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가 된 사람들
토머스 게이건 지음 | 안티고네
피고가 된 사람들
토머스 게이건 지음
안티고네 / 2016년 10월 / 363쪽 / 15,000원
법정으로 간 사람들
과도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고?
몇 년 전, 《뉴스위크》칼럼니스트 파리드 자카리아는 신문 논평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했는데, 자카리아가 주장한 핵심은 이렇다. 제3세계와 미국은 너무 많은 민주주의를 누리는 데 반해 ‘법의 지배’는 너무 적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는 축소시키고, 판사와 변호사는 더 많이 늘려, 엘리트 집단이 더 많은 규칙을 만들게 하자고 주장했다. 자카리아의 주장이 옳은가? 나는 그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법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것은 민주주의의 결핍이다. 시민 생활에서 중도 탈락한 사람들은 법에 대해 부정적이며, 법이 자신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고 생각한다. 법은 안정적이지 않을수록 예측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세상도 안정적이지 못하고 더욱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게 되자, 더 많은 사람들이 시민 생활에서 중도 탈락하게 되었다.
왜 어떤 이들은 우리가 너무 과도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까?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유권자의 반 이상이 투표를 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일이다. 19세기의 역사가인 프랑수아 기조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유럽 역사의 하나로 묘사했다. 그는 반대되는 상황, 즉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점점 더 줄어드는 역행의 과정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맞다. 누군가는 이와 같은 역주행은 다른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투표율은 다소 낮아져 왔다. 하지만 왜 미국에서는 그처럼 큰 수치의 투표율 하락이 일어났는가?
이제 3가지의 ‘중요한 사실들’을 이야기해 보자. 첫 번째 ‘중요한 사실’은 노조의 붕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자유롭고, 정당하게, 그리고 해고되지도 않은 채 노조에 참가할 권리가 점진적으로 없어지면서 일어났다. 1958년에 민간 부문 노동자 중 34퍼센트가 노조에 가입하였다. 실물 경제가 활발한 미국 북부와 중서부에서는 노조 가입률이 훨씬 더 높아 60퍼센트 정도였으며, 몇몇 대도시는 그보다도 높았다. 그런데 2005년에 민간 부문 가입률은 7~8퍼센트로 떨어졌다.
그 다음에 투표율 하락이라는 ‘중요한 사실 NO. 2’가 있다. 이것은 정치적 시민권의 상실에 대한 척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지위에서 계속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투표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자료에 의하면,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의 반 이상이 투표를 하지 않음으로써 투표율 최저치를 경신했다. 물론 2004년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60퍼센트로 약간 올랐다. 하지만 투표율이 높아진 것은 부분적으로 ‘유권자’ 산출 방식이 투표율을 올리는 데 더 유리한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잠재적 유권자의 총수를 산출할 때 전과자, 밀입국 노동자 및 여타 사람들을 넣고 빼는 데 더 능수능란해진 것이다. 게다가, 2004년에는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억만장자들이 사람들을 들들 볶아서, 말 그대로 투표소로 몰고 가는 데 수십억을 쏟아부었다. 또한 충격적인 911 테러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당시에 외국에서 패전 중이라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시민정신을 검증하는 최선책은, 아무도 투표하라고 수십억씩 쓰지 않을 때, 사람들이 투표를 하는지 여부를 보는 것이다. 가령, 2006년 예비선거에서 투표한 사람은 정당 유권자 중 16퍼센트도 안 되었다. 지금은 학력이 더 높고, 대학 졸업자도 많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학력이 더 낮았던 1960년대 혹은 그 이전 시대보다도 투표율이 훨씬 더 낮아졌다.
