핀다로스, 플라톤, 에우리피데스처럼 ‘엘피스’라는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해서 희망을 논했다. 하지만 그 시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바울은 투철한 신앙심에 근거해 확신에 찬 어조로 기독교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예전 같으면 현세에서의 행복을 간구하라고 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세에 약속되어 있는 영원불명의 행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라고 했다. 유한하고 한정된 희망은 생명을 다했고, 이제부터는 육신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희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육신이 부활하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천상의 왕국으로 영혼이 들어간 후, 형언할 수 없는 무한의 세계에서 조물주 하나님을 우러러보다가 신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바울이 엘피스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고 한 이유는 하나님이 엘피스를 보증하기 때문이었다. 엘피스는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강림, 희생, 부활했음이 그 증거였다. 기독교도들은 예수가 인류 개개인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에 이르고 부활했다고 해석했다.
이 새로운 엘피스에 가치를 부여한 정신적 풍경은 고대의 시인, 사상가들이 구축했던 정신적 풍경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전제로 한다.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하며 인류의 운명을 걱정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인간으로 강생시켜 제물로 삼으셨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고대인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당황스러운 면이 있다. 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다신교 신자였던 까닭에 대개 신들은 인간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대의 신앙 체계는 신들의 집단과 연합체를 대상으로 했기에 기독교와 정신세계가 달랐다. 이렇듯 기독교와 더불어 희망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우리는 이 점을 특히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