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간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지음 | 생각의길
선택의 순간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생각의길 / 2016년 11월 / 355쪽 / 16,000원
정치인이 말하다
김원기 - 오직 그 한 사람, 노무현
구술자 김원기는 1937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동아일보 기자생활 후 신민당 소속으로 1979년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치를 시작했다. 3선 의원으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화민주당 원내총무로 있던 13대 국회에서 통일민주당 초선의원 노무현과 처음 만난다. 1990년 3당합당은 이듬해 신민당과 꼬마 민주당의 통합으로 이어져 두 사람이 사무총장과 대변인으로 같은 정당에 몸담는 계기가 된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 결성(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동반 입당(1997년), 16대 대선(2002년), 열린우리당 창당(2003년) 등에 이르기까지 함께 헤쳤다. 김원기와 구술면담은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수록 내용은 서울 여의도 한백정치경제연구소에서 가진 2011년 10월 10일 4차, 같은 해 11월 3일 5차 면담 내용을 발췌ㆍ정리한 것이다.
투표 전날까지 후보 단일화가 가장 큰 변수였죠. [김원기] 단일화 문제에 있어서 큰 방향은 여론조사 상의 우위에 있는 사람이 후보가 되는 방법 말고 딴 방법이 없었는데 여론조사 문항을 어떻게 할 것이냐, 문항 내용에 따라서 여론조사의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 방법에 있어서 양 진영 간에 여러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고 줄다리기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그것을 매듭지어 버린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었어요. 그때 최종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할 때의 문항은 우리가 원하던 문항이 아니고 정몽준 쪽의 뜻을 수용하는 내용으로 됐어요. 노무현 후보가 ‘끝내버립시다. 좌우간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기고 그냥 받아 버립시다.’ 하고 그걸 받아 버리는 결정을 했어요.
노무현 후보가 불리한 걸 감수하고 받아들여 버리자고 해서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어요. 어느 정도 충격이 컸냐면 ‘그렇게 할 테면 그냥 줘 버리는 게 낫지 여론조사를 할 필요가 뭐 있냐.’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어떤 사람은 화를 못 견뎌서 눈물까지 흘리고 그랬다니까. 지금까지 다 만들어 가지고 정몽준이한테 줘 버린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노무현 후보는 2002년 11월 22일 오전 10시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보 단일화 협상의 걸림돌이 되어 온 마지막 쟁점에 대해 국민통합21 쪽의 주장을 전격 수용하겠다.”고 밝힌다. 이로써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이 극적 타결된다.)
대통령이 그런 대목이 있어요. 이해타산에 그렇게 얽매이지 않고 그냥 떡하니 결단을 해 버리는 것이. 그런데 결과가 결국 아슬아슬하게 좋게 나왔지요. (정몽준 후보와) 러브샷도 하고 그랬는데, 그 이후에 정몽준 씨가 이 핑계 저 핑계로 협력을 안 했어요. 그래 가지고 결국 정몽준이 외면해 버리고 실질적인 단일화는 깨져 버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어요. 그래서 각 채널을 통해서 정몽준 쪽에 협조를 구하는 노력을 많이 했는데, 그것이 많이 성과를 못 거두고 있었고. 그런 중에 그쪽 진영과 우리 진영 간에 어떻게 협력을 하고, 그 쪽이 또 요구하는 사항이 있지 않겠어요? 참으로 상식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는 요구가 정몽준 쪽에서 있었어. 뭐냐 하면은 대통령 고유 권한에 속하는 외교ㆍ안보ㆍ국방, 그리고 경제 쪽을 자기들 달라고 하더라고. 정몽준이 직접 나서서 한 건 아니라도 그쪽 진영을 대표하는 사람하고 우리 진영의 협상 대표들하고 만나는 과정에서 그러한 무리한 요구가 있었어요. 그런 요구가 있었던 배경에는 정몽준 쪽에서 적극적으로 협력을 해 주면 당선 가능성이 있고 정몽준 쪽에서 외면하면은 당선 가능성이 없다는 조사(결과)가 많았어요.