사람들은 왜 투표를 안 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많지만, 크나큰 이유 중 하나는 - 특히 남자에게는 - 노동법이 무너져서이다. 아무리 투표를 해도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금은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졌고, 헬스케어는 점점 더 축소되었다. “투표해서 뭐하냐?”고 사람들은 말한다.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노조가 없어짐으로써 ‘투표는 왜 해야 하는지’ 등등을 알려주면서 사람들을 ‘사회화’시키는 단체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노조가 없어질수록, 사람들은 더 공공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유권자들은 더 줄어들고 더 불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세 번째 ‘중요한 사실’이 여기에 일조한다. ‘중요한 사실 NO.3’은 감옥의 증가이다. 이는 시민권이 없는 ‘불가촉천민’층을 늘어나게 했다. 내가 로스쿨을 마친 1975년 이후로 수감자 수가 7배 늘었다. 게다가 전자발찌를 찬 사람들과 단순히 보호관찰 대상이 된 사람들도 더 많아졌다. 어쩌면 밀입국 노동자 1천2백만 명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법’이므로 셈에 넣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들은 투표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시민생활에 대한 총체적 분노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단순히 투표하지 않는 것 이상의 훨씬 더 근본적인 이탈로 이어진 것이다. 감옥이 많을수록, 공공의 삶은 더 안 좋아졌다. 미국은 대규모의 ‘합법적인’ 사람들과 ‘불법적인’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지 여부를 실험하는 하나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법에 따른 평등을 찬양하는 대신, 점점 더 힌두교식 카스트 계급으로 향해 가고 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친구들인 수백만 명의 시민이 어쩌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까? 정답은, 노동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노동변호사로서 내 대답은 하나다. 일부 노동경제학자들 또한 나와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 노동경제학자인 리처드 프리먼은 시급이 30퍼센트나 인하되었을 때를 주목했다. 그때가 마침 1970년대 범죄율이 크게 올랐던 시기였다. 프리먼은 시급 인하가 젊은이들을 범죄에 빠지게 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물론 어떤 일이든 단 한 가지 요인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그런데 범죄율과 시급을 연결 지은 사람이 프리먼뿐만이 아니었다. 경제학자 헨리 토마스 버클도 그랬다. 범죄율이 빵값과 직결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했던 최저임금이었다.
1970년대, 저임금 일자리에서의 급여가 하락했을 때 교도소 재소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노동력 공급이 확 줄어들자, 결과적으로 1990년대 중반에 저임금 일자리의 급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에서 범죄자를 잡아감’으로써 노동력이 조금 귀해졌던 것이다. 당연히 저임금 일자리의 급여는 올랐고, 범죄는 줄었다. 하지만 2006년이 되자, 그 동안 서서히 저임금 일자리의 급여가 내려가더니, 범죄 - 길거리 범죄나 폭력 범죄 - 가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쓴 책마다 각각 고유의 ‘중요한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안팎으로 엮어주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건 불공정이다. 국가의 소득은 점점 더 늘어나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 소득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러한 불공정은 단지 소득 불평등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소득 불평등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시민으로서의 불평등이었다. 또한 그건 법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득 불평등이 심화됨에 따라, 나는 법체계, 혹은 ‘법적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크게 변하는 걸 지켜봐왔다. 내가 로스쿨에서 배웠던 법도 바뀌었다. 내 생각에, 더 큰 변화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 아직은 우리가 ‘법 앞에 평등’할 수도 있다. 지금 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쩌면 아직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부자들은 더 부유해질 것이다. 설령 세금을 깎아준다 해도(실제로 그랬다), 부자들은 거액의 세금을 내고 있다. 나중에는 훨씬 더 많이 낼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법의 지배’를 위해 그들이 뭐한다고 돈을 내놓겠는가?
같은 국민임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라고 쓰는 건 이제 힘든 일인 듯하다. 2004년 후반에 읽은 신문 사설에서, 예일 대학 경제학자 로버트 쉴러는 몇 년 전만 해도 하위 40퍼센트의 가정이 전체 국민 소득의 18퍼센트 이상을 가져갔다고 추산했다. 그런데 현재는 14퍼센트 이하라고 한다. 머지않아 10퍼센트도 안 될 것이다! 10퍼센트 아래로 떨어지면, 우리가 모두 동일한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기는 정말 힘들어질 것이다. 정말로 안정을 파괴하는 건 소득 불평등이 아니라, 불공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허무감이었다. 그런 생각은 ‘법의 지배’에 필요한 도덕적 품성을 약화시킨다. 그렇다.
부자들은 나머지 사람들을 책임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규제 따위는 무시하고 행동한다. 그러니 걱정스러운 건 중산층이다. 이와 같은 불평등이 폭증함에 따라 중산층 자체도 더 타락할 거란 건 자명하다. 타락한다고? 맞다. 다음 사실만 봐도 그렇다. 중산층 가정의 소득이 실질 소득에 있어서 1989년과 동일한 수준에 이르는 데 10년 - 거의 1990년대 전체 - 이 걸렸다. 그러나 1999년에 1989년과 동일한 소득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 ‘중산층’ 가족은 1년에 6주를 더 일해야 했다.
경제학자 케인즈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력이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보다 더 사회를 타락시키는 건 없다.” 구소련이 바로 그랬다. 아무리 일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를 앞지를 수 없었다. 이는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구소련과 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노숙자가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일하는 사람도 결국엔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 핵심은 그것이다. 구소련처럼, 미국에서도 서서히 노력과 보상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있다. ‘법의 지배’라는 면에서 볼 때, 그건 위험하다. 중산층이 세상을 독단적이고 불공평하다 - 예측할 수 없고, 운이 지배하며, 재앙이 목전에 와있다 - 고 보기 시작한다면 위험하다.
이런 상황은 왜 ‘법의 지배’를 위험하게 만드는가? 간단하다. 세상이 합리적이고 공정하기를 기대하지 않게 되면, 조만간 사람들은 그런 걸 법에게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게 되기 때문이다. 독단적이고 불공평한 세상에 익숙해진다. 더 나쁜 경우는, 투표를 안 하고 뉴스도 안 보게 됨에 따라, 법체계를 독단적이라고 보는 게 아니라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법적으로 부과하는 것들이 있는데도, 우리는 거기에 동의한 적도 없고, 투표를 한 적도 없는 것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포기할수록, ‘법의 지배’는 더 독단적이고 예측 불가능이 된다는 점이다.
소송 권하는 사회 - 사라진 계약의 권리
19세기의 영국 역사가 메인은 전통에서 현대로의 이동은 신분(status)에서 계약(contract)으로의 이동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20세기 말부터 계약에서 불법행위(tort)로 이동하는 대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노동자의 35퍼센트 정도가 단체교섭 협약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 계약상으로 노동자는 정당한 사유 없이는 해고될 수 없었다. 또한 일반적인 계약이 없더라도, 계약에 토대를 둔 공정함이라는 규범이 있었다. 그런데 현재 내 사무실에서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는 걸 보건대, 이제 계약에 의한 세상은 사라졌다. 소수의 노동자 - 민간 부문에서는 9퍼센트 이하 - 만이 어떤 식이든 노동 계약 아래에서 일을 한다. 나머지는 ‘임의 고용’이라고 알려진 ‘법의 지배’ 하에서 일한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이유로든 해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사전 경고도 필요 없다. 퇴직금도 없다. 1970년대에 노조가 붕괴되기 전까지, 지금은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매우 독단적인 형태의 ‘임의 고용’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했다. 다른 선진국과 달리, 지난 30년 동안 계약의 권리들 - 직장에서, 연금에서, 심지어 의료보험에서 - 이 사라져갔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정말로 화나게 만든 그야말로 새로운 법적 제도였다. 그런데 분노를 표출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 일부는 분노를 자기 안에서 스스로 삭혔고, 일부는 불법행위로 고소하기도 했다. 요점은 이것이다. 일터에서 사람들이 계약을 박탈당할 때, 그들 중 상당수는 불법행위로 반격하기 시작했다.
노조가 붕괴된 이래로, 연방 법원들은 불법행위로 인한 청구와 유사한 시민권 유형의 청구를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노동과 계약 관련 법이 약해지고, 시민의 권리와 불법행위 관련 법이 흥하게 된 것이다. 최근에 한 치안 판사는 전체 민사 소송의 40퍼센트는 “고용 관련 소송”이라고 내게 말했다. 점유율이 정말로 그렇게 높은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노동 계약으로부터 불법행위로 이동하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쁜지를 요약해 보겠다. 첫째, 모든 소송 당사자가 법을 위반했다고 느끼면서 끝이 난다. 계약 소송과 달리 불법행위 소송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외적인’ 행위에 관한 것이 많지 않고, 주관적인 의도나 마음의 ‘내적인’ 상태에 관한 것이 많다. 원고가 해야 하는 것은 고용주가 구체적으로 악의적 이유를 가지고 자신을 위해하려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법적인 동기나 악의적인 의도는 입증하기가 어렵다.