제일 처음에는 그쪽에서 어느 자리를 준다고 하는 것을 서면으로 달라는 요구가 있었어요. 총리하고 또 외교ㆍ안보ㆍ국방 쪽하고. 자기들이 외교 쪽의 전문가다, 그런 걸 내세워 가지고 또 경제 쪽하고. 그 요구를 다 수용하면은 실질적으로 대통령을 그쪽이 하겠다는 것하고 똑같거든. 그전에 김대중, 김종필 연합에 있어서도 경제 쪽은 김종필 쪽에서 다 가져갔었거든. 그보다 더 요구가 심했어요. 상식과 원칙에 어긋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쪽에서도 도저히 해 줄 수 없다고 버티고 나갔고. 그러나 완전히 정몽준이 등 돌리게 하면 선거를 망치게 생겨서 한쪽으로는 더 논의하자고 붙들고 이런 것이 심하게 전개됐는데. 최종에 가서 이제 정몽준이 선거에 협력하고 나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느냐 이런 지경까지 갔을 때 정몽준 쪽에서 나를 긴급하게 좀 만나자 그래서 맨하탄호텔에서 만났어요.
만났더니, 서로들 지칠 대로 지쳤지. 이제 깨지는 마지막 고비에서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의원하고 두 사람만 비밀로 만났으면 좋겠다.’ ‘만나서 뭐 하냐’ ‘대통령에 당선되면 어떤 것을 보장해 주겠다는 말을 서면이 아니고 말로라도 해 주면 좋겠다.’ 결국 단둘이 만나서 자리를 어떻게 배려하겠다는 것을 말로써 해 달라 그거지. 서류로써는 아니고. 그러면서 나한테 한 얘기를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데 ‘아무도 없는 데서 단둘이 대통령 당선되었을 때 어떻게 배려하겠다는 이야기는 덕담에 속하는 것 아니냐. 법적인 약속은 지켜야겠지만 정치적인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 상황이 바뀌면 안 지킬 수도 있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이게 사실상 덕담 수준이다. 그것만 해 주면 참여하겠다. 내가 오늘 정몽준이 보내서 김원기 의원을 만나러 왔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 그것은 지금까지 그 사람들 요구에서 대폭 후퇴한 것이기 때문에 선거가 지고 이기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고, 그래서 내 생각에는 그건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해서 ‘알았다. 그럼 후보하고 이야기를 하고 통보를 해 주마’ 그리고 노 후보도 고비였기 때문에 나는 사실 그렇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 노 후보를 만났어요. ‘오늘 아무개를 만났는데 정몽준 쪽에서 이런 것이 왔다. 정몽준 하고 한번 만나서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배려를 잘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이야기를 하면 그걸로써 적극 참여한다고 한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저는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 대통령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더라고. ‘정몽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단일화하는데 자리 가지고 뒷거래는 안 한다고 국민 앞에 몇 차례나 이야기했는데 그건 국민을 속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단둘이 만나서 덕담으로 한 이야기라도 그걸 근거로 해서, 당신이 그전에 이런 얘기한 적이 있지 않느냐고, 그걸 실천하라고 요구할 때 약속한 걸 어떻게 안 했다고 합니까. 그대로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요. 그래서 자기는 그 사람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면서 ‘그런 식으로 자리 약속하고 그 사람 협조로 대통령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소신을 지키다가 낙선하는 걸 통해서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나도 두 번 이야기할 수가 없더만. ‘말인즉슨 후보 이야기가 옳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반론을 이야기할 수 없다. 내가 그쪽한테 그렇게 통보하겠다.’ 그러고 후보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어. 그쪽에서 떡하니 반발을 하고 달라질 알았더니 결국 굽히고 들어왔어요. 대권을 잡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별 짓을 다 하는 것이 그동안의 정치였는데, 그 사람이 협력하면 대통령 될 가능성이 많고 그렇지 않으면 낙선할 것이 십중팔구인 상황에서 ‘자리 약속하는 짓하고 대통령은 안 되겠다.’라는 결심을 해서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정치인은 노무현밖에 없을 거예요. 사실 내가 가장 감동받은 것의 하나가 그 사건이었어요.
대통령은 당선되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후보 나름의 전략이나 생각들이 있으셨을까요? - [김원기] 어떻게 보면 담이 좀 큰 사람이야. 선거운동 과정에서 내가 안 잊어버리는 건 소위 세종시, 행정수도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된 다음에 표가 엄청 빠져나가는 것이 역력하게 나타났어. 서울을 그쪽으로 옮긴다고 하니까 특히 중산층 여성들 중심으로 너무 이탈 현상이 일어나 가지고 상당히 당황했어요.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다 그래서 대통령보고 그 공약을 취소하라는 소리는 (차마) 못하고 너무 나가지는 말고 멈췄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도 노 대통령의 독특한 성격이 나타나더라고. 표는 물밀듯 빠져나가는데 선대위의 모든 사람들은 큰일 났다고, 이거 선거 망치는 거 아니냐 해서 이 정도로 멈췄으면 좋겠다 했는데도, 말을 듣는 게 아니고 한발 더 나가 버렸어요. 더 강공해 버렸어. 그래 가지고 나는 망했다 생각했는데 빠져나가는 것이 또 때가 되니까 멈춰졌어요. 행정수도 공약이 예상보단 해가 적었어.