둘째, 계약과 달리, 새로운 불법행위법은 비용이 많이 든다. 예전의 중재는 비용이 적게 들었다. 심리 전 증거 수집도 없었고 하루면 끝이 났다. 우리 로펌은 중재를 위한 고정 수수료가 2,500달러였다. 그런데 이제, 불법행위 소송에서는 그 금액이 150,000달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송비용이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죽어난다. 그건 내가 받는 수수료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측의 수수료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내가 150,000달러를 받는다면, 상대측은 350,000달러를 받고 있을 것이다.
셋째, 초토화 소송이다. 예전의 계약 소송 중재보다 훨씬 더 초토화될 가능성이 많다. 불법행위 소송에 있어서 중요한 일은 사전 심리 단계의 증거 수집인데, 증거 수집을 위한 심문은 더 야비해졌다. 불법행위 소송이 더 야비해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는 과장할 필요조차 없다. 소송 당사자는 누구나, 걸쳤던 옷을 다 벗고 스스로를 발가벗겨야 한다. 무엇을 위해? 의도와 동기, 그리고 정신 상태가 ‘안 좋은지’ 따위를 캐기 위해서다. 그것들은 노동자들이 공정하게 대우받았는지 여부와는 관계없는 소송에서, 노동자들을 괴롭히고 망가뜨릴 수 있는 합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이는 고용주에게도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고용주들에게는 값싼 시스템을 없애버린 데 대한 책임이 있다. 그들은 일찌감치 증거 수집의 권리를 확대하면 확대할수록, 고용주의 이득이 더 커질 거라는 걸 알았고, 그걸 처음 입증했던 사람은 경영자 측 변호사들이었다. 하지만 증인 심문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괴롭히는지 보여준 사람은 원고 측 변호사들이었다! 내가 주장하는 요점은 이렇다. 계약법을 대체한 이러한 불법행위 유형의 법적 시스템은 예측 불가능성과 분노를 키우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왜 소송은 증가하는가?
부자들이 더 많은 돈을 가져간다 할지라도 여전히 기업은 소송 당하는 걸 싫어한다. 비록 우리가 패소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기업에 엄청난 소송비용을 부담하게 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이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은 소송을 억제할 두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이 우리를 사취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고소할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양도계약서에 서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더욱더 그들에게 유리하다. 즉 어떤 분쟁이든 중립적인 중재자가 아니라, 그들 측 중재자에 의해 중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양도계약서: 내가 소송을 제기해왔던 모든 사건에 대해 렉시스넥시스에서 찾아본다면, 당신은 변호사로서 내가 한 모든 것이 결국 양도계약서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음 양도계약서는 소비자 계약이나 노동자 인수 합의서의 말미에 붙는 표준 문안이다. ‘이로써 나는 A은행과 그 양수인들, 모회사들, 자회사들, 대리인들, 당사자들, 이사들 및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을, 어떠한 불법행위나 사기 행위, 태만, 나에 대한 의도적 폭행, 물고문, 제네바 협정 위반, 그 외 나의 권리들에 대한 박탈로 인해 나에게 발생하는 모든 피해뿐만 아니라, 이미 입법기관에 의해 통과된 연방 혹은 주의 법률 하에서 A은행이 나의 권리들을 침해함으로써 내게 발생한 어떠한 법적 책임도 묻지 않는다. 또한 나는 인신보호영장의 권리 및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포기할 것을 약속한다. 그럼에도 만약 내가 소송을 제기하면, 그때는 A은행이 나에게 어떠한 통지도 없이 소송에 따른 모든 법률 비용을 내게 청구할 권리가 있음은 물론, 금전적 손해에 따른 위약금으로 나에게 총 3백만 달러를 추가로 징수할 권리를 가진다. A은행이 자유재량으로 결정하지 않는 한, 그것은 법률 비용의 20배가 될 것이다.’