지금도 내가 정치하면서 제일 감회가 깊었던 순간이 있어요. 단일화 여론조사가 실시됐는데 다들 초조하니까 선대위 사무실 방에 모여 가지고 같이 기도하자고 그랬어, 들. 그래 급하니까 하나님한테 호소하더만. (웃음) 그래서 이재정 신부가 기도를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들었던 기도 중에 그렇게 절실하고 호소력 있는 기도가 없었어요. 모두 눈물이 났었어. 나도 눈물이 좀 나더라고. 그래서 ‘야, 내가 기자실로 가서 기자회견을 해야겠다.’ 사실상 내가 노무현 선대위 진영의 좌장이었으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눈물을 보이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을 한 거야. (웃음)
그래, 내가 기자실로 갔어. 노무현이 돼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절실한 심정을 이야기하는데 (기도할 때) 그 정서가 그대로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눈물이 좀 나더라고. 사실은 그때 진정을 가지고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심각하게 그런 어조로 이야기할 때 그 모습을 보고 내 말에 감동해 가지고 여론조사에 응답할 사람들 마음이 극히 일부라도 이쪽으로 바뀐다면, 그것이 당락을 결정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옆에서 돕는 사람들이 그렇게 절박한 때 정작 대통령 후보는 그러한 절박함이 보이진 않았어요. 그거야 본인이 더했을 텐데 그런 의연하고 담대한 점이 있더라고.
보좌진 말 들어 보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호텔에서 주무셨다고 하더라고요. 깨워서 이겼다고 말씀드렸다고. 결국 57만 980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셨죠. 1988년 초선의원 시절 때 처음 본 후배 정치인이 대통령까지 되는 걸 보셨으니까 감회가 깊으셨겠습니다. - [김원기] 일반적으로 국민들이 보는 정치인상과 구별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독특한 개성이 정치를 할 때 여러 고달픈 길을 걷는 원인이 됐지만, 결국 그것이 국민들한테 어필해서 큰 성취를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봐요. 이해관계를 쫓아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런 정치인이 아니고 엄청난 괴로움과 정치적인 손해가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희생하면서 끝까지 소신을 지키는 그런, 정치인으로서 찾아보기 힘든 면모. 이것이 결국 노 대통령이 국민 전체에 정치가로서 인식되는 원동력이었고 결국 그걸 통해서 대통령까지 당선됐던 거고.
또 광주에서 승리도 어떤 조직으로서 그런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고, 노무현이라고 하는 정치인이 자기의 출신 지역인 경상도에서 싫어하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 당선을 위해서 별 핍박을 다 받으면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키고 거듭해서 희생하는 걸 보면서 호남 민심이 감동을 느꼈지. 노 대통령이 그동안 정치인으로서 소신을 지키고 걸어왔기 때문에, 자기 지역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또 상당히 성공했다는 후보들 다 버리고 경상도 출신인 노무현한테 표를 몰아주게 된 거지. 노무현 대통령이 일반적으로는 대통령 감으로 평가되기 미흡한 경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정치가로서의 남다른 면모가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서 대통령이 되게 했다고 봐요.
보좌진이 말하다
안희정 - 패배보다 원칙을 고민한 바보의 승리
구술자 안희정은 1964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1989년 통일민주당 김덕룡 의원 비서관으로 정계 입문했다. 1990년 3당합당을 거부한 의원, 당직자들과 함께 이른바 꼬마민주당 출범에 참여했다. 이후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출판사 영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1994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을 맡으며 노무현과 본격적인 인연을 시작했다. 2001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경선캠프 사무국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비서실 및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으로 대선과정을 함께했다. 2003년 대선자금 문제로 구속, 1년 후 만기 출소했다. 2010년과 2014년 충남도지사에 당선됐다. 안희정과 구술면담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내용은 2015년 12월 11일 진행한 4차와 2016년 6월 23일에 가진 5차 면담 내용을 발췌ㆍ정리한 것이다.
‘대통령 출마하겠다’는 뜻을 접한 시기와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 [안희정] 2001년 3월에 장관 그만두시고 우리가 금강빌딩(당시 보좌진인 이광재는 2000년 10월경 여의도 금강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한다.)으로 대통령을 모시고 가니까 대통령이 광재랑 나한테 ‘이 사무실 왜 얻었나?’ 그러더라고. 그래서 ‘경선 준비해야죠.’ 그랬더니 가만히 생각을 하시다가 ‘난 아직 마음을, 결심을 다 못 했네.’ 그러더라고. ‘왜요?’ 그랬더니 ‘이인제 후보한테 졌을 때 자네들 이인제 후보 운동해 줄 수 있겠나?’ 이래. ‘이기면 되죠.’ 그랬더니 ‘아, 내가 질 수도 있는 거지. 같이 경선해서 이기는 것만 생각하고, 졌을 때 그 사람 선거운동 도와줘야 된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그때 내가 깨달았죠. 그거 맞는 얘기네.
그 당시 대선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은 분명했었는데 경선에 참여할 거냐, 이거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고 두 번째로는 이인제가 막 대세론으로 지지율이 18~20퍼센트씩 나오는데, 우리는 2~4퍼센트 이거밖에 안 나왔거든. 많이 오를 때 한 7~8퍼센트까지 올라온 적이 있었나? 근데 문제는 김근태, 한화갑 등과 단일화하라고 사람들이, 그래야 이인제랑 경선에서 게임이라도 해 보지 않겠냐고. 그러니까 김근태 후보와 단일화를 해서 그 힘으로 이인제 대세론이랑 붙어서 싸워 봐야 되겠는데, 그 단일화가 뜻대로 안되니까 2001년 10월, 11월 이때쯤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굉장히 너버스(nervous)해졌지.
그러니까 2001년도 3월 달에 장관을 그만두고 그때쯤 금강빌딩을 첫 방문했을 때 노무현 후보의 문제 제기는 딱 두 개였어. 졌을 경우에 이인제 후보의 선거운동을 해 줄 자신이 있느냐라는 질문 하나와, 두 번째는 김근태 후보 및 이쪽 민주진영의 단일화를 해야 되는데, 연말쯤 가서 김근태 후보가 지지율이 자기보다 확 높으면 김근태 후보를 도와서 경선운동을 하면 되는데, 김근태 후보가 지지율도 안 올라오면서 자기를 지지하지 않을 땐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그럼 그 상태에서 그냥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다 덤벼서 해보나 마나 한 경선을 해야 되는 거냐. 이 두 가지가 노무현 대통령의 고민이었어요. 그리고 2001년 12월까지 두 번째 고민은 해소가 안 됐었지.
이인제 후보를 도울 수 있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후 경선에 참여했을 때 이미 노무현 후보는 ‘경선에 참여했으면 패자로서 승자를 응원해야 된다.’라는 입장을 정하고 들어가셨죠. 그때 나 같은 경우는 ‘이기면 된다.’ 아주 쉽게 생각했었고. ‘이기면 되지 왜 그런 고민하세요?’ 이랬는데 사실상 이인제 씨는 우리가 인정하기가 너무 어려운 후보였거든. 노무현의 정치 원칙으로 보면 경선하다가 정당 원칙을 파기하고 깨 버린, 경선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당을 깨 버린, 아주 민주주의자로서는 용서받기 어려운 사람이었고. 3당합당에 쫓아갔다가, 그러다가 경선했다가, 지니까 또 탈당했다가, 또 우리 당에 와 가지고 그런 후보와 맞서서 (본인이) 졌을 때, 그 후보의 선거운동을 한다는 게 그게 민주주의자로서 과연 가당한 일이냐. 이거에 대한 고민이 굉장히 깊었죠. 그런 고민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는 노무현 후보의 모습을 통해서 난 많이 배웠어요. ‘그냥 붙었다가 내가 지면 또 기회 봐 가지고…’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었던 정치공학의 논리가 아닌, 민주주의자라는 원칙에서 경선과 규칙, 원칙에 대한 준수 이런 것들에 대한 태도를 그 당시 노무현 후보가 보여 줬죠. 그래서 2001년도 3월 해수부장관 그만두고 나서 한 4월쯤에 금강 빌딩에서 나왔던 그 대화가 나한테는 굉장히 오래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